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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화약의 용병대장-9화 (9/556)

3-2. 타오르는 블랑독

기병 대열의 선두에선 메세 드 말리크는 총총걸음으로 적을 향해 나아가는 말 위에서 오랜만의 전투 흥분을 느낀다.

피가 끓어 오른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느낌.

평소보다 팔다리의 근육에 힘이 들어가고, 은근히 무겁다 느꼈던 기병창이나 방패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흔들림 없이 잘도 나아가는 말과 일체가 된 듯한 안정감. 나이 먹고 가끔 속 썩이던 허리의 통증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20년은 젊어진 듯한 느낌.

슬쩍 고개를 돌려 옆을 지켜본다. 비슷하게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다른 기사들. 모두가 당당해 보이고 용맹해 보인다. 다른 동료에게 뒤처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앞서 나가지도 않는다.

처음 전장에 서는 자가 절반에 가깝건만, 모두가 전장의 규율을 잘 따르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지시를 따른다는 데서 묵직한 감동이 느껴진다.

동료들에게 옆을, 등을 맡긴다는 잊고 있었던 신뢰감.

지휘관은 자신만 챙겨서는 안 된다. 메세는 투구로 시야가 좁아진 와중에도 전장의 상황을 살피려 애썼다. 멀리 반대편 구스타의 기병대 역시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명령 타이밍은 아주 좋았다. 이대로라면, 메세의 기병과 구스타의 기병, 그리고 중앙의 보병들이 거의 동시에 적과 격돌할 것 같다.

모두가 믿을 만하니, 이제는 정면의 돌격에 집중해도 되겠지.

메세는 다시 정면을 보며 사고를 좁힌다. 돌로 쌓아 올린 담벼락 너머에 도사린 적들이 점점 또렷하게 보인다. 뭐라 뭐라 고함을 지르는 지휘관의 모습 역시 보인다.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을까. 활이든 쇠뇌든 무섭지 않다. 묵직한 막대기처럼 보이는 물건을 담벼락에 걸쳐놓고 있다. 그림자 대륙 성전에 나섰을 때, 공성전에 사용한다고 들고 다니던 주디칼리 출신 용병이 생각난다. 공성용 대포를 작게 줄인 신무기라고 했던가.

온통 연기가 자욱하게 만드는 시끄럽고 냄새가 고약한 무기던데,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뭔가를 계속해서 쏘긴 하던데, 대체 왜 쓰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검은 돌로 쌓아 올린 담벼락은 수백 미터나 이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군데군데가 무너져 있었다. 분명 오랫동안 이 땅을 지키며 살아온 뱅티유 가문의 남자들, 때로는 여자들이 땅을 개간하면서 나온 돌을 모아 차근차근 쌓아 올렸겠지.

하지만 그 뱅티유 집안의 마지막 자손들은 무도한 침입자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지금은 조잡한 교수대에 매달려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뱅티유는 그의 남작령에 속한 농민이었다. 그가 지켜야 할 백성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영주로서, 기사로서 수치.

그 대가는 피로 치르게 해 주리라.

거리는 차근차근 좁혀져 갔다. 달아오른 피로 잔뜩 흥분했기 때문인지, 마치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은 불과 몇 초 정도로, 메세가 이끄는 기병 대열은 수십 미터를 나아갔을 뿐이다.

그래도 이제 피아간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워졌다. 백 걸음···. 스무 걸음···.

챙이 달린 투구 밑으로, 욕망과 불안으로 가득한 적병의 새까만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블랑독을 위하여!”

때가 되자, 메세가 창을 치켜들며 외쳤다.

“블랑독을 위하여!”

“블랑독!”

서로 약속한 구호이자 신호. 상체를 세우고 나아가던 기사들이 모두 상체를 굽히고 안장에 몸을 고정한다. 방패를 당겨 몸에 최대한 붙인다. 그리고···.

“돌겨억!”

수직으로 세워져 있던 기병창들이 일제히 내려져 정면을 향한다. 무도한 적의 심장을 향한다.

여태껏 네 다리를 모두 땅에서 떼지 않고 총총걸음으로 나아가던 군마가 모둠발로 뛰기 시작한다. 다각, 다각. 편자가 단단하고도 건조한 땅을 박차는 느낌이 안장을 통해 몸에 전해진다.

이제 메세의 기사들과 적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지막한 돌 담벼락 따위, 훈련된 군마라면 뛰어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서른 걸음.

방패를 더욱 당겨 몸에 붙이고 표적을 정한다. 이정표로 세워진 말뚝 옆에 기대서서 뭐라 뭐라 고함 지르는 자를 노린다.

스무 걸음.

“으아아아아!”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올라오는 함성. 어지럽게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뚫고 하나 둘 돌진 중인 기사들의 기합 소리가 울려 퍼진다.

돌격은 성공적이다. 이대로 적의 후방까···.

꽈과과광!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삐이······.

이마에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다. 갑자기 높은 산에 올라온 것처럼, 귀가 들리지 않는다. 시각에 이어 청각이 차단되었다.

뭔가가 훅훅 옆으로 날아가는 느낌이 든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비명도 들리는데, 가까이에서 들리는지, 멀리서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깨지고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서 들린다. 철퍼덕하고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도.

왼팔에 든 방패의 위쪽 절반이 갑자기 폭발하듯 산산이 조각났다. 나무조각이 눈에 들어올까 봐 잠시 눈을 감는다. 어깨에서 뜨겁고 묵직한 통증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정도로 기사의 돌격을 막을 수는 없다! 메세는 이를 악물고 애마에 박차를 가한다. 상처가 쿡쿡 쑤시고 숨이 막히지만 견딜 수 있다. 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적이 피워 올린 불길한 하얀 안개를 뚫고 나간다. 공포에 질린 적 무리가 불사신처럼 튀어나온 메세를 보고 놀란다. 맨 앞의 적에게 창을 내지른다.

...

...

...

“으어엇!”

그랬어야 했을 텐데.

땅에 누운 상태로 깨어난다. 끔찍한 통증이 몰려오고 폐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노기사의 몸이 경련한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현실이 아니었을까. 몽롱한 정신을 차리려 노력한다.

그래도 다행히, 풀밭 위에 떨어졌기에 뼈가 부러지는 등, 큰 상처는 입지 않은 모양이다.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메세의 눈에는 상상도 못 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건···!”

흰 연기가 가시자, 함께 달리던 동료 기사들 대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첫 열의 기사들은 적 방어선에 도달하지조차 못했다. 후 열의 경기병들은 기수가 겁을 먹어서 그런지, 말이 놀라서 그런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나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메세 드 말리크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아버지!”

“로용! 괜찮은 거냐!”

쓰러진 말의 곁에서 아들 로용 드 말리크가 일어나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리를 다쳤는지, 좀처럼 똑바로 서지 못한다. 두 팔로 상체를 지탱하며 다시 일어서려 시도하지만 다시 주저앉는다.

그 옆에는 브랑생 남작이 풀밭에 얼굴을 박고 엎드려 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멀쩡한 상태는 아닌 것 같다.

“적이··· 이상한 술수를···.”

항상 자신만만하고 용감하던 아들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그들의 처지나 마음도 무색하게, 당장 아들을 안아주러 갈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아버···.”

타앙! 다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로용의 몸이 휘청한다.

“로용!”

일어서려 노력하던 자세 그대로, 로용 드 말리크의 상체가 앞으로 넘어진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메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가볍게 생각했던 ‘신무기’는 단순하게 시끄럽고 냄새만 고약한 물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가 미처 무언가를 해 볼 틈도 없이 그의 부대는 전멸했다. 대부분 죽거나, 말을 잃고 상처를 입어 비틀대거나, 운 좋게 살아남은 소수는 말 머리를 돌려 도망치고 있었다.

“이 개자식들!”

분노의 고함을 지르며 검을 뽑아든다. 아래쪽 절반만 남은 방패를 던지려고 했지만 왼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보니 어깨에 구멍이 뚫려 피가 솟아나고 있었다. 그의 겉옷 절반이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대로 무기를 치켜들고 달리기 시작한다. 발걸음이 무겁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파악!

복부에 큰 충격이 온다. 빛나는 쇳조각이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메세가 입고 있던 갑옷의 철판 조각이다. 수차례의 전투에서 그를 지켜주었던 갑옷이 종잇장처럼 찟겨 나가고 피가 튄다. 대체 저 무기는 뭐란 말인지.

“크헉!”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어서 무릎을 꿇었다. 갑옷들이 부딪히며 콰장창 소리를 내고, 검이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담벼락 너머, 적들이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도한 놈들이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 하는데···.

졸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연달아 요란한 총소리가 울린다. 누가 누구에게 쏘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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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랑카벨 가문과의 계약 연장이 확정된 이후, 밥값을 하기 위해서, 나는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전투 지휘를 하기 싫은 이유 중 하나는 기본적으로 내가 방구석에 널브러져 있을 때 가장 편안함과 행복함을 느끼는 게으르고도 심심한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전쟁은 하지 않는다지만 은근히, 아니 대놓고 할 일이 많았다. 리니 능선 전투에서 전투력을 확인한 2개 연대 이외에, 막 신병 훈련만 끝난 2개 연대가 추가 대기 중이다.

카르카냑, 벨모제, 델레망드, 몽세나. 트랑카벨 가문이 영유하고 있는 4개 자작령과 그 주변에서 모집된 보병들은 각각 제10, 11, 15, 16연대로 편성했다. 연대 번호는 큰 의미는 없다. 그냥 10부터 19까지 종이에 써서 제비뽑기를 했을 뿐. 10과 15가 뽑혔길래 연결되는 숫자를 사용해서 4개 연대의 번호를 정했을 뿐이다.

뭐 어중간한 번호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게 한다고는 하지만, 딱히 비밀리에 진행하는 모병도 아니라서 큰 의미는 없겠다. 애초에 딸랑 4개 뿐이기도 하고. 아직 리니 능선에서 귀환 중인 2개 연대와 그 부속 병력이 도착하면 또 일이 엄청나게 늘어나겠구나.

그건 그렇고, 트랑카벨 가문이 부자라고는 해도 좀 과다한 병력이라는 생각은 든다. 나는 2개면 적절한 병력이라 생각했지만, 왠지 아롱드와 아쥬흐 두 사람이 강하게 4개 연대를 원했다. 그거야 고용주의 의향이고 돈이 없는 사람들도 아니었으니까, 대신 각 연대의 정원을 조금 줄이고 병종을 총병과 창병으로 특화시키는 것으로 효율화를 꾀했다.

만약 전쟁이 벌어져 가신과 동맹 영주들을 소집하는 경우를 상정하면 명확한 일이다. 수급하기 어려운 병종이 이 둘이니까. 검으로 무장한 근접 보병들도 필요는 하지만, 가신이나 동맹 영주들의 보병에서 차출할 수 있겠지. 게다가 봉건적 질서와 귀족적 자존심으로 무장한 중장병들은 평범한 징집병들보다 훨씬 강하기도 하고.

그렇다 해도 이번 전쟁이 흐지부지 끝나면 이 병력들을 어떻게 할 생각일지. 2000명에 가까운 병력은 어지간히 부자 가문이라고 해도 상비군으로 유지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비용이 들어갈 텐데. 정말 우호 가문에 용병으로 파견해서 유지비라도 벌 생각일까.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자신은 절대로 찬성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트랑카벨 저택 정문의 계단을 올라갔다. 호출받기도 했고, 마침 보고할 서류도 꽤나 있었다.

아쥬흐의 집무실은 평소처럼 열려있었다. 나는 소리내어 인사를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처럼 서류의 산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전사의 방에는, 여전히 장식이라고는 꽃병 하나가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작은 꽃 여러 개가 둥글게 뭉친 듯한 외형... 이 꽃이 뭐더라... 아 수국. 파란 수국이다.

잠시 내가 수국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되새겨본다.

수국은 자라는 토양의 상태에 따라 색이 변하는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재배에 적합한 작물을 알 수 있으며....

음, 그냥 입 다물고 있자.

"아쥬흐 공, 여기 확인을 부탁드리고 싶은 문서가...."

표정이 심상치 않다. 평소에도 하얗던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표정.

"무슨... 일 있으신가요?"

그녀가 말없이 자신이 보고 있던 두루마리를 넘겨준다. 방수를 위해 가죽을 이중으로 덧대고 끈으로 감은 뒤, 봉인까지 한 흔적이 보이는 공들인 문서.

대체 무슨 내용일까, 나는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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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 왕국 - 나우데사 연방 강화조약 체결

그룬발트 제국의 선제후 3인 역시 조약 비준

7월 15일 기점으로 조약 효력 발휘

엘랑키아의 요구대로 나우데사 남부 6개 도시 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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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니 이게 무슨....

북방전쟁이 끝나버렸네? 시발 큰일 났다!

"어... 아쥬흐 공... 이 문서 출처는요?"

"그룬발트 제국에서 사업을 함께하는 '친구'가 보낸 문서예요."

"정확한 정보겠죠?"

"아마도요."

내 얼빠진 질문에 아쥬흐가 또렷하게 대답한다.

내가 지금까지 정순파 이단 토벌 성전이 흐지부지 끝날 것이라 배짱을 부렸던 이유는 엘랑키아가 몇 년 째 북방전쟁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최소 몇 년은 더 갈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끝나버렸다.

그것도 엘랑키아의 완전한 승리. 주장하던 영토를 할양 받았고, 아마 전쟁 배상금도 받아냈겠지.

이게 의미하는 것은.

10년 넘게 확장주의 행보를 하고 있는 엘랑키아 왕실이, 이단 토벌이라는 딱 좋은 명분으로, 남부 변경의 돈은 많지만 말은 안 듣는 영주들을 토벌하는 데 온전히 힘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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