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여울목의 전투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전투는 온갖 소음이 뒤섞이는 아수라장이다.
총소리와 무기 부딪히는 소리 이외에도, 갑주를 걸친 보병이 움직이기만 해도 상당히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기병의 말발굽 소리는 말할 필요도 없다.
병사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도 한몫한다. 전의를 주체 못 해서, 공포를 숨기기 위해서, 혹은 둘 다를 위해 지르는 함성의 소리. 소속감과 의지를 보이기 위해 지르는 구호의 소리. 적에게 외치는 도발의 소리. 공포와 고통을 담은 비명의 소리. 그저 목적도 없이 외칠 뿐인 소리 등등.
여기도 마찬가지다. 총소리와 무기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온갖 시끄러운 목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한 쪽에서만 나지?
저 자식들 뭔데 아무런 소리도 안 내고 전투를 하는 거지? 이게 말이 되나?
흔한 구령 소리도 없이 조용히 다가와서 파이크 푸쉬 공격만 하고 있다. 창대와 창날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만 시끄러울 뿐, 제16 몽세나 연대의 병사들이 외치는 소리만 들릴 뿐 철저하게 조용하다는 것이다.
“정말 기분 나쁜 적이군요!”
제16 연대장 아라위스 드랭쿨이 불쾌하다는 듯 으르렁대는 투로 말했다. 이 노병은 말쑥한 신사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감정을 드러낼 때 보면 거친 산 사나이의 모습이 언뜻 드러난다.
“정말 뭐지··· 세뇌라도 한 건가?”
그룬발트와 주디칼리에서 참 많은 군세를 보았다. 아군도 있었고 적군도 있었고. 그중 상당수는 자의든 타의든 종교 어쩌고를 가져다 붙인 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종교와 관련된 부대라고 해도 대부분은 그냥 평범한 전투 집단이다. 가령 주교령에서 소집된 연대라거나, 법황청 소속의 세속 영주들이 이끄는 군대라거나. 그룬발트 선제후들의 절반은 세속 권위 이외에 종교 직위도 가진 사원령들이었기 때문에 성직자 지휘관이 이끄는 군대도 제법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뭐 그냥 평범한 군인들이다. 그냥 소유자나 지휘자가 종교와 관련이 있다 뿐이지, 조직이나 역할이나 아주 평범한 군대라는 말이지.
가끔 지역 이단 토벌 성전에 자발적으로 나선 순례자들로 이루어진 부대도 있다. 보통은 법황청의 교리에 선동당한 이들이다. 성전에 힘을 보태면 사후에 주신의 곁에 갈 수 있다는 사탕발림에 넘어간 불쌍한 사람들.
엘랑키아 왕실이 나서고 성전이 본격화되면 트랑카벨에서도 많이 보게 될 것 같아서 좀 불안하긴 하다. 그런데 갈수록 전쟁이 복잡화, 전문화되어가는 시대에 훈련도 안 받고 무기도 없는 무리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전장에서 자리만 차지하다가 사상자 숫자만 늘릴 뿐이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드라멜른 기사단과 유사한 종교 기사단이다. 대부분 수도 서원을 한 기사들과 그 추종자로 이루어져 있다. 전통을 중시하기 때문인지 시대착오적인 고풍스러운 복장을 하고 전장에 나오는 경우가 많다.
외모야 워낙 멋지고, 전투력도 평균 이상은 하는 경우가 있어서 스폰서의 근위대를 하는 경우도 많다. 뭐 내 경험상 뒤에서 폼 잡고 있다가 별다른 역할을 못 하고 쓸려나가는, 아끼다 똥 되는 경우를 꽤 많이 봤기 때문에 좋은 이야기만 할 수는 없겠지마는.
아무튼 이 종교와 관련된 부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다.
시끄럽다!
거 조용히 살면 주신께서 듣지 못하실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지, 틈만 나면 뭔가 외치고 설교를 하려 든다. 뭔가 알 수 없는 고대의 언어로 구호를 외치거나 자신들 사이에서만 내려오는 특별한 기도를 외우기도 한다. 흥분한 군중이나 다름없는 순례자 무리야 완전 시장 바닥이 따로 없고.
아무튼 좀 조용한 놈들이 있다고 손 치더라도 평균보다는 다들 시끄럽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들 다 하는 전투 함성이니 구호니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면서 기도니, 맹세니 하는 것들이 추가되니까.
그런데 이 자식들은 뭐지? 설마 드라멜른 기사단은 벙어리들만 입대 가능한 기사단인가? 드라멜른이 혹시 벙어리의 수호 성인인가?
“그냥 조용한 것이 아니군요! 뭔가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어··· 정말이네?”
전장의 소음 사이에서 뭔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린다. 중얼중얼, 정말 적병들이 뭔가 읊조리고 있었다. 아니 시발 그냥 조용한 것보다 더 무서운데.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잖아.
비주얼적으로도 이 자식들, 전원이 고풍스러운 튜닉과 망토를 입은 것에도 모자라 얼굴을 완전히 덮는 투구를 쓰고 있었다. 면갑이 따로 있는 것도 있고, 완전 구닥다리인 양동이 같은 풀 헬름을 쓴 경우도 있고. 그런 놈들이 흔한 전투 함성 하나 없이, 뭔가를 중얼중얼 읊조리면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뭐야 진짜 인간 맞아? 투구 벗겨보면 좀비나 그런 거 아냐?
따닥! 빠바방! 빡!
“으아앗!”
대체 무슨 무기에서 나는 소리인가 싶은 탁한 폭발음이 연달아 났다. 앞쪽의 총병들이 움찔하며 허리를 숙인다. 곧이어 우리 총병들이 대응 사격을 가해서 시야가 가려진다.
대체 뭘 쏘면 저따위 탁한 소리가 나는 거지? 배합이 엉망이라 타는 속도가 제각각이고 알갱이도 균일하지 못한 저질 흑색화약을 터뜨리는 소리 같다.
바람으로 하얗게 피어오른 연기가 사라지자,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비탈 너머까지 바짝 다가온 드라멜른 기사단 총병들이 들고 있는 무기가 눈에 들어왔다. 묘하게 두껍고 짧은 특이한 화승총.
저건 그룬발트 제국의 동쪽 변경에서나 쓰는 동부식 대화승총인데··· 기술 발달이 더디고 전문적인 기프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조잡한 무기이다. 일종의 샷건 역할을 하는 치륜식 나팔총과는 완전히 다른 계통의 무기인 것이다.
가난하고 거친 삶을 사는 동부 변경의 주민들이, 대륙에서 가장 튼튼한 갑옷을 입는 것으로 악명 높은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기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식이다.
짧지만 굵은 총신은 화약 소모량이 많은 대신 장전을 쉽게 만들어 숙련도가 낮은 병사들도 사용할 수 있었다. 더 높은 폭발력 덕에 품질이 나쁜 화약과 고르지 않은 탄환을 써도 항상 일정한 위력을 얻을 수 있었다. 명중률은 떨어지지만, 어차피 가까운 거리에서 쏘기 때문에 크게 문제는 되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발사할 시에 위력은 표준적인 화승총에 비해 훨씬 강력해서 울타리와 같은 엄폐물이나 나무로 된 문도 부숴 버리곤 했다.
마치 장점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당연히 절망적인 상황이 만들어 낸 어쩔 수 없는 대용품이다. 그거라도 없으면 존재할 이유가 없는 무기인 것이지. 동부 변경의 주민들 역시 구할 수 있다면, 사든 노획하든 해서 질 좋은 평범한 화승총을 쓰는 것을 선호했다.
위력이나 명중률은 차치하고 유효 사거리가 너무 짧았다. 심지어 반동까지 세서 기사의 창에 찔리기 직전에 쏴도 엉뚱한 데로 튀어 버린다는 말까지 있었으니까.
모리츠의 무시무시한 대구경 화승총처럼, 탄환의 위력이 좋더라도 결국 멀리서 정확하게 맞추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적어도 화승총의 평균 사거리 정도는 되어야지.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드라멜른 기사단의 총병은 왜 저런 무기를 쓰는 거지? 북쪽 끝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기술력이 없나? 그래도 그룬발트에서 충분히 구할 수 있을 텐데. 아무리 가난해도··· 총병의 숫자를 줄이면 줄였지, 동부식 대화승총을 지급하는 정신이 나간 인간이 있을 리가···.
“콘도티에레, 적이 가진 저 큰 총이 무엇인지 혹시 아십니까?”
“동부식 대화승총인데, 위력은 좋지만 사거리가 짧고 화약 낭비가 심해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무기입니다. 저도 실제로는 거의 본 적이 없네요.”
생각해보니 가난한데 화약 낭비가 심한 무기를 쓸 리가 없지 않은가! 나름의 확실한 장점을 가진 대구경 중화승총 조차도 효율 문제로 채용을 하느니 마니 말이 많은 판인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실제 전투 상황을 보아도 그렇다. 중거리에서 번갈아 가며 총화를 주고받는 것은 아군이 훨씬 유리하다. 엄폐물에 보호받는 것도 있겠지만 계속 사상자가 나오는 것은 적군 쪽이다. 이대로 총격전이 계속되면 결국 피해가 누적된 적군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으아아! 이 새끼들 뭐야?"
"왜 안 죽어!"
"머리를 쏴 머리!"
총병들의 교전 거리가 가까워지자 내가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음이 드러났다. 정확히는 배에 총을 맞아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더니, 방어선에 바짝 붙어서 총을 겨누는 적병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병사가 쏜 총에 맞아 흉갑 한가운데가 움푹 들어갔으며, 뻥 뚫린 구멍에서 시커먼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온다.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투구가 벗겨져 얼굴이 드러났다. 짧게 깎은 머리카락과 창백한 얼굴, 움푹 들어간 뺨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자기학대에 가까운 고행을 수행하는 수도사의 얼굴이다. 웃는 것인지 화를 내는 것인지, 이빨이 보이게 슬쩍 벌어진 입가에서는 피거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공포나 고통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빠방!
다시 탁한 폭발음이 울리며 총이 발사되었다. 너무 강한 반동에 총구가 하늘로 치솟고 뻑뻑한 안개와도 같은 연기가 사방을 채운다.
파팍!
"우으윽!"
총탄이 아군 방어선의 울타리에 명중했는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말뚝 하나가 꺾이고, 사방으로 나무 조각이 튀어 오르자 당황한 병사들이 얼굴을 가리며 움찔한다. 다행히 큰 부상자는 없는 것 같다. 정작 대화승총을 쏜 적병이 반동을 이기지 못한 듯 바닥에 누워있다. 여전히 일어나려는 듯 움찔움찔하면서. 우리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띄게 위축되었다. 아무 피해가 없이 적을 쓰러뜨렸는데도 오히려 위축되었다는 말이다.
...빌어먹을 놈들이 대체 자기네 병사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세뇌를 했나? 약을 먹였나? 단순한 종교적 열정 때문에 총 맞고도 일어나서 적 코앞까지 다가가 총을 쏘고서야 쓰러진다고? 개소리다. 사람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가끔 진짜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인간을 초월한 듯한 이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수준을 일개 보병에 이르기까지 부대 전체에 요구한다? 올해의 개소리로 뽑힐 망발이지.
나도 치료 안 했으면 얼마 안 가서 뒈졌을 치명상을 몇 번 입어봤지만 일단 큰 상처를 입으면 드는 생각은 공포다. 오히려 고통은 조금 있다가 찾아온다.
따라서 치명상을 입으면 그게 당장 죽지는 않을 상처라도, 또 팔다리를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더라도 일단 전투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종교적 열정이든 정치적 열정이든, 다른 이상한 신념이든 간에 커버가 가능하더라도 현실, 다시 말해 치명적인 상처를 인식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세계는 멈춘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지. 물론 정신적인 충격 말고도 피를 갑자기 많이 흘리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쇼크의 영향도 있고.
그런데 총에 맞아 피가 역류해서 입으로 피거품이 나오고 갑옷 위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수도꼭지처럼 피가 줄줄 흐르는데 시발 끝끝내 방어선까지 도착해서 마지막으로 한 발 쏘고 죽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정상이 아니다.
"콘도티에레, 창병 중대장들에게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적 상태가 이상하다고 합니다."
"찔러도 안 죽고 악착같이 달라붙는다고 하던가요?"
"네, 그렇습니다!"
"총병들도 마찬가지니...."
아주 악랄한 일이다. 총병들은 장비와 지형의 우위로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싸우고 있었고, 창병들 역시 특별히 불리할 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 병사들은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
나는 방어선 우측 끝을 향해 걸으며 전선을 살폈다. 전체적으로 상황은 비슷했다. 수적으로도 크게 불리하지 않다. 적이 예비대를 투입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다. 다행히 드라멜른 기사단의 숫자는 좌익 쪽 귀족 군대에 비하면 숫자가 적다. 많아도 3천은 넘지 않는다.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면 충분히 상대 가능한 규모.
빠악!
"크아아아악!"
"소대장님!"
바로 옆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찢어지는 비명이 들린다. 병사 하나가 얼굴을 감싸고 괴로워하고, 다른 병사들이 기겁하여 주변에 모여든다.
"제16 몽세나!"
"코, 콘도티에레?"
"콘도티에레!"
나는 그들의 부대 이름을 불렀다. 바로 뒤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자 놀라며 굳어 버린다.
"소대장이 다쳤는데 이대로 있을 건가? 거기, 자네 빼고 다시 총을 잡아라."
"죄, 죄송합니다."
"복수를 해야지! 몽세나의 의기를 보여줘라!"
"넵, 연대장님!"
아리위스 연대장도 독려하자 한 명을 뺀, 나머지 병사들이 서둘러 전선으로 되돌아가 적 방향으로 사격을 재개한다.
"얼굴 많이 아프지? 이 손 보이나?"
"큭, 콜록! 보입니다, 콘도티에레."
"다행이네!"
많이 다치지는 않은 것 같다. 얼굴이 긁힌 자국 투성이인데, 큰 조각을 몇 개 털어내니 불투명한 유리 조각으로 보인다. 이 새끼들 뭘 쏜 거야 대체. 산탄을 쏘려면 저런 어설픈 무기로는 딱 붙어서 쏘지 않으면 거의 소용이 없다.
"얼굴에 흉터가 남아서 안 됐지만, 다행히 위험한 상처는 없다."
"다행이네요!"
"신병, 소대장에게 약을 발라주게."
"넵, 콘도티에레!"
병사에게 부상한 소대장을 맡기고 다시 일어선다. 자칫 패닉으로 번질 수 있었던 상황을 막기는 했지만 어디서건 이런 일이 또 생길 수 있다. 이마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마 제16 몽세나 연대의 병사들이 베테랑이었다면 ‘폼 잡는 주제에 약하네?’라고 하면서 서걱서걱 썰어 버렸겠지만, 부대 대부분이 신병인 지금 상황에서 그런 멘탈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위험하다. 좌측에 비해 여기가 명백하게 위험하다.
기사단인지 뭔지 광신도 놈들, 이번 전투 이기면 내가 탈탈 털어 버린다 진짜. 나는 결심하고 돌아서며 전령을 불렀다.
“전령!”
“전려엉!”
대기하고 있던 전령이 헐레벌떡 달려온다.
“기병 연대장 파스칼에게 전령, 총기병 4개 중대와 용기병 2개 중대를 이끌고 우측으로 이동, 나에게 와서 추가 지시를 받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