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화 (5/556)

1-5. 퇴역하고 싶은 용병

‘남부의 가증스러운 이단과 그들을 두둔하는 가문들을 처단하자’라는 구호 아래 시작된 이단 토벌 성전군이 트랑카벨의 영토를 침범해왔다. 북방의 영주 몇 명이 산발적으로 출전시킨 병력이었다. 여기에 트랑카벨 가문 측이 영격에 나서면서 발생한 리니 능선 전투가 끝난 지 이틀이 지났다.

트랑카벨 가문의 병력 1200명과 성전 연합군의 병력 1600명이 부딪혔었다. 아군인 트랑카벨 가문 군대의 사망자가 46명인 것에 비해, 성전군은 사망자는 300명이 넘었고 포로가 400여 명이나 잡혔다.

리니 능선 전투는 트랑카벨 가문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고 해야겠지. 대충 예상대로다. 적장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우주 방어 수준으로 진형을 갖춰놓은 방어진에 꼬라박는 생각을 한 것인지.

기병을 포함하여 적지 않은 숫자의 적병들이 탈진하여 주저앉아 도주도 포기했다는 사실이 그 날의 상황과 환경을 말해준다.

아군은 소수의 감시병만 남긴 채, 포로와 전리품을 챙겨 철수했다. 특히 무기 전리품이 꽤 많았고 군마도 50마리를 넘게 노획했다. 한동안 새로운 연대들을 창설하고 보병도 기병도 증강해야 하는 트랑카벨 가문에 큰 도움이 되겠지.

아, 물론 포로들의 몸값도 말이다.

별다른 준비 없이 신앙심과 욕심만 가지고 덤벼드는 얼간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줬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성전이 선포된 이상, 천국행 티켓을 욕심내는 얼간이들이 더 몰려들 수는 있겠지만 어설프게 덤비면 천국 대신 골로 간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니까.

이 성전이 선포된 이유도 참 골때린다. 엘랑키아 왕국 남부, 블랑독 지방은 중앙 정부에서 멀리 떨어져서인지, 예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 지역의 강자인 트랑카벨 가문조차도 엘랑키아 왕실이 내린 작위 따위는 없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에, 고만고만한 수많은 소영주들이 난립한 지역이라 종교에 대한 탄압도 느슨했고 외부에서 이단으로 여겨지는 종파가 많이 유입됐다. 그걸 예민하게 문제 삼는 이웃들도 없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법황청에서 트집을 잡고 늘어진 것이다. 하여간 어디나 종교쟁이들이란.

당연히 이단들을 탄압하거나 추방하고 법황청의 파문과 이단 토벌령을 피하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리 가문의 땅에 살며, 블랑독의 문화와 법을 존중하고 의무를 진다면 트랑카벨의 신민입니다. 트랑카벨의 일원들은 마땅히 그들을 차별 없이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 우리 아실 트랑카벨 자작님이 딱 적절한 대답을 해주신다. 질문했던 상대방, 카렐 드 상포리앙은 언제나 친절한 소년이 단호하게 잘라 말하자 조금 놀란 것 같다. 아마 이단 놈들 쫓아내라는 말을 했겠지?

“에트 경 오셨군요. 누님께서 좋은 과자를 보내주셔서 함께 드셨으면 해서 휴식을 방해했습니다.”

아실이 나를 보자 웃으며 의자를 권한다. 맞은 편에 앉은 카렐의 표정은 나를 보자 확 일그러진다. 아 쪼잔하게, 이틀 전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네. 거 사나이가 전쟁도 하고 하다 보면 서로 총도 쏘기도 하고 맞기도 하고 하는 거지.

많이 아픈지 벌거벗은 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다. 역시나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표정이 안 좋은 것은 당연하지. 뭐, 상대는 귀족이고 고용주 가문과 나쁜 관계도 아닌 듯하니 사과를 해야겠다.

그나저나 이 자식은 몸도 잘생겼네. 완전 근육질에 잡티 하나 없이 흰 피부라니, 기사 때려치우고 모델 해라 시발.

“거 맞은 데는 괜찮으십니까?”

나는 생각보다 옹졸한 인간이다.

“에트 경이라 했나! 내 비록 패배한 입장이라 면목은 없네만, 그대는 어찌 기사로서 그런 비겁한 짓을···! 크윽!”

갈비뼈가 부러졌는데 고함 지르면서 삿대질을 하면 그야 아프지.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자꾸 저 깊은 곳에서 어두운 기쁨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저는 기사도 아니고 귀족은 더더욱 아닙니다. 아실 자작님께서 존중의 의미로 경을 붙여주시기는 합니다만 저는 그냥 용병 나부랭이거든요.”

“아니··· 그런 이가 어떻게 전투 지휘를?”

“거 싸움 못 하고 신분만 높은 것보단, 신분이야 어찌 됐든 싸움할 줄 아는 놈이 맡는 게 좋지 않겠어요?”

솔직히 시비 걸려고 한 말이다. 내용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아니 솔직히 잘생기고 집안도 좋은 놈이 저러는데 대항심이 생기겠냐 안 생기겠냐.

“음··· 그건 경의 말이 맞는군.”

...어라?

“신분 어쩌고 한 것은 내 실언이었으니, 사과하겠소.”

카렐은 순순히 사과하며 고개까지 슬쩍 숙인다.

그러지 마... 내가 옹졸한 놈으로 보이잖아.

“괜찮으시다면 지난 전투에서, 아군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의견을 들려주시겠소?”

“제 의견 따위가 무슨···.”

“저, 저도 듣고 싶어요!”

“허어···.”

각진 턱과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야성적인 상체 탈의 미남과, 투명한 흰 피부와 가는 선의 정복 차림의 미소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에게 집중한다. 아주 샤방샤방 배경에 꽃이 날리네, 여기가 무슨 여성향 로맨스물 세계냐. 나만 그림체가 혼자 다르잖아. 전생 누가 시킨 거냐 젠장 전생을 엉뚱한 세계로 잘못 온 듯.

잡생각이 끝이 없다. 후우, 그래 뭐 썰 정도야 못 풀 건 없지.

나는 차근차근 전투 직전부터 종료 시까지 흐름을 짚어갔다.

험지에 자리 잡아 이미 방어 준비까지 확실하게 갖춘 상대에게 다소 수적으로 유리하다고는 해도 정면공격을 가한 무모함.

복잡하고 거친 지형에서 평지에서나 쓸 법한 전술을 사용한 점.

약점을 보여주고 공격을 유도했는데 정확히 그쪽으로 공세를 취한 점.

체력 소모가 심한 지형에 더운 날씨를 고려하지 않은 점.

지휘관이란 작자, 레스펜스 후작인가 하는 인간이 가뜩이나 오르막이라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너무 멀리서 구경이나 하다가 먼저 도망쳐 버린 점까지.

덤으로 좌익 지휘관이란 양반도 말이지, 도전받았다고 일기토 할 기세로 투구 면갑 올린 점도 지적하고, 다음에 창병 방진으로 파고드는 상황이라면 체면이고 뭐고 버리고 바닥을 구르라는 말까지 해버렸다.

미안한 점도 없지 않고, 어차피 용병 때려치울 건데 뭐···. 그리고 경험상, 이런 거 들어봤자 그다지 소용없다. 정작 눈앞에 닥치면 열에 하나 기억날까 말까고. 꼭 다 끝나고서야 '아 그때 이랬어야 했는데' 이따위 생각이나 하지. 물론 운 좋게 살아남았다면 말이다. 그렇게 치이고 또 치이면서 몸에 익히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람은 내 말을 진지하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었다.

“귀하는 그런 점들을 어디서 배우신 거요?”

“용병으로 구르면서 배웠죠.”

적어도 10년 이상은 전쟁터에서 굴렀으니까. 그리고··· 전생하기 전의 역사 덕후 생활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해야 하려나. 없는 것보다는 나았지.

“허어, 상당히 놀랍군. 이러니 질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데. 부끄럽지만 우리 쪽은 각자 위치를 정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못했소.”

“기프트와 화약이 지배하는 전장 아닙니까. 기사 한 명의 용맹과 힘으로 승패가 갈리는 시대가 아니니까요.”

사실 그 전에도 그런 시대는 아니었지만... 이라 생각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건 약간은 빈정대는 투로 들릴 수도 있었을 텐데, 카렐은 고개만 끄덕인다.

“정말 부끄럽군··· 내 잘못으로 아버님의 가신들을 여럿 잃고 이렇게 포로로 잡히기까지 했으니.”

그러고 보니 이 귀족 청년은 자신을 포함한 자기 가문 사람들은 반드시 몸값을 부담할 것을 맹세하고, 나머지 부하들을 석방해 달라고 요청해왔었다. 자신은 의무가 이행될 때까지 포로로 남기도 서약했고.

사람 좋은 아실은 이를 들어주고 싶어했기에 그러자 했고, 나도 동의했다. 어차피 포로 관리도 귀찮았으니 잘된 일이지. 까놓고 말해서 잡병 수백보다는 백작 후계자 한 명이 더 포로로서 가치 있기도 하니까.

이제 보니 이 카렐이란 귀족 양반은 꽤나 인격자인 모양이다. 두 발이나 총 쏜 게 좀 미안한 것 같기도 하고. 귀족이란 인간들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존중받을 일을 했으면 존중해 주기는 해야지. 하... 역시 잘 생긴 놈이 성격도 좋다. 불공평하게.

“그런데··· 카렐 경은 백작가로 돌아가시면 다시 출전하셔서 저희와 싸우게 되시는 건가요?”

아실이 묻는다. 불문율에 따르면, 카렐이 포로로서 맹세한 서약을 이행하고 몸값 까지 지불해 자유의 몸이 된다면 다시 같은 상대와 적대하는 것은 문제가 되는 사항은 아니긴 하다.

갑작스러운 질문을 들은 카렐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다.

“음, 그렇지 않습니다. 아실 경. 드 상포리앙 가문은 본래 이번 전쟁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다만 우호 관계인 드 레스펜스 후작가의 요청에, 장남인 제가 가신들을 이끌고 참여했을 뿐입니다.”

아하 그랬구만. 그런데 리니 능선 전투에서 총지휘관이라는 레스펜스 후작이 그런 추태를 부렸으니···.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지난 전투에서 저희 군이 패배했습니다. 후작께서 이러한 실태를 범했으니, 두 가문 상태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지요.”

아실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하긴 작은 가문들이 몰려있고 사이가 대체로 좋은 편인 블랑독 지방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 아니긴 하지.

“어설픈 지휘로 크게 패했고, 소중한 백작 가문의 후계자를 적의 포로로 남겨두고 도망쳤으니··· 레스펜스 후작가가 카렐 경의 가문에 빚을 지게 된 것이군요.”

“그렇소. 에트 경이 잘 정리하셨군.”

그제서야 아실이 알겠다는 듯 두 손을 마주친다.

“비록 이런 형태로 뵙게 되긴 했지만, 앞으로도 트랑카벨 가문과는 적대하고 싶지 않군요.”

“저도! 저도 그래요 카렐 경!”

두 젊은 계승자는 미소를 지으며 마주 본다. 으음··· 이거 미남과 미소년이 마주 보며 웃으니 분위기가 조금 그래지는데. 에이 설마, 아니겠지. 여긴 로맨스물 세상이 아니니까.

“뭣보다, 에트 경이 지휘하는 군대 상대로는 다시는 싸우고 싶지 않소! 이렇게 살아남아 다행이지만 말이지.”

“하하, 그냥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

“하지만 카렐 경은 체격도 좋고 힘도 센 데다가, 금속 강화의 기프트도 가지고 계시죠. 원래대로면 제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거든요.”

“심장이 한번 멈춰 보면 그런 생각 안 들걸?”

우리는 잠시 마주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아실까지도 소리를 내 웃었다. 하아, 그랬지.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 죽어가는 걸 흉부압박을 해서 살려냈었지. 솔직히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계셨구먼!”

갑자기 누가 등짝을 친다! 엄청난 충격이 배면 갑옷을 뚫고 충격파가 심장과 폐를 뒤흔든다. 이러다 심장진탕이 온다고!

“크헉, 톨마르 경, 저 죽는다고요!”

키가 2미터에 가까운 거한, 톨마르 마슈레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켁켁대는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기사 한 명의 용맹과 힘으로 승패가 갈리는 시대는 아니지만, 이 노인네라면 승패를 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엄청난 존재감이다. 실제로 리니 능선 전투에서 최후의 예비대로 적의 후방을 차단할 때의 기세는... 내가 적이었으면 지렸을지도.

“병사들이 숙영 준비를 마쳤습니다. 교대 경비 외에는 휴식을 주었습니다.”

애정이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기는 한데··· 역시 너무 크다. 이 노인네는 아무튼 다 커. 남들 목소리의 성량을 국자질로 비교하면 이 노인은 삽으로 퍼서 뿌리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고하셨습니다, 톨마르 경.”

아실 역시 활짝 웃으며 올려다본다. 톨마르는 트랑카벨 가문의 오랜 가신으로, 현재는 가문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벨모제의 성주를 맡고 있었다. 젖먹이 때부터 곁에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트랑카벨 가문의 두 남매, 특히 동생인 아실을 끔찍이도 아끼는 사람이다.

...사실 이번 전투에도 부르지도 않았는데 아실이 출전한다는 소식 듣더니 휘하 기사들 이끌고 바람처럼 달려왔으니까. 덕분에 뒤 걱정 안 하고 편히 싸우기는 했다만.

아실과 카렐, 그리고 톨마르 경, 남자 넷이서 하는 기괴한 다과회가 시작되었다.

전장에서 내린 차는 먹을 만했으며, 아실의 누나인 트랑카벨 영애가 보낸 이국의 과자는 꽤 맛있었다. 불과 이틀 전까지 적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카렐은 우리와 잘 어울렸으며 농담이 오가며 간간히 폭소가 터졌다.

음, 좋은 분위기야. 그래. 이럴 때 이야기를 꺼내야지.

"그런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진지한 말투로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저는 이번 전투 이후 트랑카벨 가문을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무어라!"

"네에?"

톨마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아실의 날카로운 의문을 담은 목소리 역시 지지 않고 울린다. 카렐의 표정 역시 총 맞았을 때보다도 놀란 것 같다. 아, 반응이 너무 싸하다··· 때가 안 좋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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