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천하 (4)
별안간 폭발적으로 치솟은 기척.
팔대교왕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존재감을 내뿜는 이들이 비인외도의 괴물들을 끌고 온다.
혈라분에 중독된 혈교의 고수들은 물론, 마수들과 흡혈괴마를 비롯한 강시 군단, 게다가....
“죽은 자들이 몰려온다!”
“빌어먹을 혈교놈들! 죄없는 사람들까지...!”
-으흐흐흐흐흐흑!
-구워어어어!
강호 무림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정주의 주민들.
잔혹하게 살해당한 뒤 망자로 부활한 그들이 구슬프게 포효하며 성벽을 넘은 아군을 덮쳤다.
검은자위 없이 온몸에 핏줄이 불거진 몰골로, 게걸스럽게 살점을 탐하는 모습에 모두가 경악했다.
“원시안진! 제자들은 저들에게 안식을 안겨주어라!”
“신교의 형제들은 사특한 종자들을 쳐부숴라!”
병장기의 예기와 부적이 사방에서 빗발치고, 처절한 악다구니와 비명이 전장을 질타한다.
처음엔 절세고수들의 활약으로 아군이 유리하게 돌아갔지만, 숫적 열세를 완전히 뒤집을 순 없었다.
특히 흡혈귀가 된 관병들이 도검과 창을 내찌르면서 덤벼들자 고수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아군 고수들이 처절한 비명과 악다구니를 쏟으며 죽어나가고, 애써 준비한 사다리와 공성무기가 적들의 손에 파괴되고 있었다.
‘천시, 지리, 인화... 그 모든 게 불리해.’
적에게 유리한 환경, 게다가 병력의 숫자에서 밀리니 전황이 점차 불리하게 돌아간다.
전장을 살핀 강엽이 인상을 썼다.
“안 되겠군.”
“뭐? 벌써 나서게!?”
백서희가 놀라서 물었다.
아무리 강엽의 내공이 무한에 가깝다지만, 싸우다 보면 심력을 소모하기 마련이다.
특히 혈마를 상대할 땐 사소한 차이로도 승패가 갈릴 수 있는 만큼 졸들의 싸움은 가급적 관망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는 괜찮아. 게다가 성벽을 완전히 점거하지도 못했는데 밀리면 더 큰일이지.”
“그건 그렇지만....”
안색을 흐린 백서희를 뒤로한 강엽이 손을 들어올렸다.
결계에 깃든 혈마의 의지가 술법의 운용을 방해했지만, 개의치 않고 주력을 모은다.
평소보다 배는 더 품이 든다 해도 용맥의 힘으로 말미암아 술법을 완성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전장에 쏟아진 피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검붉은 먹구름을 잉태하고, 창백한 벼락을 자아낸다.
쿠르르르르릉...... 콰아아앙!
눈 깜짝할 새에 대지를 강타한 벼락 줄기.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벼락의 기둥이 전장을 이동하며 적들의 육신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압도적인 폭력을 맞이한 적들이 일제히 분쇄되는 결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교주님의 권능이다! 그분이 우릴 가호하신다!”
-천마군림 만마앙복!
전장 곳곳에서 이구동성으로 울려 퍼지는 함성.
전장의 소음을 파묻을 정도로 진각을 밟은 신교의 고수들이 용기백배하여 적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평무인들이 성벽을 밟고, 성벽 아래의 적들을 처단하면서 공간이 확보됐다.
“성문을 열어!”
“와아아아아아아아!”
열린 성문으로 고수들이 쏟아져들어오며 적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린다.
물론 적들의 저항도 완강했다.
“크하하! 힘이, 힘이 넘쳐나는구나! 이 모두가 혈신의 은총이로다!”
“암, 지금이라면 무림맹주도 두렵지 않지!”
팔대교왕을 위시로 한 마두들이 고루거각 사이로 출몰, 성벽을 넘은 고수들을 덮쳤다.
혈마의 피를 마시고 흡혈귀가 됐는지 전원이 눈이 시뻘겋게 물든 채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한쪽에선 팔대교왕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완안극과 일성좌, 전강 등과 겨루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대등하게 맞서 싸우는 모양새였다.
“강엽, 이건...!”
“대규모 인신공양으로 얻은 힘을 나눠준 것 같군.”
광활한 정주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숨을 추수하여 얻은 막대한 선천지기.
가히 용맥의 자연지기에 비견될 거력을 품은 팔대교왕들이 심극을 쏟아내며 전장을 폐허로 만들었다.
위력만 보면 심상절예에 버금갈 심극이 연쇄적으로 터지자 세 사람도 쉬이 맞서지 못했다.
“어쩔 수 없군. 한 번 더 도와줘야....”
강엽의 손에서 하얀 뇌기가 명멸할 때였다.
-가십시오, 주인님!
-여긴 우리가 맡겠소!
귓전을 파고든 완안극과 전강의 전성.
일성좌는 굳게 입을 다물었으나, 눈빛으로 나서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멀리서 마두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하후진이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교주, 아니 강엽! 여긴 네가 싸울 곳이 아니잖냐! 네 상대는 따로 있다고!”
“그렇지!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다!”
낭왕이 호응했으며, 다른 칠성좌와 창룡대에 속한 각파의 수장들도 굳건한 눈빛을 통해 강엽으로 하여금 앞으로 갈 것을 종용한다.
“.......”
“강엽, 가자.”
마지막으로 백서희가 손등을 어루만졌다.
“저 사람들 말대로 네 상대는 따로 있잖아. 혈마를 꺾지 않으면 이 싸움은 안 끝나.”
이만오천의 군세는 용맹하게 싸웠지만, 몇 배에 달하는 병력을 제압할 정도는 아니었다.
“길을 열어주는 게 저들의 역할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그래.”
지략이나 용맹을 겨루는 전쟁이 아닌, 단 한 번의 싸움으로 판가름이 나는 승부.
설사 전장을 제압하고 혈마에게 몰려가도, 막상 혈마를 이기지 못하면 무슨 소용일까.
혈마가 존재하는 한 이까짓 군세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을 터인데.
“대신 난 마지막까지 함께 갈 거야.”
늠름하게 웃어보인 백서희가 내미는 손을, 강엽은 피식 웃으며 힘차게 맞잡았다.
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상공에서 짝을 이룬 비익조처럼 표홀하게 날아가는 한 쌍의 남녀.
이상을 눈치챈 혈교의 마두들이 경파와 강기 다발을 내쏘았으나, 두 사람에게 닿는 일은 없다.
외려 그들은 한눈을 판 대가로 뒤를 노린 고수들에게 척살당했다.
* * *
안쪽으로 나아갈수록 분위기는 흉험해진다.
마치 바깥에서 싸우고 있는 놈들은 잡졸에 불과하다는 듯 안에서 꿈틀거리는 불길한 기척들.
지난날 신교를 침입한 타락한 백택이나, 북해에서 싸웠던 교룡 같은 대마수들이 심연 속에서 으르렁거린다.
심상지경을 이룬 백서희조차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킬 대마경(大魔境).
대마수들이 앞을 가로막진 않았으나, 전각 너머로 아른거리는 그림자는 더없이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두 사람의 앞길을 막은 것은 시커먼 장포를 흩날리는 중년인이었다.
스쳐지나가면 바로 잊어버릴 만큼 흔해빠진 인상이었으나, 그렇기에 도리어 비범하게 느껴지는 자.
“검마.”
“...기다리고 있었다.”
무림맹의 성문 앞에서 철푸덕 주저앉은 검마가 땅에 박힌 흑검을 빼들며 일어섰다.
동시에 거리 곳곳에서 들어선 검은 인영들이 일대를 물샐 틈 없이 포위.
하나하나가 강대한 마수에 필적하는 자들이 살벌한 압박감을 내뿜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등을 맞댄 두 사람이 적들을 견제할 때, 강엽은 자신과 마주한 덩치가 어딘가 눈에 익다는 것을 깨닫고 기광을 발했다.
두건과 흑립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언뜻 드러난 덥수룩한 수염은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촤아아아악!
바로 심검을 휘둘러 흑립을 베자 산발이 된 백발이 풀려나오면서 창백한 노안이 드러났다.
곁눈으로 강엽이 벤 자를 힐끔거린 백서희가 헛바람을 토했다.
“맹주님!”
“.......”
두 사람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기색.
썩은 생선처럼 흐리멍텅한 눈동자는 두 사람을 보고 있었으나, 의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하하, 어떤가? 너희들을 위해 신경 좀 썼는데. 헤어졌던 지인을 보니 반갑지 않나?”
메마른 웃음기를 띠며 강엽을 응시한 검마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일제히 흑립이 풀려나왔다.
사천의 정마대전에서 무림맹이 패한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고수들.
그중엔 현 맹주인 이송 진인뿐 아니라, 불권의 사후 소림의 방장직을 맡았던 법현 대사도 있었다.
“물론 모두 아는 건 아니겠지. 아마 저 여자는 처음 봤을 거다. 주산 검각의 검후다.”
백서희 이전에 검후의 자리를 꿰찼던 정도십대고수.
광명마교 육사도와의 비무에서 패배한 책임으로 검각을 봉문시켰다가, 광명마교가 패망한 이후엔 아예 강호를 떠나 초야에 묻혔다고 했던가.
한데 그런 여인이 혈교에 끌려와서 이지를 제압당한 꼭두각시로 변했을 줄이야.
사면을 포위한 면면을 둘러본 강엽은 그들이 불괴강시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모로 비틀었다.
“이들을 고기방패 삼으면 내가 망설일 거라 생각했나?”
“하하, 설마 그러려고. 다만 주인님께선 만찬을 방해받길 원치 않으신다. 너는 몰라도 그 계집은 여기 남아 우리와 놀아줘야겠어.”
강엽은 말없이 심검을 쥐었다.
아무리 백서희가 심상지경에 올랐다지만 홀로 검마와 꼭두각시가 된 고수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
맞댄 살갗을 통해 자신의 안에 녹아든 흑룡교의 신물을 그녀의 몸 안으로 보냈다.
[강엽?]
[용혼갑이다. 저놈의 심상절예를 막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적어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이런 건 네가 쓰는 게....]
[어차피 혈마의 심상절예는 이걸로는 못 막아. 그리고... 네가 조금이라도 안전해야 내가 마음 놓고 날뛸 수 있을 것 같거든.]
지난날 소림의 참회동에 봉인됐던 호신갑.
오직 용혈의 소유자만이 쓸 수 있는 호신갑을 백서희에게 넘겨준 강엽은 자세를 낮추었다.
그때 두 사람의 옆에 한 명의 인영이 내리꽂혔다.
“껄껄, 내가 아직은 늦지 않았나 모르겠군. 조금만 늦었다면 원수를 갚을 기회를 놓칠 뻔했어.”
죽립을 쓴 중년인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두 사람을 향해 아는 척을 해보였다.
그를 알아본 두 사람이 이채를 띠었다.
“신유 선배.”
“오랜만일세, 강엽. 아니, 이젠 강 교주라 해야 하나? 어찌 됐든 저자에게 원한이 있어서. 발목을 잡진 않을 테니 끼는 걸 허락해주겠나?”
“무림맹 바깥에서 기다렸던 겁니까?”
강엽이 신교의 옥좌에 앉았을 때도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았던 신유였다. 그랬던 그가 혈교와 치르는 일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숨어다니면서 혈귀들을 척살했지. 겸사겸사 사람들도 좀 구했고.”
“도와주신다면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지금은 한 사람이 아쉬운 때니까요.”
씩 웃으며 고개를 주억인 신유가 죽립을 벗으며 굳은 표정을 지은 검마를 돌아봤다.
“그새 내 얼굴을 까먹진 않았겠지?”
“어이가 없군. 별 거지같은 것들이 낄 데 못 낄 데 구분 못하고 기어나오는 꼴이라니....”
벌레 씹은 표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검마가 콧방귀를 뀌며 흑검을 들어올렸다.
“상관없다. 이제 와서 벌레 한 마리 끼어봤자...!”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저편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인영들이 강엽의 주변에 내려섰다.
하후진과 청수, 낭왕, 완안극, 일성좌, 전강, 그리고 당천경과 북해빙궁주 등의 절세고수들.
눈을 부릅뜬 채 혀를 빼문 세 사람의 수급이 검마의 발치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이제 팔대교왕은 전멸했다. 네가 마지막으로 남은 팔대교왕이자 호교사천이군.”
“착각하지 마라.”
검마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고작 애송이들 몇 명 죽였다고 끝난 줄 아느냐? 싸움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우레같은 노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전각 사이에 숨어 있던 마수들이 몸을 일으켰다.
앞서 성벽에서 출몰했던 마수들과는 격이 다른, 그야말로 대마수의 반열에 들 만한 어마어마한 괴물들.
신장만 십여 장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거인과 승천하기 직전에 타락한 악룡, 인면이 달린 대붕 등.
산해경의 괴물들이 옛 신화에서 돌아온 것 같은 위용에 일행은 쓴웃음을 흘렸다.
“이거야 원, 우리가 지면 진짜 세상이 끝나겠군요.”
“그럴 일 없으니 괜한 헛소릴랑 말거라.”
푸념을 흘리는 청수에게 핀잔을 준 낭왕이 강엽을 향해 시선을 돌려세웠다.
“여긴 우리에게 맡겨라.”
강엽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백서희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힘차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갔다 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검마가 강하다 하나 이쪽도 심상지경의 고수만 네 명인 만큼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으리라.
강엽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조심해라.”
여차하면 동귀어진의 심상절예를 쓸 수 있는 검마였다.
일전에 상대했을 땐 타점을 흐트러뜨려서 심상절예의 효과를 무위로 돌렸지만, 제대로 작렬하면 강엽도 방심할 수 없겠지.
비록 용혼갑을 줬다고 하나 검마쯤 되는 초강자의 심상절예를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모두 살아남아라. 살아서 술잔을 나누자.”
“어이, 강호 격언 세 번째를 기억하라고. 헤어질 땐 훗날을 기약하는 말을 해선 안 된다. 대체로 그런 말을 하는 놈이 가장 먼저 죽기 때문이다. 까먹었냐?”
“글쎄, 난 처음 듣는데?”
하후진의 타박을 피식 웃어넘긴 강엽은 일행과 눈을 마주친 뒤에 땅을 박찼다.
그가 무림맹의 성벽을 넘어 사라진 뒤, 검마가 이지를 잃은 고수들과 함께 일행을 노려봤다.
“작별인사는 마쳤기를 바라마.”
직후 농밀한 경파와 심상의 파동이 일대를 휩쓸면서 공전절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누가 길을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발길은 자연스레 자신을 부르는 기척의 주인에게 향한다.
옛 맹주전에 도착한 강엽은 반쯤 폐허가 된 전각의 위에 앉아서 술잔에 입을 대는 사내를 올려다봤다.
요사스러운 핏빛의 만월 아래, 반쯤 기댄 자세로 고아하게 풍류를 즐기는 혈룡포의 주인.
혈마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마실 텐가?”
“그건 누구의 피지?”
코끝을 진동하는 피비린내. 혈마가 마시는 건 술이 아니라 사람의 피였다.
“흐음, 누구의 피더라. 이 나라 황족들의 피를 적당히 섞은 것 같은데... 아무렴 무슨 상관이겠나. 중요한 건 이게 옛 흡혈귀들의 예법이라는 거다.”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가축으로 기르는 인간을 잡아 신선한 피를 대접했던 것이다.
“과거 진조가 흡혈귀들을 잡아죽이기 전에 세상의 주인은 흡혈귀였다. 흡혈귀들은 양지에 나서지 않되, 어둠의 지배자로서 천하의 음지를 장악했지.”
“넌 순혈 흡혈귀도 아니잖나.”
“그래, 하지만 난 흡혈귀들을 잡아먹고 그 누구보다 순혈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가까워졌을 뿐 진짜 흡혈귀가 되진 못했어.”
혈마가 술잔을 깨트리자 가루가 흩날렸다.
천천히 일어선 혈마가 뒷짐을 지고 강엽을 오연하게 내려다봤다.
“너를 잡아먹고 진조가 되겠다. 그리하여 천리를 뒤집고 만천하의 주인이 되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