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퇴역하고 싶은 용병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트랑카벨을 위하여!”
“트랑카벨!”
그 나팔소리조차 깔아뭉갤 기세의 쩌렁쩌렁한 외침. 후방의 숲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강철과 인간, 말로 이루어진 무리가 쏟아져 나온다.
면갑까지 단호하게 내려 얼굴을 포함해 피부를 드러내지 않는 거의 완전한 전신 갑주.
두껍고 긴, 정면 돌파를 상정한 거대한 기병창과 거기 장식된 색색의 페넌트.
온몸을 철갑으로 감싸고, 말에게도 마갑을 채운 한 세대 이전의 고풍스러운 전사들.
그러나 여전히 강력하고 아름다운 전장의 꽃.
100기를 훌쩍 넘는 중장기병대가 창날을 겨누고 돌진한다. 그 맨 앞에는 백발을 휘날리는 큰 덩치의 노인이 남다른 존재감을 발휘하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트랑카벨의 땅에서 나가라!”
고함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 경우가 딱 그럴 것 같지만, 역시 고함만으로 사람은 죽지 않는다. 대신 거대한 창끝에 찔린 기병의 허리가 휙 하고 굽더니 망가진 인형처럼 허공으로 튕겨 나간다. 잠시 기세를 올리고 있던 적 기병들이 대열을 공포가 훑고 지나가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이다.
전장에서 화약과 기프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질수록, 중무장 기사들의 가치는 줄어들었다. 오랫동안 무술과 승마술을 수련하고, 값비싼 갑옷을 입어 압도적 무력을 자랑하는 것이 기사들이다. 하지만, 볼품없는 보병들이 모여 만든 창벽이나 총병들이 쏟아내는 일제사격이 기사들의 위치를 위협하고 있다.
게다가 갈수록 군대의 규모가 커지고 전투가 단순 힘 싸움에서 벗어나 기동전화 되면서 기사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 또한 온갖 보병 전술들을 개량하면서 그 추세를 더 빠르게 하고 있는 처지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단일 부대의 충격력으로는 이길 상대가 없다.
게다가 주변 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역할로도 말이다!
이 전장이 그 증거다!
“정말 대단하네요! 역시 톨마르 성주님!”
애써 침착을 가장하고 있던 아실 자작의 얼굴에 소년다운 순수한 감탄이 떠오른다. 그렇지, 저걸 보고 가슴이 뛰지 않는 15살 남자애가 있다면 그게 정상이 아니지.
전장에서 온갖 거지 같은 경험을 다 하고 열정이고 뭐고 다 썩어 비틀어져 버린 나조차도 저 가슴 속 깊은 데서 말라붙은 로망인가 뭔가가 꿈틀할 지경인데.
물론 주변의 아군 병사들도 마찬가지다. 적군의 압박에 질린 듯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신병들이 마치 사자처럼 포효하며 적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야아아!”
“물러서! 후퇴!”
숲에서 튀어나온 120기의 기사들은 말 그대로 적 기병대를 ‘돌파’해 버렸다. 적이 수적으로 두 배 가량 많다는 것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기사들은 그저 뚫고 지나갔고, 산산조각난 적 기병들은 부대로서의 존재를 잃어버렸다.
일부는 말을 돌려 달아나고, 달아나지 못한 이들은 바리케이드와 창병들의 포위망에 갇혀 죽거나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바위투성이 오르막을 올라왔으니, 말들이 이미 지쳐있었겠지.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제자리를 돌다가 항복하는 기수들이 꽤 보인다.
기사들은 잠시 흩어져 도망치는 적 기병들을 추적하나 싶더니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음, 이런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않고 예정대로 잘하고 있다.
방어선 밖으로 나간 기사들은 그대로 선회하여 크게 2개 열로 진형을 재편성하더니, 재차 돌격을 시작했다. 빨리 달리지도 않고, 그저 총총걸음으로 적에게 강철의 벽을 쏟아내는 장엄한 중장기병의 돌진.
그 목표는 당연히 아직 귀찮게 진형을 유지하고 있는 중앙의 적 보병 대열.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결정적 공격이라 생각했던 아군 기병들이 순식간에 박살이 나 흩어져 도망치고 있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철갑의 괴수들이 자신들을 노리고 달려온다.
게다가 비탈을 오르느라 이미 지친 상태에서 장시간 전투를 치르느라 기진맥진한 상태.
음, 뭐 대충 각이 나오는구나.
나는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다시 말에 올랐다. 지금까지처럼 몸을 숙이는 것이 아니라 상체를 쭉 펴고 바라본다.
혹시라도 적의 후속 부대는 없는지. 만약에, 만약에 지금까지의 일방적인 전투 흐름이 모두 적장이 ‘계획’한 것이며, 승리를 위한 버림말을 투입했을 뿐이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럴 리는 없겠지.”
함정이라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그나마 전장이 잘 보일법한 바위 위에 화려한 복장을 한 몇 명이 늘어서 있다. 그 주변으로 비슷하게 화려한 호위병들이 보이고. 머저리 지휘관과 그 호위들인가.
역시 함정은 아니었다.
“자작님, 승패가 거의 정해진 것 같습니다.”
“네!”
감탄하는 표정으로 자기 가신, 기사들의 돌격을 구경하고 있던 아실이 내가 갑자기 말을 걸자 깜짝 놀라며 대답한다.
“최후의 쐐기를 위해 중앙에 전진 명령을 내려도 될까요?”
“네, 전권은 맡겼습니다. 에트 경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순수한 신뢰와 감탄의 눈빛을 보내는 귀족 미소년의 미소가 눈부시다. 이렇게 된 이상, 마무리까지 잘 해주는 수밖에.
“전진을 준비한다! 군악수! 전령!”
참모 장교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음, 굳이 쐐기를 따로 박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측면에 기사단의 돌격을 받은 적 보병 방진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그 혼란은 연이어 이웃 부대로 파급이 되어, 중앙부의 적 전체에서 탈주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화려한 복장의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위 위에 있던 적장으로 보이던 자들도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전투를 포기하고 도망치려는 모양이지.
멍청하고, 자존심은 강한데, 운도 없고, 비겁하기까지 하군.
진심으로 적 병사들에게 동정심이 든다.
고통은 빨리 끝내줘야겠다.
“전진 명령을! 적을 밀어낸다!”
전령들에게 명령을 전한다. 군악수들이 나팔을 꺼내 길게 분다. 미리 정해둔 전진 명령. 느슨한 방어대형이던 아군 보병들이 바쁘게 공격을 위한 방진을 만들어간다.
“아, 무기를 버리면 항복을 받아주도록 해.”
나는 명령에 한 마디를 더했다.
덥고 지루하고··· 나름 격렬한 전투를 빨리 끝내자. 최대한 적은 희생으로.
뭔가 전장에서 구르면 구를수록 월급쟁이 마인드가 되어가는 것 같다. 사실 용병이니 틀린 사실은 아니지만서도···.
기병들이 후방을 차단하는 와중에 지금까지 방어선에 박혀서 꼼짝하지 않던 보병들이 진격을 시작하자, 기진맥진한 상태로 간신히 전투를 이어나가던 적군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렇게까지 한계에 몰려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전투는 그렇게 큰 변수 없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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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흐으으흐으음, 퉷!”
제10 카르카냑 보병연대 소속의 화승총병 얀 고티어는 비명도 신음도 아닌 괴상한 소리를 내다가 침을 뱉었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침은 나오지 않았다.
“모두 불 꺼뜨리지 않게 조심해! 전투 안 끝났다!”
장전된 총을 들고 있던 얀과 동료들은 생각났다는 듯, 화승 길이를 조절하고 입으로 후후 바람을 불어 불씨를 살려냈다. 화승은 아주 천천히 타들어 가기는 하지만 타지 않는 것도 아니고, 쉽게 꺼지지 않기는 하지만 아예 안 꺼지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화승총 사수라면 항상 신경을 써야만 했다.
얀은 이번 전투에서 몇 발이나 쏘았는지 남은 탄약포를 세어 보았다. 어? 분명 8발을 쏜 것 같은데 왜 12개 중에 3개 밖에 안 남았지? 갑자기 가슴이 철렁한다.
훈련 도중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것이, 장전을 어디까지 했는지 까먹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엄격하게 기계적으로 장전 단계를 지키도록 손끝이 닳도록 훈련을 받았던 것이고.
화약을 넣지 않고 총알부터 넣으면 총알 빼느라 하루가 걸릴 수도 있다.
반대로 총알을 넣지 않고 화약만 넣으면 허공에 1회분을 날리는 것이다.
꽂을대로 장전을 하다 말고 방아쇠를 당기면 꽂을대를 같이 쏴 버려서 이번 사격은 사격대로 날리고 다음 장전을 못 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는 장전만 두 번 하고 발사하는 것이다. 잘 돼야 불발이고, 최악의 경우 총열 파열로 사수와 주변 사람들이 다칠 수 있다.
혹시 하는 마음에 부들부들 떨며 몇 번이고 남은 탄약포를 세다가 깨닫는다.
아, 맞다. 총에 한 발 장전되어 있지.
안도의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행히 큰 실수를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창병 친구들이 천천히 전진하며 적을 밀어붙였고, 얀을 비롯한 총병들은 창병들의 측면을 보호하면서 조심스럽게 보조를 맞췄다. 주춤주춤 밀려나던 적군은 눈치를 볼 뿐, 서로 더 이상의 적대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저 뒤편으로, 기사들이 벽을 만든다. 벽이라고 해도 촘촘하게 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시 기사들의 위용은 대단하다! 기세에 눌린 적들은 차마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바닥에 무기를 던지고 두 손을 들어 올린다.
“항복해! 무기 버리고, 양손 들어!”
“무릎 꿇어! 죽이지 않는다!”
아군 장교들이 외치자 저항을 포기하는 적들이 점점 늘어난다.
“총구 하늘로! 절대로 쏘지 마! 그래도 언제라도 쏠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해!”
감시하는 역할이다. 얀과 동료들은 총을 세워 들고 화승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입으로 바람을 불어준다. 그 사이에 창병들이 절반은 창을 겨누어 감시하고, 나머지 절반이 무기를 회수한다.
적군 병사들이 애처롭고 불안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다. 한편으로는 드디어 전투가 끝났다는 후련한 감정도 엿보인다. 만약에 졌다면··· 서로 위치가 뒤바뀌어 있었겠지. 자칫하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무기가 회수되고, 풀 죽은 적병들이 한 줄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슬슬 긴장이 풀린다. 장교의 지시로 오발사고를 피하고자 격철을 되돌린다. 총병들은 원래 배치되었던 위치로 귀환했다.
긴장이 풀리고 아드레날린으로 곤두섰던 신경이 가라앉은 얀의 온몸이 쿡쿡 쑤신다. 무시무시한 화승총의 반동을 연달아 받아 낸 오른 어깨가 떨어져 나갈 듯이 아프다. 화문에서 수시로 튕겨대는 불똥에 데인 뺨도 따끔거린다.
그뿐 아니라, 격철 고리 안쪽으로 타들어 간 화승을 밀어 넣다가 실수로 불에 직접 닿았던 엄지손가락에도 물집이 부어오르고 있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목이 말라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화약이 입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종이로 된 화약포를 입으로 뜯다 보면 가루 일부가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얀으로서는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화약에는 물기를 흡수하는 작용을 하는 물질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덕분에, 말 그대로 입안에 바짝바짝 마르고 있었다. 아까처럼, 침을 뱉으려고 해도 뱉을 수가 없을 정도로. 미묘하게 찝찝한 이물감을 참으며 원래 진지로 돌아간다.
원래 위치로 돌아오자, 부대원들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호송되는 포로들을 감시하며 느꼈던 약간의 승리의 흥분이 사라져 버렸다.
두 명의 동료가 바닥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한 명은 얀이 잘 아는 사람이다. 같은 마을 출신으로, 첫 적응 훈련도 같이 받았던 친구. 나이는 얀이 한 살 많지만, 어릴 때부터 격의 없이 형제처럼 자랐었다.
그랬던 그가 얼굴에 총을 맞아 마치 잠자는 것처럼 평온하게 누워있다.
소름이 끼치는 것은, 얀은 전투 내내 그가 전사했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부지런히 손을 놀려 장전하면서 옆에 농담을 건네기까지 했다. 살아있는 친구가 듣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그 외에 한 명이 손에 큰 화상을 입었다. 장전 순서를 헷갈렸기 때문이다. 화승이 물린 격철을 당기지 않고 화문에 점화약을 부어 넣었다니! 다행히 점화약 주머니 자체에 불이 옮겨 폭발하지는 않았다.
폭발했으면 손가락을 잃었을 수도 있지만, 요행히 손가락은 멀쩡했고, 대신 손바닥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장교가 약을 발라주고 있었다.
“화상 입은 녀석 또 있나? 어? 얀! 꼬라지를 보니까 화승을 손으로 잡았구나!”
“으읏, 맞습니다···.”
“이 약은 교관님이 사 주신 거니까 말이야. 나중에 감사하다고 인사해라. 화상 연고는 꽤 비싸다고.”
“아, 알겠습니다!”
그 외에도 크고작은 화상을 입은 병사들은 조금씩 약을 발랐다. 약이 좋은 건지, 그냥 기분 탓인지 붕대를 감자 통증이 확실히 줄어든 느낌이다.
“이겼다!”
“우리 승리다!”
“트랑카벨 만세!”
저 멀리서부터 술렁술렁하더니, 승리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진다. 아마도, 영주님이 승리 선언을 하신 모양이지.
“이겼다 이 녀석들아!”
장교가 외친다. 얀은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옆에서 동료 병사들이 양손을 치켜드는 것을 보았더니 머릿속에서, 저 가슴 깊은 어딘가에서 뭔가가 치솟아 오른다.
“으아아아아아!”
포효.
죽지 않았다. 이겼다. 크게 다치지 않았다. 자신감이 생겼다. 등등.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얀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짐승 같은 괴성을 질러댔다.
이번에는 승리했다.
다음에도 꼭 승리하고 싶다.
풋내기 화승총병 얀 고티에의 첫 출전은 이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