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타오르는 블랑독
콘도티에레.
주디칼리에서 쓰이던 용어로 단순하게 용병대장을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용병을 운용한다고 콘도티에레를 자칭한다면 웃음거리가 된다.
왜냐하면 주로 어느 국가나 지역의 대리로 군권을 위임받아 전쟁을 대리하는 ‘대리 사령관’의 의미로 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전쟁 아웃소싱이다. 계약 조건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지만, 자기가 주관한 전투 혹은 전역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율권을 가지게 된다.
트랑카벨 가문에서 내가 받은 권한은··· 거의 무제한이다. 한번은 현재 가문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아쥬흐에게 물은 적이 있다.
“제가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데요. 이러다 혹시 제가 용병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합니까?”
“그게 ‘우리의 승리’에 도움이 되나요?”
“아뇨···.”
“아하, 그거 아쉽네요.”
괜한 질문을 하고 바로 카운터에 된통 얻어맞고 찌그러진 나를 의기양양한 미소로 바라보는 트랑카벨의 장녀. 역시나 괜한 뻘소리 했다가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반란은 언감생심 바라지도 말아야지.
우선 중요한 것은 병력 확충이다.
트랑카벨 가문 소속의 영토와 동맹 영주들의 영토에 모병령을 내렸다. 그리고 가문에 대한 의무로 소집된 봉건 군대 소속의 병력들에게 전환 훈련을 수행하도록 명했다.
모든 기병은 치륜식 권총이나 기병총 쓰는 법을 배워 총기병으로 무장해야 한다. 갑옷 역시 될 수 있는 대로 신품을 지급할 예정이다.
보병 역시 기존에 쓰던 재래식 무기를 버리고, 적성에 따라 창병과 총병으로 전환 배치한다. 쇠뇌와 활은 사용하지 않거나, 요새 주둔군 등 2선급 예비 무기로 배치한다.
당연히 불만이 장난 아니었다. 특히 기병이 창을 버려야 한다는 말에 폭동이 나올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전히 마상 창시합 대회가 열리는 시대이고 기사의 자존심이자 소양으로 평생 창을 수련해온 이들에게 창을 버리라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바꿔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리니 능선 전투에서 트랑카벨 가문의 기사들이 혁혁한 전공을 세웠었으니까. 전통적인 중장기병들이 적 기병들을 순식간에 쓸어 버리고 보병들의 퇴로를 차단하며 완벽한 승리를 견인했던 것은 사실이고. 이 사건으로 톨마르 경은 가신들 사이에서 영웅이 되었다.
그래도 안 된다. 이들은 창병과 총병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소중한 기병 전력을 그렇게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평지에서 적 총병에 노출되는 안타까운 상황이나, 결국 장창방진 때문에 기동력이 묶이는 상황도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천적에 가까운 병종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나는 그룬발트 제국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기병전을 이야기했다. 두 선제후 간에 벌어진 전투로, 한쪽은 대부분이 전통적인 기사 계급 출신의 중장기병으로 이루어진 6천 명의 전력, 나머지 한쪽은 권총 2자루로 무장한 흉갑 총기병을 주력으로 한 4천 명의 전력이다.
2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수적으로 유리했던 선제후군은 무리한 돌격 끝에 무려 4천명의 병력을 잃고 지휘관까지 전사해 완전히 붕괴해 버렸다. 그에 비해서 상대 측의 사망자는 600명 정도로, 완벽하게 승리하고 후속하는 보병들 역시 압박하여 퇴각하게 만들었다.
내 설명을 듣자 반발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그래도 불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여기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은 것은 리니 능선 전투의 승장 본인, 노기사 톨마르 마슈레 경이었다. 이미 내 권유로 권총 다루는 법을 배우고 있던 그는 능숙하게 표적을 맞히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폭발 직전의 기사들도 ‘톨마르 경이 그러시다면야’ 하면서 수그러들었다.
정말 다행이다 다행.
뭐, 상대적으로 보병들은 반발이 적은 편이었다. 싸우는 방식이 많이 달라지기는 하겠으나, 보조무기를 자유롭게 하나씩 가져와도 된다고 허락했기 때문이다. 뭔가 양손 검이나 양날 도끼 같은 엄청난 무기를 등에 이고 다니는 창병이나 총병 장교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는 각각 알아서 할 일이지.
활이나 쇠뇌를 다루던 이들은 익숙한 무기를 놓는다는 점에 불안을 느낀 듯했지만 ‘원래 활 잘 다루던 이들이 총도 잘 쏘더라’는 내 말에 조금은 안심한 듯하다.
전체적으로 이들을 교육하면서 느꼈던 가장 특이한 점은 이들이 전체적으로 가지는 트랑카벨에 대한 높은 충성심이다. ‘밖에서 굴러들어온 용병 나부랭이’인 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닦달하던 인간들이 아쥬흐나 아실이 나타나면 갑자기 순한 양이 된다.
하긴, 나도 그룬발트며 주디칼리를 전전하며 온갖 개쓰레기 같은 귀족들을 보아 왔으니, 트랑카벨 남매 정도면 성군이 따로 없긴 하겠지.
그래도 이 망할 인간들아,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남매를 속여 군권을 가로챈’ 인간으로 모는 것은 좀 심하지 않냐!
안그래도 어차피 할 계약, 괜히 삼고초려 시켰다고 미안해하고 있었구만···.
“저와 아쥬흐 누님은 에트 경, 아니 콘도티에레를 전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콘도티에레에 대한 공격은 트랑카벨 가문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나에 대한 험담을 들은 아실이 평소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화를 내서 가신들을 침묵시켰다. 문가에서는 아쥬흐가 아빠 미소를 지으며 동생과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덕분에 교육을 어떻게든 이어 나가고 있다.
“콘도티에레께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그래도 모두 충성스럽고 좋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보증할게요!”
“믿어요, 당연히 믿지요.”
열심히 사과하는 아실을 보면, 왠지 나 역시 아빠 미소가 나올 것 같다. 아마 그가 후방에 듬직하게 서 있기만 해도 모두가 배는 용감하게 싸우게 할 것이다. 타고난 귀족이자 타고난 지휘관이라 해야겠지.
“남아주시기로 해서 정말 기뻤습니다! 에트 경 없이 어떻게 새 군대를 이끌어 가야 할지 막막했거든요! 그리고 저도 총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아, 내가 이 남매를 두고 어디를 가려고 했던 거지. 반성하게 된다.
리니 능선 전투의 승장인 아실이 부대를 이끌고 귀환했으나, 예정되어 있던 개선식은 며칠 미루어진 상태이다. 기왕이면 블랑독의 제후들이 모였을 때 보여주는 편이 좋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날을 위해, 아실과 제10 카르카냑 연대, 제11 벨모제 연대의 병사들은 휴식과 훈련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아실이 훈련장을 떠나고 나자, 아빠 미소를 짓던 아쥬흐가 다가와 슬쩍 이야기한다.
“북방 전쟁의 종전이 확정되었네요. 엘랑키아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했어요.”
“역시 정보는 진짜였습니까···.”
“팔자에도 없는 주식 부자가 되었네요, 후후.”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나라도 썩 유쾌하지는 않을 것 같다.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할 수 없다니.
“이제 시간 승부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요? 석 달? 반년?”
“브와이유나 타비뇽에 정보원을 보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이유는?”
“왕이 병력을 소집한다면 두 곳 중 하나일 겁니다. 블랑독으로 진군하기 딱 좋은 도시들이네요.”
“알았어요. 정보가 들어오면 바로 알려 드리죠.”
가슴이 두근거린다.
대부분은 두려움과 걱정 때문이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이렇게 말하면 쓰레기 같지만, 기대감이 분명하다 자각하고 있다.
악독한 폭군의 대군에 맞서 선량한 이들의 작지만 강한 군대를 이끌어 싸운다.
한 나라의 군대를 편성부터 지휘까지 전권을 가지고 바닥부터 만들어 간다.
일단 겉보기에는 아름다운 공주를 지킨다···.
뭐 이런 로망들 덕분인지, 빌어먹게도 전쟁이 기대되고 있다 이 말이다.
그렇게나 전장에서 멀어지고 싶었는데···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지만 이제는 나도 나 자신을 못 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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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랜만의 바다 냄새를 맡으며 부두를 걷고 있었다. 부두에는 멋지게 생긴 범선이 몇 척이나 배를 대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대체 모터도 안 달린 배를 어떻게 이리 육지에 바짝 붙여서 세우는 거지··· 정말 뱃사람들이 대단해 보인다.
물론 놀러 온 것은 아니다. 엄연한 공무 때문, 트랑카벨 가문이 발주한 무기들이 도착해서 하역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쥬흐는 어차피 대리인들이 잘 처리할 테니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했으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품질 체크를 직접 하겠다 말했다.
현실에도 그렇지만, 이 세계에서도 군납에는 비리가 많다. 촉이 빠지는 창을 납품했다가 분노한 용병들에게 맞아 죽은 용병단 재무관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하물며 트랑카벨의 무역 대리인들은 포도주에는 전문가일지 몰라도 무기에는 완전히 문외한인 사람들이잖아.
우선은 총들을 점검했다. 화승식 소총 800정과 치륜식 소총 450정.
“화승총은 벤도테네 공방에서, 권총은 체데나 공방에서 만들어진 최신품입니다! 특히 치륜식 기어에는 최신 공정이 적용되어서···.”
싱글벙글 웃는 납품업자는 대머리에 말쑥한 주디칼리식 정장을 차려입은 덩치 큰 남자였다. 나는 소개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무작위로 상자를 열어 총을 몇 개 꺼냈다. 완충제로 들어있는 지푸라기를 헤치자 안에서 기름종이에 싸인 총기가 나온다. 으음, 새 물건 특유의 기름냄새가 독특하다. 이게 은근히 중독성 있다니까.
“이 제품에서는 화문 개방에 들어가는 단계가 하나 줄었습니다! 테스트 사격 당시 기록에 의하면 불발률이 현저히 줄었다 하네요!”
오, 정말이다. 확실히 내 총보다 좋아 보이는데. 물질을 다루는 공업계열 기프티드인 아키텍티들의 노력 덕에, 정말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 다 같은 총 같지만, 기능을 하나하나 뜯어보자면 분명히 다르단 말이야.
“훌륭하네요. 아주 좋은 총기들입니다.”
“감사합니다! 하핫!”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총기를 이리저리 다루는 나를 보던 남자가 그제야 활짝 웃으며 이마의 땀을 닦아낸다.
“콘도티에레, 이건 믿음의 증표로 드리는 물건입니다. 앞으로의 거래도 잘 부탁드립니다.”
남자가 품에서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인 물건을 꺼낸다.
“음, 선생님의 물건은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고용주께도 그렇게 말씀드리고, 이런 것을 주시지 않아도 다음 발주는 드리려고 했는데요.”
“어이구, 그런 의도로 드리는 물건이 아닙니다. 저희 회사에서 관례적으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나는 물건을 받아 천을 벗긴다. 안에서 짙은 갈색 나무로 된 권총 손잡이가 나온다.
“저희 쪽 장인이 신경 써 만든 총입니다. 명품입지요.”
“오호···.”
확실히 단순한 공산품에서는 보이지 않는 뭔지 모를 아름다운, 장인의 고집이 느껴진다. 솔직히 나도 이런 건 잘 모르고 살았었지만, 이렇게 손이 많이 들어가는 무기류는 이름 있는 장인이 만든 물건이 확실히 이름값을 하더라.
아··· 가지고 싶은데, 이거 내가 먹으면 직권 남용 아닌가? 뇌물 수수 이런 거 아님?
“저희가 드린 물건에 결함이 있다면 저를 찾아오셔서 이 총으로 저를 쏘셔도 됩니다!”
“아니··· 너무 쉽게 목숨을 버리시는 것 아닙니까? 원래 총기라는 게 수시로 고장도 나고 할 텐데요.”
“푸하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처음이네요. 물론 불가항력적인 고장은 어쩔 수 없지만, 사기꾼들이 팔아먹는 그런 물건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의지 표시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뭐 받아 두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아쥬흐나 아실도 자기 총기가 필요하겠지··· 나중에 가져다주도록 하자. 내가... 가지고 싶지만... 난 이미 총이 두 자루 있으니까... 필요 없어, 응응.
다음으로는 갑옷과 투구를 확인하러 간다. 마침 무역선에서 나무 상자를 수도 없이 내리고 있었다. 이번 군납업자는 키가 작고 비쩍 마른 사람이네. 깔끔하게 꾸미고 다니기는 하는데 뭔가 관상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편견은 가지지 말아야 하겠지만···.
“주디칼리 북부 최고의 공방에서 만들어 낸 갑옷입니다! 분명 만족스러워하시리라 믿습니다. 여기 방탄 표식 보이시죠?”
워낙 총기가 판을 치는 시대이다 보니 투구와 흉갑은 방탄성능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아키텍티들이 개량을 거듭한 덕에, 이 세계의 철강은 수준이 상당해서 갑옷의 방탄성능 역시 상당히 발전한 상태이다.
100벌의 기병용 퀴레이스 갑옷 세트와 100벌의 창병용 갑옷 세트. 퀴레이스 갑옷은 팔을 포함한 상체 전부와 허벅지를 덮는 견고한 갑옷이다. 창병용 갑옷은 흉갑과 허벅지를 덮는다. 어차피 온몸을 방탄 성능을 가진 철갑으로 덮을 수는 없기에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봐야 한다. 수백 년 동안, 전장에서 많은 시도를 한 결과가 이런 형태이다.
나는 이번에도 무작위로 상자를 열어, 흠집 하나 없이 반질반질한 흉갑 하나를 꺼내 든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잘 닦인 갑옷에는 송곳으로 찌른 듯한 자국이 하나 있다. 이게 바로 방탄 표식으로, 실제로 총을 쏴서 튕겨내는 시험을 통과했다는 증명이다.
...증명이긴 한데, 여기 문제가 있다. 일부러 화약의 양을 줄여 비실비실한 총을 쏴서 ‘총 맞은 흔적’만 내는 사기꾼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방탄 시험, 직접 해봐도 괜찮죠?”
“에엣? 하, 하지만 저희가 제작 공정에서 미리 했는데요···.”
“그럼 더 문제없겠네요.”
나는 미리 준비한 모래를 채운 밀가루 포대를 이용해 흉갑을 고정했다. 그리고 열 걸음 떨어진다. 이 이상 가까운 거리에서도 방탄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지. 화력이나 관통력이 떨어지는 권총으로 이 거리에서 도탄이 나온다면, 화력이 더 강한 소총을 적절한 거리에서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뚫릴 때는 뚫리지만.
장전된 권총을 꺼내서 약실을 체크한다. 장전 상태는 괜찮다. 이번에는 손목을 체크한다. 다행히 요즘 수전증이 많이 호전됐다. 이 정도면 뭐.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태엽이 풀리고 톱니 바퀴가 돌아가며 황철광을 긁어대는 요란한 소리 직후에 화문에서 확 하고 불이 일어난다.
타앙!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표적 뒤에 흙먼지가 일어났다. 그저 그것뿐이다.
아니 시발 세상에 이걸 못 맞혔네. 쪽팔려 쪽팔려 쪽팔려···. 아 진짜 수전증 때문에 용병 안 한다는데 누가 억지로 시켜서 정말 솔직히 손이 제 혼자 떨리는데 총을 어떻게 쏘냐구요 아···.
심각한 쪽팔림으로 뇌까지 흔들리는 와중에, 하나 남은 장전된 권총으로 표적을 쏠까 내 머리를 쏠까 고민하는 찰나···.
타앙!
표적인 흉갑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다.
손가락이 두 개 정도 들락거릴 정도의 크기. 전형적인 납탄이 뚫고 지나간 자국이다.
뭐야 누가 쐈어?
“콘도티에레! 여기서 뵙는군요!”
누군가가 나를 강하게 끌어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