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44화 (444/450)

89화. 천마 (2)

천마삼검의 삼초식 진혈.

강엽이 지닌 모든 영성과 심상, 의념을 한데 엮어 날린 심상절예.

단순히 하나로 엮인 것을 떠나, 그 이상에 도달한 미증유의 절기다.

온전한 위력을 펼치기 위해 육신이 수용할 수 있는 자연지기의 최대치는 물론, 진원의 일부까지 불태운 바.

“큭...!”

지독한 탈력감이 온몸을 사로잡고, 욱신거리는 뼈마디가 비명을 지른다.

흡혈귀의 재생력으로도 가라앉지 않을 만큼 한계를 초월한 대가는 끔찍했다.

견고하게 짜인 그릇에 금이 가면서 영성이 줄줄이 새어나가고 있다.

삼검을 위해 자기 자신을 깎아낸 만큼 실상은 동귀어진의 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서 빨리 전쟁을 끝내야....’

서둘러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위험하겠지.

자성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며, 힘겨운 한 걸음을 내딛는다.

겨우 세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굵직한 땀방울이 턱선을 따라 점점이 떨어진다.

판석이 벗겨져 흉하게 드러난 흙바닥이 땀방울을 맞고 색을 바꾼다.

찢어질 듯이 아픈 아랫배를 잡고 간신히 서너 걸음쯤 걸어갔을 때.

-인상적이었다, 천마.

문득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발을 멈춘 강엽의 표정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모든 걸 쏟아부었구나. 그렇지 않고선 나를 죽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

“혈마....”

어렵사리 고개를 돌려세운 강엽은 핏물이 떠올라서 혈마의 얼굴을 이루는 것을 발견했다.

육신은 한 줌의 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부쉈거늘, 의념은 어떻게든 살아남은 건가.

“끈질긴 게 바퀴벌레가 따로 없군.”

-큭큭큭, 천 년 전에도 난 끈질기게 살아남았느니라. 여기서 허망하게 죽어줄 것 같으냐!

화아아아아아악-!

혈마가 포효한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치솟은 핏물.

두 사람이 싸웠던 장소뿐만 아니라, 무림맹을 둘러싼 전장 전체에서 솟구친 핏빛의 바다.

그렇게 하늘 높이 솟구친 핏물이 구름처럼 뭉치면서 표면에 혈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뇌성벽력이 치는 것처럼, 혈마가 입을 벌릴 때마다 쩌렁쩌렁한 전성이 지상을 강타한다.

-나는 불구대천의 대악이자 절대의 마. 이 세상을 불태우기 전까지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 말과 함께 혈교도들이 싸우다 말고 홀린 듯이 몽롱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주인이시여, 우리의 주인이시여! 우리를 바칩니다! 부디 대계를 이루소서!”

“킥킥킥! 크하하하하하!”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심장에 칼날을 박고, 목을 베면서 자결을 하는 혈교도들.

사마외도의 고수들과 마수들 역시 광기에 휩싸인 채 자신의 목숨을 끊으며 피를 보탠다.

흡혈귀로 전락한 관병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건....’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한 강엽이 흠칫했다.

한순간에 너무 많은 이들이, 못해도 십만은 될 법한 자들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다.

그들의 피에 담긴 선천지기가 하늘에 떠오른 혈마에게 향하며 그의 일부가 되어간다.

사전에 막기 위해 힘을 모았던 강엽은 돌연 단전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휘청거렸다.

‘젠장, 아까 마지막에 너무 힘을....’

미연에 방지하기엔 뒷심이 부족한 상황.

아군 또한 갑작스러운 이변에 공포에 빠져 허우적거렸으며, 칠성좌와 창룡대의 고수들도 방법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처지였다.

능공허도조차 닿지 않을 높은 하늘에 뜬 혈마가 입꼬리를 한껏 올리면서 소름끼치는 광소를 토해낸다.

저 힘이 한꺼번에 풀려나면 마치 해일에 휩쓸리듯 무림맹에 자리한 아군이 쓸려나갈 터.

“하지만 마지막까지 발버둥치는 게 산 자의 권리지.”

지팡이처럼 쥔 자성검을 던지다시피 내려놓은 강엽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의념을 집중했다.

육신의 그릇은 한계에 다다랐으나, 그게 곧 모든 힘이 떨어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용맥의 자연지기를 발바닥 용천혈을 통해 흡수, 경맥으로 인도하며 천마신공의 구결대로 빚어낸다.

그오오오오오오......!

순수한 자연지기가, 패도적인 마기로 변하면서 강엽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한다.

십만에 달하는 사람들의 선천지기를 흡수하여 그 스스로 대재앙으로 승화한 혈마에 맞서기 위해.

‘지키고 싶다, 내 사람들을.’

한 올의 잡념도 담기지 않은 순수한 의념.

설사 자신의 목숨을 불태운다 하더라도,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지금껏 만났던 인연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걸 느끼면서 강엽은 웃었다.

“꼭 싫은 일들만 있던 건 아니었어.”

죽고 싶을 만큼 힘겨웠기에, 흡혈귀로서 사는 게 너무 비참했기에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흡혈귀인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그럼에도 삶에 집착해서 끝내 흡혈귀로서 살아갔던 모순.

그러나 돌이켜보면 자신을 지탱해준 사람들 덕분에 나름 즐겁게 살지 않았던가.

“강엽...!”

멀리서 들려오는 아련한 목소리.

절박한 외침에 시선을 돌린 강엽은 애타게 손을 뻗는 백서희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

무어라 외치면서 달려오는 백서희를 향해 고개를 저으면서, 하늘의 혈마를 향해 비상한다.

밤하늘의 탐랑성이 주인의 운명을 예견하듯 찬란하게 명멸하고,

먼 동쪽 하늘에서 따스한 서광이 스며들면서 어둠이 물러난다.

그때만은, 모두가 하늘 높이 떠오른 강엽의 모습만 우러러봤다.

“교주님!

“지존!”

“강엽!”

“안 돼...!”

안타깝게도 그들의 염원은 닿지 않았다.

서서히 쪽빛으로 물드는 하늘 속에서 붉은 유성이 된 강엽이 끝없이 솟구쳤다.

혈무화와 심상화로 육신의 한계를 벗고, 공간을 구부리면서 혈마의 얼굴로 비상한다.

언젠가 염왕이 그랬듯, 지금의 혈마가 그렇듯 육신에 구애받지 않고 의념만으로 존재하는 경지.

달리 말하면 탈각(脫却)이라고 해도 무방할 터.

‘그렇군. 이런 기분이었나....’

그 순간, 강엽은 천지자연과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내면의 심상을 벗어나 천지자연 속에 녹아드는 자연경(自然境).

육신의 죽음을 초월하여 혼백이 먼 곳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진다.

죽어서 하늘로 돌아가는 귀천이 아닌, 사바세계보다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도약하는 승천.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천마아아아아!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새카만 인영이 강엽을 쫓아왔다.

왼쪽의 눈은 통째로 터지고, 오른팔은 어깻죽지부터 잘려나가서 한 손으로 흑검을 들고 있는 몰골.

심지어 들고 있는 흑검마저 이가 나가고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간 게 박살나기 직전.

다만 교도들이 전멸한 참상 속에서도 검마는 혈마의 배려로 목숨을 부지했다.

‘아니, 애초에 날 방해할 요량으로 살려준 건가.’

태산처럼 거대한 혈마가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는 모습에 강엽은 내심 피식 웃었다.

결국 혈마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전장에 남은 마지막 수족까지 가차없이 희생시킨 것이다.

흑검과 합일되면서 동귀어진의 심상절예로 화한 검마가 가일층 속도를 높이며 쫓아온다.

검마 역시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혈마가 하는 일을 거들기 위해 전력을 다한 것.

-죽어어어어어엇!

가까스로 강엽을 따라잡은 끝에 필살의 의념을 토해내는 발버둥.

그러나 흑검은 강엽을 치기 전에, 붉은 섬광이 닿자 덧없이 잿가루가 되어 스러졌다.

-아.......

공허한 탄식을 끝으로 사그라지는 의념.

그렇게 검마를 처치한 강엽은 더욱 빨라지며 혈마의 미간을 향해 짓쳐들어갔고,

쩌어어어어어엉!

모두가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는 가운데, 혈마의 안면을 꿰뚫으면서 그 안으로 사라졌다.

* * *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비틀린 조소를 짓는 혈마의 얼굴.

그와 대치했던 강엽은 어느새 자신이 육신을 되찾았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들어올렸다.

“...진짜는 아니군.”

-그래, 의념이 형상화된 게지.

혈마의 얼굴이 투영된 구름 안쪽은 심상세계였다.

붉게 회오리치는 하늘 너머로 창백한 벼락이 쏟아지고, 대지는 갈라지고 핏빛 바다가 범람한다.

-독한 놈. 육신을 버려서 스스로 심상절예가 되다니.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거든.”

결국 마지막에 혈마를 무찌른 것은 천마삼검도, 만상여의도 아니었다.

육신의 태를 벗고 날린 최후의 심상절예.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고 나서야, 혈마와의 악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난 죽겠지. 하지만 너도 끝난 건 매한가지다. 다시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야.

강엽은 부정하지 않았다.

탈각하여 선계로 향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나, 원래 세상으로 못 돌아간다는 점에선 비슷했으니까.

-넌 너무 강해졌다. 그 좁은 세상엔 가둬둘 수 없을 정도로. 우화등선은 존재 자체로 세상을 어그러뜨리는 자들을 강제로 추방하는 우주의 섭리다. 네놈이 이겼어도 결과적으로는 나와 똑같은 신세....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

-뭐?

“난 너와 달리 세상에 남긴 게 있거든.”

강엽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할 수 없겠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을 유지했다.

표정을 있는 대로 구긴 혈마를 향해 코웃음을 친 강엽이 팔짱을 끼며 비아냥거렸다.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패배자는 꺼져라.”

-하...!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린 혈마는, 이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한 강엽은 무너져가는 심상세계를 둘러보며 쓰게 웃었다.

말은 자신만만하게 내뱉었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더 이상 못 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주먹을 꽉 쥐고 감정을 추스리며 말했다.

“그래도 이게 맞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글쎄다.

어느새 뒤편에 다가온 목소리.

기척도 없이 다가온 염왕의 목소리에 강엽은 하하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절 마중 오신 겁니까?”

-선계는 그렇게 친절한 세상이 아니다. 여러모로 네가, 아니 사람들이 상상한 것과는 다르지.

일순 염왕의 외양이 물결처럼 흐트러지더니 다소 냉막한 인상의 사내가 되었다.

진조의 기억 속에서 봤던 백무량이 말했다.

-선계에 들어오면 섭리의 일부가 된다. 개개인의 자아는 흐려지고, 감정과 기억은 희미해져. 이번처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도 없지.

백무량은 다시 유익이 되었다.

-어찌 보면 혈마의 말이 맞아. 너는 너무 위험해서 더는 저쪽 세상에 있지 못하거든.

빙긋 웃은 유익은 눈 깜짝할 새에 예사란으로 변했다.

-그럼에도 당신은 여기로 오기엔 너무 일러요. 우리가 온 건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예요.

“그게 무슨...?”

이해 못할 말에 눈을 껌뻑일 때, 예사란은 일 장에 이르는 거인이 되어 있었다.

진조가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간단하다. 너는 섭리에 섞일 만큼 미련을 떨쳐내지 못했다는 거지. 본디 이 경지에 이르면 속세의 미련을 떨치기 마련이거늘. 너무 어린 나이에 경지에 올라서 오욕칠정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어.

“으음, 그야 뭐....”

-넌 아직 세상을 더 살아봐야 한다.

어느새 진조의 곁엔 천 년 전의 영웅들과 염왕이 있었다.

자연스레 강엽을 둘러싼 그들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거나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너는 선계에 이르지 못한 신선이다, 강엽.

-마이되 마를 초월한 자. 탈마(脫魔)이자 마선(魔仙)으로서 세상을 거니는 최초의 초월자가 될 거야.

-언젠가 시간이 흘러 당신의 안에 있는 인간다운 감정이 희미해지면, 인간의 욕망을 버리면 그때서야 다시 이쪽에 올 수 있겠죠.

-하늘조차 두려워하는 마인. 하늘조차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마인. 그게 너다.

-널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가라, 천마.

진조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다섯 사람은 아득히 먼 하늘로 향해 나아갔다.

마지막까지 강엽을 응시한 진조가 씩 웃었다.

-지금껏 고생했다, 후계자야.

“....”

강엽은 대답하지 못했다. 문득 깨달았을 때는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 진짜... 마지막까지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는 스승님이군. 구배지례할 시간 정도는 줘야지.”

한동안 울면서 웃은 흡혈귀는 소매로 얼굴을 슥 닦고, 갈라지는 바닥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럼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 * *

하늘을 가렸던 혈마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사람들은 환호하지 못했다.

그들을 구한 영웅 또한 사라졌던 것이다.

완안극을 비롯한 일부 칠성좌와 지인들이 강엽을 찾겠다면서 난리를 치는 가운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던 백서희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봉목을 크게 떴다.

“어?”

처음엔 점처럼 보였던 것이 급격히 커지면서 그녀가 그리워하는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본능적으로, 스스로 의식할 새도 없이 몸이 빛살처럼 화해서 하늘 높이 날아간다.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 외치는 소리를 뒤로하며 날아간 백서희는 간발의 차로 한 사람을 안아들었다.

졸지에 안기는 듯한 자세로 그녀의 품에 들어온 강엽이 쓴웃음을 지으며 푸념했다.

“...이런 자세는 부끄러운데.”

“시끄러워, 이 남정네야!”

하마터면 과부가 될 뻔했다고 투덜거린 백서희는, 그러나 웃으면서 강엽과 이마를 맞댔다.

반짝이는 눈물이 얼굴에 떨어지자 강엽은 그녀의 머리를 껴안고 다독였다.

“걱정 마라. 널 두고 떠나진 않으니까. 앞으로 할 게 많아. 아이들이 크는 것도 봐야 하고, 또....”

“또 뭐?”

“우리 둘째도 만들어야지.”

“나참.”

황당하다는 듯이 남편을 바라본 그녀는 피식 웃으면서 안은 자세 그대로 천천히 하강했다.

“사랑한다, 서희야.”

“자, 잠깐. 사람들이 본다고... 흡!”

그제서야 강엽이 무사하다는 걸 알아차린 일행들이 앞다투어 달려왔지만, 죄다 무시한 강엽은 백서희와 깊은 입맞춤을 이어갔다.

“어, 음. 뜨겁구만. 하긴 우리 교주님이 신혼이긴 하지. 아, 나도 돌아가서 우리 마누라 보고 싶다!”

눈치없이 중얼거린 하후진의 말에 일행은 눈을 흘기면서 강엽을 맞이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지존!”

“이제 교주님이 천하의 주인이십니다.”

무림맹의 인사들은 복잡한 기색을 띠었지만, 그 말을 부정하진 못했다. 혈마를 물리친 강엽이 천하를 쥐고자 한다면 누가 있어 막겠는가.

그러나 강엽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예?”

“혈교의 총단이 남아있지. 그리고 천하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이겨야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그게 누구입니까?”

강엽은 걸레짝처럼 찢긴 채 나부끼는 관군의 깃발을 보며 대답했다.

“이 나라 황제를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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