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여울목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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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랑카벨 군 방어선의 좌측면을 담당하는 석조 건물 담장에 기대서서, 화승총병 얀 고티에는 적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화승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입으로 후후 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변에 쪼그리고 앉은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격철 절대로 끝까지 당기지 마. 실수로라도 허공에 발사하면 피 터지게 두들겨 맞아도 할 말이 없어.”
“네 소대장님!”
잘난 듯 말하기는 했으나, 솔직히 첫 출전에서 오줌을 지릴 뻔한 어리버리하던 자신을 생각하면, 지금 동료들이 훨씬 믿음직하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것 같기는 하다. 훈련 기간으로 따져도 더 오래, 제대로 받았고 말이다.
그도 이제는 안다. 화승총병에게 첫 장전은 무척 중요하다. 안전한 장소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화약을 다져 장전한 첫 총알과, 혼란통에 되는 대로 장전한 두 번째 이후의 총알은 차원이 달랐다. 명중이나 위력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거리까지도 더 길다. 실전에 한 번 참여하고, 가끔이지만 사격 훈련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소중한 첫 총알을 허공에 날리면 지휘관으로서는 복장이 터지겠구나 싶기도 하다. 자기라도 소대원들을 잘 관리 해야지.
"소대장님, 적이 옵니다...."
"어 오겠지.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더 세다."
두 시간 쯤 전에 오줌 싸고 왔는데 덜 싸고 왔는지, 얀은 다시 오줌이 마려워 옴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입에서는 부하들 들으라고 허세 넘치는 대사가 나오고 있다. 옆에 나란히 있는 신병, 드레소 비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깨가 좁고 샌님처럼 생긴 이 소년은 소대에서 가장 어렸다.
"우리 투구와 갑옷이 적보다 더 튼튼하고, 우리 총이 더 신제품이다. 우리 지휘관은 콘도티에레 님이시다!"
반쯤은 얀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그래도 진심이 아닌 것도 아니지. 물론 여전히 무섭기는 하지만 그래도, 리니 능선에서 승리를 경험했고 블랑독 북부에서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승리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들었다. 이번에도 이기겠지.
"적 진형 봐라. 삐뚤빼뚤한 것이 훈련도 제대로 못 받은 것 같네."
"그건 그렇네요."
드레소가 고개를 끄덕인다. 천천히 가까워지는 적군의 진형은 확실히 엉망이다. 함께 훈련받았던 같은 연대 소속 창병 친구들에 비해서도 형편없다. 엉망인 대열로 각자 걷고 있을뿐더러, 창 길이도 서로 다르다. 확실히 훈련도의 차이가 느껴진다.
"주신께서 우리를 보호 하시기를...."
"우리가 이단인데 기도해도 되나?"
"그럼 정순파 쪽의 주신께 기도하면 되잖아!"
이 자식들은 겁도 없나, 저쪽에서 신병들이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킥킥 웃는다.
저 병사들의 농담이 현재 트랑카벨 영지군에, 아니 영지에 사는 주민들 전체 사이에 팽배한 분위기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이단으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독실한 신앙을 가진 이들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부패한 교단 조직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서 부당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에는 다들 공감하고 있었다.
딱히 트랑카벨 가문에서 나서서 프로파간다를 한 것은 아니었으나,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가 생겼고 그렇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마 종교적 문제보다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적어도 트랑카벨 영지에서 배가 고파 굶어 죽는 이는 아무도 없다.
통치자 가문의 전횡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도 아무도 없다.
전쟁이 났으나 세금이 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이웃으로 지냈던 정순파 신도들이 딱히 악마들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법황청 교단 조직이나,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복잡한 이단 교리 논쟁보다는 조상 대대로 함께해온 영주 가문과 이웃들을 선택했다. 백성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나름의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첫 전투에 겁을 먹고 부들부들 떨고 있을지언정, 자기 의사에 반해 이 자리에 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얀 고티에 자신도, 샌님 신병 드레소 비타도. 스스로의 의지로 모병 지원서에 서명했기에 전장에 나선 것이다. 제10 카르카냑 연대의 전원이 그렇고 다른 연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 사실 주신님은 여러 명인 거야?"
"그림 우리 주신과 적 주신 중에 누가 더 세지?"
"전원 조용히! 적이 코 앞이다!"
천벌 받을 소리를 농담으로 하던 신병들에게는 천벌 대신, 중대장의 호령이 떨어졌다. 이제 적들이 다가온다. 거대한 적 창병 방진의 전열에는 총병들이 드문드문 섞여 있다.
"사격 준비!”
호령 소리에 따라, 돌담에 의지하고 있던 병사들이 총을 가슴 앞에 세워 든다. 타탕, 탕! 총 소리와 함께 적진에서 하얗게 연기가 몇 줄기 피어오른다. 노리고 쏜 것인지 실수로 쏜 것인지 다행히 근처로 날아온 총알은 없다. 아직 거리가 애매하다. 트랑카벨의 총병들은 최대한 적을 끌어들일 때까지 쏘지 말도록 교육받았다.
“조준!”
지금이 최대한 적을 끌어들인 순간이다. 불붙인 화승이 물린 격철을 뒤로 당긴 다음, 총을 수평으로 겨누고 뺨을 가져다 댄다. 마지막 남은 단계는 방아쇠를 당기는 것뿐. 마치 1시간과 같은 1초가 지나간다.
담장 앞에 적의 총병이 늘어선다. 몇 명은 이쪽을 노리고, 몇 명은 장전하고 있다. 바로 뒤에는 활을 겨누는 적도 보인다. 심장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기특하게도, 명령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도 총을 발사하지 않는다.
“발사!”
타타타타탕!
순식간에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연기로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 굉음으로 인해 찌잉 하고 귀가 울린다. 매캐한 연기를 맡으며, 얀은 재빨리 재장전을 시작했다. 처음 전투에 나섰을 때는 총의 반동을 받아 낸 어깨와 팔이 너무 아파서 몰랐는데, 요령이 생기니까 진짜 아픈 건 귀였다. 일시적으로 고막이 아려오는 고통에 얀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제 그는 선임병이며, 소대장이다. 주변의 병사 10명을 지켜보며 혹시라도 실수하는 녀석은 없는지 살핀다. 다들 평소보다 당황하고 긴장한 것 같기는 하지만 큰 실수는 없는 것 같다. 첫 사격 직후에 장전한답시고 꽂을대 거꾸로 꽂았던 것 생각하면··· 역시 자신의 첫 출전 때에 비하면 지금 신병들이 훨씬 똑똑한 것 같다고, 얀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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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솔직히 개판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적 우익의 공격은 만만치가 않았다.
우선 선두로 내세운 창병 방진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창병과 총병의 조합으로 대열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현재 트렌드에 전혀 맞지 않는 편성이었다. 창 길이는 들쭉날쭉했으며, 대열을 갖추는 훈련도 받지 않아서 진형도 엉망진창이다.
게다가 주변에서 보조해주는 총병의 숫자도 너무 적었고 그렇다고 아쉬운 대로 궁병이나 쇠뇌병의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천천히 접근해온 적 보병 대열이 준비하고 있던 제15 델레망드 연대의 방어선과 충돌하는 순간, 잘 훈련된 우리 병사들이 가지런한 장창 밀기, 즉 파이크 푸쉬 공격으로 비탈을 오르려던 적을 쫓아냈다.
장거리 화력 면에서 압도적인 총병 전열은 말할 것도 없었다. 꾸준히 적진으로 투사되는 아군의 화력은 차곡차곡 적의 시체를 늘려나간다.
이쯤 되면 리니 능선 전투 이상으로, 무난하게 버티기만 하면 점점 아군이 유리해질 것으로 생각했으나 적의 엉망진창이던 보병 진형에 시너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 큰 규모의 보병 방진이 생각보다 단단했다. 비탈을 오르려다 밀집 장착 대형에 밀려나고, 근거리에서 발사되는 총병의 공격에 속절없이 쓰러져 가면서도 말이다. 충분히 많은 숫자의 보병 대열은 그 피해를 흡수하고 거대한 전열의 질량 자체로 아군 방어선에 달라붙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적 창병의 후위에는 생각보다 잘 무장된 중장병들이 붙어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말에서 내린 기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장이 잘 되어 있었다. 온몸을 철갑으로 감싼 중장병들이 창병의 측면에서 아군 방어선을 압박해오자 특히 창병 방진에 압박이 증가했다.
게다가 비탈과 울타리를 지나 총병 대열을 위협하는 놈들도 나왔다. 숫자가 많지 않고, 기어오르다 격퇴당하거나 죽는 경우가 많아 총병 대열을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이러면 총병들이 맘 놓고 사격을 할 수 없어서 창병 대열에 대한 지원이 약해진다.
나름 열성적인 귀족들이 성전에 참여하겠다고 데려온 병력이라 그런지 총소리에 놀라 우르르 도망치는 어설픈 징집병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용감한 전사들이다.
“막생 경, 귀하의 의용병 부대 하나를 전선에 투입하고자 합니다. 명령을 전달해 주세요?”
“맡겨주세요!”
“10명 씩 나눠서, 현재 전투 중인 좌측 방어선의 총병 전열을 지원해 주세요. 총병들이 백병전에 휘말리는 것을 지켜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누구냐 대체··· 설마 소베트르라는 남작이 이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나? 자신이 가진 병력의 특성과 역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불리한 와중에 그 잠재능력을 한계까지 끌어내어 아군을 밀어붙인다고?
아니, 말은 다시 하자. 이건 아군이 밀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부담이 되긴 하지만, 이건 적이 자신의 병력을 연료로 태우고 있는 상황이다. 백병전에서 대등하거나 좀 밀린다고 하더라도, 압도적인 우리 총병 전열에 꾸준히 사상자가 누적되는 것은 상대 쪽이다. 이런 전투를 오래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분명 다음 노리는 바가 있다.
단순하게 힘만 앞세워서 밀어붙이는 것이라면 우리도 두터운 방어선으로 적의 공격력을 흡수한 다음, 기동 전력으로 적의 측면부터 깎아 먹으면서 서서히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그걸 못하는 이유는 적의 오묘한 배치 때문이다.
아군 전열에 달라붙은 선두 보병 뒤에는 다른 보병 방진이 예비대로 위치하고 있고, 최후방에는 숫자가 꽤 되는 적 기병의 주력이 있다. 어정쩡하게 힘을 뺐다가 중앙을 돌파당하기라도 하면 끔찍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한편으로 기병 유격대를 보내 적의 측면을 공격하자니, 적 주력과 따로 움직이는 분견대가 딱 측면을 견제하는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 파스칼의 총기병 600기를 내보내면 분견대 정도는 쫓아낼 수 있겠지만 이러면 또 최후방의 적 기병 주력에 노출되겠지? 대충 가위바위보에서 가위, 바위를 미리 내어놓고 들어올 거면 바위로 들어오시든가~ 이런 꼴이네.
이건 분명히 노렸다. 우연히 이렇게 빡치는 배치를 할 수는 없어! 누구지? 진짜 소베트르 드 랑두제라는 남작이 사실은 전술의 귀재였다고?
일단은 진정하자. 아직 전투는 초반이고, 먼저 수를 내기가 곤란할 뿐이지 불리한 것은 절대로 아니니까.
"모리츠, 잠시 이쪽 전선을 맡... 보고 있어 줘."
"맡겨주십시오, 콘도티에레!"
"특이사항 생기면 불러 줘! 아치요 군도 전령으로 부탁하네."
"네, 넵! 콘도티에레!"
랑두제에서 밤새 남쪽으로 달려와 비상 상황을 전달했었던 방아깨비 청년 아치요는 부대 내 전령으로 임시 고용했다. 나에게 쪽지를 전달한 후, 야전 병원에서 쉬면서 탈진 상태에서 회복한 그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하며 잡일을 돕고 있길래 부대 일꾼 겸 전령으로 고용했다. 원래 떠돌이로 살아 딱히 갈 곳이 없는 모양이다.
헐렁한 투구가 자꾸 흘러내려서 턱끈을 고정한 모습이 뭔가 개그 캐릭터 같아서 자꾸 웃음이 나올 것 같지만 아치요의 표정은 진지하다. 전령으로 온 날도 우리 군을 찾느라 아무것도 없는 초원 지역을 새벽부터 뒤지고 돌아다닌 모양이더라. 솔직히 포기하고 떠났어도 아무도 몰랐을 텐데. 그의 빠른 다리와 책임감은 전령에게 반드시 필요한 미덕이다.
"철통같이 지키고 있겠습니다!"
"믿겠네!"
제15 델레망드 연대장 쥐그 드 푸로니 역시 우렁차게 말했다. 드 푸로니 가문은 대대로 트랑카벨 가문의 자작령 중 하나인 델레망드의 행정관을 하고 있다고 한다. 본래라면 쥐그 역시 아버지의 대를 이어 행정관을 할 예정이었겠으나, 본인의 강력한 희망으로 군인을 지망하고 있었다. 델레망드 출신 병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는 청년 기사였기에 연대장 업무를 잘하고 있었다.
나는 모리츠와 쥐그, 그리고 아치요에게 잠시 좌측 전선을 맡기고 오른편으로 이동했다. 한발 늦은 타이밍에 접근해온 드라멜른 기사단의 군세와 제16 몽세나 연대가 충돌하고 있었다.
"콘도티에레!"
제16 몽세나 연대를 지휘하고 있는 연대장 아리위스 드랭쿠가 모자에 손을 대는 고풍스러운 남방식 경례로 나를 맞이했다. 그는 연대장 중 가장 연상으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풍성한 수염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과거 라솔 왕국과의 전쟁 당시, 트랑카벨 가문에서 파견한 병력에 참여했었다. 벨모제의 성주 톨마르 슈마레의 부장으로 보병 부대를 지휘했었던 노장이다.
"몽세나의 청년들이 전선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아리위스 드랭쿠의 보고에서는 강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트랑카벨 남부의 자작령인 몽세나는 다소 폐쇄된 산악지방이라 그런지, 유독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조하곤 했다. 그렇다고 지역감정이나 차별 문제가 나올 만큼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고.
대열을 갖춘 방어선 너머로, 가지런한 드라멜른 기사단의 전열이 다가오고 있었다. 타타타탕! 타탕! 적절한 거리에 도달했다 판단한 총병들이 중견 지휘관들의 명령에 따라 사격을 시작했다.
"전투에 대비해!"
"몽세나! 트랑카벨!"
"몽세나아아!"
병사들의 우렁찬 외침에 내 가슴도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그렇게 양측의 선두 전열이 부딪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