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1화 (21/556)

5-6.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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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아아···.”

바람을 타고 서서히 흩어지는 흰 연기를 보면서, 용병 지휘관 하비에르는 비명도 아니고 신음도 아닌 소리를 흘린다.

조금 전까지 그가 지휘하던, 사각 대형의 한쪽 면을 이루고 있던 부하들이 싹 갈려 나갔다.

아직 승산이 있다.

어두워질 때까지만 버티자.

힘을 모으면 살아나갈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나갈 방법을 암중모색하던 것이 거짓말 같다. 애초에 전제부터가 잘못된, 헛된 희망이었다.

아,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었구나.

이걸 어떻게 이겨···.

하비에르의 머릿속을 절망이 가득 채웠다.

카라콜.

화기로 무장한 기병들이 순차적으로 적에게 접근해 화력을 퍼붓는 전술이다. 그 하비에르 역시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전술은 아니다. 오히려 교본이나 이론과 현실의 심각한 괴리를 보여주는 전술의 대표격이라고 할지. 아무튼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고, 사용된다고 해도 쉽게 파훼 되어 흐지부지, 일반적인 기동 전술로 바뀌는 것을 실제로 경험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쓸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조건이 너무 복잡하다. 기동성에서 우위여야 하고, 화력으로 견제를 받지 말아야 하며, 상대를 밀집 대형으로 고착시켜야 하는 등···.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상대의 카라콜에 ‘대응할 수도 있었던’ 기회를 오늘 하루 동안 전부 놓쳐 버렸다. 공성전을 준비하면서 상대의 기동 전력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며, 조바심에 마지막 예비대를 내보내 기동성과 화력을 차츰 잃어갔으며···.

다 떠나서, 적의 전력을 모르고 얕본 시점에서 이미 뭘 해도 패한 것이긴 하다. 당장 저 기병들이 말에서 내려 성벽에 배치되기만 했어도···.

뭐 그랬다면 이렇게 파멸적인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겠지만.

짧은 상념에서 빠져나온 하비에르의 눈앞에는 참혹한 현실만이 있었다.

“으아, 으아아!”

“살려줘··· 살려줘 제발!”

“눈이 안 보여! 엄마!”

“케엑, 켈룩, 크허억!”

사각 대형의 동쪽 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 중 서 있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수십 명이 배치된 자리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아직 살아있는, 아니 ‘덜 죽었다’가 걸맞은 비참한 생존자들이 동료들의 시체 위에서 기고 있었다. 바닥은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가 흘린 피로 흥건하다. 매캐한 화약 냄새 사이로 비릿한 피 냄새가 주변을 가득 채운다.

“흐어어··· 내 손···.”

왼쪽 팔목이 잘려 나간 병사가, 손가락 두 개를 포함한 오른 손바닥이 뜯기듯 잘려 나간 모습을 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크헉, 콜록! 컥!”

연달아 바닥에 피를 토하는 병사는 흉갑에 총알을 몇 발이나 맞았는지 왼쪽 옆구리 부분이 완전히 깨져 있었다. 거기서 흘러나온 내장이 바닥에 닿아 흙투성이가 되어있다.

“이 무슨··· 이게··· 전쟁?”

믿을 수가 없다! 이건 전쟁이 아니다! 평생을 용병으로 살아왔고, 최근에야 작은 용병단의 지휘관이 된 하비에르 바우티스타 푸에산토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크고 작은 전투를 15회 가까이 겪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도 두어 번 부딪혀 본 그로서도 이런 장면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400여 발의 사격이 좁은 공간에 퍼부어져 하얀 연기로 가득해 마치 안개의 벽이 생긴 것 같은 너머에서, 그것은 덮쳐왔다.

“흐아아악!”

하얀 연기의 벽 속에서, 갑자기 기사가 튀어나왔다.

크고 검은 근육질의 말과, 투구도 없이 위에 탄 기수의 검은 곱슬머리, 이마와 팔을 포함해 온몸에 둘둘 감긴 붕대, 창백한 얼굴에 초점 없는 작은 눈동자까지. 도저히 이 세계의 존재 같지 않았다.

그런 기사가 갑자기 피로 젖은 흰 천을 두른 창을 들고 돌진해오니, 하비에르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더듬더듬 허리춤을 잡아 칼을 뽑아 들었다.

게다가 기병은 그 혼자가 아니었다. 두 명, 세 명, 다섯 명, 열 명. 하얀 연기 속에서 자꾸 튀어나왔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블랑독에서 ‘이단 토벌’을 하면서 수도 없이 쓰러뜨렸던 기사들이다. 200년 전 과거의 늪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역사 속의 전사들.

또한 알게 되었다. 자신과 이 시대착오적인 기사들 사이에는 항상 있어야 했던 것이 없다.

바로 그의 용병들이 세운 창벽이다.

창벽만 있었어도···.

콰자작!

그의 흉갑이 강한 충격에 우그러드는 소리가 났다. 엄청난 충격이 복부에 느껴지고 허리가 홱 하고 뒤에서 당겨지듯 꺾인다.

“크헉!”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발이 허공으로 붕 뜬다. 눈앞으로 하비에르 자신의 부서진 갑옷 조각과, 부러진 기병창의 나무 조각이 떠오른다. 그 너머로, 무표정한 기사의 얼굴이 마주친다.

광대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말랐지만, 꽤 미남형의 얼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피부와 눈 밑의 심각한 기미 때문에 깨닫지 못했지만 아는 얼굴이었다. 기억났다.

얼마 전, 블랑독 여기저기서 약탈을 하며 기세를 올리는 그의 군대에게 도전해온 작은 봉건 군대의 기사였다. 무리하게 접근해오는 기사와 중보병들은 가뜩이나 몸집을 불린 하비에르의 용병대에 아무런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중에, 배에 총을 맞고도 거듭해서 돌격을 시도하다가 기절하고 동료들에게 끌려 도망쳤던 기사가 있었는데···.

그 기사가 돌아와 자신에게 창을 꽂게 될 줄은 몰랐다.

“크으으윽!”

뒤로 넘어져 등이 땅에 닿자, 하비에르는 아찔해지는 통증에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희미한 시야 속으로 자기 복부에 꽂혀 비죽 튀어나온 부러진 창끝과, 무심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기사의 얼굴이 보인다. 기사는 미련 없다는 듯, 하비에르를 찌르는 바람에 끝이 부러진 창을 옆으로 던지고는 칼을 뽑아 들었다.

주변에서 온통 무기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 비명이 난무한다.

가운데를 비워두고 사방을 향해 창병을 배치해 어떤 방향에서의 공격에도 대응하는 것이 장점인 사각 대형이다. 그런데 그 한쪽 면이 압도적인 화력에 싹 갈려 나갔고, 중앙부로 기사들의 난입을 허용해 버렸다.

부나방처럼 달려들다 창벽에 막히고, 일제사격에 줄줄이 죽어 나가는 기사들을 솔직히 우습게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술이 발전하고 화약 무기가 생기면서 기사들에 대한 대응 능력이 생겼을 뿐이지, 기사들이 걸어 다니는 흉기가 아니게 된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격차는 더 심해졌겠지.

하비에르는 속으로 자조했다.

이제 끝장났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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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중대는 포위해! 한 놈도 빠져나가게 하지 마!”

마브리엘의 외침이 병사들의 함성에 섞여서 들린다. 권총을 안장의 권총집에 되돌리고 다시 검을 뽑아 든 기병들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창병들의 사각 대형을 마구 짓밟고 있었다.

총 10개 열, 200기의 기병, 400정의 권총이 쏟아내는 카라콜 직후에는 사실 11번째 열이 있었다.

로베르 드 나뵈프 경이 이끄는 18기의 기병들이다. 우리가 로데브 강을 건너 블랑독에 오기 전에, 북부에서 있었던 작은 교전들의 패잔병들. 특히 그 지휘관인 하급 귀족 로베르 경은 복부에 총을 맞고 말에서 떨어질 때 머리도 다쳐서 의식 불명의 중상이었다. 아마 초월적인 의술을 가진 아쥬흐의 치료가 아니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더니 전투 전날에 갑자기 정신을 차려서는 나를 찾아와서 ‘버림패라도 좋으니 전장에 다시 세워달라’고 반 애원, 반협박을 하는 것이다. 뭐 성녀님의 부름을 받았다나 뭐라나.

몸 상태가 안 좋아지면 바로 열외한다는 조건으로 예비대로 투입했고, 카라콜이 끝난 직후에 무기를 바꿔 돌격할 때 선봉으로 세웠던 것인데··· 보다시피 복수는 원 없이 하는 것 같다.

총기병들이 만들어준 돌파구를 통해서, 본래라면 절대적으로 안전해야 할 공간인 사각 방진의 한 가운데에 무사히 배송되는 데 성공한 18기의 기사들은 인간 병기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일단 돌격의 기세를 유지하며 창부터 찔러 넣은 그들은 뒤늦게 반응하여 대응하려 하는 창병들을 말 그대로 갈아버리며 3/4쯤 남아있던 창병 방진을 그대로 끝장냈다. 뒤이어서 무기를 바꿔 든 트랑카벨의 제1 중대 기병들이 돌입한 시점에는 이미 대열이 완전히 붕괴하여 있었다.

이래서··· 화약이 판을 치는 세상에도 검술을 못 버리는구나 싶을 정도였다. 존나 무섭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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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괜찮으세요? 다친 분은 없나요?”

아쥬흐의 맑은 목소리와,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 항아리를 실은 수레 두 대가 도착했다. 아넥시에서의 전투가 드디어 끝났구나··· 실감이 난다.

나는 병사들에게 물을 한 컵씩 배급하고, 군마에게도 물을 먹이도록 중대장들에게 명령했다. 병사들이 신나서 줄을 선다. 그래, 이들은 물을 마실 자격이 있다.

“콘도티에레···.”

명령을 내리고 내려다보니, 갈색 머리의 소녀가 쭈뼛거리며 나에게 양철 컵을 내밀고 있었다. 흰 붕대가 가득 든 가방을 뒤로 맨 그 소녀다. 나는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컵을 받았다. 물이 제법 시원하다.

“고마워, 잘 마실게. 가방이 무겁지는 않니?”

“괜찮아요.”

소녀는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비쩍 마른 작은 몸으로, 자기 몸통만 한 가방에 천을 잔뜩 넣어 놓았는데 무겁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말라서 무릎이 툭 튀어나온 맨다리에는 온통 긁힌 자국이고, 발부터 발목까지 붕대가 감긴 모양새가 애처롭다.

“네가 에밀리아지? 밤새 아넥시로 뛰어와서 적 습격을 알려 주었던 거지?”

“네···.”

“덕분에 준비를 잘 할 수 있었어. 잘했어.”

“감사합니다···.”

“아넥시에서의 일이 잘 정리되면 포상금을 내려 달라고 트랑카벨 가문에 건의할게. 네 공이 정말 크니까.”

에밀리아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콘도티에레 에트! 다치신 데는 없나요?”

아쥬흐가 다가와 내 앞에 쪼그려 앉는다. 이제는 익숙해진, 피 칠갑이 된 품이 넉넉한 하얀 옷차림이다. 정들겠네.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저는 지휘만 해서, 피 한 방울 안 묻었네요.”

그렇지 뭐, 기병들이 이렇게나 잘 싸울 줄 모르고 괜히 고민하고 걱정해서 손해 봤다. 하, 머리를 너무 썼더니 피곤하네.

안심했다는 듯, 그녀의 얼굴

“그··· 기사들이 줄지어서 순서대로 총을 발사하는 그것 말이죠···.”

“아아, 그건 카라콜이라고 합니다. 권총으로 무장한 기병들의 전술 중 하나지요.”

“그거, 원래 그런 건가요? 막 펑펑 터지고 하는데··· 이런,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아쥬흐는 단어를 조심해서 고르는 듯, 잠시 말을 멈춘다.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 전에 조심하는 건 참 그녀의 좋은 점 중 하나이다.

“저···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기사 분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너무 부끄러웠는데···.”

아니 시발 그게 왜 부끄러워. 세상에서 제일 멋진 장면인데! 뭐, 나도 차마 입 밖으로 내놓지는 못하긴 하겠다마는. 지휘하느라 뒤에서 본 게 한이 될 정도구만! 이런 건 옆에서 라이브로 봤어야 했는데···.

“이런 지휘를 하는 콘도티에레 에트는 분명 대단하시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과찬이십니다. 기병들이 말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고 침착한 것이지, 제가 잘한 것은 딱히 없습니다.”

“후후, 저쪽에서는 기사들이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이 상상이 안 간다면서 콘도티에레 에트를 칭송하고 있던데요?”

그때 갑자기 우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오며 말참견을 한다.

“아쥬흐 영주영애께서 하시는 말씀이 맞습니다! 카라콜은 매우 실행하기 어려운 전술이죠! 콘도티에레께서 대단한 것이 맞습니다!”

“깜짝이야! 넌 왜 갑자기 끼어들어?”

“역시 그렇죠?”

아쥬흐가 왠지 나를 흘겨본다. 아니 왜 또···.

“저는 평생 자기 능력을 과장해서 말하는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을 간파하기 위해 고민하면서 보냈어요.”

입만 앞서는 사람들이 많지··· 나도 그런 인간들이 싫고, 그래서 똑같은 인간이 되기는 싫다. 과한 기대를 받아봐야 좋은 꼴은 못 보니까.

“그런데 어째서 콘도티에레 에트는 항상 자신의 힘을 숨기려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제가요? 아니 저는 딱히 그러지는 않는데요···.”

내가 힘숨찐처럼 보인다는 말인가! 아니 그건 아니지 솔직히.

“휴우,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네요.”

나도 아쥬흐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미소를 짓는 것 보면 잘은 몰라도 어떻게 대충 넘어간 것 같네.

“그런데 모리츠는 왜? 무슨 일 있어?”

“아, 방진의 적들 중에서 생존자가 있었습니다.”

치륜식 권총 400발의 총알이 휩쓸고 지나가고 곧바로 기병에게 짓밟혔으며, 요행히 어떻게 기병들 틈 뚫고 도망쳐도 민병대에게 잡혀 죽었을 거로 생각했는데··· 어떻게 살아남은 억세게 운 좋은 인간이 있었다.

아니,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만.

“제가 상처를 볼게요.”

아쥬흐가 몸을 일으키자 에밀리아가 곧바로 붕대 가방을 들고 보좌하듯 따른다. 그런데 모리츠는 좀 당황한 것 같다.

“네, 상처도 상처인데, 아마도 적 지휘관인 것 같습니다.

“아 그래? 그럼 얻을 정보가 있겠네. 그 개판 속에서 요행히 살아남았구나.”

“제가 보기에 상처가 좀 크긴 합니다!”

우리는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구역 옆의 간의 들것들이 놓여있는 장소로 갔다. 그래도 생존자가 한 열 명은 있네. 그런데 대부분이 중상으로 보인다. 멀쩡하게 도망치려던 인간들은 다 잡혀 죽고, 다쳐서 드러누운 인간들이 요행히 살아남은 모양이다.

이들을 살피던 아쥬흐가 말없이 팔을 걷어붙인다.

“나중에 아넥시 주민들의 손에 처벌을 받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살리기 위해 노력은 해 봐야죠.”

역시 의사답네. 나는 아쥬흐를 따라 신음하는 생존자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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