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8화 (8/556)

3-1. 타오르는 블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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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 남부 지역을 부르는 말인 블랑독은 관습적인 용어로, 문화적 동질성으로 구분된다. 다시 말하면 행정구역이나 국경 등으로 엄밀하게 구분되는 지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적 동질성은 북부에 비해 강한 악센트와 어절을 생략하지 않고 비교적 또박또박 발음하는 등의 특징이 있으며, 지금은 멸망한 고대 제국 아란의 행정구역이 있던 지역이라 관습법을 아란 법을 따른다는 점에서 외부와 크게 구분된다.

블랑독의 명목상 통치자는 레뮤즈 백작이었으나 그의 실질 지배력이 미치는 부분은 서부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나머지 거대한 토지는 트랑카벨 가문을 비롯한 여러 토착 가문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트랑카벨 가문이 통치하거나, 그 협력 가문이 아닌 토지도 많다.

특히 동북쪽의 꽤 넓은 영토는 섬기는 대군주 없이, 균분상속법에 의해 무수히 쪼개진 소영지들이 난립한 특이한 장소이다.

“어이구, 마을 하나에 징세권 가진 남작이 대체 몇 명이야?”

기가 막혔다. 자녀 균분상속이 한 500년 지속되면 이런 누더기 지도가 되는구나. 이런 핸디캡을 안고 트랑카벨은 무슨 수로 세력을 계속 키워온 것인지 거의 불가사의 수준이다.

넌더리를 내며 지도를 내려놓은 나는 기다란 종이에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작위 리스트를 훑어보았다. 무려 86명, 블랑독 지방의 소귀족 리스트였다. 셋에 하나 정도는 붉은색 표시가 되어 있다. 트랑카벨 가문에 우호적이고 얼마 후 있을 트랑카벨 가문의 계승식에 참여하기로 약속한 이들이다. 나머지는 과연.

그리고 계승식에 참석은 한다고 해도 말을 잘 들어주기는 할 것인가.

“할아버지 대 까지만 해도 서로 싸우던 집안들이 많으니까요···.”

아쥬흐 역시 답답하다는 듯 말한다. 그녀의 할아버지이자 현재의 가주인 아롱드 트랑카벨이 손바닥만 한 땅을 뺏고 뺏기는 싸움에 진저리를 내고 사업에 투신하기 전 이야기인 모양이다. 외교 관계를 대충 정리하고 포도주 사업에 투신하여 대박을 내기 전에는 용맹한 기사였다고 했지.

...그 시기에 트랑카벨과 싸우며 원한을 키웠던 늙은이들이 현재 주인으로 있을 가능성이 크겠지. 이 낮은 참석률도 이해는 간다. 이웃끼리 사이가 좋기가 힘들지.

즉, 다시 말하면···.

리니 능선 전투와 비슷하게, 이단 토벌의 기치를 올린 침략군이 습격해 왔을 때 주체가 되어 막아 낼 구심점이 될 가문이 없다는 것이다.

전쟁의 화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하지만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 고집쟁이들을 어떻게 해야 내가 더 편해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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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다른 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움직이는 기색도 없습니다!”

메세 드 말리크 남작은 정찰병의 보고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였다. 적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말을 돌려 후방을 돌아본다. 네 명의 귀족들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50대인 자신과 동년배인 구스타 경부터, 아직 19세라는 브랑생 남작까지.

서로 나이는 제각각이지만 그의 지원 요청에 서둘러 달려와 준 든든한 이웃들이다.

구스타 경은 20년 전 그림자 대륙 성전에 함께 참여했던 전우이며, 나머지 가문들도 15년 전 주디칼리 해적들의 습격 때 힘을 모아 싸웠던 사이이다.

땅이 작고 사람이 다소 적을지라도, 메세의 조상들은 힘을 합쳐 수백 년간 블랑독의 초원을 지켜왔다. 엘랑키아의 왕이든, 레뮤즈 백작이든, 트랑카벨 자작이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 왔으니까.

“그럼 갑시다. 여러분!”

움직이기 시작하는 작은 군대. 26명의 중기병, 22명의 경기병, 84명의 중보병, 38명의 궁병에 16명의 쇠뇌병. 모두 평소에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용감한 전사들이다.

감히 자신의 영토를 침입한 불한당들을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아버지, 저기 시체가 보입니다!”

메세와 나란히 말을 달리고 있는 그의 둘째 아들, 로용 드 말리크가 팔을 뻗어 농장의 기둥 옆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울타리들을 뽑아 만든 것 같은, 뭔지 모를 어설픈 나무 구조물이 서 있었다.

“교수대! 교수대입니다. 아버지!”

그랬다. 장대에 매달려 천천히 흔들리는 네 개의 그림자는 인간의 시체였다. 침입자들이 습격한 농장의 주인인 뱅티유와 그 아내, 두 아들의 시체겠지.

뱅티유는 솜씨 좋은 농부이며 사냥꾼이기도 했다. 항상 메세에게 가장 좋은 농작물을 진상했었고, 가끔 사냥으로 잡은 새 고기를 주기도 했다.

“뱅티유는 이단이 아니다!”

그가 거칠게 말하자, 듣고 있던 로용 역시 굳은 기세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단이라는 정순파인지 뭔지, 성전에 나오지 않고 자기들끼리 신앙을 공유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적어도 뱅티유는 아니었다. 항상 아내와 두 들을 데리고 성전에서 함께 기도했었으니까.

저들이 진짜 성전군일 리가 없다.

“포로를 잡을까요?”

로용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묻어났다.

“정보를 알아야 하니 한 명은 잡아야지! 어차피 다른 지역 출신이고, 돈에 팔려 용병 나부랭이나 하는 뜨내기들일 것이다. 용서하지 마라!”

“네, 아버지!”

메세의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안 적들이 갑자기 바빠진다. 농장을 약탈하고 아무 데나 널브러져 휴식을 취하고 있던 놈들이 한데 모이기 시작한다.

적의 숫자는 200 남짓, 서로 비슷하다. 절반 정도는 몇 미터나 되는 긴 창을 가지고 있었다.

‘저놈들은 기병을 두려워하고 있다.’

대부분이 보병에, 기병은 지휘관으로 보이는 몇 명이나 될까 말까. 그에 비해 메세의 군대는 기병이 50명 가까이 되고, 절반이 중기병이었다. 저 ‘성전군’ 침입자들은 자신들이 기병에 약하다는 것을 알기에 장창으로 다수 무장했겠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메세 역시, 오랜 전투 경험으로 기병에 대응하는 보병들을 어떻게 요리하면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작전 계획은 이미 동료 귀족들에게 공유되어 있었고,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우왕좌왕하던 적들은 빠르게 진형을 갖추었다. 비스듬히 연장되어 있는 농장의 울타리 뒤에 숨은 듯한 배치. 예상대로다. 중앙에 창병들로 만든 방진과, 주변에 배치된 나머지 보병들.

“구스타 경! 부탁하네!”

오랜 전우에게 외치고, 고삐를 왼쪽으로 당긴다. 하나의 거대한 대열을 이루고 있던 기병대가 좌, 우로 나뉘어 흩어진다.

바로 뒤에 있던 궁병과 쇠뇌병들이 활을 들고 달려 나가고, 그 뒤를 창과 검, 도끼와 방패 등으로 무장한 중보병들이 바짝 따른다. 이들은 대부분 주변 지역의 지주 계급 출신으로, 온갖 것들로부터 땅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사나운 전사들이었다.

“아버지! 적들이 우왕좌왕합니다!”

둘째 아들의 목소리에 흥분이 섞였다. 그에게도 보인다. 적 지휘관들이 대열 뒤에서 뭔가 외치며 뛰어다니고 있고, 보병들이 배치를 변경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배치가 끝난 보병 방진을 새로 배치하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지. 기병이라면, 그 전에 충분히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멍청하기는, 창을 이쪽으로 세우고 준비를 마친 창병들에게 정면으로 뛰어들 리가 있나. 물론 창병들의 정면은 무섭지만, 반대로 말해 그것만 조심하면 된다.

“쏴라!”

메세가 기병의 절반을 이끌고 왼쪽으로 우회하는 동안, 궁병과 쇠뇌병들이 적진으로 화살을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척후전이 시작되었다. 적은 경보병이 없는지 맞대응은 없다. 대신 농장 울타리에 의지해 화살 공격을 피하려는 모양이다.

궁병들이 이렇게 적을 묶어놓는 동안, 방진을 짠 중보병들이 접근해 창병들을 잡는다.

그럼 나머지 떨거지들이 무슨 짓을 하건 절대로 중기병을 앞세운 자신의 기병대를 막을 수 없다. 울타리에 의존해 막아보려 하는 애처로운 보병들을 짓밟고 주력인 창병들을 포위 섬멸한다.

“메세 남작님! 귀하의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군요! 감탄했습니다!”

나란히 말을 달리고 있던 19세의 어린 남작, 브랑생이 찬탄의 말을 한다. 메세는 빙긋 웃으며, 건방지다는 인상이 있던 녀석이지만 솔직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계획은 완벽했고, 부하들과 동맹군도 잘 따라주고 있었다. 이로써 이웃 영주들과의 관계는 더더욱 돈독해질 것이며 드 말리크 가문의 주도권도 확고해질 것이다. 이대로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면 분가들의 권리를 되찾아 종가로서 다시 가문을 온전하게 할 뿐 아니라, 이웃들의 추대를 받아 소영주 신세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드 말리크 자작이 될 수 있을지도.

그의 할아버지가 그토록 원했던, 남부의 트랑카벨 가문을 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정지!”

창을 들어 부대를 멈춘다. 적절한 위치에 왔다. 돌격을 위해 휘하 기병들을 선형으로 다시 배치하고 전장을 둘러본다.

선두의 사격부대는 여전히 화살을 꾸준히 날려 보내고 있었다. 적군은 대응하지 않는다. 아무리 갑옷을 입었다 해도 계속 사격에 노출되다 보면 피해가 없을 수는 없을 텐데.

활로 무장한 경보병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쇠뇌와 같은 무기는 기병 대응용으로 아껴두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후속하던 중보병대가 적당한 위치에 이르렀다. 이제 그들이 돌격을 시작하면 궁병들이 자리를 비켜 줄 테고, 아군 보병이 적 창병과 격돌하는 순간 메세 자신이 이끄는 기병과, 반대편의 구스타가 이끄는 기병들이 측면을 공격할 예정이다.

중보병대의 건너편, 옛 전우 구스타의 기병들 역시 돌격 준비 위치에 도착해 두 줄로 돌격 대형을 갖추었다.

이제 전투 시작은 모두, 메세 드 말리크의 판단에 달렸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20여 년 전, 그림자 바다 건너 사교도들의 항구 도시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적들과 싸우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15년 전, 갑자기 바다에서 몰려든 해적들과 갑옷 입을 틈도 없이 치열하게 백병전을 벌였던 기억도. 양손으로 온 힘을 다해 휘두른 검이 해적의 칼날을 부수고 그 해적의 정수리에 박혔었지.

나름 파란만장한 세월이었다. 그 와중에도 지금처럼 작더라도 부대의 총지휘관이 되어 공격 명령을 내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로용! 나팔 신호를!”

그의 아들이 안장주머니에서 뿔피리를 들더니 볼을 부풀리고 길게 분다. 낮고 웅장한 뿔피리 소리가 블랑독의 건조한 초원을 내달린다.

첫 반응은 중앙에 배치된 중보병 부대에서 나왔다.

“으아아아!”

“돌겨억!”

“블랑독을 위하여!”

궁병들이 내준 공간으로, 보병들이 돌진해 들어간다. 메세는 마지막으로 부하들을 돌아본다. 자신의 아들 로용. 이웃 영지의 남작 브랑생. 평생 자신을 따라준 기사들, 종사들, 지주들. 출신이나 무장은 각양각색이지만 모두 믿음직한 전사들이다.

“준비!”

메세는 마지막으로 부하들, 동료들의 모습을 눈에 새기고 투구의 면갑을 내렸다. 세상이 좁아졌다. 투구에 새겨진 좁은 틈만 한 크기로, 울타리 뒤에 숨은 적 무리가 딱 들어온다.

“돌격!”

박차가 늠름한 군마의 옆구리를 차고, 오랜 기간 함께해온 군마가 힘차게 첫발을 내디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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