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47화 (447/450)
  • 90화. 세월 (2)

    혈마의 사망 이후 이 년.

    중원 전역에 퍼진 혈교의 잔당을 일소한 신교와 무림맹은 여세를 몰아 혈교의 총단까지 공략했다.

    본디 술법으로 보호받는 총단이었으나, 제갈세가의 술사들이 총력을 다해 공략법을 마련한 것.

    강엽이 마음만 먹는다면 혈교의 총단을 박살내는 것은 시간문제였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보고만 받을 뿐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다만 혈교 공략전에서는 신위를 드러내며 간만에 존재감을 알렸다.

    “천마아아아아아아아-!”

    “참 끈질기군.”

    쿠구구구구구구궁...!

    십 장에 달하는 신장과 염소처럼 굴강한 뿔이 달린 흉포한 외양.

    시뻘건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는 마신상이 새카만 대검으로 궁전을 박살낸다.

    처참하게 으깨진 전각엔 마신의 검격을 맞고 망가진 회백색 피부의 거한이 누워 있었다.

    양팔의 관절은 바깥으로 뒤틀렸으며, 양 다리는 무릎 아래로 잘려나간 채 피를 울컥 쏟아내는 몰골.

    호교사천의 일좌인 괴악을 내려다보는 강엽의 눈에 싸늘한 한기가 피어났다.

    “설마 혈마를 부활시킬 계책을 세웠을 줄은 몰랐다.”

    엄밀히 말하면 부활은 실패했다.

    천 년 전처럼 혼백을 쪼갠 것도 아니기에, 이젠 뭔 짓을 해도 부활할 방법이 전무했다.

    “그런데 혈마의 찌꺼기들을 모아 인신공양을 벌일 줄이야. 그런 식으로 혈마의 흔적을 한데 모으면 혈마를 부활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나?”

    “으, 끄으아아아아아악!”

    발광하는 괴악을 굽어본 강엽이 차갑게 조소하며 손짓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괴악을 구속하며 그의 신형을 허공으로 띄운다.

    “끄으으으... 천마! 이 저주받을 종자야! 감히 우리들의 시조를 해하고도 무사할 줄... 컥!”

    “반대로 묻지.”

    의념을 일으켜 괴악의 목을 조른 강엽이 입매를 살짝 당겼다.

    “혈마를 부활시키면 날 이길 것 같던가?”

    “끄윽...!”

    “그럴 리가 없지.”

    설사 인신공양으로 혈마의 조각들을 모은다 한들 짜깁기한 가짜일 뿐.

    그렇게 만들어진 가짜의 잠재력이 생전의 혈마보다 출중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참 미친 충성심이야. 차라리 네놈이 교주위에 올라서 이 땅을 통치하지 그랬나?”

    “쿨럭! 주, 죽...여라.”

    “원하는 대로.”

    우드득!

    괴악의 목을 뽑아버린 강엽은 시커먼 겁화를 일으켜 그의 육신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밤바람에 흩날리는 잿가루를 일별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별안간 저편에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우오오오오오오오!

    딱 꼬집어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거대한 괴물.

    신교와 무림맹의 고수들이 포위한 채 파상공세를 퍼붓는 가운데 괴물이 온몸을 비틀었다.

    진흙을 뭉쳐서 만든 듯한 부정형(不定形) 괴물의 입에서 걸쭉한 핏물이 쏟아진다.

    땅에 닿은 것만으로도 지면을 녹이면서 범람하는 핏빛 홍수에 완안극 등의 안색이 변했다.

    “산성을 띠는 독이다! 닿으면 죽어!”

    “쓰벌, 호신강기도 녹이잖아!”

    하후진이 인상을 쓰며 창염을 휘두르고, 청수도 태극의 원을 그리며 핏물의 흐름을 돌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선 신교와 제갈세가의 술사들이 수인을 맺은 채 진언을 읊조리고 있는 판국.

    비지땀을 흘리면서 입을 놀리는 모습은 급박했지만, 그래도 싸움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혈마의 찌꺼기들을 모은 만큼 강하긴 하지만... 이성은 없다. 힘만 무식하게 센 마수에 불과해.’

    다만 용맥의 자연지기를 끌어올렸기 때문에 힘이 소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 상황.

    마신을 회수한 강엽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신형은 삼십여 장 아래의 지하로 하강했다.

    괴물이 태어난 진원지이자 혈교가 인신공양을 벌인 죄악의 장소.

    비릿한 피냄새가 코끝을 들쑤신다.

    “.......”

    웬만큼 인신공양에 익숙한 강엽도 이맛살을 찌푸릴 만큼 적나라한 참상.

    생전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한데 섞인 살덩이들과 핏물이 시산혈해를 이루고 있다.

    ‘흡혈귀의 피냄새....’

    아마 인신공양의 제물로 쓰인 것은 혈마에 의해 변질된 흡혈귀들이 아니었을까.

    상단전의 영성으로 일찍이 그 사실을 예감했지만, 여기에 와서 다시 한번 확신했다.

    그렇게 가죽신으로 바닥에 고인 핏웅덩이를 밟는 순간.

    “주인님.”

    어느덧 강엽의 옆에 내려선 묘령의 소녀가 옷에 피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부복했다.

    “명하신 대로 대법의 자료를 챙겨왔습니다.”

    “수고했다, 주율.”

    주율. 지금은 타계한 선대 황제의 쌍둥이 여동생이자 혈마에 의해 흡혈귀가 되었던 비운의 소녀.

    이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암중호위로서 여러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번만 해도 혈교가 신교와 무림맹의 협공에 정신없이 밀리는 동안 은밀히 침투해서 정보를 입수했다.

    “예상은 했지만 이놈들은 정말로 미쳤군.”

    “....”

    주율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정보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자료를 살핀 만큼 혈교의 대법이 얼마나 역겨운지 아는 것이리라.

    ‘혈마의 일족들을 희생시킨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혈마의 자식들까지 희생시키다니....’

    생전의 혈마는 여색을 즐겼다.

    신녀 후보들을 비롯한 여러 여인들을 건드렸고, 그녀들로 하여금 자신의 자식을 잉태하게 했다.

    하나 괴악은 혈마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기꺼이 주군의 자식들까지 희생시킨 것이다.

    “...주인님, 바깥의 괴물을 죽이실 건가요?”

    주율 역시 한때는 혈마의 일족이었으니 자신의 일처럼 느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쓰게 웃은 강엽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다. 달리 방법이 없구나.”

    이미 한데 뒤섞인 혼백은 강엽이 손도 못 쓸 만큼 망가졌다.

    차라리 빨리 해치우는 게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겠지.

    시무룩해하는 소녀를 위로한 강엽은 용맥에 의식을 집중했다.

    쿠구구구구구구궁......!

    지하 전체가 흔들리며 괴물에게 이어진 자연지기가 차단된다.

    -우워어어어어엇!

    본능적으로 용맥의 힘이 막혔음을 알아차린 괴물이 울부짖는 소리에 주율이 속눈썹을 떨었다.

    “용맥이 막혔으니 끌어낼 수 있는 힘엔 한계가 있지. 조금만 기다리면 끝날 거다.”

    그 말대로 괴물은 구슬픈 포효를 끝으로 핏물로 녹아내렸다.

    가까이서 상대한 고수들이 산성을 띠는 핏물을 피해 기겁하며 도망쳤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이후 혈교의 잔당들을 추살하고, 그간 혈교의 치세에서 착취당한 사람들을 구출한 뒤.

    강엽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혈교의 비급과 비약을 구덩이에 파묻고 불을 질렀다.

    “이제야 완전히 끝났군.”

    강엽이 감회에 빠져 중얼거릴 때, 옆에 온 하후진이 기지개를 켜며 히죽 웃었다.

    “크흐, 이랬는데 혈교가 부활하진 않겠지?”

    “불길한 말 좀 하지 마세요.”

    청수가 핀잔을 주며 강엽을 돌아보았다.

    “신교로 돌아가실 겁니까?”

    “전리품만 챙기면 돌아가야지.”

    “...혹시 사천에 들르실 생각은 없습니까? 혜심 스님이 아미파 장문직에 취임한다고 합니다.”

    “혜심이라면 소창후?”

    하후진의 물음에 청수가 고개를 주억였다.

    “얼마 전에 만났습니다. 삼화취정을 이루었더군요.”

    “참, 그러고 보니 그 스님도 아미파를 재건한다 뭐한다 바빴지.”

    “익명의 후원자가 자금을 줬다던데요.”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간다는 듯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강엽이 실소했다.

    “아미파는 명망이 높은 불문이니까. 사천의 유지들이 몰래 기부한 모양이지?”

    “...뭐, 그런가 봅니다.”

    하긴 명색이 신교주인 강엽이 대놓고 아미파를 후원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겠는가.

    “산불이 나면 초목은 까맣게 타지.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새싹이 자라고, 예전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하하, 그렇지요. 세상 만사가 물극필반의 이치대로 돌아갑니다.”

    “아니, 그래서 사천에 갈 거냐고?”

    하후진이 삐딱하게 묻자 강엽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 고개를 저었다.

    “축하 사절단만 보내지. 내가 거기까지 가는 것도 좀 이상하고... 또 당분간은 바쁠 테니까.”

    “아, 그렇네. 하긴 우리도 개파 준비를 해야지.”

    “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일월신교가 개파식을 왜 한단 말인가.

    잠시 강엽과 눈빛을 나눈 하후진이 뒤통수를 긁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일월신교라는 현판을 떼고 새로운 이름으로 바꿀 거라서. 아직은 내부에서만 논의 중인데, 곧 강호에 정식으로 공표할 거야.”

    일월신교와 광명마교, 흑룡교까지 세 종파를 합친 사상 초유의 종파가 탄생하는 셈.

    저간의 설명을 들은 청수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새로운 이름을 쓴다고요?”

    “천마신교... 그억!”

    농담조로 대답한 하후진이 뒤통수를 맞고 나자빠지는 모습에 청수의 표정도 해괴해졌다.

    “...천마신교?”

    “뭐, 그런 이름도 논의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별호를 따는 건 좀 그렇지. 우상 숭배 같잖나?”

    원래 마교가 다 우상을 숭배하긴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딴 종파를 만드는 것도 남사스러웠다.

    “일월신교의 이름을 합자(合字)해서 명교라고 지을 생각이다. 이쪽이 교도들에게도 잘 먹힐 것 같고.”

    “명교라... 이 나라의 국명과 똑같군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군.”

    신교는 이미 황실에 의해 국교로 선포되었으니, 조정과 관부의 지원에 힘입어 세상 곳곳에 퍼질 것이다.

    그래야 한다면 무림인뿐만 아니라 평범한 양민들도 명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교리를 손봐야겠지.

    오랜 시간이 걸릴 테고, 생각과 다르게 실패할 수도 있지만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 * *

    혈교의 총단이 무너진 뒤 일 년.

    일월신교는 무림과 상계, 관부의 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명교의 개파식을 선언했다.

    강엽은 명교의 초대 교주로 취임했으며, 백서희는 신녀 겸 대부인의 자리에 올랐다.

    조영옥은 이부인의 자리에, 당묘정은 삼부인의 자리에 올랐다. 강엽은 태화문과 당문을 동맹으로서 예우했으며, 이 자리에서 두 여인의 아이들이 태화문과 당문의 후계자가 될 것을 만방에 알렸다.

    기존의 칠성좌 제도는 폐지하고, 완안극과 일성좌 예건룡은 각각 좌우사자에 임명됐다.

    수성좌 정도준은 대호법의 자리에 올랐으며, 다른 칠성좌들도 요직을 맡는 등 인사이동을 거쳤다.

    거기서 빠진 것은 하후진이었다. 본래는 요직을 맡기려고 했으나, 하후진은 조직 생활이 체질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안을 사양했다.

    “그래서 어쩌려고?”

    “으음, 그게 말이지....”

    “일가를 이룬 녀석이 백수로 지내려고?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난 그 꼴 못 본다.”

    “아니, 꼭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 하후진도 일도 안 하고 탱자탱자 노려니 가족의 눈치가 보여서 속내를 썩였다.

    한적한 곳에서 수련하고 싶은 마음과 가족을 위한 마음이 충돌하면서 갈피를 못 잡은 것이다.

    “교단 외곽에 장원을 마련해주지. 그럴 듯한 직함도 만들어주고. 대신 꼬박꼬박 들려라.”

    “아이고! 감사합니다, 교주님!”

    그렇게 예정에 없었던 부교주의 지위를 받은 하후진은 반색하면서 사라졌지만,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저놈 노는 꼴은 못 보겠다. 어떻게든 현장에 복귀시켜서 개같이 굴린다.’

    하후진이 그런 속내를 알았다면 사기를 당했다면서 방방 뛰겠지만 강엽이 알 바는 아니었다.

    이후 하후진은 딸인 하후린에게 무공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세상을 떠돌아다녔는데, 어쩌다 보니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굴비 엮듯 주워서 명교로 데려왔다.

    한편 강엽은 명교가 개파한 뒤에도 천하 전역에 비선과 분타를 설립했으며, 명교의 무인들을 파견하여 각지의 도적과 요마를 토벌했다.

    또한 그간 나라를 위협했던 북방의 유목민들과 남방의 왜구들을 소탕하니, 차츰 명교는 중원에 자리를 잡으면서 천하제일문파로 거듭났다.

    그렇게 세월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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