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세월 (3)
“혼인 동맹이라....”
명교를 찾아온 북해빙궁 사절단의 서찰.
사절단의 책임자가 비밀리에 전한 서찰을 읽은 강엽은 연회가 끝난 뒤 측근들을 불러모았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제안만 보면 나쁘진 않군요.”
우사자 예건룡이 대답했다.
“빙궁의 세력권은 세간에 알려진 이상으로 넓습니다. 북해는 물론 만주와 몽골, 심지어 아라사(俄羅斯 : 옛 러시아)에도 영향을 미치니까요.”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포교하기 쉽다?”
“교주님께서 중원을 넘어 새외의 영역까지 염두에 두신다면 빙궁의 도움은 필수입니다.”
강엽이 고개를 주억였다.
빙궁의 입장에서도 상임 문파의 지위를 굳히려면 명교의 도움이 필요한 만큼 서로 이득을 볼 수 있겠지.
당장은 빙궁이 더 많은 덕을 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명교의 세력권을 넓힐 수 있으리라.
“문제는... 하오문도 같은 서찰을 보냈다는 거군.”
강엽이 또 다른 서찰을 올려두자 측근들의 얼굴에도 떨떠름한 기색이 떠올랐다.
예건룡의 맞은편에 앉은 좌사자 완안극이 말했다.
“숫자만 보면 개방에 버금가는 이들이 하오문입니다. 오히려 문도들이 여러 직종에 종사하며 강호의 풀뿌리를 이루니, 그들이 도와준다면 교세를 넓히는 데 수월할 겁니다.”
“혼인 동맹을 하면 포교를 적극적으로 돕겠다라....”
무림 문파를 넘어 종파로서 불가와 도가 등 토착 신앙과 겨루려면 수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강엽이 천산으로의 순례길을 열고 병자들과 빈자들을 받아들이며 교도들을 늘리고 있었지만, 아직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
‘확실히... 단기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이 땅에 토착 신앙이 뿌리를 내리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음을 생각하면 매우 어려운 과업이다.
명교의 비선과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도 사람들의 믿음을 단기간에 바꿀 수는 없는 법.
그러나 명교뿐 아니라 하오문과 빙궁의 힘을 동원하면 그 기간이 많이 단축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하오문과 빙궁에 도움을 청했거늘, 그들은 혼인 동맹이라는 건을 들고 왔다.
‘후계 구도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어. 다만....’
역대 왕조들을 보면 후계 문제로 인해 나라가 뿌리째 흔들렸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자리에서 물러난 뒤 후손들이 상잔을 벌일 여지를 없애기 위해 후계 구도를 명확히 했다.
명교는 백서희의 소생이, 태화문은 조영옥의 소생이, 당문은 당묘정의 소생이 물려받기로 한 바.
설사 이 혼인 동맹을 받아들여도 명교의 후계 구도가 흔들리는 일 따위는 없다.
‘무진이와 무린이, 둘 중 누구에게 물려줄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정할 일.’
얼마 전에 태어난 차남을 떠올린 강엽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교주님은 천하의 주인입니다. 황제도 수많은 비빈과 첩들을 거느리는데, 교주님이라면....”
“그렇지만 대부인의 뜻도 여쭤봐야....”
수하들이 왈가왈부 떠드는 소리에 강엽은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일단 이 건은 거절하지. 다만 바로 거절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거절한다. 두 문파가 어떤 생각으로 혼인 동맹을 제안했는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제안을 거절하더라도 두 문파가 원하는 게 뭔지 안다면 쌍방이 만족하는 거래를 할 수 있을 터.”
무작정 거절하면 저쪽도 체면이 상하기 마련.
명교가 다른 문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지만, 우호적인 문파에게 굳이 결례를 저지르는 건 하책이었다.
강엽의 결정에 측근들은 머리를 조아렸다.
* * *
“말하자면 정략혼이네.”
온 가족이 함께하는 다과회.
식사를 마친 후 세 부인이 모인 자리에서 강엽은 두 문파의 서찰 내용을 말해주었다.
당연히 세 부인의 표정이 좋을 리 만무.
한쪽에서 아이들끼리 놀고 있는 광경을 바라본 백서희가 툭 내뱉듯 말하자 조영옥이 눈을 흘겼다.
“상공도 참... 우리로는 만족하지 못하세요?”
“아니, 그럴 리가. 이 건은 거절할 생각이오. 수하들에게도 그리 일렀고.”
자칫하면 본전도 못 찾을지 모른다.
그런 위기감을 느낀 강엽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하자 당묘정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상대는 홍 소저와 야율 소저인가요?”
“두 사람 다 상공과 인연이 있고, 저희와 모르는 얼굴도 아니네요. 백 동생은 어때?”
아이들이 노는 모습만 보고 있던 백서희가 턱을 괴며 피식 웃었다.
“기분이 좋겠어요?”
“응. 그렇지.”
“근데 받아들여야 해요.”
가장 반대할 줄 알았던 백서희가 그렇게 말하자 강엽은 물론 다른 두 여인도 깜짝 놀랐다.
강엽이 낮게 가라앉은 안색으로 물었다.
“...진심이냐?”
“이런 걸 장난 치겠어?”
“그럼 왜....”
“난 명교의 안주인이니까.”
“...?”
“명교에 도움이 된다며. 그럼 받아들여야지. 하오문과 빙궁 덕분에 교도들이 늘어난다면... 장차 우리 아이들의 힘이 될 거 아냐.”
“굳이 그들의 도움을 안 빌려도 돼.”
“하지만 더 효과적이잖아. 나도 대부인을 오래 하니까 알겠더라. 민초들이 명교를 믿어야 교세를 넓힐 수 있어.”
전대 신녀인 유소향에게 내조와 교단의 예법을 배운 백서희는, 이제 개인의 입장을 넘어 명교라는 거대한 문파의 안주인으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조 언니와 당 동생은 입장이 달라. 그러니까 반대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섭섭하긴 하지만... 두 문파 생각도 이해해.”
조영옥이 어깨를 으쓱 추어보이며 덧붙였다.
“상공의 혈통은 특별하잖아? 나도 상공을 사모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장차 태화문의 후계자는 뛰어난 핏줄을 타고나길 바랐어.”
즉, 하오문과 빙궁 모두 미래를 내다보고 강엽의 핏줄을 원한다는 뜻이었다.
강엽이 어이없어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종마도 아니고....”
“풋, 말이 그렇다는 거죠. 다만 우리 아이들이 태화문을 반석에 올려둘 거라는 건 상공도 동의하시잖아요.”
궤를 달리하는 수명과 자질, 그리고 독특한 능력들까지.
강엽처럼 불로불사를 누리는 건 아니라 해도, 그 핏줄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소첩은 장차 상공의 핏줄이 전 무림에 퍼져나갈 거라 생각해요. 어쩌면 헛된 욕망을 품은 자들이 우리 후손들을 노릴지도 모르고요. 그럴 바엔 미리 많이 퍼뜨려서 희소성을 떨어트리는 게 낫지 않겠어요?”
“글쎄, 그게 별로 좋은 일인지 모르겠는데.”
강엽이 쓴웃음을 지으며 차를 홀짝이는데 당묘정이 옆에서 조영옥의 말을 거들었다.
“가문에 넌지시 제안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에요. 령아와 정아가 가문에 돌아가면 정혼을 맺자고....”
“...어떤 놈팡이가 그따위 말을 했소?”
강엽이 대번에 싸늘한 살광을 뿌리자 당묘정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이들이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다는 소문이 새어나갔나 봐요. 령아는 정안과 불괴를 타고났고, 정아는 초음과 혈목을 타고났잖아요.”
령아는 장녀인 강세령이었고, 정아는 삼남인 강무정이었다.
백서희의 소생인 강무진과 강무린은 암신과 불괴를, 조영옥의 소생인 강세민은 마안과 혈목을 타고났다.
여기에 선천적으로 강대한 영성과 근골, 오성까지 타고났으니 대문파라면 군침을 흘릴 만했다.
“딱히 내 핏줄을 퍼뜨릴 생각은 없소. 그게 좋은 일인지도 모르겠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식들이 흡혈귀로 될 여지는 없애버렸지만, 후손들 중에 혈마처럼 엇나가는 놈이 없으리라는 장담은 못했다.
하나 조영옥의 말마따나 핏줄이 세상에 퍼질 것은 자명한 일.
강엽은 복잡한 감정과 함께 반쯤 식은 찻물을 삼켰다.
* * *
여차저차 복잡한 일이 있었지만, 강엽은 결국 두 문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특히 홍가려의 경우엔 낭왕이 찾아오기까지 했다.
“은퇴 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오랜만에 맹방대회합에 참여하기 위해 무림맹에 왔던 강엽은 낭왕의 뜬금없는 말에 눈을 껌뻑였다.
“낭인전을 떠나시겠다고요?”
“나도 꽤나 늙었다. 죽을 때까지 할 거 아니면 슬슬 물러나야지.”
“아직 정정하십니다만.”
“안사람이 아프다.”
“....”
“원래 지병을 앓았던 사람이야. 문주직이야 려아에게 물려줄 생각이지만... 얼마 남지 않았어. 마지막엔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
“...유감입니다.”
진심 어린 위로에 낭왕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아쉬운 게 있다면 우리 사이에 자식이 없다는 건데... 려아가 빈 자리를 채워줬으니 그건 됐다. 다만 려아가 짝이 없어서 걱정이구나.”
“....”
“늙은이의 마지막 부탁이다. 려아를 행복하게 해다오.”
“전 일가를 이룬 몸입니다. 홍 소저와 맺어진들 그녀는 첫 번째가 될 수 없어요. 차라리 다른 남자와 맺어지는 게 그녀도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럴지도. 사실 나도 그러길 바란다. 한데 려아는 하오문의 미래까지 생각하고 있더구나.”
“음....”
신음처럼 침음한 강엽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 *
“후회하진 않나?”
“그걸 이제 와서 물어봐요?”
붉은 혼례복을 입은 홍가려가 눈을 흘기자 강엽은 겸연쩍어져서 고개를 돌렸다.
몇 년 사이 부쩍 자란 야율산산 역시 배시시 웃었다.
“저도 후회 안 해요. 아무리 정략혼이라지만 마음에도 없는 혼인은 하고 싶지 않거든요.”
“...미안하다. 난 이제 순수한 열정이나 마음으로만 혼인할 순 없는 몸이야.”
강엽의 사과에 두 여인은 침묵했지만, 이내 따스한 눈웃음을 치며 강엽의 양팔에 팔짱을 꼈다.
“알아요. 그래도 우릴 아껴줄 거죠?”
“약속하마.”
강엽이 결연하게 말했다.
“죽음이 우릴 갈라놓을 때까지, 부군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여러 이해관계가 얽혔지만, 강엽 역시 두 여인이 마음에 들었기에 받아들인 혼사였다.
마차가 멈추는 것과 동시에 밖에 내린 강엽은 두 여인을 안으며 신방에 들어갔다.
* * *
강호 전역에 폭풍이 몰아쳤다.
-새로운 무림맹이 발족될 것이다.
구파일방과 팔가가 주축이 되었던 옛 무림맹.
연이은 정마대전으로 인해 구파일방은 몰락하여 육파일방이 되었고, 팔가는 오가가 되었다.
그러나 옛 무림맹의 주축 중에서 상임 문파에 든 것은 사천당문뿐.
본래는 제갈세가가 거론되었지만, 제갈의현이 우연히 선조가 남긴 비동을 발견한 걸로 인해 틀어졌다.
선조의 대술법을 구하기 위해 과업에 도전했다 그 안에서 행방이 묘연해졌던 것이다.
그제서야 제갈세가는 무림맹에 도움을 청했고, 명교의 부교주에 오른 하후진을 중심으로 구출대가 조직됐지만 이미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제갈의현의 부고를 들은 강엽은 애도를 표하면서도, 상임 문파의 후보군에서는 뺐다.
그렇게 명교를 비롯한 태화문, 당문, 낭인전, 빙궁이 상임 문파가 되었고....
강엽이 자기 사람들만 챙긴다면서 반감을 표출한 이들도 있었으나, 대세를 거스르진 못했다.
무림과 황실을 장악한 실질적인 천하의 주인.
맹주의 자리에 오르진 않았으나, 강엽은 만인지상의 지존으로서 천하를 잠식해갔다.
물론 세상사 모든 게 마음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청류맹(淸流盟)이라....”
명교에 반감을 지닌 일부 백도 문파들이 무림맹을 탈퇴하여 새로운 맹회를 설립한 것.
“세력은 미약합니다. 육파일방이나 오가가 합류한 것도 아니지요. 강남의 일부 문파들의 연합입니다.”
“저들은 무림맹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타격대를 보내서 정벌하심이....”
“그대로 두도록.”
“예?”
“알아서 하라고 해. 청류맹의 영역엔 전력을 파견하지 말도록.”
내버려두면 남은 맹방들도 이탈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우려를 안고도 강엽의 명령대로 청류맹을 내버려둔 결과 악룡맹이 발호했다.
과거 광명마교에 복속되었다가, 그들이 멸문한 이후 해남도에 숨어 차근차근 힘을 기른 해적들.
명교의 눈치를 봤던 악룡맹은 강엽이 손을 떼자 청류맹의 영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미처 조직을 정비하지 못한 청류맹은 지리멸렬했다.
청류맹에 돈을 댔던 상인들이 등을 돌리고, 민심이 이반하고 나서야 강엽은 다시 나섰다.
해남도의 해적들을 정벌하고, 소수만 남은 옛 해남파의 후예들을 찾아내서 해남파 재건을 약속하고 그들을 맹방으로 들인 것.
그때까지도 명교에 반감을 가졌던, 혹은 가졌지만 드러내지 않았던 자들은 깨달았다.
“천마가 죽어야 정파가 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누가 있어 천하제일, 아니 고금제일로 일컬어지는 그를 죽일 텐가? 오직 세월만이 그를 죽일 수 있으리라.”
“어쩌면 세월도 그를 못 죽일지 모른다. 명교의 무인들은 교주를 불로불사라 일컫는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강엽은 그 의문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가 군림하는 한, 정파가 기를 펴는 세상은 돌아오지 않으리라.
세상은 여전히 마도천하였다.
그러나 모든 걸 가진 남자도, 이별의 아픔은 피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