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삼개군 전역
“국왕이 직접 베르마유의 대성전 맨 앞자리에서 성사에 참여했습니다. 제 평생 베르마유 대성전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건 처음이었어요.”
아쥬흐가 정보를 위해 고용한 상인이 자신이 엘랑키아 수도를 다녀오며 경험한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쥬흐가 고용한 것은 아니다. 상인은 그냥 평소처럼 베르마유를 포함한 여러 지방들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데, 그 상품 목록에 정보라는 값비싼 품목을 하나 얹었을 뿐이니까.
“성사 끄트머리에, 성전 참여자 기록부를 봉헌하는 의식이 또 있었습니다. 이게, 지금 베르마유에서 완전히 큰 유행이 됐습니다.”
그건 또 대체 뭐지?
“주신께서 직접 보실 책이라나요? 거기에 이름 한 줄 올려보겠다는 귀족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으니까요.”
“설마 이단 토벌 성전에 참전하면 이름 새겨주는 겁니까?”
“그뿐 아니라, 기부금을 내도 이름이 올라갑니다. 매일 밤 왕실 서기들이 가서 목록을 추가하는데, 기부한 금액이 많고 이끌고 참전하는 병력이 많을수록 더 화려하게 장식 글씨를 만들어서 새겨준다네요.”
와, 누군지 몰라도 진짜 천재적인데. 수도 대성전에서 가장 신성한 책을 가장 세속에 찌들게 만들었으니. 그래서 지금 왕실의 금고에는 차근차근 군자금이 쌓이고 있고, 천상행 티켓을 얻겠다며 몰려든 공짜 병력들도 모이고 있다는 이야기니까.
주디칼리에서 좀 느꼈었지만, 사교에 목숨을 거는 귀족이란 사람들은 유행에 상상 이상으로 민감하다. 아마 누군가가 기부금을 내고 기록부에 이름을 올려 귀족 커뮤니티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면, 더 큰 기부금을 내고 더 화려한 이름을 올리지 않고는 못 버틸 인간들이 있을 거다.
가령, 내가 잠시 지내던 도시에서는 귀족들 사이에 ‘노랑색’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당시 귀족들은 가장 좋은 발색을 가장 좋은 천에 입히기 위해서 도시의 저택이나, 지방의 마을을 살 수 있는 금액을 낭비하곤 했었으니까.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완전히 핫 플레이스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몇몇 기사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레이디를 데리고 와서 성전 참여를 맹세하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건 좀 로맨틱하네. 기사가 자신의 미래와 신앙을 걸고, 성전에 참여하며 여인에게 사랑을 속삭인다라. 나름 멋질 수도 있겠네. 맹세한 기사가 전쟁 나갔다가 죽거나 불구 되지만 않으면, 그리고 여인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한다면 말이지.
“그게 좀 변질돼서, 청년 기사들이 줄을 서서 성전 참여를 맹세하고, 간택 받기를 원하는 귀족 처녀들이 주변에 서 있다가 참여를 맹세한 기사의 꽃과 검을 받아 서로 마음이 맞으면 손잡고 대성전을 나서는 연애의 장이 되었습니다! 신성한 대성전이 말이지요.”
이런 불경한 놈들! 어딜 감히 신성한 대성전에서 발정이 나서는! 연애에 미쳐서 전쟁터에 기어 나온 멍청이들에게 뜨거운 화력의 맛을 보여줘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내 감상이야 그렇다 치고, 정보를 들으니 고민을 하게 된다.
귀족 사회에서 성전 참여가 그렇게 유행한다니, 조금 겁이 나기는 한다. 이단 토벌 성전군의 규모 자체도 문제지만, 엘랑키아 왕실을 적대하는 것과, 엘랑키아 귀족 집단 전체를 적대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그냥 흐지부지되면 좋겠는데.
반대로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되는 점은 시간은 벌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겠다. 예상대로 엘랑키아 왕실은 북방 전쟁에 돈을 너무 많이 써서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쇼를 하면서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결국, 국왕이 소집한 왕실군은 적어도 몇 달 동안은 출발도 못 할 것 같다. 몇 달 후면 겨울이니까··· 내년 봄에나 오겠네. 이건 좋은 소식이 맞지.
그래도 국왕이 법황의 이단 토벌령에 응했다는 것 자체로 성전에 나서는 멍청이들이 늘어날 것은 분명하다. 또 그중에 특별히 멍청하고 독실한 녀석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들지도 모른다. 리니 능선 전투가 그랬고 아넥시 전투가 그랬으니까. 천상행 티켓이 필요해서 그런가. 이런 한입충같은 놈들.
“그러고 보니, 레뮤즈 백작령에서 정순파 추방령이 내려졌습니다. 조만간 카르카냑에도 피난민들이 올지도 모르겠어요.”
아, 그 뚱땡이 백작이 결국 저질렀구나.
“탄압은 아니고 그냥 추방령인가요?”
“네, 특별히 정순파를 폭력적으로 괴롭히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들었습니다. 공고로 조건도 정했더라고요. 48시간 내로 집을 떠날 것. 성인 1명 당 말은 한 필까지, 수레는 금지되고 가지고 갈 수 없는 재산은 백작가에 귀속된다고요.”
뭔가 미묘한 추방령이라 관대한 것인지, 쪼잔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적어도 마구잡이로 약탈하거나, 목숨을 위협하는 막장 탄압령은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이도 저도 싫으면 성전을 찾아가 사제에게 그간의 이단 행동을 반성하고 용서받으면 이단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이건 꽤 자비로운 처분이다. 아넥시에서도 그랬지만, 대체로 성전군 놈들이 원하는 것은 이단 척결이 아니라 ‘이단자들이 가진 재산’의 약탈이니까. 라몽 드 레뮤즈는 외모나 하는 짓에 비해서 정말로 악한 짓은 못하는 건가.
약간 라몽이라는 인물을 알 것 같기도 하다. 특별히 귀족으로서의 명예나 영광은 물론 부와 권력에도 크게 관심이 없는 타입이 아닐까. 그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몫에 만족하며 하루하루 복지부동으로 어제와 같은 내일이기를 비는 그런 인간.
전란의 시대가 아니라면 평범하게 칭송받는 어진 군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타입은 귀찮아서 일도 안 저지르고, 백성을 수탈하지도 않을 테니까. 굳이 말하자면 ‘멍청하고 게으른 상사’에 속하는 케이스라고 하겠다. 적어도 사태를 악화시키지는 않는 인물이라는 것이지.
하지만 판단력과 생활력이 떨어지고 외부 자극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밀리면 바로 추태를 일으켜 버린다. 카르카냑에서 아무도 안 쫓는데 혼자 도망친다고 벌였던 촌극이 그런 케이스겠고.
나는 라몽의 평가를 '치졸한 인간쓰레기'에서 '미숙한 얼간이'로 상향 조정했다. 무려 2단계 상향 평가다. 부디 상식적으로 행동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특히 선과 악을 기준으로 행동하기는 힘든 이런 시기에는 말이다.
블랑독이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인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균일한 문화적 구성을 보인다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여러 문화적 특성들이 지역별로 얽히고설켜 공집합과 합집합을 만드는 와중에 한가지 구분 기준이라고 해야 하려나.
당장 정순파가 블랑독에 널리 퍼져있다고는 하지만 대체로 동쪽으로 갈수록 그 비율이 높고, 서쪽으로 갈수록 적은 모양이다. 아넥시처럼 인구의 50퍼센트 이상이 정순파 신앙을 받아들인 곳이 있는가 하면, 드 레뮤즈 백작 가문의 거점인 레뮤즈 같은 곳은 말 그대로 소수 종교라고 한다.
숫자가 적으면 박해받기 쉬울 텐데··· 좀 걱정이 된다. 슬슬 방어 전략을 결정해야 할 것 같다. 정말 안타깝지만, 블랑독 전체를 철통같이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철저하게 지킬 장소와 그 밖에 사는 이들의 안전한 대피처라도 제공해야 할 테니까,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또 돈 쓸 일이네.
괜찮아 돈은 아쥬흐가 벌어다 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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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 카르카냑 연대의 총병 소대장 얀 고티에는 자신과 소대원 병사들의 복장을 점검했다. 그동안 훈련에서 나름 힘들게 굴러다녀서 장구류는 제법 닳아 있었지만, 새로 받은 흉갑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변한 게 하나 있다. 얀의 옷깃에는 트랑카벨 가문의 상징인 올리브 잎을 형상화한 배지가 붙어 있다. 이름하여 트랑카벨 단엽장. 실전에 참여한 병사만 받을 수 있는 영광의 상징이다.
신병들이 얀의 옷깃 언저리를 경외하는 눈으로 볼 때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고 허리가 꼿꼿하게 펴지는 것이다. 아마 리니 능선 전투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대부분 그럴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불과 두어 달 일찍 입대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덕에 소대장도 되었다. 트랑카벨 영지군의 병력이 짧은 기간에 몇 배로 확장되면서, 얀과 같은 초기 입대자들을 기간 병력으로 하여 소부대 조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몇몇 동료들은 제15 델레망드 연대나 제16 몽세나 연대로 옮겨가기도 했다. 화승총 조작은 기술이 필요하고, 전투 중에는 당황해서 실수하기 좋아서 숙련병이 함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얀 자신도 리니 능선 전투에서 용병이었던 장교가 여러 차례 지적해주었던 기억, 그런데도 정신 못 차리고 어리버리하던 기억, 불붙은 화승을 손으로 잡는 바람에 손가락에 묻은 화약이 타 버리면서 화상을 입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엄지손가락에 까끌까끌한 흉터로 남았지만, 지금은 자신을 하늘처럼 여기는 신병들이 알까 봐 겁나는 창피한 기억이다.
그렇지만 선임병인 얀 고티에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에 그의 부하 신병들은 얀의 첫 출전 때 보다 훨씬 준비가 잘 돼 있었다. 이후 확장된 연대는 꾸준히 훈련을 이어갔고, 실사격에 비해 적은 화약을 넣는 사격 훈련도 많이 받은 데다가 실탄 사격 훈련도 해서 수준이 더 높았다. 유일하게 부족한 것이 실전 경험인데, 함께 전장에 나간다면 신병들이 금방 자신을 추월할 것 같았다.
밀리지 않으려면 더 빠릿빠릿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슬그머니 허리 뒤 춤에 찬 도끼의 머리를 만진다. 보조 무기로 사용한다고 가지고 있지만, 물론 아직 한 번도 전투에서 쓴 적은 없다. 야영지 설치 등에 매우 유용하게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루틴이다. 첫 전투에서 진정했던 경험 때문일지.
봉급과 전투 포상금의 대부분은 고향 집의 부모님에게 보냈다. 얼마 전에 어린 여동생의 편지가 도착했다. 아직 열 살인 여동생은 집에 송아지와 닭 등 가축이 늘어나자 신이 난 모양이었다.
“1분 후 출발!”
“1분 후 출발!”
전령들이 연대 구석구석을 달리며 명령을 전한다. 다소 느슨하게 서 있던 보병 대열이 다시 각을 맞춰 선다. 얀도 마찬가지다. 지난 전투에서 귀환한 이후, 재편성과 훈련만 하느라 카르카냑을 떠나지 않았었다.
제10 연대를 포함한 수 천 명의 보병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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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로 창설된 제7 카르카냑 기병 연대의 연대장을 맡고 있는 파스칼 드 뒤랑은 보병의 뒤를 따라 부대를 전진시켰다.
이제 그는 연대장이 되어 모두 8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있었다. 마브리엘은 다른 부대의 편성을 위해 기병 지휘관 자리를 내려놓았다. 먼저 전장에 나가게 된 파스칼을 무척 부러워하며, 자신도 곧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아넥시에서의 전설적인 승리 이후, 파스칼과 마브리엘의 기병 중대 200명은 영웅이 되었다. 특히 전통적인 마갑과 창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에서 권총을 사용하는 총기병으로의 전환을 두려워하던 기사나 향사 계급 청년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받았다.
총의 위력에 대해서는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믿기가 어렵다. 파스칼 역시도 아넥시 전투 직후에 자신들이 해낸 전과에 놀랐을 정도니까. 하지만 장창으로 무장한 밀집 방진을 기병만으로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밀어 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전과인지 누구나 아는 것이다.
그렇게 전환 훈련은 무사히 마무리됐고, 600명의 총기병을 중심으로 제7 연대가 창설되었다. 그들은 모두 블랑독 출신의 기병으로 모두가 훌륭한 기마술을 가지고 있다.
거기 추가로 200명의 새로운 형태의 기병대가 추가되었다. 콘도티에레가 파스칼에게 설명하기로, 그들은 ‘총을 든 기병’이 아니라 ‘말을 탄 총병’ 개념이라고 한다. 전투용으로 쓰기에는 영 부족해 보이는 짐말에나 어울리는 말들을 라솔 쪽에서 수입해오더니 이런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다.
또한 조금 특이한 부대가, 제7 연대가 호위를 맡은 수송부대에 포함된 모양이었는데, 어떤 식으로 활용될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다 콘도티에레가 알아서 생각하고 있겠지, 파스칼은 그렇게 모든 의문을 정리했다. 부하들을 이끌어 아넥시 성문 앞에서 카라콜 전술을 완벽하게 실행하며 어설픈 의심 따위는 전부 사라졌다. 다소 괴상한 것을 시켜도 ‘다 생각이 있으니 시키겠지’로 납득 가능할 정도로 신뢰가 쌓였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또한 드는 것이다. 이유를 말하라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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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지어 행군하는 우리 병사들의 뒷모습이 늠름하다. 정말 멋지고 믿음직하다. 엘랑키아, 아니 대륙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병사들이다.
하지만 좀 불안한 점이 없지 않다. 중견 지휘관급 인재가 너무 없는 것이 첫 번째 문제. 애초에 기껏해야 수백 정도의 지역 수비군 정도만 보유했던 트랑카벨에서 갑자기 연대장급 인재를 찾아낸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게다가 사회적 계급이나 인지도 따위도 고려해서 인선을 하려니 좀 피곤한 점도 있었다. 오히려 일선 전투병이나 하급 지휘관 지원자들의 질과 열정이 워낙 높아서 당황스러울 정도인데.
확 사관학교를 세워? 하는 정신 나간 생각도 했지만 그건 또 누가 가르치며, 몇 년 후에야 초급 장교들이 배출될 텐데 그거 기다릴 시간도 없다.
결론은 실전과 유사한 기동 훈련을 하면서 전체적으로 군의 훈련도를 높이고 장교들의 숙련도 역시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장에서 병사들 당황하지 않게 장악하기만 해 줘도 훌륭한 지휘관이니까.
이번 출정은 그런 목적이 절반, 나머지 절반은 블랑독 순시다. 아넥시 방향 말고, 더 서쪽 지역. 위력 과시라고 하면 뭣하지만, 최소한 소규모로 넘어와서 이단 토벌이랍시고 약탈하는 놈들이 생길까 봐 걱정인 점도 있고.
아마 엘랑키아 왕실에서 주도하는 침공은 해를 넘겨서야 시작될 것 같지만, 이만한 군대가 순찰을 하고 있으면 약탈자 놈들도 생각을 다시 하게 되리라. 그럼 내년까지 시간을 벌고, 만전의 준비를 한 상태로 왕실의 군대를 맞이할 수 있겠다.
제발 별일 없어라.
제발.
제바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