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7화 (7/556)

2-2. 카르카냑

나는 아침 일찍, 오랜 인연을 방문했다.

“자네로군. 오랜만이구나.”

카르카냑 성 내부. 트랑카벨 저택의 병상에 누운 현 가문의 주인. 아쥬흐와 아실 두 남매의 할아버지인 아롱드 트랑카벨은 나를 만나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아롱드 경.”

“자네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벌써 10여 년 전이다. 아직 그룬발트 제국의 풋내기 용병이던 나는, 엄청난 거부를 벌어들이던 상인인 이 노인을 처음 만났다.

어떤 의미에서, 이 60대 후반의 노인은 내가 이 세계로 전생한 이후, 가장 오래 알아 온 사람이다.

그보다 일찍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죽거나 아니면···.

“아롱드 경도 건강해 보이시는데요.”

“크흐흐, 겉보기는 그렇지. 걷지 못하는 것만 빼면.”

그는 내 고용주였으며, 파트너였고, 후원자이자 전우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어렵고 혼란스러울 때 도와주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두 손주, 아쥬흐와 아실 남매는 나에게도 각별한 아이들이다. 이들이 속한 트랑카벨 가문 역시, 여느 귀족 가문과는 다르게 여기고 있고.

...그런데 그건 그거고 수전증이 심해서 더 이상 용병일 못 해 먹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팩트고.

“아쥬흐가 아침에 와서 말하더군. 자네가 말을 통 안 듣는다고 말이야.”

“하하···.”

먼저 집에 들어간 그녀가 다 이야기 한 모양이다. 다 내가 우유부단하게 여지껏 결정을 못 내리고 있어서 그렇겠지.

“아직 젊은 친구가 손떨림이라니, 언제부터 그랬나?”

“주디칼리에 있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한 3년 됐네요.”

“속상한 이야기구먼··· 떨릴 거면 쓸모없는 내 손이나 떨릴 것이지.”

노인이 혀를 차며 자기 손을 내려다본다. 한때 전사이자 상인이자 정치가였던 노인의 손은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확실히 시간의 흐름이 느껴진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나이보다도 건강하게 느껴지는 노인이었는데.

지금은 어떤 원인인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한다. 사실 아쥬흐가 주디칼리까지 가서 의학을 공부한 것은 할아버지의 다리를 낫게 하려는 이유가 첫 번째였다고 한다. 불행히도 소용이 없었지만 말이다. 기프트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어떤 원인인 모양이지.

“그래도 부디 부탁하겠네. 트랑카벨의 군대를, 내 손주들을 부탁하네.”

“....”

“아들놈만 살아 있었어도···.”

일찍 세상을 뜬, 두 남매의 아버지 이야기다. 나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나에게 은인이 한 명 있다면 바로 이 노인, 아롱드 트랑카벨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부탁받아 군사 고문으로 잠시 머물렀던 것이고··· 나름 머무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리니 능선에서 원치 않는 전투를 하면서 증명하기도 했고.

“아롱드 경, 저는 이번 성전이 흐지부지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망설이던 나는 솔직한 속 마음을 털어놓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성전을 한다고 해도, 거기 참여해서 이득을 볼 사람들이 없습니다.”

“호오?”

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분명 트랑카벨의 영토를 포함한 블랑독 지방에 이단으로 간주되는 정순파 신도들이 여럿 거주하며 이 때문에 법황이 성전을 선포한 것은 사실이다. 블랑독 지방의 귀족들에게도 파문 혐의가 내려온 것이 사실이고. 하지만 이를 누가 토벌한단 말인가?

“엘랑키아는 벌써 7년째 북방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왕이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대부분이 북방에 몰려가 있지요.”

“그건 나도 알고 있네마는.”

“왕에게 충성하는 영주들의 정예 병력도 전부 북방에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남쪽까지 병력을 보내겠습니까?”

“음, 자네가 얼마 전에 침공해온 이들을 격퇴하지 않았나?”

“그렇죠. 그런 전쟁을 잘 모르는 얼간이들이 ‘이단 토벌 성전의 승리자’ 타이틀을 탐내어 덤빌 수는 있겠죠. 하지만 이제 트랑카벨의 군대는 그런 놈들에게 지지 않습니다.”

진심이다. 리니 능선에서 용감히 싸웠던 신병들은 이제 신병이 아니다. 그들을 기간으로 해서 연대 규모를 확장하고 병력 충원을 계획한다.

군사 조직의 확장과 유지.

전쟁은 개인의 용맹이나, 일시적인 무기의 상성 따위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걸 모르는 놈은 전쟁할 자격도 없고.

“그 부분은 알겠네. 하지만 법황의 명에 따라, 외국의 군이 들어올 수도 있지 않겠나?”

“그건 좀 어렵지 않겠습니까.”

“호오, 그건 왜 그런가?”

“블랑독이 변경이 있다고 해도 전통적으로 엘랑키아 왕의 영토니까요. 타국 군대가 침략한다면··· 정말로 이단 토벌 이후에 얻는 게 하나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영지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이 노인네, 자기도 알면서 물어보는구나.

“그건 엘랑키아 왕의 봉신으로 들어가거나, 엘랑키아 왕과 전쟁하겠다는 것인데 어느 쪽이나 애매하지 않겠습니까?”

“크크크, 그렇게 되겠지.”

노인이 왠지 대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더더욱 트랑카벨에 머물러도 되지 않겠는가? 전쟁 가능성은 낮으니 말일세.”

“아.”

...망할 노인네.

수전증이 심해 전쟁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떠나려고 했는데, 내 입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이유를 줄줄이 말하고 말았다.

혼자 대륙을 종횡무진으로 오가며 그룬발트와 주디칼리 포도주 유통망의 1/4을 장악하는 상단을 만들어 낸 인간인데.

병자 코스프레를 한다고 내가 호랑이 굴로 기어 들어갔구나.

“...제가 영감님을 무슨 수로 당하겠습니까.”

“그보다 좀 묻고 싶은 게 있네. 대체 여기를 떠나면 어디로 가려고 한 것인가? 자네 트랑카벨을 좋아하던 것 아니었나?”

그거야··· 엘랑키아 남부인 블랑독 지방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살기 좋은 지역이다. 여름이 좀 덥긴 하지만 사계절 내내 춥지 않고, 장마나 태풍 같은 극단적인 자연현상도 없다.

“대륙 전체에 여기만큼 살기 좋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 술도 맛있고.”

“술도 맛있죠.”

다시 말하지만, 이 교활한 노인네는 블랑독 산 포도주로 이웃 나라의 주류 시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큰 손이다.

“그럼 아예 여기 정착하면 어떻겠나? 카르카냑에 말일세.”

“하하, 저도 느긋하게 햇살 좋은 집에서 포도주나 마시면서 살고 싶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 말이죠.”

“그게 아니라 이 사람아. 가신으로 들어오라는 이야기지. 손녀사위로 말이야!”

이게 뭔 소리야 또 갑자기.

“...영감님 노망이 드셨습니까?”

“자네라면 지참금으로 카르카냑을 내주지. 에트 드 카르카냑 자작, 좋은 이름이 되겠네.”

“정신 좀 차리세요 어르신. 여기가 트랑카벨 가문 본성인데 누구한테 내 주신다구요?”

“소중한 손녀니까, 그만큼 가치 있는 영지를 지참금으로 주는 게 아니겠나. 아니면 뭐, 우리 아쥬흐가 못난이라는 이야기인가!”

“아니 그게 아니고요흐으어억!”

그렇다.

나는 문틈으로 도끼눈을 뜨고 들여다보고 있는 아쥬흐와 눈이 마주쳤다. 다행히 아롱드 경 역시 바로 눈치를 챈 모양이다.

난데없이 침묵이 자리한 방 안으로, 직접 음료가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온 그녀는 자기 할아버지와 나를 말 없이 흘겨본다.

말없이 우리 둘의 앞에 잔을 내려놓는다. 차게 식힌 차 종류인가, 고소한 냄새가 솔솔 올라오는데. 손은 대지 못하겠고, 침묵 속에 목은 말라만 가고.

“다 큰 어른들이 사람이 없는 데서 사람을 마치 상품 취급하듯 하는 건 좀 어떤가 싶네요.”

그녀가 노려보자 트랑카벨 가문의 주인, 블랑독 4개 자작령과 그 주변 부속지의 영주, 그룬발트와 주디칼리를 지배하는 블랑독 포도주 상단의 대표인 67세 아롱드 옹이 재빨리 눈을 피한다.

“그리고 저도 선택의 권리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번에는 내가 열심히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역시, 아무리 봐도 블랑독 초원의 풍경은 질리질 않는다니깐.

“그럼, 대충 이야기는 정리된 것 같으니 이따 저녁에 계약서 써도 괜찮겠죠?”

“네··· 그러시죠.”

“아실이 무척 기뻐하겠네요. ‘아실’이요.”

“에··· 그, 저도 기쁩니다···.”

아쥬흐 트랑카벨, 현 가주인 늙고 병든 할아버지와 다음 가주인 어린 동생을 대신해서 실질적으로 블랑독의 4개 자작령을 운영하고 있는 수완 좋은 귀족 아가씨는 마지막으로 방 안을, 우리를 흘겨보더니 문밖으로 나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신다. 곡물을 볶아 만든 차 같은데, 자극적이지 않고 꽤 맛있네.

“흐음, 흠.”

노인이 헛기침을 하더니 마찬가지로 차를 입으로 가져간다.

“아 그러니까 왜 괜한 이야기는 하셔가지고요.”

“자네가 괜히 튕겨서 이렇잖은가! 왜 거절을 해 거절을!”

“에휴, 빨리 건강이나 찾으십쇼.”

“아무튼, 그럼 가문에 남아주는 것으로 알겠네.”

“...알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대리 사령관 자리를 내주지. 그 뭐라 하더라? 아, 콘도티에레!”

“잠깐! 그냥 군사 고문입니다. 너무 앞서가십니다, 아롱드 경.”

“거참 까다롭구만 젊은 친구가.”

접견 초반에 다소 예의 차리던 분위기는 어디 가고, 옛 술친구 사이의 농담 따먹기에 어울리는 말투가 되어 있었다. 그래, 우리는 원래 이렇게 친해진 사이다. 나이가 30살 넘게 차이가 나지만 술친구였으니까.

귀족과 비 귀족 자유민 사이에 격의가 없는 편인 것은 블랑독 특유의 문화이기도 하다. 블랑독을 제외한 엘랑키아 중북부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소위 ‘그룬발트 제국법’이라 불리는 장자상속제를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블랑독은 왠지 옛 아란 제국법을 따라 균분상속제를 지향한다.

그뿐 아니라, 오래 일한 가신이나 심지어 하인에게까지도 유류분이 생긴다. 권리가 생긴 이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더더욱 끈끈해진 ‘가족’이 되느냐, 재산을 빼돌리는 ‘도둑놈’이 되느냐는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려 400년을 하나의 가문으로 유지해온 트랑카벨 가문이니, 그 가주가 권위나 억압에 의존했다면 진작에 산산이 조각났겠지.

이렇게 이유를 늘어놓고 나니, 내가 트랑카벨 가문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된 계기가 단순히 따스한 카르카냑의 날씨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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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들러 필요한 자료들을 좀 찾은 뒤, 한적한 주점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던 나는 다시 트랑카벨 저택을 찾았다.

...계약서 써야지.

나는 아쥬흐의 집무실을 찾았다.

서류, 서류, 또 서류.

스물한 살 귀족 아가씨의 방이라고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책상과 책장, 그리고 산더미 같은 서류로 가득한 방.

병중인 할아버지의 대리를 맡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그녀의 일이 만만치 않구나 싶었다. 영지 관련 업무는 관련 정무관들이 대부분 처리하지만, 결재가 필요한 일도 있을 테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상단 관련 일도 상당하겠지.

이 살풍경한 ‘일하는 인간의 방’에 장식이라고는 보조 탁자 위에 놓인 꽃병 하나뿐. 마침 내가 아는 꽃이다.

“수선화네요.”

노란 여섯 장의 꽃잎을 가진 귀여운 꽃.

“...꽃에 대해 잘 아시나요?”

아쥬흐가 의외라는 말투로 묻는다. 그녀는 왠지, 서류로 얼굴 절반을 가리고, 보석처럼 파란 눈만 내밀고 있었다. 역시 아까 일 때문에 불쾌한 모양이지.

“말에게 목초를 먹일 때요, 수선화 잎을 먹으면 토하고 종일 앓거든요. 그래서 피하라고들 합니다.”

“와.”

서류 너머 아쥬흐의 눈이 찌푸려진다.

“정말 끝내주게 무드 없는 꽃 설명이네요.”

“....”

빌어먹을, 또 헛발질인가. 트랑카벨 가문 사람들은 왠지 대하기가 힘들단 말이야. 지금은 순진하고 솔직한 아실도 자라면 할아버지나 누나를 닮아가려나.

“그... 계약서 쓰러 왔습니다.”

일이나 하자.

“할아버님께서는 대리 사령관, 콘도티에레 임명을 강력히 원하고 계셔요.”

아쥬흐는 비로소 얼굴을 가렸던 서류를 내리고, 두 개의 서류 묶음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눈가가 붉은 것 같아서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아닌 모양이다. 어젯밤의 수녀 코스프레 차림과 달리, 평범한 귀족 아가씨 복장이 잘 어울리게 아름답다.

“이쪽은 콘도티에레 계약서, 이쪽은 기존 군사 고문직의 수정 계약서예요.”

나는 말없이 콘도티에레 쪽을 다시 밀어주고, 반대편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안 한다고 말씀드리고 왔습니다.”

“휴, 그래요. 그 이야기는 차근차근해요.”

아니 뭘 또 차근차근해 안 한다는데.

“읽어보세요. 고용 기한은 매년 첫날에 갱신하는 것으로 하고, ‘블랑독 정순파에 대한 이단 토벌령’ 동안은 자동 갱신으로 정했어요. 다른 조건은 완전히 동일하고 연봉은 조금 올랐어요.”

“딱히 올려주시지 않아도 되는데요.”

“어차피 전에 드린 임시 계약금도 화상 연고 사느라 다 쓰셨다면서요? 앞으로 연대 정원이 늘어날 테니 연고도 더 많이 사셔야 하거든요.”

“허어···.”

“농담이고, 그런 게 필요하면 앞으로는 예산을 요청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절차상 그게 옳긴 하겠네요.”

“만약에 대리 사령관 직책이 되시면 직접 예산을 짜는 재무 장교를 수하에 두시고···.”

“잠깐! 너무 나가셨습니다.”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아마도 농담으로 한 이야기였나보다. 이런, 역시 트랑카벨 사람들은 대하기가 어려워.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 월급 받는 동안은 열심히 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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