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45화 (445/450)
  • 89화. 천마 (3)

    황제가 기거하는 북경.

    자유롭게 풍진 강호를 누비는 무림인들에게도 금지로 여겨지며, 허락받지 못한 자들은 병장기를 패용하는 것도 삼가야 할 만큼 삼엄한 도시.

    그 북경이 포위된 것도 모자라 수괴의 검격에 성문이 격침됐다는 소식이 퍼지고 한 시진 뒤.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대동한 하얀 장삼의 사내가 황궁의 남문을 통과했다.

    황제를 지키는 금의위와 동창 등 고수들이 달려들었으나, 진각 한 번에 선지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천마군림보로 황궁의 병력을 간단히 제압한 강엽은 백서희와 함께 여유롭게 경내를 거닐었다.

    햇볕을 받아 황금빛을 띠는 지붕과 붉은색으로 덧칠된 장엄한 전각군.

    수로를 지나는 금천교, 그중에서도 황제만 거닐 수 있다는 가운데 다리를 버젓이 통과.

    황제가 대신들과 국사를 논한다는 봉천전(奉天殿)의 앞에 모여있는 문무백관들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하나같이 황제를 지키겠다고 결사옹위를 한 건지 침중한 기색으로 두 사람을 막아선다.

    그 면면을 둘러본 강엽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금의위와 동창이 무력화된 시점에서, 아니 신교의 군세가 황궁을 포위한 시점에서 싸움은 끝났다.

    저들이 옥쇄의 각오로 앞길을 막아봤자 무의미한 짓.

    그때 파뿌리처럼 새하얀 머리와 수염, 흘러내릴 듯이 깊은 주름을 지닌 노신이 나왔다.

    다소 구부정한 허리에도 흔한 청려장 없이 강엽을 맞이한 늙은 신료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에 따라 뒤편에 선 대소신료들이 모조리 무릎을 꿇고 강엽을 향해 조아렸다.

    “삼가 신인을 배알하나이다....”

    “뜻밖인걸.”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권력자들. 내각의 대신들과 군부의 수장들이 먼저 굴복할 줄이야.

    “적어도 금의위와 동창은 기개라도 보여줬는데 말이다. 한데 황제를 보필한다는 신료들이 자존심도 내던지고 목숨을 구걸할 줄은 몰랐군.”

    “.......”

    통렬한 빈정거림에도 대답은 없었다.

    몇몇 신료들이 어깨를 움찔하며 반발하긴 했으나, 옆에 있던 자들에게 소리 없이 제압당한 마당.

    늙은 신료가 대표격으로 대답했다.

    “신인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기실 그들은 혈교가 침투시킨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겠지.”

    혈교의 사특한 마공을 익힌 마인들.

    강엽 역시 그들이 굴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뿌리를 뽑을 작정으로 손을 썼던 것이다.

    “하지만 당신들이 이리 쉽게 굴복할 줄이야. 광명마교주와 혈마의 등쌀에 연이어 시달리다 보니 기개고 뭐고 다 떨어진 건가?”

    혈마 이전엔 광명마교주가 황궁에 공작을 벌이며 여러 사람들을 꾀어내지 않았던가.

    심지어 황실이 보유한 유일한 천하팔존, 패군도 광명마교의 쥐새끼 노릇을 했던 바.

    “황제를 보필하지 못한 죄를 물어 다 죽여버릴 수도 있다.”

    그에 대다수 신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으나, 늙은 신료들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허허, 그렇다면... 달게 받아야지요. 신인의 말씀대로 폐하를 보필하지 못했고, 이 나라 종묘사직을 시궁창에 처박았으니 말입니다.”

    “내게 원하는 게 있나?”

    좀 전의 말과는 달랐다. 만약 이들이 신교에 협력한다면 살려줄 의향이 있다는 뜻.

    곳곳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늙은 신료들의 눈이 교활하게 빛났다.

    “불초 소생들은 그저 자비를 구할 뿐입니다.”

    “자비라....”

    어린 황제가 미망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못하는 동안 이들이 뒤에서 얼마나 착복했을까.

    대쪽같은 신하들은 진작에 갈려나갔고, 부화뇌동하는 간신들만 남은 상태.

    “뭐든 과도기가 있는 법이지.”

    광명마교와 혈교가 그랬듯, 강엽 역시 황궁을 자신의 색으로 물둘일 생각이었다.

    신교의 지자들이 관직을 차지할 것이며, 신교에 충성하지 않는 자들은 출셋길이 막히겠지.

    다만 지금 당장 시행하기엔 여의치 않은 만큼, 시간을 들여 인수인계를 해야 하리라.

    그때까진 이들을 살려둘 필요가 있다.

    ‘그 뒤엔 제거해야겠지만.’

    이들이 곳간에 숨겨둔 재물은 장차 이 나라를 재건하는 데 적잖은 보탬이 될 터.

    강엽이 만천하를 장악한 이상, 다소 압정을 취하더라도 거스를 자들은 없으리라.

    “새 황제를 옹립할 거다.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 허수아비가 되겠지.”

    머리를 조아리는 문무백관들을 지나친 강엽은 백서희의 허리를 안고 그대로 날아올랐다.

    건청문을 지나쳐 황제가 기거하는 건청궁 앞에 선다.

    “어때?”

    “역시 예상이 맞았어.”

    건청궁 안쪽에 숨은 미약한 기척.

    그 안에 깃든 익숙한 존재감을 감지한 강엽은 쓴웃음을 지으며 황제의 거처를 거침없이 흙발로 더럽혔다.

    그나마 이쪽엔 충신들이 남은 듯 환관들과 시녀들, 호위들이 앞길을 막았지만....

    “저리 비켜라. 방해된다.”

    “끄악!”

    무형의 힘에 속박되어 벽에 처박힌 자들을 무심하게 지나간 두 사람은 곧 황제의 침방에 닿았다.

    곤룡포를 입은 어린 소년이 고귀한 여인의 치마폭 뒤에 숨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어, 어마마마....”

    “무엄한 것들.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화려한 비단 궁장을 걸친 귀부인.

    이 나라 군주의 생모로서 황태후의 지위에 오른 여인이 앙칼진 음색을 토하며 두 사람을 노려봤지만, 안색에 생기 따윈 없었다.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본 강엽이 이채를 띠었다.

    “시체인가.”

    “기묘하네. 강시와는 좀 달라. 이지를 가진 걸로 봐선 망자도 아니고.”

    백서희 역시 여인의 상태를 알아봤는지 입맛을 쩝 다시면서 동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당혹한 기색이 역력한 여인이 파르르 떨었다.

    “이, 이 연놈들이 정말...!”

    “광명마교주의 솜씨는 아니군. 혈마가 당신을 죽이고, 혼백을 시체와 함께 묶었나?”

    깜짝 놀란 여인이 입을 작게 벌리자 강엽은 추측이 맞았음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하면 이지를 가진 시귀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진 않을 거다.”

    멀쩡히 말하고 움직이는 것 같아도, 그녀의 생명은 오래전에 끊겼기에 한계가 찾아올 것이다.

    온몸은 뻣뻣하게 경직될 테고, 피부는 썩어서 악취를 풍기겠지. 파리와 구더기가 꼬일 터.

    “황태후,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 화장으로 가렸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은 썩고 있어.”

    “....”

    입을 다문 황태후는 이내 체념한 것처럼 손을 늘어뜨리더니 처연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속일 순 없구나. 그대들이 말한 대로 본후의 육신은 안쪽부터 썩고 있느니라.”

    사특한 술법으로 죽음을 유예할 순 있어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법.

    황태후가 말을 이어갈 때였다.

    “윽... 그윽...!”

    “황상!”

    모친의 뒤에 숨은 어린 황제가 갑자기 헐떡이는 소리를 내면서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어, 어마마마... 목이, 목이 말라요....”

    “조금만 기다리시오! 바, 밖에 누구 없느냐! 황상이 갈증을 느끼신다! 어서 물을 대령하거라!”

    “소용없다는 걸 알 텐데.”

    태사의의 뒤편에 엎드린 채 헐떡거리는 어린 황제를 딱하게 본 강엽이 말했다.

    “피냄새를 맡은 건가. 흡혈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어. 마지막에 피를 마신 게 언제지?”

    “그걸 어떻게...?”

    아연해한 황태후는 강엽의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떠오르자 말문이 막힌 기색으로 침음했다.

    “설마... 그대도 흡혈귀인가?”

    “그들의 근원이 되는 존재지.”

    “하, 하면 도와다오! 뭐든 사례하겠다! 원한다면 이 황궁을 통째로 넘겨주마!”

    “이미 황궁이 내 건데 거래가 된다고 생각하나.”

    강엽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벽의 일부가 허물어지며 찬란한 햇볕이 새어들어왔다.

    그때까지도 흡혈 충동에 괴로워하던 어린 황제가 비명을 지르며 뒹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악!”

    “황상! 이놈, 어찌 이런 참람한 짓을!”

    황태후가 당황하여 발을 동동 구르는 때, 이성을 잃은 황제가 비호처럼 모친을 덮쳤다.

    부지불식간에 모친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은 황제가 피를 들이마신 순간.

    “켁! 케엑!”

    검은 피를 뱉은 황제가 비틀거리면서 쓰러지는 모습에 강엽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한번 흡혈귀가 되면 무슨 짓을 해도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다. 그리고 난 혈마의 일족을 전부 멸족시키기로 결심했지.”

    “아, 안 돼! 제발! 내가 애원하마!”

    비록 술법의 꼭두각시가 됐다지만 고귀한 황태후가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목덜미에서 검은 피가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이 불쌍한 아이를 살려다오! 아니, 살려주세요! 난 어찌 되든 좋으니 제발...!”

    햇볕에 노출된 어린 황제는 온몸을 비틀면서 어두운 구석으로 향했지만, 허공섭물에 사로잡혀 이도 저도 못한 채 비명을 질렀다.

    송곳니가 돋아난 흡혈귀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강엽을 노려본다.

    “카아아아아아악!”

    이젠 사람의 말도 잊은 건가.

    한때 자신도 이렇게 될 뻔했다고 생각하면 씁쓸해졌지만, 강엽은 독심을 먹고 손을 뻗었다.

    “정말로 방법이 없는 거야?”

    “음?”

    “솔직히 불쌍하잖아. 자기 의지로 흡혈귀가 된 것도 아닌데. 예전의 너처럼....”

    백서희의 말마따나 흡혈귀가 된 건 황제의 본의가 아니겠지. 과거 강엽이 그랬듯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애꿎은 희생양이 된 것이다.

    “살려두면 위험하다는 건 알아. 저대론 황제 노릇을 못한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을까?”

    “....”

    어린 황제가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황태후도 입을 꾹 다물고 강엽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강엽이 한숨을 쉬며 장삼의 소맷자락을 걷어올렸다.

    “그래, 해볼 만한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하지. 다만 성공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과거에 완안극에게 했던 것처럼 강엽 자신의 피를 먹여 혈족으로 만드는 수법.

    이미 혈마의 일족이나 다름없는 황제를 자신의 혈족으로 만드는 게 쉬울 리 만무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황제는 폐위시킬 거다. 난 흡혈귀를 황위에 앉혀둘 생각 없어.”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황태후의 동공을 보며, 강엽은 엄지를 깨물어 피를 냈다.

    그리고 으르렁거리는 황제의 턱을 붙잡고 피를 흘려보내 꿀꺽 삼키게끔 했다.

    “이제 결과를 지켜보면 되겠군.”

    “가, 감사합니다.”

    “당신은 어쩔 거지?”

    “예?”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은 죽는다. 당신의 자식이 내 혈족이 된다 해도 헤어져야 해.”

    “여한은 없습니다.”

    황태후가 처연하게 웃었다.

    “저는 자결했습니다. 혈마 그자가 다음 황제는 자기 자식으로 세우고 싶다고 제 몸을 더럽혔을 때....”

    “...유감이군.”

    평생 황제의 여인으로 살아온 사람이 정조를 잃었으니 그 고통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자는 저를 비웃으며 되살렸지요. 그리고 제가 보는 앞에서 자식들을 죽였습니다. 그자의 피를 마신 아이들은 죽었지요. 황상도 그때....”

    “뭐?”

    “황제가 죽어!?”

    그 말에 놀란 두 사람이 고개를 들어올리자 황태후가 어린 황제의 뺨을 만지면서 미소 지었다.

    “세간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황제에겐 쌍둥이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여아로 태어난 덕분에 다행히 목숨을 잃지 않았지요. 하나 그 아이가 흡혈귀가 되었고, 덕분에 오라비를 대신해서 황제 노릇을 했답니다.”

    소년이라 생각했는데 소녀였단 말인가.

    ‘변성기도 안 올 나이라서 의심도 못했군. 곤룡포도 치렁치렁해서 체형을 가렸고.’

    하긴 혈마는 황제를 꼭두각시로 삼을 생각이었으니 성별이 뭐든 중요치 않았겠지.

    겉모습만 보면 지학도 안 된, 심지어 완안극보다도 더 어려 보이는 나이다.

    “그럼 대신들이 막지 않은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미 황제가 죽었는데 대용품을 지키겠다고 목숨을 거는 것도 어리석은 짓일 터.

    물론 황제가 진짜라고 해도 간신들이 자기 목숨을 걸지는 의문이었다.

    “허락하신다면 전 이만 하늘로 떠나고 싶습니다. 더 추해지기 전에....”

    “딸에겐 당신이 멀리 떠났다고 말해두지.”

    “영특한 아이니 그러시지 않아도 알아들을 겁니다. 부디 제 딸을 잘 부탁드립니다, 천마.”

    제 운명을 기다리겠다는 듯이 다소곳이 서서 눈을 감은 황태후의 자태.

    강엽은 정안을 열어 그녀를 속박한 술법을 풀고 혼백이 하늘로 돌아가게끔 했다.

    “황제, 아니 꼬맹이는 어떻게 됐어?”

    “안정적이군. 소질이 있는 모양이야.”

    시커먼 기막을 펼쳐 햇볕을 가린 강엽은 소녀의 기운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쓰게 웃었다.

    “딱히 흡혈귀를 늘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완 노사님도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이제 황궁의 일은 끝난 거지?”

    “그래, 이 아이는 죽었다고 공표해야겠지만... 새 황제만 내세우면 되겠지.”

    “생각해둔 후보가 있어?”

    “마침 적당한 후보가 있더군. 먼 방계이긴 하지만 주제 파악을 할 줄 아는 사람이야.”

    “흐응, 나중에 딴마음을 먹진 않을까?”

    “상관없어.”

    강엽이 있는 한 황제는 존귀한 지존이 아니라,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강엽의 눈을 피해 막후에서 힘을 키우려 하다면, 그 반항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겠지.

    정신을 잃은 새로운 혈족을 데리고 밖에 나간 강엽은 맑고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광명마교와 혈교가 멸망하고, 무림맹이 멸망한 세상에서 승자는 오직 일월신교뿐이었다.

    아니, 일월신교조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터.

    ‘명교(明敎).’

    머지않아 개파할 새로운 교단. 천마를 시조로 모시며, 강호 무림을 지배할 유일한 마도방파.

    강엽은 초대 명교주로서 천하를 지배할 테니, 작금의 강호 무림은 바야흐로 마도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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