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49화 (449/450)
  • 90화. 세월 (4)

    “하아압!”

    낭랑한 기합과 함께 휘두르는 목검.

    목검을 부딪친 두 소년이 서로의 노림수를 헤아리면서 초식을 가져가고 투로를 잇는다.

    굳이 나이를 들먹이지 않아도 빼어난 실력에, 검에 실린 기세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목검이라 해도 적중하면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짓이겨질 위력.

    그러나 소년들은 때리는 것도, 맞는 것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지 아랑곳 않고 대련을 이어갔다.

    강철만큼 단단하다는 자단목검을 휘두르며 허점을 노리고 투로의 연결고리를 절묘하게 찌른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허초와 변초를 가하면서 상대를 자신의 간합으로 끌어들이며 반격했다.

    그렇게 얼마나 공방을 이어갔을까.

    백여 초를 싸울 무렵 좀 더 성숙한 소년이 상대의 초식을 파탄내면서 목검을 쳐냈다.

    하늘 높이 올라간 목검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땅에 떨어지고, 소년은 상대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내가 이겼다, 동생아.”

    명교의 대공자 강무진.

    부모의 무재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소년이 싱글벙글 웃는 모습에 패배한 소년은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에휴, 오늘은 좀 더 버틸 줄 알았는데....”

    “저번보단 강해졌어. 다만 이 형님도 나날이 발전한다는 말씀. 날 따라잡으려면 더 열심히 수련해야지?”

    “...한 번 더 해. 이번엔 능력도 쓸 거야.”

    “푸흐흐, 얼마든지 받아주마.”

    쾌활하게 웃은 강무진이 물러나서 기수식을 취하자 소년 역시 검을 줍고 자세를 낮췄다.

    강무진의 동생이자 강엽과 백서희의 차남인 강무린은 입을 꾹 다문 채 진기를 가다듬었다.

    그 순간, 두 소년이 어둠 속에 녹아들면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직후 고막을 때리는 파찰음. 각각 하얀 기운과 검푸른 기운이 부딪치면서 불똥이 튀었다.

    형제라고 해도 두 소년이 물려받은 무공은 달랐다.

    강무진은 아비의 일월신마공을, 강무린은 어미의 전륜구룡공을 물려받았던 것이다.

    강무린의 무재도 형 못지않게 출중했으나, 수련의 시간에서 밀렸기에 승리는 강무진의 차지였다.

    ‘아이고, 쉽지 않네. 이 녀석도 괴물처럼 강해지니....’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누님과 어린 동생들을 떠올린 강무진은 입맛을 다시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야 자신이 가장 강하지만, 조금이라도 수련을 게을리하면 밀릴 만큼 다들 뛰어났던 것이다.

    짝짝짝짝!

    문득 두 형제의 귓전을 파고드는 박수 소리.

    고개를 돌려세우니 형제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엇, 좌사자님?”

    “완 할아버지!”

    그래도 강무진이 의젓하게 직함을 부르는 한편, 두 살 어린 강무린은 천진난만하게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완안극이 답지 않게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두 분 공자님의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군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란 말이 딱 공자님들의 성장세를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흐음, 아부해도 드릴 게 없는데요.”

    “아부라니요. 당치 않는 말씀입니다. 교주님과 대부인께서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시는데요.”

    “...알아요.”

    강엽은 엄격했지만 칭찬에 인색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질책했다.

    어쩌다 두 형제가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개선할 점을 알려주기도 하지 않던가.

    강무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강해지려면 멀었어요.”

    동생은 형을 경쟁 상대로 삼았지만, 강무진이 바라보는 것은 부친의 등이었다.

    “아버지는 이립이 되기도 전에 심상지경에 오르셨다고 들었어요. 근데 저는....”

    “공자님.”

    부드럽게 입매를 푼 완안극이 소년의 어깨를 짚었다.

    “교주님은 스무 살때까지 무공의 무 자도 모르셨습니다. 그때까진 공맹의 가르침만 좇으셨지요.”

    “그건 알고 있지만....”

    “그에 비하면 공자님의 출발은 굉장히 빠릅니다. 태어나자마자 벌모세수를 받으셨고, 좋은 스승들에게 무공을 배우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아버지만큼 강해질 수 있을까요?”

    “모릅니다.”

    단적으로 대답한 완안극은 형제가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기 전에 잽싸게 말을 이었다.

    “교주님이 강하신 것은 그분께 시련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이 목숨을 건 싸움이었지요. 적들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태양과 흡혈귀의 본능, 그 모두가 그분을 옥죄는 적이었지요.”

    강무진뿐만 아니라 강무린도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였음에도, 듣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태양 때문에 고생하신 건 실감이 안 나요. 온몸이 타서 목숨이 위험하셨다니....”

    두 형제도 태양과 친하진 않았으나, 무더운 여름날에 햇볕을 쐬면 약간 현기증이 나는 정도에 불과했다.

    강엽처럼 온몸이 불타는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이다.

    “너무 조급하실 필요 없습니다. 공자님들께서 무공을 열심히 수련하고 실전을 겪으시면, 언젠가는 심상지경에 닿으실 테니까요.”

    자만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두 형제는 강해지리라.

    완안극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칭찬을 늘어놓을 때였다.

    문득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돌처럼 굳어버리자 형제는 불길함을 느끼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왜 그러세요?”

    “으음... 아무래도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송 노야께서....”

    강엽에게 학문을 가르친 송계학.

    그는 정마대전이 끝난 뒤에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명교에 눌러앉아 강엽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위급하신 모양입니다. 대부인께서 공자님들을 찾는다고 하니 속히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두 형제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 * *

    “스승님.”

    강엽은 착잡한 얼굴로 스승의 손을 쥐었다.

    세월과 함께 고목처럼 앙상하고 주름이 늘어진 손을 어루만지면서 스승의 얼굴을 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정했던 스승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얼마나 놀랐던가.

    며칠 전에 비해 부쩍 수척해진 노학자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맺혔다.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살 만큼 살았느니라.”

    “스승님, 어찌 그런 말씀을....”

    “행여나 활명술인지 뭔지로 이 늙은이를 살릴 생각은 말고. 사람은 천수를 누렸으면 가야 하는 법이다.”

    “...그거 이 제자를 비꼬는 말 아닙니까?”

    “허허, 넌 아직 젊지 않느냐.”

    안색은 초췌한데 목소리는 밝았다.

    태양이 지기 직전 잠시 밝아지는 것처럼, 송계학의 생명도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이다.

    “살짝 아쉽긴 하구나. 네 자식들이 관례를 올리는 것까진 보고 싶었거늘....”

    “충분히 그러실 겁니다. 무진이는 이제 열다섯 살입니다. 오 년만 더 사신다면...!”

    “엽아.”

    말문이 막힌 강엽의 손을 살짝 두들긴 송계학이 입꼬리를 올렸다.

    묘하게 초점이 맞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는 틀림없이 제자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넌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였느니라.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

    “....”

    “허허, 회자정리라 했다. 만남엔 헤어짐이 따르는 법이지.”

    “스승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을 겁니다. 제 목숨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스승이 잠에 든 것을 확인한 강엽은 나직한 한숨을 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뒤에 있던 송하영 부부가 다가왔다.

    “고마워요, 사형. 할아버지 곁은 저희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이제 가보세요.”

    “그래, 스승님을 부탁한다.”

    송하영의 남편과도 인사를 나눈 뒤, 강엽은 스승의 거처를 나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송계학의 죽음이 천기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어서일까. 한 시대를 풍미한 노학사의 죽음이 임박했는데도 하늘은 평화롭기만 했다.

    “여보.”

    “상공....”

    바깥에선 다섯 여인을 비롯해 아이들이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장남인 강무진과 차남인 강무린, 삼남인 강무정, 사남인 강무호, 그리고 장녀인 강세령과 차녀인 강세민, 삼녀인 강세아.

    “스승님은 너희들에게도 글과 사람의 도리를 가르쳐주셨지. 너희는 마땅히 그분의 곁을 지켜야 한다.”

    “송 조부님은 저희 형제에게도 스승입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그분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강무진의 대답에 강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원을 걷다, 가까운 의자에 비틀거리듯 주저앉았다.

    백서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엽의 등을 쓸었다.

    “괜찮아요?”

    “...언젠가는 닥칠 일이었지.”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것이 처음은 아니잖은가.

    다만 부모처럼 섬겼던 스승이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을 가누기 힘들 만큼 공허해졌다.

    아비의 약한 모습을 처음 보는 아이들이 충격받은 표정을 짓자 강엽은 쓰게 웃었다.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아, 그, 그게....”

    “아비도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위대한 신인이라 일컫지만... 난 그런 존재가 아니야.”

    묘한 기색을 띠는 아이들을 바라본 강엽은 일곱 명의 아이들을 팔 벌려 안으면서 말했다.

    “절대자는 외롭다고 하지. 하나 누구도 외롭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아비는 너희가 있어 외롭지 않구나. 힘들어도 너희 덕분에 버틴다.”

    “아버지....”

    서로를 의지하는 아비와 자식들의 모습을 본 여인들은 눈매를 훔치면서도 흐뭇하게 웃었다.

    이튿날, 송계학은 가족과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편안한 미소를 남기며 눈을 감았다.

    강엽은 가족들과 함께 스승을 장지까지 호종했으며, 황실 또한 노학사의 죽음을 기리며 시호를 하사했다.

    ‘회자정리라....’

    송계학이 유언처럼 남긴 말을 입 안에서 굴려본다.

    그의 말처럼 만나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니, 강엽이 알던 사람들도 언젠가는 곁을 떠날 것이다.

    염왕 또한 비슷한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추억을 많이 쌓아둬라. 훗날 네 곁의 사람들이 떠나면 행복한 추억이 널 지탱할 테니까.

    이별은 심장이 찢길 만큼 아팠지만, 언젠가는 맞이할 결말이었다.

    그러나 그 이별을 겪으면 겪을수록, 마음은 닳고 마모되어 오욕칠정을 잃어버릴 터.

    ‘진조, 당신이 왜 죽음을 바랐는지... 지금이라면 조금은 알 것 같다.’

    하지만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았기에, 떠나간 이들보다는 소중한 사람들이 더 많았기에.

    강엽은 추억을 보물처럼 여기며, 소중한 사람들과 추억을 쌓아가며 행복을 만끽했다.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 * *

    점창파는 전쟁의 참화 뒤에도 문파를 재건하여 운남의 부족들을 아우르는 대방파가 되었다.

    출신이 어떻든 바른 품성을 지녔다면 가르침을 베풀었기에 성세를 되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편 운남 북쪽의 옥룡설산엔 행방이 묘연해진 설산파의 여제자가 돌아왔는데, 그녀는 뛰어난 무공으로 도적들을 평정하고 문파를 재건했다.

    금사하라는 이름을 지닌 그녀는 수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며, 그들을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혈교에 의해 강시로 변모한 그녀는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았고, 훗날 신교주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제자에게 문주직을 넘겨주고 떠났다.

    설산의 전설이 된 그녀는 일대종사로 추앙받으며 설산검모(雪山劍母)라는 별호로 불렸다.

    * * *

    광명마교에게 멸문당한 남궁세가는 젊은 여가주의 인도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고향인 양주의 장원에 돌아온 그녀는 연씨 성을 쓰는 무인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사업을 벌이고 무사들을 충원하며 가문의 영역을 확장, 삼십 년 뒤엔 명실상부 남직례의 맹주가 되었다.

    그녀의 아들들 또한 뛰어난 무공과 협심으로 명성을 떨치며 정도십대고수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남궁세가는 다시 한번 웅비했다.

    * * *

    불문의 성지인 소림은 멸문했지만, 승려들은 속가 제자들의 도움으로 사찰을 다시 세웠다.

    강호를 방랑했던 아라한이 사문에 돌아와 제자들을 모았으며, 그는 제자들과 속가 문파들의 동의를 얻어 방장이 되었다.

    부족한 살림에도 언제나 빈자들을 먼저 보살폈던 승려.

    과거를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무망(無忘)이라는 법명을 지은 그는 세월이 흘러 불권을 계승한 신승으로 세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등봉현에 객잔을 연 대머리 친구가 숭산을 찾아와서 똑같이 대머리가 됐다고 놀렸는데, 그때마다 그는 껄껄 웃으면서 받아쳤다.

    “소승은 스스로 머리를 깎았소만, 주인장은 안 자라지 않소?”

    물론 대머리 친구가 화를 낸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그들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우정을 유지했으며, 눈을 감을 땐 하얀 장삼을 걸친 청년이 찾아왔다.

    * * *

    검선이 영면한 뒤 장문직을 맡은 현운 진인은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무당파를 이끌었다.

    그는 간혹 사문을 떠나 먼 운남으로 갔는데, 가까운 이들은 그가 파문된 사형이 묻힌 무덤을 찾는다는 걸 알고 착잡해했다.

    고희가 되었을 때도 창창했던 그는 돌연 장문직을 제자인 청수 도장에게 물려주고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강호엔 부평초처럼 세상을 떠돌며 협을 행하는 늙은 검객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청수 진인은 스승의 뒤를 이어 훌륭히 무당파를 이끌었고, 사조처럼 태극검선(太極劍仙)이라 불렸다.

    반백 년 동안 무당파를 이끈 뒤 금분세수를 했는데, 만인이 보는 앞에서 씩 웃으며 연기처럼 사라졌다.

    세인들은 무당파의 장문인이 우화등선을 했다며 놀라워했다.

    * * *

    화산파의 옥청선자는 평생을 화산의 재건에 이바지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육성했다.

    세월이 지나 천하팔존의 반열에 오른 그녀는 무당의 장문인과 함께 백도이검(白道二劍)이라 불렸다.

    오랫동안 화산을 수호했던 그녀는 가장 아끼는 적전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강호를 떠났다.

    백 세가 되어 임종할 무렵, 하얀 장삼을 휘날리는 수려한 청년이 그녀를 방문했다.

    천기의 변화를 감지하고 조용히 찾아온 청년의 손을 잡은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자네는 세월을 비껴가는군. 대체 언제 강호를 떠나려는가?”

    청년이 대답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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