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전쟁의 바람
나는 모리츠를 따라 트랑카벨 저택으로 돌아왔다.
요즘 저택 내부에 내 방까지 얻어놓고 지내다 보니 거의 제집 드나들듯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트랑카벨 저택이 좀 불편하다. 너무 화려하고, 너무 넓고, 너무 안락하고···.
“대체 누구길래?”
실무자 만남이면 아쥬흐의 집무실로 갈 테고, 보통 손님이면 최근 자주 갔던 만찬실일 텐데, 모리츠는 나를 2층 영주 접견실로 안내했다. 모리츠도 누가 찾아왔는지는 모르는 모양이다. 설마 신분을 숨기고 싶어 하는 자의 방문이라....
대체 누구지? 설마 법황의 특사? 엘랑키아 왕의 사절?
“콘도티에레!”
영주 접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실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이건 좀 의외인데··· 아실은 지금쯤 훈련장에서 병사들을 조련하고 있을 시간이 아닌가? 나는 일부러 병사들에게 자주 보이는 ‘신생 트랑카벨 군의 수장’은 아실이라 각인하기 위해 아실을 훈련장에 자주 보냈다. 나는 어디까지나 대리이므로, 새로운 교육을 시작하거나 할 때만 실무 보조로 참여한다.
트랑카벨 영지군의 수장은 가문의 주인인 아롱드이며, 지휘권은 가문의 후계자이자 사령관인 아실에게 있다. 나는 대리 사령관 역할로, 사령관 아실로부터 지휘권을 잠시 위임받아 근무하고 있을 뿐이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부대가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외부에 주둔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고향과의 유대가 멀어지고 자신들끼리 똘똘 뭉치는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게 심해지면 군벌이 되고 반군이 되는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자기네 월급 주고 밥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지, 아니면 그냥 얼굴 자주 보여주는 사람에게 충성 바치는 군벌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지. 앞으로 ‘진짜 전쟁’을 하게 되면 부대별로 오랫동안 카르카냑을 떠나있게 될 텐데, 어느 때라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트랑카벨의 군대라는 정체성 말이다.
참고로 귀찮아서 그런 건 결단코 아니다. 아무튼 아니다.
“잘 왔네, 에트.”
“어서 와요, 콘도티에레 에트.”
방 안에는 아실 뿐 아니라, 아롱드와 아쥬흐가 함께 있었다. 이렇게 트랑카벨 가족이 전부 모이는 건 또 오랜만인데. 게다가 주로 가운과 같은 편한 옷을 입던 아롱드는 정복을 갖춰 입었고, 아쥬흐 역시 평소보다 한층 아름답게 꾸민 것으로 보인다.
대체 무슨 일일까. 소파에 앉아있던 머리카락이 반백인 귀족처럼 생긴 사내가 나를 보자 찻잔을 내려놓고 슬쩍 눈인사를 한다. 저쪽 창가에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안절부절못하는 듯 제자리를 맴도는 누군가가 또 있다.
뭐야 대체 누구야 이 사람들. 반백 귀족 아저씨와 후드 남자라니···.
“미안하지만, 오드 군과 모리츠 군은 자리를 비켜 주겠나?”
“예, 가주님.”
“알겠습니다!”
아롱드의 휠체어를 밀던 하인과 모리츠가 방을 나간다. 이런 것도 또 처음인데. 왠지 느낌상 법황이나 국왕이 보낸 사절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이 신분을 속일 이유가 있나, 오히려 삐까번쩍하게 화려한 수행원 대열을 이끌고 이리 오너라! 하면서 찾아왔겠지. 카르카냑 주민들 절반은 구경하러 왔을 테니 나도 알았겠고 말이다.
“백작님들, 트랑카벨 가문의 군사 전권 대리인, 콘도티에레 에트를 소개합니다. 콘도티에레 에트, 블랑독의 고위 귀족들이신 라몽 드 레뮤즈 백작님과 가스텔 드 누아 백작님이십니다.”
아쥬흐가 우리를 소개했다. 블랑독의 백작들이라니! 나는 인상이 확 나빠졌다. 리니 능선이나 아넥시나, 다른 약탈당한 마을들을 기억해야 한다. 외지의 군대가 함부로 블랑독을 들락거리며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 코빼기도 안 보였던 그 백작님이란 말이지.
“가스텔 드 누아요, 콘도티에레.”
반백의 남자가 맵시 있게 한 손을 가슴에 얹고 허리를 숙인다.
“레뮤즈의 라몽이오!”
뭐가 불안한지, 라몽은 그제야 후드를 벗고, 계속 불안한지 주변을 살핀다.
드 누아 가문이야 그렇다 치자. 블랑독의 서남쪽, 라솔 왕국과의 국경인 이스키비르 강변에 자리한 누아는 백작령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빈약했다. 트랑카벨이 보유한 자작령인 카르카냑이나 델레망드가 훨씬 풍요롭고 넓을 정도였으니.
한때는 남부에서 손꼽히는 대귀족이었으나, 엘랑키아 왕국과 라솔 왕국의 전쟁에서 엘랑키아가 패배하면서 강화 조약의 일부로 이스키비르 강 너머의 영토를 몽땅 라솔에게 뜯겼기 때문에 지금처럼 영토가 쪼그라들었다. 전쟁은 왕실이 일으켰는데, 영토는 드 누아가 뜯겼으니 딱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한편 드 레뮤즈 가문은 엘랑키아 건국 당시부터 존재했던 엘랑키아 왕실 공인의 8대 명문으로, 대귀족 중의 대귀족이다. 게다가 명목상 블랑독 전체의 통치자이기도 했고. 아무리 블랑독의 소귀족들이 독립 성향이 강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도 그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앞으로도 블랑독에 대한 권위를 인정받기 힘들다는 것을 뜻했다.
“어째서 이런 일을··· 항상 트랑카벨 가의 인간들은 블랑독의 골칫거리구만! 내 할아버지, 선선대 라몽 백작의 입버릇이셨지!”
라몽 드 레뮤즈가 자리에 털썩 앉더니 짜증스럽게 말한다. 다시 후드를 쓰지는 않았지만, 다리를 덜덜 떠는 게 무척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불뚝 튀어나온 뱃살이 같이 흔들려 썩 보기 좋지는 않다.
“허허허, 선선대 라몽 공은 저도 기억나는군요.”
아롱드가 사람 좋게 말했지만, 말에 가시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롱드 영감님이 어릴 때만 해도 트랑카벨과 드 레뮤즈는 블랑독의 패권을 다투는 양대 세력이었던 것이다. 뭐, 영토 다툼에 염증을 느낀 영감님이 드 레뮤즈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고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을 멈추면서 일단락되긴 했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는 있었다.
라몽 백작은 쌓인 것이 많은 모양인지, 속사포처럼 계속 불만을 이야기했다.
“알아서 이단 나부랭이들은 적당히 처리하고! 법황 눈에 안 거슬리게 했으면 됐잖은가! 성전군도 적당히 재미 보고 가도록 놔두면 될 것을, 그걸 굳이 병력을 출전시켜 쫓아내다니 제정신인가 당신들!”
뭐라는 거야 이 자식, 완전 쓰레기 같은 인간이네.
“이제 법황청에서도 직접 기사단을 파견하고 왕도 군대를 보낸다는 소문이 파다해! 이걸 어쩔 생각인가!”
“자자, 라몽 공, 이미 상황은 이렇게까지 왔습니다. 벌써 물은 엎질러졌고, 저희 입장에서도 왕실이나 법황청의 행보가 곱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크으....”
가스텔 드 누아가 말리자 분노를 쏟아내던 라몽이 입을 다문다. 오호라, 지금까지 정세를 관망하던 이들이 이래서 트랑카벨을 찾아온 것이구나. 그것도 비밀리에 말이다. 아마 잘 안되면 트랑카벨 가문과의 연고를 거부하려는 것이겠지?
“자, 트랑카벨 경, 우리는 앞으로 귀하의 가문이 어떻게 할 생각인지를 듣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는 지금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가스텔은 사람 좋은 중재자의 태도를 하고 있지만, 그 얼굴에서는 나름의 계산과 총기가 보인다. 분명 어느 쪽에 붙을까 계산을 하고 있겠지.
아무리 세력이 작지만, 썩어도 백작, 나름 블랑독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엘랑키아 왕실 세력이 트랑카벨을 멸망시키고 블랑독을 먹어 버리면 가뜩이나 세력도 작은 드 누아 가문은 나가리 중의 나가리가 되는 수가 있다. 그렇다고 성전군과 싸우다 지면 그나마 있는 세력권도 털리는 수가 있겠고.
그의 입장에서도 최선의 상황은 블랑독이 성전군을 몰아내고 전쟁 이전의 상황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줄을 잘 섰으면 옛 드 누아의 영광을 조금쯤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지금은 트랑카벨에 줄을 서도 될지 가치를 가늠하러 온 것이다. 덤으로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있음을 과시하려는 거겠지. 아주 너구리 같은 인간이다.
나도 블랑독 주변 세력 지형 조사를 하면서 예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찾아올 줄은 몰랐네.
“여기에 대해서는 콘도티에레 에트의 의견을 듣는 게 좋겠네요.”
아쥬흐가 말했고, 아롱드와 아실 역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트랑카벨 가문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병력을 기르고, 요새를 보강하고, 작전을 세워 어떤 적이 와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병력? 트랑카벨의 병력이 얼마나 있길래?”
“현재 목표는 보병 4개 연대 5천과 기병 1개 연대 8백입니다. 각 요새 수비군은 제외한 숫자입니다. 더 늘릴 여력도 충분히 있습니다.”
내가 숫자를 담담하게 말하자, 병력의 규모에 두 백작은 놀란 모양이다.
“5, 5천··· 제법 많기는 하지만 평민들을 모아 머릿수만 채운 군대 아닌가? 저쪽은 블랑독을 탐내는 귀족들이 가신들을 직접 이끌고 올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보병은 모두 충분히 훈련받고 기강을 세운 장창병과 화승총병이며, 유기적인 병종간 협력 전술을 배운 정예군입니다. 기병은 전원이 화기로 무장한 중장기병이고요. 여기에 소수지만 최신예 야포로 무장한 포병 역시 포함됩니다.”
“요, 용병을 고용한 거요?”
“일부 용병을 고용하긴 했고, 앞으로도 고용할 예정입니다만, 대다수는 트랑카벨 영지의 백성들입니다. 모두 고향을 지킨다는 생각에 사기도 높고 충성스럽습니다. 용병보다 유지비도 적게 들어가고요.”
그 외에도 투자한 무기나 군사적 전통, 군사 인프라 등도 트랑카벨 가문에 남아서 장기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겠지.
두 백작은 내 말에 감명을 받은 건지, 나름의 계산 중인지, 그냥 말이 막힌 건지 잠시 조용해졌다.
“백작님, 백작님들. 저는 대리 사령관으로서 모든 힘을 다해 트랑카벨의 군대를 강화할 예정입니다. 단일 가문으로는 아마, 어떤 공작가도, 대귀족 가문도 뛰어넘는 군사력을 가지게 될 겁니다.”
“어, 어디서 돈이 나와서 말인가?”
“저도 최근에야 알았는데, 세금 거두는 것 말고도 세상에는 돈을 버는 방법이 많더라구요.”
내가 슬쩍 아쥬흐를 바라보자, 그녀 역시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뭐 여기서 ‘아쥬흐가 주식으로 대박 내서 떼돈을 벌어 왔습니다!’ 따위를 이야기해 줄 필요까진 없겠지.
“콘도티에레, 귀하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말이오, 우리의 협력 따위는 필요 없는 게 아니오?”
이번에는 가스텔 드 누아가 묻는다.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그렇기에 백작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호오, 어째서?”
“첫째로, 트랑카벨의 군대가 잘 훈련받고 현 트렌드를 따르는 강군이라고 해도, 숫자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우세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비슷하게 함께 싸울 아군이 필요합니다.”
“우리 병사들을 내놓으라는 이야기로군!”
라몽이 또 으르렁대자 가스텔이 말린다.
“또한 백병전에 뛰어난 전통적인 군대와, 화력이 뛰어난 트랑카벨의 군대는 좋은 시너지를 낼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아넥시 전투에서 그게 증명되기도 했네요.”
“아넥시! 그 전투 이야기는 나도 들었지. 그건 자네 개인의 무용이 뛰어나서 얻은 승리일 뿐 아닌가?”
“에··· 엣? 뭐라구요?”
아니 이건 또 시발 무슨 소리야 대체?
“자네가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첫 권총 사격으로 적장을 쓰러뜨리고,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마구 쓰러뜨리니 전열이 무너진 게 사실 아닌가! 나머지 병력은 그 뒤를 따라 굴러다니는 승리를 주웠다, 이거겠지?”
자기 말이 틀리냐는 듯,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은 라몽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붕어처럼 뻐끔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풋 하고 아쥬흐가 웃는 소리가 들리고, 가스텔 역시 쓴웃음을 짓는다.
아니 시발 뭔 나에 대한 황야의 총잡이 헛소문이 어디까지 가 버린 거야? 나중에는 내가 아주 단칼에 백명을 쓰러뜨렸다 이런 말 나오겠네?
“...그건 다소 과장이 됐군요. 아넥시 전투의 가장 큰 원인은 트랑카벨 기병대의 강력한 화력과, 인근에서 모인 귀족 기사대의 돌격이었습니다.”
라몽의 의기양양한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날리고 싶은 울컥하는 마음을 억지로 참으며 최대한 친절하고도 침착하게 말했다.
“뭐 내용은 알겠네. 그럼 두 번째는 무엇인가?”
이번에도 가스텔이 끼어들어 괴상한 분위기를 정리한다. 휴, 한 명이라도 말이 통해서 다행이네.
“배후지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있을 전쟁은 필연적으로 아군이 열세, 가끔은 공간을 주고 시간을 벌어들이는 전략이 필요해집니다. 이럴 때 병력을 물리고 나중을 준비하는 우호적인 지역이 필요합니다.”
이건 화약이 없는 시대에도 마찬가지인 전략이긴 하다. 요새 등의 거점을 지키며, 면을 포기하고 적을 소모하게 하는 전략 말이다.
“흐음··· 그리고 배후를 위협당하지 않는다는 점도 포함해서겠지?”
“...정확하십니다.”
내 입으로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드 누아 가문이 명백한 적이라면 그 방면으로도 병력을 투입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배후를 위협당하는 군대가 강할 리가 없다는 것은 진리다.
“트랑카벨 측의 말이 다 맞다고 해도, 자네 같은 애송이를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아, 이것만은 내가 어떻게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게, 나를 뭘 보고 믿으라고 하나.
“에트 경은 슈토르히라는 이름의 용병단의 단장이었습니다. 이후 주디칼리로 옮겨가 용병 대장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하더군요.”
가스텔 드 누아의 말이다. 심술보로 가득하게 보이는 라몽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진다.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 뭐야 이 너구리 같은 인간? 내 뒷조사를 했던 건가?
“모릴리에리에 친구가 살아서 말일세, 트랑카벨 가문이 새 용병 지휘관을 영입했다는 말을 듣고 조사를 좀 부탁했었다네.”
“네, 모릴리에리에서는 용병으로 고용된 적이 있습니다.”
“모릴리에리에서 자네의 명성이 대단하더군. 지루한 전쟁을 단번에 끝낸 명장이라고 말이야.”
“그건 전임자들 탓이 큽니다. 계속 용병료 우려먹겠다고 안 해도 되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눈치 없게 굴어서··· 도시 입장에서는 좋았겠죠.”
가스텔이 빙긋 웃는다. 아 또 뭐야 불안한데.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네가 고용되었던 모릴리에리와 적대했던 도시인 디에토에서도 자네의 평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일세.”
“그건···.”
“나는 이게 참 흥미롭더군. 보통 한 나라의 영웅이라면 적 입장에서는 악역일 텐데.”
“디에토가 지인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배려를 해 주다 보니···.”
아니 내가 왜 수세에 몰린 거지. 내가 딱히 숨겼던 이야기도 아니고 말이야. 그냥 나서서 말하고 다니지 않았을 뿐인데. 가스텔의 괴상한 기세에 괜히 긴장하게 되네.
“뭐 적어도 자네가 고용주나, 고용주의 동료들을 팔아먹지 않는 남자라는 것은 알겠더군.”
“하아··· 네 뭐 그건 그렇습니다. 계약은 지켜야죠.”
“뭐? 계약은 지켜야죠? 푸하하하하하!”
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내뱉은 말에, 가스텔이 웃음을 터뜨린다. 바로 뒤를 이어 아롱드가 웃음을 터뜨린다. 아니 뭐가 웃긴 거야, 노인네들끼리 통하는 웃음 코드라도 있나?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나는 이번 전쟁에서 트랑카벨 가문에 협력하겠소.”
한참 웃던 가스텔이 아롱드를 보며 말했다. 아롱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시한다.
“라몽 경은 어떻게 하시겠소?”
“나, 나는···.”
대화를 한참 지켜보고만 있던 라몽은 모두의 시선이 자기에게 모이자 당황한 것 같다.
“나는··· 조금 생각해보겠소···.”
“좋습니다, 라몽 공. 오늘 저녁 만찬에 참여하시겠습니까? 블랑독의 다른 영주들도 올 겁니다.”
“아니··· 괜찮소이다. 나는 홀로 생각할 일이 있어서.”
이상하게 눈알을 굴리는 라몽은 보기에도 좀 이상하다. 이 자리에서 귀족으로서 가장 등위가 높은 사람이고, 이론상 트랑카벨 가문의 상위 군주인데. 좀 더 당당하게 행동해도 되지 않을까.
“오드 군! 모리츠 군! 들어오게!”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오자, 라몽이 기겁하며 후드를 뒤집어쓴다. 인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나 모르겠지만.
“그럼 저는 저녁 만찬에서 뵙겠습니다.”
“나, 나도 가보겠소!”
두 백작이 접견실을 나간다. 한 명은 당당하게, 한 명은 불안하게 주변을 살피며.
어떻게 대화는 잘 마무리가 된 느낌이다. 그나저나 가스텔 드 누아, 그냥 너구리도 아니고 대왕 너구리 같은 인간이었다.
가능하면 아군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