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타오르는 블랑독
그냥저냥 대치나 하고, 소규모 교전이나 하면서 어영부영 시간이나 보내면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전쟁이, 자칫하면 엘랑키아 왕국 전체를 상대로 하는 전쟁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불안해 죽겠는데, 아쥬흐는 의외로 태연한 표정이다. 방금 전의 표정도 그렇게 불안한 표정만은 아니었고··· 설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에트 경, 엘랑키아 왕가가 성전에 참여할까요?”
아쥬흐가 묻는다.
“정순파니 이단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겠지만, 반드시 참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 국왕 다고베르 2세는 왕권 강화에 집착하고 있거든요.”
“북방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됐는데도요?”
“시간이 잠시 있겠지만··· 길어야 6개월이라 생각합니다.”
“어째서인가요?”
“이번은 이겼지만, 엘랑키아의 외교 상황은 완전히 최악이거든요. 나우데사 연방이나 그룬발트 제국을 묶어둔 지금이 내부를 통합할 기회니까요··· 블랑독 지방은 또 다른 큰 적인 라솔 왕국과의 국경지대기도 합니다.”
나는 벽에 걸린 지도를 내려 이리저리 돌려가며 설명했다.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요?”
“아뇨, 그건 어렵습니다.”
“그럼 에트 경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세요?”
“항복··· 한다면 트랑카벨 가문의 영지는 거의 몰수되겠지요···.”
다고베르 2세가 노리는 것은 왕실 직할령의 확장이니까. 레뮤즈 백작가 처럼 전통있는 대귀족이 아닌, 최근 300년 정도 변방에서 세력을 키워 성장한 ‘근본 없는’ 가문의 종주권을 인정할 리 없다. 기껏해야 시골 영지 하나 정도 남겨주고 나머지는 직할령으로 빼앗아 가겠지.
“그리고 정순파 신도들은··· 학살 당할 겁니다.”
정순파가 뭔지 정확히는 모른다. 그냥 현 법황청의 권위와 조직을 부정하고, 나름의 소박한 전통을 만들어 살아가는 이들이라고밖에. 적어도 이들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 의의를 부정당한 법황청의 머저리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지.
“할아버님께서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가문의 땅에 살며, 블랑독의 문화와 법을 존중하고 의무를 진다면 트랑카벨의 백성이라고요.”
아··· 아실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게 아롱드 영감님이 해준 말이었구나···.
“그러면 항복은 기각이겠네요.”
나는 무심코 씨익 웃었다. 항복할지 말지 결정을 못 하고, 죽지 못해 싸우는 상황은 괴롭다. 정말 사무치도록 괴롭다. 차라리 싸운다는 방침을 명확히 하는 편이 낫지.
“자, 군사 고문 에트 님. 무리라는 것은 알지만, 싸워서 승리하려면 어쩌는 것이 좋을까요?”
아쥬흐가 탁자에 두 손을 얹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으음··· 이 자세는··· 가슴이 두드러져서 좀 부담스럽지만···.
“승리··· 라는 단어를 정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와중에도 한군데로 모이려 하는 눈알을 억지로 끌어 올리고 대답한다.
“침입해오는 엘랑키아 왕실군이 포함된 성전군을 전멸시키고 완전한 군사적 성공을 거둔다? 이건 어렵다고 봅니다.”
아쥬흐는 조용히 듣고만 있다.
“현재 우리에게 ‘승리’라고 하면 적군을 괴롭히면서 지엽적인 전과들을 늘리고, 아군의 중요 거점들을 지켜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얼마나 그래야 할까요?”
“1년에서 2년을 봅니다. 아무리 배상금을 받았다 해도 북방전쟁 직후, 왕실군 역시 군비가 넉넉하지는 않을 겁니다.”
“지쳐서 성전을 포기하는 영주들도 나올 테고요?”
“맞습니다. 아무리 신앙심이 강해도 거덜 나는 가산을 두고만 보긴 힘들겠죠.”
아쥬흐는 내 표현이 재밌는지 킥킥대며 웃는다. 그런데 역시 뭔가가 이상하다··· 왜냐하면 파산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아군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어찌 보면 절망적인 상황인데, 그녀의 태도에서는 어딘가 여유가 느껴진다.
“저··· 뭔가 숨기고 계시는가요?”
“숨기다니요?”
“북방 전쟁 강화 소식처럼, 다른 소식통이 있으신 게 아닌가요?”
“후후··· 어떨려나요.”
이건 분명 뭔가 있구만. 아쥬흐가 책장으로 가더니 뭔가를 꺼내온다.
“이게 뭐죠?”
두꺼운 상자 안에는 깨알같이 글자가 적힌 종이가 여러 장 들어 있다. 비싸 보이는 종이에 여러 가지 색이 들어가고, 중간중간 도장에 봉인에··· 굉장히 격식을 갖춘 것이 중요한 문서 같긴 한데 정체를 모르겠네. 생전 처음 보는데 이게 뭐지 대체.
“나우데사 연방 소속 해운회사 일곱 곳의 주식이에요.”
“주식이요?”
이게 무슨 소리야. 주식? 내가 아는 그 주식 맞나?
“그··· 회사의 권리를 사는 주식 말씀입니까?”
“오호, 에트 경은 상당히 유식하시네요.”
아쥬흐는 정말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한다. 아니 뭐, 전생자니까··· 주식을 잘하지는 못해도 뭔지 정도야 알지. 잘하지는 못해도···.
“앗 잠깐, 나우데사의 해운회사 주식이라면··· 전쟁이 끝나면 폭등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겠죠?”
“어, 얼마짜리 채권입니까?”
그녀는 말없이 장부를 내민다. 장부에는 엄청난 금액과, 주식 보유량이 두 페이지 가득 쓰여 있었다.
“예상 수익률··· 은 얼마인가요?”
“글쎄요. 최소 20배? 최대 60배 까지 보고 있어요.”
“....”
나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입이 한계까지 벌어져서 찢어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아하하하, 뭐예요, 그 표정.”
아쥬흐가 입을 가리고 소리를 내 웃는다.
아니 시발 그럼 내 손에 있는 이 문서들이 얼마야 지금··· 와··· 이 상자에 금이 가득 들어 있어도 비교 못할 엄청난 거금이다. 역시 돈은 이렇게 벌어야 해. 트랑카벨이 이렇게나 부자였구나.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딱 좋은 타이밍에 주식을 살 수 있었던 거지···.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정보를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그룬발트의 ‘친구’들이 보내오는 정보라는 것이 보통은 모순되는 게 많거든요. 대신 현상을 분석했어요.”
“분석···.”
“나우데사 연방의 도시들이 손해를 보더라도 종전을 원한다는 소문과, 영토 할양을 하느니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소문이 섞여 있었거든요. 그래서 정보는 일단 밀어두고 주식의 움직임을 확인했죠.”
“그런 것도 알 수 있습니까!”
“연방 의회 의장이기도 한 이소브론 대공의 처남이 해운회사 주식을 조금씩 사더라구요. 덤으로 항구에 창고 건물을 사들이는 것도 확인했어요.”
세상에. 그래도 전생하고 10년은 넘게 살았는데, 이런 세계가 있는지 전혀 몰랐다. 전쟁터에서만 구르고 또 구르니 머리가 돌이 되었구나. 단순히 주식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종합적인 정보 수집과 그 관리에서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네. 용병으로서, 군인으로서 부끄러운 점이 잔뜩이다.
“그래서 뭐··· 할아버님과 의논 해서 베팅 한번 해 봤죠.”
“혹시, 혹시 잃으면 어찌하실 생각이었나요?”
그래, 나 같은 소시민은 항상 이게 걱정이 돼서 질러야 할 때 지르지 못하니까.
“잃어요? 그래도 주식은 내 손에 남는걸요. 물론 가치가 떨어지면 한동안 현금 흐름은 힘들어지겠지만, 북방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은 가문에 큰 위기는 없는 거잖아요?”
젠장할! 완전히 사고방식이 다르다. 이래서 나 같은 놈은 절대로 부자가 못 되는 거구나. 역시 사람은 존버 또 존버를 해야 돈이 모이는 것인가.
“제가 장부를 보여드린 이유를 아시겠어요?”
“그, 글쎄요···.”
“이 돈은 트랑카벨을 지킬 돈이에요.”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보다 엄청난 돈이었다. 말 그대로 국가 예산 수준의 돈. 실제로 본 적도, 운용한 적도 없다. 그러나 아쥬흐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아까 ‘승리’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한다고 하셨죠?”
“그랬습니다.”
“제가 하나 제안해도 될까요?”
“아, 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나는 충격에 대비하는 굳은 마음을 먹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아요.”
“....”
“트랑카벨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백성들을 지켜주세요.”
“아···.”
“그게 가주 아롱드 트랑카벨 자작의, 그리고 저를 포함한 트랑카벨 가문 전체가 제안드리는 ‘승리’의 정의입니다.”
나는 대답을 못 했다. 솔직히 조금 감동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자리에 없는 트랑카벨, 아실도 분명 같은 이야기를 하겠지. 100퍼센트 확신한다.
이만한 거부를 가지고 있고, 주디칼리와 그룬발트에 잘 나가는 상단을 가지고 있다. 분명 각국의 고위층과 이어지는 커넥션도 다양하겠지. 굳이 대대로 이어지는 영지에 집착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솔직히 다 털어놓고 말해서, 법황청의 앞잡이가 되어 이단이든 뭐든 잡아다가 고문하고 화형대에 걸어 버리면 법황청에서는 기뻐하겠지. 파문도 풀리겠고. 엘랑키아 왕의 야심은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중요한 명분 하나는 지워버릴 수 있다.
그런데 트랑카벨은 그렇게 하지 않을 모양이다. 가문의 재산을 태워서라도 백성을 지키겠다는 것은···.
단순한 경제 논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나는 숙연한 마음으로,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휴우...."
제일 먼저 나온 것은 한숨이었다.
"혹시 계약서 제안은 아직 유효하나요?"
"콘도티에레 계약서요?"
"콘도... 예, 대리 사령관 계약 말입니다."
"물론이에요."
그녀가 서랍에서 종이를 꺼낸다. 내가 극구 거부했던 그 계약서. 마지막으로 확인한다.
"저는 이렇게 손이나 떠는 반쪽짜리 용병이지만...."
"지금은 괜찮으신데요?"
"어라...."
그러게. 손떨림이 없네.
"...간혹 손이나 떠는 반쪽짜리 용병이지만 트랑카벨 가문의 제의를 받아들이려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콘도티에레 에트."
나는 잠시 계약서를 살펴본다. 계약서의 항목을 살피는 것은 아니다, 이 계약서에 싸인을 하면서 바뀔 미래를 예상하는 것이다.
뭐, 하는 수 없지. 나는 단번에 내 이름을 적어 넣는다.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잠시 시간을 두고 아쥬흐에게 돌려준다.
“부족한 재주나마 열심히 발휘해 군을 이끌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트랑카벨의 승리’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양손으로 받아들더니, 묘한 미소를 지으며 한참 계약서를 바라본다.
"그렇게 여러 가지 조건을 걸어도 소용이 없었는데, 결국 마음을 돌려주셨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튕기지나 말 것을 그랬어요."
우리는 잠시 마주 보고 웃었다.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심이다. 어차피 할 일이었다면 하루빨리 맡아서 준비하는 게 나았지. 군사 고문 시절에는 권한 밖의 일들은 신경 쓰기 어려우니까. 특히 사람들, 참모와 하급 지휘관들을 뽑아야 하는데. 생각나는 이름들이 몇 있지만 다시 함께해줄지는 모르겠다.
"만약 제가... 콘도티에레 에트를 놓치기 싫어서 위선을 부린 것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제가 스승님께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흐음."
"위선도 선이라는 겁니다. 의도야 어떻든 좋습니다. 그걸로 구원받는 이들이 있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