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퇴역하고 싶은 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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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전장을 살펴본다. 아무리 조악한 흑색화약의 총탄이 오가는 전장이라지만, 저격으로 인한 장교 부상률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용병으로 전장에 나왔다면 목숨을 아끼기만 하면 안되지만 적어도 아껴서 쓰기는 해야지. 그래야 비싸게 팔린다.
게다가 오늘은 언덕 위 능선을 따라 포진했기 때문에 장소가 협소해서 적과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래서 아실 역시 말에서 내리도록 했다.
전투는 대충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적장은 아마추어다. 아마 이번 전투가 첫 지휘겠지. 아니면 이런 거지 같은 지형에서 지휘해본 경험이 없거나.
거지 같은 지형이니 제발 오지 말라고 광고를 했는데, 그게 경고라는 사실을 알아챌 능력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멍청한 지휘관 덕분에 그 병사들이 대신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불쌍한 인간들···. 아마 저들도 멍청한 인간을 지휘관으로 고르고 싶지는 않았을 텐데.
“아군이 이기고 있는 것 같은데, 맞나요?”
아실이 까치발로 고개를 내밀며 주변을 살핀다. 키가 작아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다음에는 발판이라도 준비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금은 지휘부가 최전선에서 너무 가까운 상황이다. 눈먼 총알이 어떤 변수를 만드는지 수없이 보아 왔으니까.
“으음, 계획대로 진행은 되고 있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지요.”
조심스럽게 대답했지만, 솔직히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반쯤은 적장이 실패한 덕이다.
적장은 이 전장이 단순히 평평한 사면이 아니라, 중앙이 불룩 튀어나온 특이한 지형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래쪽에서 보기에는 중앙 쪽의 비탈이 가파르지만, 어느 선을 지난 시점부터는 중앙의 비탈이 가장 완만해진다.
이 사소하다면 사소한 차이가 병력 투입에 시간차를 발생시켰고 선두의 적 보병들이 아군 총병과 쇠뇌병에게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 결과를 가져왔다. 약 3분 후, 적 사격부대가 최전선에 도착했을 때는 몇 번이나 총알과 화살을 뒤집어쓴 보병들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게다가 어정쩡하게 하나의 큰 부대로 뭉친 보병들 역시 나쁜 결과만 낳았다. 이 시대의 전장에서 거대한 보병 방진이 힘을 받는 것은 상식이다. 다소 비효율만 각오한다면 결국 보병 힘 싸움에서는 숫자가 힘을 발휘하니까.
거듭 말하지만, 여기가 평지였다면 말이다. 그랬다면야 가늘게 선형으로 배치된 아군 전선을 묵직한 방진의 질량으로 밀어붙여 뚫어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바위투성이 지형이 밀집 방진을 유지하지 못하게 막았고 비탈과 더운 날씨가 빠르게 병사들의 체력을 깎아냈다. 결국, 장교들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시작된 시점의 전투 대형은 엉망이었다. 이래서야 대규모 방진의 충격력이 전혀 발휘되지 못할 수밖에. 게다가 어중간하게 차지하는 공간만 많으니 후속하는 사격부대가 사격각을 잡기 힘들게 만드는 결과만 되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정말로 적장은 경험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이래서 집안 좋다고 아무나 지휘관 시키는 봉건 사회는 안된다니까.
중앙의 적은 완전히 고착됐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무익하게 창질이나 하다가 도망치겠지. 나는 오른편의 방어선을 바라보았다. 아까 이야기했던 비탈의 차이와 우측 방어선을 좀 더 안쪽으로 접어서 배치한 덕분에 시간차가 발생해 이제 막 전투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이고 말을 몰아 우익 쪽으로 향한다.
내가 정확히 예상한 대로의 상황이 발생한다.
"돌격!"
"이야아아아!"
창병 방진으로 도전해온 중앙과 다르게, 몸통을 가릴 정도의 작은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근접 보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온다. 적군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다. 하지만 그곳은 말이다....
개미 떼처럼 몰려든 적 보병들이 우리 방어선 앞에 움푹 파여 있는 지형에 이르렀다. 폭 5미터 정도의 지형을 지나 나지막한 비탈을 오르면 그 위에 아군이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중앙과 비교하면 배치된 부대도 적고 당연히 병력 밀도도 낮았다. 아마 이걸 노리고 검과 방패로 무장한 근접 보병들을 배치해서 난전으로 밀어붙이려고 한 것 같지만....
그렇게 배치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게 뭐야!"
"어어? 어어어!"
그 움푹 들어간 자리가 다 늪이거든. 묘하게 언덕의 응달쪽 자리 잡은 좁고 기다란 늪지는 장마 시기에 비가 오면 물이 흐르며, 건기에는 표면에 풀이 자라는 고운 흙으로 된 특이한 지형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들어가 봤으니까.
딱 세 걸음 성큼성큼 걸어가자 순식간에 늪지대에 무릎까지 빠졌고 호위병들이 창대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농담이 아니다. 결국, 진흙 속에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냄새는 어찌나 고약한지, 한참을 씻었는데도 온종일 냄새가 빠지질 않더라. 지금도 생각만 하면 종아리까지 썩어들어 가는 기분이다. 그 물컹물컹한 기분이란.
가능하면 전장이 될만한 곳은 보급품 수레를 끌고 돌아다녀 보는 것이 내 방식이다. 내가 걸어서 통과할 수 있는 곳이면 보병부대가 통과할 수 있고, 수레가 통과할 수 있는 곳이면 기병부대나 보급부대가 통과할 수 있다.
아무리 천재 전술가라고 해도 지도에서 모든 것을 읽을 수는 없다. 나는 천재 전술가도 아니고 하니 몸으로 뛰는 수밖에. 그게 별다른 재주도 없이 생전 모르는 이세계에 떨어진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비결이다.
하지만 적은 그게 안 됐고, 저 수상한 장소로, 아니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늪지대로 병력을 돌격시켰다. 말 그대로 꼬라박을 했다 이 말이다.
나 혼자도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거렸던 장소이다. 거기에 칼과 방패로 완전 무장한 보병들이 무더기로 들어갔으니... 원래 물에 빠진 상황에서는 근처에 나와 비슷한 상황인 놈이 있으면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방해가 된다.
“발사!”
우측 방어선에 배치된 아군이 사격을 시작했다. 납탄과 화살이 불과 몇 미터 앞에서 늪지대에 발이 묶여 허우적대는 병사들을 향해 쏟아진다. 이 거리에서는 방패도 갑옷도 의미가 없다. 기세 좋게 달려들던 적병들이 무의미하게 쓰러져 간다. 역겨운 녹색이 섞인 진흙탕에 병사들이 뿌린 혈흔이 천천히 번져간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늪은 바닥이 없어 사람이 빠져 죽을 정도의 깊이는 아니다. 어떻게든 건너올 수는 있다. 무릎까지 진흙투성이가 된 병사들이 반대편으로 건너와 비탈을 오르기는 한다.
하지만,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의 손아귀처럼 발목을 잡아채는 진흙 속을 지나느라 체력을 낭비했다.
바지에 온통 진흙이 묻어 무거운데 털어내지도 못해 발걸음이 무겁다.
그 아래는 늪 속에서 신발을 잃어버려 흙투성이 맨 발이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아 정신적 타격까지 입은 상태로 비탈을 오르는 병사들을 기다리는 것은 촘촘한 창날의 벽이었다.
검과 방패로 무장한 근접 보병들이 창병 방진에 위협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미처 대응하지 못한 측면에 붙거나, 방패로 차근차근 창날을 쳐내며 안쪽으로 들어오거나, 창날 아래를 기어서라도 근접했을 때는 말이다.
하지만 몸 상태까지 만전이 아닌 상황에서 띄엄띄엄 한 명 두 명씩 도착한 보병들이 창날의 벽을 뚫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어정쩡하게 머뭇대다가 화승총병의 근거리 사격에 피를 뿌리고 마는 것이다.
비탈 아래로 쓰러진 적병들의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제 무리해서 비탈을 오르는 적병이 줄어든다. 늪을 빠져나갈 힘이 있어도 공포로 인해 빠져나가지 않는 것이다.
이건 끝났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필 날씨까지 더워서 갑옷을 입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체력이 쫙쫙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전의를 잃었다? 무기가 갑자기 천근만근으로 느껴질 것이다. 내가 왜 여기 있나 회의가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상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겁먹지 마라! 아군 숫자가 훨씬 많다!”
쩌렁쩌렁한 중저음의 목소리. 자신이 말하는 바를 믿어 의심치 않는 확신을 가진 목소리. 연극배우를 해도 대성할 것 같은 목소리. 영웅의 목소리이다.
나로서는 귀찮은 놈들의 목소리지.
“내가 앞장선다! 드 상포리앙을 따르라!”
상포리앙··· 이 녀석들 드 상포리앙 가문 녀석들이었구나. 저 북쪽 어딘가의 백작 가문이다. 복잡하게 얽힌 매듭 모양의 문장기를 보니 이제 기억났다.
“가자!”
긴 장화를 신은 발목을 제외한 거의 온몸을 갑옷으로 감싼 젊은 귀족이 고상한 날 밑 장식이 달린 검을 치켜든다. 고함을 지르며 늪지대를 지나기 시작하자 어찌할 줄 몰라 하던 적병들이 주위에 모이기 시작한다.
전의와 판단력을 잃고, 전진도 후퇴도 못 하고 그저 흩어져있던 적병들이 어설프게나마 쐐기 형태의 대형을 이루고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웅성대는 군중이 되어 전투에서 탈락했던 적이 다시 부대의 형태를 가지고, 전투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래서 카리스마 있는 놈들은 귀찮다니까.
내가 따로 명령을 전할 필요도 없이, 경험 많은 트랑카벨의 가신이나 용병 출신인 장교들이 상포리앙의 귀족 놈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한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효과가 없다. 탄이 적병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강과 전의를 되찾자 앞사람이 쓰러진 자리를 뒷사람이 채우기 시작했다. 부대로서 유기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재장전이 오래 걸리는 화승총의 사격이 뜸해진 사이, 적 보병들이 다시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뿐 아니다. 선두에 선 상포리앙 가문이라는 귀족의 갑옷에서 희미하게 하얀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 녀석, 기프티드, 능력 사용자다.
이 세계의 인간 중 일부는 ‘기프트’라 불리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다. 그 능력 사용자들을 기프티드라고 부른다.
아마도 ‘소재’를 다루는 아키텍티 계열의 기프트겠지. 자신과, 어쩌면 주변의 병사들의 금속 갑옷을 강화 시키는 형태 같다. 어쩐지 가까운 거리인데도 총알이 튕기는 것 같더라니!
“돌격!”
“이단자들을 죽여라!”
“우와아아!”
적군이 창병진에 돌격해온다. 아군의 가지런한 창날이 진흙으로 지저분해진 적의 방패에 부딪힌다. 적은 방패로 밀치고 칼로 쳐내며 어떻게든 안쪽으로 파고들려 하고, 아군은 창날로 어떻게든 밀어내려 한다.
큰일이다.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늪지대 믿고 이 지역은 병력을 적게 배치해놨다. 창병진의 깊이가 4열뿐이다. 사기가 높은 데다가 강화 기프트까지 쓰는 기사가 이끄는 병력을 막기에는 부족하다.
하나는 허리에, 하나는 가슴 앞에 찬 권총을 만지작거린다. 손이 떨린다. 쇠로 덮인 엄지손가락이 흉갑과 부딪혀 미세한 소리가 들린다. 왼손을 들어 오른 팔목을 꽉 잡는다.
빌어먹을, 손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개 같은 전쟁, 오늘까지만 하고 때려치워야지.
어차피 내 임무는 전투 지휘도 참여도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트랑카벨 가문에서 새로 창설하는 연대들의 교관, 기껏해야 가문의 후계자 아실 트랑카벨 자작의 전술 고문일 뿐이지.
그런데 예상보다 전쟁이 빨리 일어났고, 내가 키운 햇병아리들이 전투에 너무 빨리 투입되는 상황이 왔다.
모처럼 키운 신병들이 무익하게 전장에서 쓸려나가면 꿈자리가 좋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제 겨우 15살인 꼬맹이 자작님을 차마 전장으로 혼자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뒤에서 전술 조언만 하려고 했는데···.
여러모로 너무 깊이 개입해 버렸다. 물론 순박하지만 똘똘하고 열의 넘치는 시골 청년들로 이루어진 신병들에 정이 많이 들고, 아실이라는 소년이 모시는 맛이 나는 괜찮은 귀족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니 엄청 호구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용병은 받은 만큼만 일하는 것이 미덕일 것인데. 그래도 오늘 까지다. 딱 이번 전투까지만 하고 용병 때려치운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목을 더욱 꽉 잡았다. 떨림이 멎은 것 같다가도 손을 떼면 다시 떨린다. 용병인데, 손 떨림이라니.
“못 올라오게 막아!”
“증원! 증원 이쪽으로!”
근처에서 장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다. 병사들은 신병이고, 장교들도 신통찮다.
금속 강화를 사용하는 기사라니, 전장에서 흔히 마주치는 존재가 아니니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겠지.
다 이긴 전투, 이대로 우익이 무너지게 둘 수는 없으니 내가 나서야 한다. 심호흡 후 허리에 찬 총을 우선 꺼낸다. 이판사판, 빗나가면 어쩔 수 없지.
“잠시 지나갈게.”
나는 다닥다닥 붙어 선 창병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대열 안으로 들어간다. 친절해서가 아니라, 전장의 소음 속에서 대열을 무너뜨리지 않고 지나가려는 목적이다. 밀집대형 안의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가장 첫 열과 두 번째 열 사이에 도착한다.
“에잇! 비켜라!”
상포리앙의 기사 양반은 우리 창병들의 창날 사이에 끼어서 창날을 걷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자신은 전신 갑옷을 입었기에 검으로 창을 쳐내며 억지로 전진하고 있었지만 다른 적들은 1미터 이상 뒤처져 있다.
다행히 타이밍은 맞은 것 같다.
나는 심호흡을 한 다음, 미리 장전된 권총의 격철을 눌렀다.
그리고 크게 외쳤다.
“상포리앙의 기사라고 하셨소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