8-3. 여울목의 전투
“콘도티에레! 명을 받고 왔습니다!”
전령의 연락을 받은 파스칼 드 뒤랑이 헐레벌떡 말에서 뛰어 내린다. 몽세나의 성주 파스칼 드 뒤랑은 몇 배로 늘어난 기병대의 운용을 능숙하게 하고 있었다. 적에게서 보이지 않는 언덕 너머에서 4개 중대의 총기병과 2개 중대의 용기병 총 600기가 이동하고 있었다.
파스칼과 아리위스, 두 연대장이 보는 와중에 내가 바닥에 막대기로 그림을 그리며 설명을 시작한다.
“반격이 필요합니다. 우측 후방에 배치된 제10 연대의 절반을 전개하여 적의 측면을 노릴 예정입니다.”
“문이 열리는 식으로 공격하는 거군요!”
“맞습니다. 단번에 우측 전선이 1.5배 연장 되는 거죠.”
현재 드라멜른 기사단과의 전선은 제16 몽세나 연대가 담당하고 있다. 그 측후면을 지키는 것은 현 트랑카벨의 최선임 연대, 제10 카르카냑 연대의 절반이다. 이들이 측면으로 기동하는 것이다.
“제 추측에 적은 이상한 약물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약을요?”
파스칼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놀랄 만하지. 나도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제10 연대의 전개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 후방에 대기하는 기사단이 나서겠죠? 그래서 파스칼 연대장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맡겨 주십시오!”
드라멜른 기사단 기병들의 무장을 아직 모르겠다. 멀리서 보병들의 싸움을 고고하게 지켜보고만 있는 이들은 모두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망토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중간중간 창이 보이기는 하지만, 망원경으로 봐도 갑옷의 형태나 화기 무장의 여부를 알기 힘들었다. 용병으로 그룬발트에서 굴렀다면 충분한 총기를 갖추고 있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트랑카벨 총기병들 역시 대륙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강병들이다. 아쥬흐가 벌어다 준 돈으로 주문한, 주디칼리에서 가장 훌륭한 큐레이스 갑주와 최신예 권총으로 무장한 정예군이다! 비슷한 수준의 적이라면 절대로 지지 않는다.
“용기병들은 총기병을 지원합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조금 망설여진다. 아직 용기병들의 숙련도는 부족하다. 총기병들은 타고난 기사들을 훈련시켰지만, 용기병들은 그냥 말도 탈 수 있는 총병 정도니까.
하지만 파스칼이 잘 지휘한다면, 총기병과 용기병의 시너지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아라위스 경은 지금까지처럼 제16 연대를 지휘해 방어선을 강고하게 지켜 주시면 됩니다.”
“쥐새끼 한 마리도 통과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제10 연대의 반격은 누가 지휘합니까?”
“아.”
젠장! 이 멍청한 머리통 같으니라고. 좌측방과 우측방에 절반씩 나누어 배치된 제10 연대는 현재 연대장이 공석 상태이다. 평시에는 아실 트랑카벨이 겸임하고 있었으며, 현재는 내가 연대장 대행이다. 실질 지휘는 부연대장 자격으로 기즈 드 콜롬브라는 선임 중대장이 하고 있었는데, 기즈는 반대편에 배치된 나머지 절반을 지휘하고 있었다.
어쩌지? 연대장 대행인 내가 지휘한다? 안 된다. 명령을 내리고 곧바로 좌측으로 이동해, 상황을 보고 새로운 반격을 조직해야 한다.
이쪽의 두 연대장 중 한 명? 아리위스가 제16 연대를 두고 가기는 너무 위험하다. 파스칼은 더 중요한 기병대를 지휘해야 한다.
적당한 인물이 없을까. 제10 연대의 병사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부대 단위 전술을 잘 이해하고 전투 경험도 제법 있으며, 내 명령도 잘 실행할 수 있는 딱 맞는 인물이 있을 리가··· 있네.
“전령! 모리츠를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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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전진!”
모리츠 디트마르 폰 뮌타우젠.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남작이며, 슈토르히 용병단의 운영 책임자. 그리고 지금은 콘도티에레의 직속 부관을 자처하고 있는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덩치에 어울리는 우렁찬 외침으로 작전 개시를 알렸다.
제10 카르카냑 연대의 우측방 파견대 600명은 하나의 커다란 직사각형 진형을 이루고 방어선의 나무 울타리 너머로 진격을 개시했다.
가지런히 늘어선 창병 방진의 움직임은 느릿느릿하지만, 그만큼 단호하고 꾸준하다. 방진의 모서리에는 작은 부대로 나뉜 총병들이 행군하고 있었는데, 적군의 접근에 따라 자유자재로 이동하며 창병 방진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도울 것이다.
모리츠는 경애하는 콘도티에레의 명령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전선을 연장하며, 적 보병 예비대와 기병대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적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측면을 공격하면 그만.
오랜만에 부대를 지휘하는 모리츠는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꼈다. 이 600명의 병사들은 그의 정식 부하는 아니지만, 모두 그가 잘 알고 있는 이들이다. 병사들 역시 이 덩치 크고 호쾌하며 총을 잘 쏘는 남자를 잘 알고 있었다.
햇병아리 용병 시절, 아직 슈토르히라는 이름이 붙기도 전에 에트와 함께 전장에 나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룬발트의 전장이었던가.
당시에도 그의 경애하는 콘도티에레는 단 한 명의 부하도 헛되이 목숨을 잃게 하지 않았었다. 모처럼, 오랜만에 그 군대의 일익을 맡게 되었으니, 부끄럽지는 않게 행동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드라멜른 기사단 놈들은 병사들에게 약을 먹이는 것 같다.’
조금 전, 그에게 부대를 맡기며 콘도티에레가 불쾌하다는 듯 말했었다. 모리츠 역시 드라멜른 기사단령의 군세에 대해서는 들어만 봤지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다. 기분 나쁜 부대라는 소문이 있기는 했는데 종교 기사단 특유의 음습하고 끈질긴 분위기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적이 정말 약쟁이들이라면, 갑작스러운 전선 변화에 대응이 늦을 거야. 외부 자극에 둔감해진 병사들을 재배치하기 힘들 테니까.’
그 말이 맞았다. 정확하게. 확실히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적 예비대 보병들은 어기적대면서 움직인다는 느낌이다. 멍청이들, 우리 카르카냑 연대의 보병들이라면 명령 한 번에 가로 배치를 세로로도 바꿀 수 있을 텐데. 모리츠는 함께하는 병사들을 깊게 신뢰하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후방에서 따라오고 있는 제7 카르카냑 연대의 기병들을 확인했다. 폭이 넓은 종심 대형을 갖춘 총기병들의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아마 여기에 창기병들이 돌입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첫 열과 교전하다가 모조리 격퇴될 것이다.
기병의 숫자가 아예 압도적이거나 비교도 안 되는 화력으로 몰아붙이지 않으면 결코 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전력이다.
정면의 검은색과 붉은색 망토를 걸친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보병들의 측면이 완전히 노출될 위기인데. 드라멜른 기사단의 예비대 보병들은 여전히 느릿느릿하게 진형을 바꾸고 있었다.
모리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콘도티에레의 정확한 반격 명령, 다소 투박한 진형이라도 최대한 빨리 만들어 측면을 위협한 자신의 임무 수행이 맞아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드라멜른 기사단의 지휘관은 달갑지 않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보병의 측면을 내주고 불리한 포지션에서 전투를 이어 나가는 대신 기병을 보존할 것인가.
기병으로 측면을 보호하며 시간을 끌고, 보병으로 방어선을 재구축할 시간을 벌 것인가.
어느 쪽이든 고통스러운 선택일 것이다.
‘주도권은 이쪽에서 가지고 있되, 상대에게 불리한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전술이다.’
모리츠에게 있어 진리나 다름없는 콘도티에레의 전술론이다. 정말 한 자도 빠뜨릴 수 없는 훌륭한 이야기였다.
마침내 적장이 선택한 모양이다.
적 기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더 외곽 쪽으로. 처음에는 도망치는 것인가, 혹은 파스칼의 기병대를 유인하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해 봤자 보병 부대의 측면을 유린당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드라멜른 기사단은 돌격 시작점을 찾고 있는 것이다.
상대의 의도를 알아챈 모리츠는 살짝 감탄했다. 아마도 트랑카벨의 기병대와 교전하면서 보병 방진에 속한 총병들의 지원 사격까지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겠지. 외곽 방향으로 우회해 파스칼의 기병대가 모리츠의 보병대를 등지게 만든다면, 아군이 가려서 지원 사격을 못하게 된다.
적은 전투에 익숙하고 심지어 똑똑하다. 하지만 파스칼은 추격하거나, 보병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하는 대신 기병 대열의 방향만을 튼다. 적 기병을 협공하고자 병력을 재배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적의 의도에 빠지는 것이다.
기병을 믿자. 모리츠는 계획대로 행군을 계속한다.
타타타탕!
따닥! 타다당!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총신이 짧고 입자가 고운 화약을 사용하는 기병용 권총 특유의 경쾌한 발사음이다.
드라멜른 측의 선공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선두 기병들이 트랑카벨 기병대를 향해 20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일제히 권총을 발사하고, 대열을 갖추고 기다리고 있던 트랑카벨 측 역시 대응 사격을 가한다.
드라멜른의 기병대는 그대로 돌격해오는 대신 반전한다. 다음 대열이 앞으로 나서 다시 권총을 발사한다. 카라콜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어정쩡한 거리여서 양측 모두 효과는 미미하다.
파스칼은 잠시 생각한다. 적 기병의 일부는 창을 가지고 있다. 돌격을 허용한다면 불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먼저 돌격해서 육박전을 시작하는 것이 유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자신에게 다른 카드가 있음을 떠올린다. 곧바로 용기병대에 전개를 명령한다. 총기병 대열의 그늘에 숨어있던 용기병대가 옆으로 행군하여 사격에 적당한 각도를 잡는다. 화승의 불이 꺼질 수 있으니 너무 서두르지 않는다.
훈련대로 재빠르게 말에서 내린 후, 남겨진 말은 5~10마리 씩 서로 고삐를 겹쳐 도망치거나 난동을 부리지 않게 막아 둔다. 그리고 다시 대열을 갖춘다. 이제부터는 기병이 아니라 보병이다. 장비 자체도 보병과 별 차이 없고.
권총으로 무장한 기병끼리 대열을 바꿔가며 총격전을 벌이고 있던 와중, 측면에 갑자기 200명의 화승총으로 무장한 보병 부대가 나타난 것이다.
“발사!”
타타타탕! 타다당!
용기병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기병끼리의 사격전에서 서로 사상자가 미미하던 와중에, 측면에서 보병의 사격이 쏟아지자 십 수명이 순식간에 말에서 떨어진다. 깨진 갑옷 조각과 핏방울, 그리고 운 없는 희생자의 살점이 붙은 뼛조각이 아직 살아있는 동료 드라멜른 기사단의 머리 위로 쏟아지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낸다. 총에 맞았는지 다리를 절뚝거리는 말 한 마리가 멀리 블랑독의 초원으로 달려 나간다. 위에 타고 있던 기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혼란 통에 알 수 없었다.
대열을 교대한 용기병들이 재차 사격을 이어 나간다. 시야를 가리는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고, 또 다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기사들이 쓰러진다. 검은색과 붉은색의 고풍스러운 전투복이, 좀 더 선명하고 소름끼치는 선혈로 물들어간다.
견디다 못한 드라멜른 기사단의 후열 창기병들이 나선다. 30명 정도의 창기병이 용기병들의 사격 대형으로 돌진한다. 비록 숫자는 말에서 내린 용기병들이 압도적으로 많으나, 근접전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모든 탄환을 발사해 재장전 중인 상황이다. 그대로 싸운다면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것이다.
하지만 용기병들은 패닉에 빠지는 대신 훈련받은 대로 행동했다. 그들의 후방에 있던, 고삐를 겹쳐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둔 말들의 반대편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러니 또다시 애매한 선택지만 남은 것은 추격해온 창기병 쪽이 되었다. 돌격의 기세를 살리자니, 말에서 내린 용기병들과 그들 사이에는 방치된 말들의 무리가 있다. 말로 말을 방해한다. ‘트랑카벨 용기병들이 타고 온’ 말이 ‘드라멜른 창기병들이 타고 있는’ 말을 막는 바리케이드가 된 것이다!
이대로 말을 밀치고 재장전 중인 용기병을 덮친다? 말의 무리를 우회한다? 용기병을 죽일 방법은 없으니 말이라도 죽인다? 포기하고 원래 대열로 돌아간다?
무엇 하나 개운하지 못한 선택지였다. 게다가 적 용기병들은 벌써 재장전 중이다. 자칫 어물쩍 거리다가는 말 너머로 저격당할지도 모른다.
창기병들의 지휘관은 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다. 자기들이 타고 온 말 뒤에 숨어 재장전 중인 용기병들을 포기하고 대신 돌격 방향을 총기병 쪽으로 변경했다. 주력 기병들이 교전 중이니 그 측면을 노리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3중대, 측면 방어!”
하지만 역시 결과는 좋지 못했다. 파스칼은 이미 우회하는 창기병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후열의 트랑카벨 총기병들이 쇄도해오는 창기병들에 대응하고 있었다. 짧은 교전 후, 병력의 절반을 잃은 창기병들은 초라한 모습으로 원래 대열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타타타탕! 따다닥! 타앙!
위협에서 벗어난 용기병들이 장전을 마치고 다시 사격을 가했다. 또 다시 희생자들이 발생하고, 몇 마리인가의 말이 놀라서 사방으로 달아난다.
아직 본격적으로 교전한 것도 아니다. 서로 회복 불능의 큰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끊임없이 사상자가 나오고 있는 것은 드라멜른 기사단 측의 기병들이었다.
기병대 지휘관인 파스칼이 이대로 버틸까, 돌격해서 변수 없이 단번에 끝내 버릴까 고민하던 사이, 적군은 말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한다. 뒤에 남은 사망자의 숫자는 못 해도 백은 되어 보인다. 말을 잃고 절뚝거리며 도망치거나 망연자실해 주저앉은 기사들의 모습도 보인다. 유난히 말을 잃는 기병들이 많은 것은, 총기를 사용하는 시대 기병전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겼다!”
“우와아아아!”
첫 교전에서 가볍게 승리한 기병들이 신이 나서 함성을 지른다.
“재장전!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모두 장전해!”
잠시 승리에 취해있던 기병들을 닦달하며, 중대장들이 재장전을 시킨다. 말 위에서 하는 재장전은 어렵다. 제법 훈련을 해왔지만, 아직 미숙한 이들도 많으니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어쨌거나 적에게 꽤 큰 피해를 주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도 수적으로 드라멜른 기사단 측이 유리하다. 지금 당장은 전장을 벗어났지만, 전열을 재정비하면 분명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목적을 절반은 이루었다. 결국 드라멜른 기사단 소속 보병들이 측면을 일방적으로 공격당해 궤멸하는 사태는 막아 낸 것이다. 제10 카르카냑 연대 보병 방진의 측면 공격은 생각만큼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아아니!”
휘하 보병들을 측면에 전개하며, 기병들의 교전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모리츠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적 후방, 전장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일단의 기병대가 있었다.
“적 후방에 기병! 적 후방에 기병!”
모리츠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파스칼을 향해 외친다.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기병이지? 매복? 지원?
잠깐 눈을 뗀 것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모리츠는 이를 갈면서 총병들의 일부를 측면에 배치해 혹시 모를 기습 돌격에 대비한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