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세월 (1)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
그러나 화려한 대로에 가려진 성도의 뒷골목은 한여름의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게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천하가 몇 번이나 뒤집어지면서 성도도 한바탕 평지풍파를 겪었지만, 뒷골목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달라진 게 없었다.
“한마디로 최악이라서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거지.”
그런 뒷골목에 갑자기 들어온 두 사람의 인영.
한눈에 봐도 외지인임을 알 수 있듯 귀한 비단옷을 차려입은 남녀의 등장에 뒷골목의 이목이 쏠렸다.
도저히 이런 시궁창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왜 들어온 걸까.
뒷골목의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관찰할 때, 남녀는 마치 목적지를 정해둔 것처럼 헤매는 법 없이 쭉쭉 나아갔다.
부유한 자들은 대개 강도의 표적이 되는 법.
돈냄새를 맡은 소매치기들이 접근했지만,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받은 듯 발길을 돌렸다.
“어이, 거기 여자 데리고 온 형씨. 가진 거랑 여자 내려놓고...!”
눈치 없이 실실 웃으며 끼어든 왈패들만 갑작스레 게거품을 물고 졸도했을 뿐.
어둠 속에서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기척을 느낀 강엽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은 피를 보고 싶지 않군. 이대로 물러나면 유혈사태는 없을 거다.”
“고수...!”
그제서야 두 남녀가 범접하지 못할 고수임을 깨달은 뒷골목의 인간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신분을 숨긴 무림인들과 뒷골목을 주름잡는 흑도 방파 모두 경계심을 바짝 곤두세웠다.
“그래도 완전히 물러나진 않네.”
“우리가 왜 왔는지 불안하겠지.”
멀찍이서 따라붙는 기척에 백서희가 볼멘소리를 내뱉었지만, 굳이 강제로 내쫓지는 않았다.
어차피 뒷골목의 특성상 감시의 시선을 완벽히 떨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말이지.’
하지만 뒷골목의 인간들에게 말한 대로 적어도 오늘은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나아간 끝에 도착한 곳은 햇볕도 잘 들지 않는, 깊고 으슥한 매음굴.
기루에서 쫓겨난 늙고 병든 창기들이 먹고 살기 위해 허름한 움막에서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한낮인데도 술냄새와 앵속 냄새, 여인들의 분냄새가 진동한다. 토사물과 체취가 섞여 형용할 수 없는 악취를 자아냈다.
마침 멍석을 깔고 앉은 기녀가 멍하게 햇볕을 쬐다 두 사람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얼씨구, 허우대는 멀쩡한 양반이 왜 이런 데 여자까지 데려왔대?”
딴엔 안 들리도록 작게 중얼거렸지만, 두 사람의 귀를 속일 순 없었다.
쓴웃음을 지은 백서희가 다가오자 기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뭐, 뭐야!?”
“안녕하세요. 뭣 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전에 여기 있던 사람은 떠났나요?”
“그, 글쎄... 그건 왜 묻는데?”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니 그새 자리의 주인이 바뀌었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리라.
“실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당신의 집에서 시간을 좀 보내려는데, 잠깐만 비켜주실 수 있나요?”
“내가 왜?”
낡고 더러운, 눕기만 해도 병이 걸릴 것 같은 움막이었지만 기녀에겐 생계가 걸린 장소.
하지만 강엽이 은전을 꺼내자 눈빛이 달라졌다.
“...반 시진. 그 이상은 못 내줘.”
“한 시진. 대신 원하는 대로 주겠소.”
강엽이 금전까지 꺼내자 기녀의 눈빛에 탐욕이 어렸지만, 이내 그녀는 체념 어린 얼굴로 거절했다.
“흥, 됐어. 돈이 많아봤자 빼앗기기만 하지. 대신 어지럽히지만 마. 내겐 하나뿐인 집이자...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곳이니까.”
“고맙소.”
은전을 챙긴 기녀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백서희는 그녀가 앉던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하얀 치맛단에 먼지가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엄마... 저 왔어요.”
과거 모친과 함께 살았던 움막.
그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거쳐갔음에도, 그때의 흔적은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다.
어릴 적에 땅바닥에 끄적거린 낙서를 매만진 백서희가 처연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저 혼자 오진 않았어요. 남편도 함께 왔어요. 참, 아들도 낳았는데... 아직은 어려서 데려오진 않았어요. 나중에 장성하면 그때 함께 올게요.”
나란히 앉은 강엽이 사천에서 제일 유명한 술도가의 검남춘과 전병을 내려놓고 인사를 올렸다.
“강엽이라고 합니다, 장모님. 처음 뵙겠습니다.”
“혹시 몰라서 묻는데 여기에 우리 엄마 계셔?”
혼백을 볼 수 있는 강엽이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
백서희의 목소리에 실린 긴장감을 읽은 강엽은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오래전에 귀천하신 것 같아.”
근처를 배회하는 혼백들은 많았지만, 백서희의 모친이라 추정되는 사람은 없었다.
백서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다행이다.”
“....”
“왜?”
“아니, 그렇게 말할 줄 몰라서. 장모님과 말을 나누고 싶어서 물은 거 아니었어?”
“만약 엄마가 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혼백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면 원한이나 미련이 남았다는 뜻이 아니겠나.
다시 만나고 싶다는 그리움과는 별개로, 모친이 지박령처럼 떠돌기를 원치는 않았다.
“괜찮아. 엄마의 혼백이 없어도, 추억은 가슴속에 남아있으니까.”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거야.”
“응.”
고개를 주억인 백서희는 소매로 눈을 훔치며 애써 밝게 웃었다.
“저 힘내서 살게요. 엄마가 절 지켜준 것처럼 우리 아이들을 지켜줄 거예요. 그리고 엄마 몫까지 행복해질 테니까... 지켜봐줘요.”
“저도 이 사람을 목숨처럼 아끼겠습니다.”
“바람둥이지만 진짜로 절 아껴주는 사람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
“왜?”
“아니, 굳이 그 말을 해야 하나 싶어서.”
강엽이 떨떠름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자 백서희가 코웃음을 치면서 받아쳤다.
“하지만 사실이잖아?”
“그래, 내가 죄인이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강엽의 모습에 백서희는 깔깔 웃으면서 옆구리를 때렸다.
* * *
땅거미가 내려앉으며 어두워진 밤거리.
입도공월로 중경에 찾아온 두 사람은 함께 팔짱을 끼며 중경의 대로를 거닐었다.
대재앙의 참상으로 인해 예전처럼 붐비진 않았지만, 그래도 전쟁이 끝났다는 소문 때문인지 사람들의 낯빛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생각해보면 참 많은 일을 겪었어. 그렇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흡혈귀가 되어서 강호에 투신하고, 낭인이 되어 수많은 사건에 휘말렸던 지난 나날들.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선 청송객잔의 터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은 추억에 젖었다.
“그러고 보니 낭인전이 청송객잔의 땅을 팔았다더군.”
“엥? 그럼 중경 분타는 아예 사라지는 거야?”
물론 인근 도시들에도 분타가 있으니 의뢰를 조금씩 나누면 수요를 감당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중경에 분타를 설립하는 것보다 효과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아니야. 곧 만들겠지. 다만 지금은 낭인전도 의뢰를 받을 형편이 아니니까.”
“아, 하긴.”
혈마가 죽으면서 전쟁은 끝났지만, 혈교의 세력이 완전히 일소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각지에선 혈교의 잔당들이 발악하고 있었으며, 전 무림이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낭인전 역시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고 혈교 소탕에 나섰기에, 민간의 의뢰를 받기엔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도 농땡이를 피울 처지가 아니네.”
“괜찮아. 수하들도 공을 쌓을 기회를 줘야지.”
아무리 강엽이 신인의 경지에 올랐어도 모든 일에 사사건건 나설 수는 없는 노릇.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가능하다고 해도 그랬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으리라.
“어쨌든 놀 생각이잖아?”
“하하, 들켰나?”
시치미를 뚝 떼고 뻔뻔한 표정을 짓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백서희가 피식거렸다.
“흥, 아주 그냥 깨가 쏟아지네요.”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
행인들 사이에서 면사를 쓴 조영옥과 당묘정이 툴툴거리는 얼굴로 곱게 눈을 흘기고 있었다.
“아하하, 둘이 드디어 왔네.”
“백 동생, 질투 나게 둘이서만 다닐 거야?”
“그래서 불렀잖아요. 입도공월이 있으니 편히 올 수 있지 않아요?”
“그동안 상공 차지했으니까 물러나.”
“에이, 그건 아니죠.”
두 여인이 대치하는 동안 당묘정은 수줍게 강엽의 옆에 다가가서 반대쪽 팔짱을 꼈다.
승리자의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 당묘정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두 여인.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만.”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예요.”
혀를 쏙 내밀면서 강엽에게 몸을 밀착한 당묘정의 기세에 두 여인의 눈에서 불똥이 튀겼다.
하필이면 백서희와 당묘정이 강엽의 양팔을 붙잡은 통에 손이 빈 조영옥이 에라 모르겠다는 얼굴로 강엽의 가슴팍에 안겨왔다.
“후훗. 보고 싶었어요, 상공.”
“부, 부인들....”
졸지에 세 여인에게 둘러싸인 강엽은 왠지 모를 위기감에 등이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말실수라도 했다간 뼈도 못 추릴 분위기군.’
다행히 술법으로 주변의 인식을 가렸기에 행인들이 그들의 추태를 보고 술렁거리는 일은 없었다.
눈으로는 봐도 머리로 인식을 못하기에,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고 네 사람을 스쳐지나간 것.
“한데 아이들은?”
“유모에게 맡겨뒀죠.”
“잔 거 보고 왔어요. 한번 잠들면 잘 깨지 않는 아이들이니 지금도 꿈나라에 있을 거예요. 나란히 잠든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고생했소.”
조영옥과 당묘정 모두 최근엔 육아로 정신이 없던 만큼 휴식이 간절했을 것이다.
백서희도 헛기침을 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진아를 돌봐줘서 고마워요, 조 언니. 당 동생.”
“뭘. 진아가 의젓해서 어렵지 않았어. 그치?”
“그럼요. 세 아이 모두 칭얼거리지도 않고 밥도 잘 먹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렇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네 사람은 중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평정산으로 올라갔다.
익숙한 전경에 백서희가 아는 척을 하며 경탄했다.
“아, 여기... 예전 집이 있던 곳이었지?”
과거 흑접과 싸우면서 무너진 집이 있던 곳.
그동안 강엽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올 일이 없었지만, 폐허가 된 집을 헐고 근사한 장원을 지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장원엔 외부의 인식을 방해하는 술법까지 걸려 있어서, 술법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호기심에 기웃거릴 일도 없었다.
“혹시나 엉뚱한 놈들이 또 쳐들어올까 봐 가명으로 명의를 돌렸어. 이제부턴 별장으로 쓰려고.”
사람이 살진 않았지만 술법 덕분에 먼지가 쌓이진 않았다. 오히려 혈우의 대재앙을 비껴나간 것처럼 연못은 깨끗했고 정원엔 아름다운 기화요초들이 자랐다.
이번엔 당묘정이 감탄했다.
“아, 이 화초들... 가문에 있던 것들이에요!”
“독이 없는 것들만 따로 추렸지. 나름 부인들 취향에 맞춘다고 했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소.”
세 여인이 탄성을 지르며 온 집안을 쏘다니고 있는 동안 강엽은 밖에서 식사를 준비했다.
미리 찬합에 담아온 요리들을 정자의 식탁에 올려둘 때쯤 세 여인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왔다.
“마음에 쏙 들어. 침실도 꽤 많네. 나중에 애들이랑 같이 와도 되겠다.”
“그러게. 가까운 곳에 온천도 있던걸.”
“어머, 식탁은 혼자 차리신 거예요? 같이 하시지.”
“꺼내기만 하면 되니 어렵지 않았소. 그런데....”
식탁을 내려다보는 강엽의 표정이 묘해졌다.
조영옥과 당묘정이 준비한 거라 내용물을 몰랐는데, 고기요리는 그렇다 쳐도 같이 있는 것들도 장어나 간처럼 소위 정력에 좋다는 음식들만 있는 게 아닌가?
“흠흠, 백 동생에게 들었어요. 진아 동생을 만들기로 했다면서요. 그럼 지금부터 힘을 비축해야죠.”
“저랑 언니가 손수 만든 거니 남기시면 안 돼요, 엽랑.”
말은 나긋나긋하게 하는데 어째 협박으로 들린다면 과연 착각일까.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다 백서희를 바라보자 그녀가 야릇한 표정으로 눈웃음을 쳤다.
“푸훗, 어쩌겠어. 힘 좀 써야지. 우리들 다 만족시키려면 힘이 많이 들 거 아냐?”
“오늘밤은... 재우지 않을 거예요.”
기대감에 찬 얼굴로 눈을 반짝이는 세 여인의 모습에 강엽은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설마 복상사로 죽진 않겠지?’
그나마 죽지 않는 몸인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아니면 죽도록 고혈을 빨릴 것을 걱정해야 할까.
아름답고 헌신적인 부인들이 지금은 자신을 잡아먹기 위해 입맛을 다시는 천적으로 보인다.
불길한 예감은 벗어나지 않는다는 옛 선현들의 말씀처럼, 한동안 세 여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강엽은 뺨이 홀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