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5화 (15/556)

4-3. 기병대 출진

아넥시라는 이름의 이 마을은 굉장히 오래된 성벽을 두른 마을이다. 성벽의 형태로 보아, 현 거주민들이 쌓은 것은 절대로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오래전 대륙을 지배했던 아란 제국의 유적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요새였나? 그런 것치고는 성벽이 좀 낮은데··· 그냥 후방 안전한 곳에 만들어진 병력 주둔지였을지도 모르고.

아무튼 부드러운 연회색 돌로 쌓인 성벽은 적어도 수백 년은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은 듯,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몇몇 군데는 지탱하는 힘을 잃어버린 석재가 와르르 쏟아져 내려 돌무더기처럼 되어 있었다. 이래서는 공격자가 비탈을 타고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방어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구조의 마을이다. 성벽이 요새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한 대신 접근로가 제한된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언덕들 사이에 낀 마을? 한쪽이 열린 분지? 반대편은 어떤지 몰라도 이쪽에서 보기에는 그러네.

가까이 다가가자 성벽 위에 다닥다닥 붙어서 이쪽을 보는 사람들이 보인다. 숫자는 많아 보이는데··· 아마 전투원이 아닌 이들까지 구경한다고 올라와서 그렇겠지. 여기까지 불안함이 느껴진다.

“누구냐!”

성벽 위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까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왔지만, 다행히 화살은 날아오지 않는다.

“트랑카벨 가문에서 왔소! 이야기가 하고 싶소!”

나는 말고삐를 놓은 채, 두 손을 들고 외쳤다. 아, 별일 아니라고 하고 오긴 했는데 이거 등에 땀 나네. 뭐 날아오면 어떡하지···.

“꺼져라!”

“귀족 놈들 필요 없어!”

“돌아가!”

성벽 위가 갑자기 시끄러워진다. 오호라, 이거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일까···.

“여러분! 저희는 여러분을 돕고 싶어요!”

순간 아쥬흐가 외친다. 깨끗하고, 높지만 갈라지지 않으며, 멀리까지 전달되는 울림이 좋은 소리. 표현하자면 성악가 같은 발성이라과 해야 하나.

그녀의 목소리가 평원에 울리자 성벽 위가 조용해진다.

“잠시 이야기를! 아넥시를 돕게 해주세요!”

다시 성벽 위가 시끄러워지는데, 우리를 향한 외침은 아니다. 아마 자기들끼리 뭔가 떠들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그런데 아쥬흐는 그런 큰 소리를 내는데 어떻게 목소리가 안 갈라지지? 나는 고함지르면 째지는데 말이야. 하여간 재주도 많아.

2분 쯤 흘렀을까, 문이 빼꼼하고 열린다. 헝클어진 머리가 쏙 하고 나온다. 이거, 아쥬흐 없었으면 마을에 들어가지도 못했겠다.

“무, 무기는 없소?”

“없어요 없어. 다 놓고 왔습니다.”

나는 두 손을 들고 옆구리를 보인다. 아쥬흐도 나를 보더니 똑같이 따라 한다.

“들어오시오.”

우리는 다시 천천히, 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말을 몰았다.

반쯤 열린 문을 지나며 상대를 관찰한다. 낡고 지저분한 복장에 헝클어진 머리. 이런 협상을 주도할 신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푸석푸석한 얼굴과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은 최근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스트레스에 시달렸음이 분명해 보인다.

아넥시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성문을 통과하며 내부를 살핀다. 평범한 흙으로 바른 축축한 내부이다. 성벽이 꽤 두껍게 느껴진다. 반대편으로 나오자, 수백은 되는 사람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어···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한다고 했으나 반응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핏발선 눈과 시무룩한 표정이다. 다들 지치고 지저분한 게, 한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한 것 같다. 몇 명은 초라한 병사 복장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보통 마을 사람들이다.

그러고보니 각자 초라하지만, 무기며 방어구를 챙겨입고 있다. 누구는 투구만 쓰고, 누구는 흉갑만 입고, 손에는 식칼을 장대에 고정한 조잡한 창이며 아무리 봐도 전투용은 아닌 도끼나 낫이며.

와 이거··· 지금까지 포위된 성채를 방문했던 적이 몇 번 있지만,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인데. 심지어 이 마을은 아직 포위도 안 된 상태잖아! 왜 이렇게 문을 틀어막고 똘똘 뭉쳐서 외부 통로를 막고 있었던 거지?

“혹시 영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떠났소.”

방금 문을 열어준, 헝클어진 머리의 남자가 말했다. 아마도 그가 이 아넥시의 주민의 대표 역할이 되어 이끌고 있는 모양이다.

“성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호위병들을 이끌고 떠났소. 벌써 열흘이 넘게 지났소.”

“음, 혹시 적을 맞서 싸우러 출정하신 것은···.”

“그런 자가 자기 가솔만 챙겨서 호위병만 데리고 떠난다는 말이오! 그자는 도망쳤어! 도망쳤다고!”

남자가 내 말을 끊으며 외치자 군중 사이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남자의 말을 긍정하는 듯하다. 여기저기서 무기를 부딪쳐 내는 시끄러운 소리.

그랬구나. 이들은 평소 자신들이 섬기던 영주에게 버림받았다. 아마 평소에는 그렇게 나쁜 영주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배신감을 느끼는 것일 테지. 버려진 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똘똘 뭉쳐 무장을 했을 테고.

이걸 어떻게 풀어나간다.

“여러분, 저는 의사입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아쥬흐가 말에서 내리며 말한다.

“마을에 병원이 있나요?”

적대적인 분위기가 갑자기 사그라진다. 주민들이 서로 얼굴들을 돌아보더니, 안쪽으로 향하는 길을 만든다.

“저는 잠시 환자들을 봐 주고 올게요. 책임자분을 찾아서 이야기를 나눠 주세요.”

“알겠습니다.”

와 아쥬흐 덕에 살았다. 이런 게 임기응변이지.

“무슨 말씀인지 약간은 알겠습니다. 저희는 아넥시를 약탈자들에게서 지키려고 왔습니다. 이름을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루옹이라 부르시오.”

루옹과 나는 성문 근처에 있는 초소에 마주 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상대로 아넥시 영주는 평소에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포도주 생산으로 제법 벌고 있었고, 그 수익을 주민들에게도 나눠주고 세금을 낮춰 주는 등, 오히려 좋은 축이었겠지. 하지만 정순파 문제로 블랑독에 파문이 걸리고 이단 토벌령이 내려지면서 사람이 변했다고 한다. 몹시 초조해하고, 주민들을 정순파가 아니냐고 의심했다고 한다. 몇몇 마을이 약탈당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가족들만 데리고 도망친 것이다.

음··· 그런 얼간이 귀족들이 의외로 제법 있다. 이 시대의 영주라는 것은 정치와 경제, 군사를 총괄해야 하는 역할인데, 그중에 뭐 하나, 혹은 하나 이상이 빠지면 문제가 생기는 거지. 아넥시 영주의 경우는 군사가 빠졌겠고.

그렇게 버려진 주민들이 나서서 마을을 지키려고 했는데, 이틀 전 새로운 소식이 왔다는 것이다.

“여자애였는데, 맨발로 며칠을 달려온 모양이었지 뭐요··· 완전히 빈사상태였는데, 들어보니 가족들이 약탈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거지... 불쌍하게도.”

“저런···.”

“무슨 사제인가 하는 인간이 와서 재판한답시고 이단으로 몰면서 사람들을 죽였다는데 진짜 이단 토벌군이 오는 거요?”

“빠르든 늦든 그러리라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사제의 이단 재판이라니, 처음 듣는 정보다. 드 말리크 가문의 생존자가 전해준 기존의 약탈 소문이나 내가 겪었던 리니 능선 전투에서도 이단 재판을 하겠다고 나대는 미친놈은 없었다. 법황청에서 파견한 이단 토벌군의 본대가 도착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니 우선 기억해둬야지.

“그리고 그 소녀가 약탈자 무리의 다음 목표가 여기, 아넥시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네? 혹시 그 소녀가 언제 도착했습니까?”

“어젯밤 늦게 도착했는데 그건 왜··· 에그머니!”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탁자가 밀쳐지자 놀란 루옹이 진저리를 쳤다. 미안하지만 사과할 틈이 없다.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아넥시를 지키려면 제 말을 따라 주십시오.”

“에? 어··· 그···.”

“마을 사람들을 모아 주십시오. 그리고 전령을 보내 성 밖에 대기 중인 기병들을 불러 주십시오.”

“에에? 에···.”

“부탁해도 될까요?”

“에? 네, 그렇게 합지요.”

내 말을 들은 루옹이 후다닥 뛰어나간다. 망할, 이걸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할지.

약탈하는 군대는 지금까지 빼앗은 약탈품도 있을 테고, 주변의 다른 마을들을 들러 ‘재미를 볼’ 수도 있으니 행군 속도가 느릿느릿할 것이다. 여태까지의 쉬운 승리와 전리품들로 기강이 해이해졌을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잠 자는 것도 잊고 달려온 소녀보다 행군속도가 늦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닐 것이다. 아주 잠깐의 차이, 방어 준비를 해야 한다. 어떻게 하지? 뭐부터 하지?

나는 계단을 따라 성벽으로 올라갔다. 성벽은 정말 수 백 년 동안 비바람을 맞은 흔적이 역력하다. 올라가는 계단도 닳고 닳아서 이게 울퉁불퉁한 비탈인지, 계단인지.

성벽 위로 올라가자 몇 명 있던 수비병들이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본다.

“성에 수비병은 몇 명인가요?”

“그게··· 한 서른 있기는 한데 진짜 군인들은 아니고요··· 마을 남자들이 번갈아가면서 지키고 있습니다.”

“책임자는 없겠네요?”

“네 그렇죠 뭐. 수비대장은 영주 도망갈 때 같이 가버렸어요.”

초췌한 병사들의 얼굴에서 절망과 체념이 느껴진다.

“지금 오는 기병들은 아군입니다! 쏘지 마세요!”

트랑카벨의 기병들이 성벽으로 접근하자, 당황한 병사들이 활을 들려 하길래 서둘러 막았다. 병사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내 지시를 따른다.

성벽 아래 어딘가에서 시끄러운 종 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사람들을 모으는 소리겠지.

성벽에서 가장 높은 망루 위에 올라가 도시 전체를 살펴본다. 밖에서 보았던 대로, 두 개의 언덕 사이에 낀 도시는 방어하기에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언덕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벽은 비록 낮지만 아무 장비 없이 오르기에는 힘들어 보이고, 이쪽 정문이나 반대편의 좁은 문 말고는 출입구는 없는 것 같다.

“성벽에 문이 몇 개나 있나요?”

“여기 큰 문이랑, 반대편에 쪽문이 있어요.”

병사들이 대답해준다. 예상대로다.

“기병들이 모일 만한 장소가 있습니까? 넓은 광장이라거나.”

“중앙 광장 아니면, 쪽문 쪽에 공간이 좀 있어요. 원래 포도주 팔러 갈 때 거기다 물건을 부려놓고 마차에 싣거든요.”

“아, 알겠습니다.”

아 생각해보니, 마을 사람들이 모이면 이쪽으로 모일 텐데, 기병들도 불러놔서 장소가 좁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별로 넓지도 않은 공간에 기병들이 꽉꽉 들어차서 난리다.

“미안하지만 서둘러 줘! 얼른 들어와서 문 닫아!”

나는 성벽에서 아래쪽으로 고함을 쳤고, 결국 미어터지는 와중에 몇몇 사람들이 거리 안쪽으로 들어가고서야 200명의 기병을 전부 마을 안으로 들일 수 있었다.

“여러분, 저는 트랑카벨의 지휘관 에트라고 합니다. 갑자기 나타나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조만간 약탈자들이 이 마을을 습격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부족합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방어를 준비해야 합니다.”

“적이 언제 쳐들어오는데요?”

“이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로 예상합니다.”

웅성거림이 더더욱 심해진다.

“트랑카벨! 남쪽의 돼지들! 믿을 수 없어! 우리를 방패로 쓰려는 거지?”

누군가의 외침에 동조하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시끄러워진다. 꺼지라느니, 못 믿겠다느니 하는 외침. 확실히 트랑카벨의 이미지가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아넥시의 주민 여러분!”

나왔다, 비장의 카드가. 높지만 맑은 목소리. 아쥬흐의 외침이다.

“저는 아쥬흐 트랑카벨, 트랑카벨 가문의 장녀입니다.”

시끄럽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사람들 사이를 뚫고 앞으로 걸어 나오는 아쥬흐의 주변에 사람이 만든 작은 원이 생긴다.

“저분은 저희 가문의 대리 사령관, 콘도티에레 에트입니다. 부디 말씀을 들어 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이어서 선언하듯 말한다.

“이번에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저는 아넥시에 머물겠습니다. 그게 트랑카벨 가문이 여러분께 보여 드리는 진심입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다. 숙연한 분위기. 하아, 이게 타고난 고귀함이자, 귀족의 품격이구나. 내가 저런 소리 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고귀한 신분의 그녀가 피할 수 있는 위험을 마다치 않고 버림받은 아넥시 주민들 사이에 자리하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후우··· 솔직한 마음으로 그녀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 전쟁에는 항상 만약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호위를 붙여 카르카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이제 와서 그러자고 하는 것도 코미디겠지.

“아아 완성자님···.”

어?

“완성자님··· 완성자님!”

“완성자님이 오셨어···.”

웬 할머니가 아쥬흐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는다. 그 할머니를 시작으로, 갑자기 그녀 주변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물결처럼, 퍼져 나간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방금 나와 이야기하던 성벽 위의 무장한 병사 중에서도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는 이들이 나온다. 아니 니들은 그러면 안 되지··· 경계 근무 서야 하지 않아?

이런 것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완성자님··· 저희는 완성자님을 따르겠습니다.”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다.

“이, 이러지 마세요, 여러분.”

아쥬흐가 당황해 하며 사람들을 말리려 하지만, 자신의 손에 손끝이라도 닿으려 하고, 신발과 발자국에 입 맞추려는 사람들을 쳐내지는 않는다.

문득 이 세계 종교에 대한 쓸데없는 내 지식 꾸러미에서 ‘완성자’라는 용어를 끄집어낸다.

완성자.

정순파의 신도들이 따르는 인도자이자, 덕을 쌓아 높은 위치에 도달한 이들을 말한다. 법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 조직이나 성자 시성을 부정하는 정순파에게 있어, 사제 역할이자, 시성된 성자나 성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주신교 신앙의 핵심 요소가 높은 곳에 계신 존재가 낮은 곳에 임하여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이니···.

생각해보면 완성자가 맞네, 우리 아쥬흐 아가씨는. 이런 귀족이 또 어디 있겠어?

이러면 안 될 것 같기도 한데, 주민들 사이에서 쩔쩔매는 그녀를 보니 괜히 웃음이 나온다. 아, 물론 조롱하는 웃음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아빠 미소에 가깝지 않을까.

“콘도티에레! 갑옷 가지고 왔습니다!”

“오, 고맙다 모리츠.”

나는 주섬주섬 갑옷을 챙겨 입는다. 그러는 와중에,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 모래먼지가 일어난다.

“모리츠 저거··· 적 맞지?”

“맞습니다.”

그가 굳은 얼굴로 대답한다.

시간 계산이 대략 맞았네. 적이 도착했다. 하아... 조금 긴장된다. 괜히 오줌이 마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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