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41화 (441/450)

88화. 천하 (3)

서안을 해방시킨 뒤로도 군세는 눈덩이마냥 불어났다.

장경과 전강이 창룡대에 편입했고, 낭왕과 하오문주가 각자의 세력을 이끌고 참전하는 한편.

대초원을 경유해 장성을 넘어온 북해빙궁이 서안에 진입했다.

처음엔 이만으로 시작했던 군세가 세 문파의 합류로 이만오천까지 불어난 상황.

그런 와중 하오문주가 중대한 소식을 전했다.

“황실이 혈교의 수중에 넘어갔습니다. 어린 황제는 혈마를 만난 뒤 그의 추종자가 됐어요.”

황궁에 잠입한 수십의 문도들이 희생한 끝에 겨우 알아낸 정보.

증거는 없었으나, 강엽은 그 말을 들은 순간 황제가 흡혈귀로 전락했다는 예감을 느꼈다.

“본궁 역시 장성을 넘던 도중 기이한 경험을 겪었소. 장성이 거의 비워져 있었지. 남은 병력을 추궁해서 그들이 황제의 명령을 따라 남하했다는 걸 알았소. 하오문의 도움으로 다행히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관군과 일전을 치를 뻔했소이다.”

어쩌면 꼭두각시가 된 황제가 장성의 병력을 빼돌려 신교의 앞길을 막을지도 모르는 일.

최소 십만, 어쩌면 수십만의 병력이 가로막았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해진다.

‘이제부턴 시간싸움이겠지.’

속전속결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설사 적들이 아군의 진군 경로를 예측했다고 해도, 최대한 빠르게 부딪쳐서 깨부숴야 할 터.

서안에서 정주까지는 천삼백 리에 이르지만, 황하를 끼고 간다면 최대한 단축할 수 있다.

혈교에 충성을 바친 마도 문파들과 각 위소의 병력들이 앞길을 틀어막았지만 이만오천에 이르는 군세의 진군을 완전히 방어하진 못했다.

고작해야 하루이틀쯤 늦췄을 따름.

하지만 때론 약간의 시간이 전황을 뒤바꿀 변수를 창출하기도 하는 법.

강엽이 우려한 대로 장성을 떠난 관군은 이미 정주성을 장악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역도들은 들어라! 황상께선 혈교를 국교로 선포하시고, 정주 일대를 국사(國師)이신 혈마 공의 봉토로 내리셨다. 네놈들이 한 발이라도 들이면 역모로... 커억!”

“쓰벌, 들어봤자 귀만 썩지.”

하후진이 쌍욕을 하며 사절의 목을 베었어도 누구 하나 나무라는 이가 없었다.

비록 관복을 입었으나 이미 오래전에 숨이 끊긴 시체가 사악한 술법에 조종당해 입을 놀렸던 것.

붉은 결계에 휩싸인 정주성을 노려본 강엽은 관군이 흘리는 꺼림칙한 기척을 감지했다.

“이거 예상보다 더한데....”

“왜? 또 뭐가 있어?”

백서희가 속삭이며 묻자 강엽이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관군이 전원 흡혈귀가 된 것 같다.”

“뭐!?”

가까이서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대경할 만큼 상리에 어긋나는 소리였다.

암만 혈마의 권능이 천리를 농락한다지만 그 많은 관군을 흡혈귀로 만들었다니?

“정식으로 흡혈귀로 만든 건 아니고... 아, 그렇군. 혈우에 특별한 공정을 더했어. 의식을 간소화해서 흡혈귀를 대량으로 양산한 거다.”

그렇게 만든 흡혈귀는 재생력도 약하며, 육신의 힘 역시 진짜 흡혈귀에 비할 바는 아니다.

“잘해봤자 혈라분에 중독된 사람 수준이겠지.”

“아니, 하지만 훈련받은 정병들이 흡혈귀와 비슷해졌다면 무시할 수준이 아니잖아?”

그 정도라면 내공 한 줌 없는 병사조차 일류고수에 준하는 괴력을 자랑하지 않겠는가.

수성좌도 당황하며 물었다.

“술법으로 없앨 순 없습니까?”

“안 돼. 저 붉은 결계 때문에 외부의 술법은 일절 간섭할 수 없다.”

저 반투명한 붉은 결계는 단순히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정주성을 보호하는 용도가 아니었다.

술법을 완전히 틀어막는 난공불락의 요새. 그러면서 아군의 술법은 오히려 보조한다.

‘이치만 보면 혈라지망과 비슷하다. 다만 규모만 따지면 이쪽이 훨씬 거대해.’

굳이 개입하자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언발에 오줌 누기일 뿐.

철옹성 같은 결계가 있는 이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수십 배의 심력을 기울여야 했다.

일성좌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결국 정면 돌파밖에 답이 없다는 건가.”

“광명마교와 싸웠을 때처럼 소수정예로 잠입하는 건 통하지 않는다. 특별한 계책도 없지.”

이 대목에서 강엽은 창룡대의 군사를 맡은 제갈의현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그 역시 뾰족한 수가 없는지 어두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저 안엔 최소 십만, 어쩌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는 병력이 있다. 그들 전원이 고수거나 괴물이며, 혈마에게 충성하기 때문에 전향할 가능성도 없다.”

강엽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말뜻에 담긴 현실은 눈앞이 아득해질 만큼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싸워야 한다.”

어느새 말을 몰아 일행을, 아니 이만오천의 군세 앞에 선 강엽이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우리의 가족이, 후손이 놈들의 노예가 될 것이다!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이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두려움과 분노, 의무감, 그 사이에 있는 무수한 감정들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이 안엔 백도도, 흑도도 없다! 정도와 마도도 없으며! 무림맹과 신교도 없다! 오직!”

그 순간, 강엽의 눈에서 폭사한 강렬한 안광이 그를 우러르는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 높이 들어올리며 선언했다.

“오직 인간만 있을 뿐이다! 나 역시 그대들과 같은 인간이며, 한 명의 인간으로서 형제인 그대들과 함께 싸울 것이다!”

신인이라 불리는 교주가 스스로를 인간으로 격하시켰으나, 오히려 아군의 사기는 들불처럼 타올랐다.

위대한 교주가 그들을 형제라고 불러주지 않았는가.

“천하 무림이여.”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자성검을 뽑아든 강엽이 하늘 높이 검날을 치켜들며 선언했다.

“진격하라.”

-와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모든 것을 끝낼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자고로 공성하는 자는 수성하는 자보다 세 배 이상의 병력을 지녀야 하는 법.

병법에 대해 무지한 자도 어디선가 들어본, 그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인 구절이다.

그런 병가의 가르침을 무시한 시점에서 이만오천의 군세가 맞이할 운명은 뻔했지만,

“선두는 방패로 화살을 막아라!”

“칠성좌와 창룡대의 수장들이 선두가 되어 길을 연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끓는 물과 기름을 뿌렸지만 삼화취정을 이룬 고수들을 제지하진 못했다.

성벽을 평지처럼 내달린 절세고수들이 성벽 위를 올라가서 병사들과 혈교의 고수들을 격살한다.

눈이 시뻘게진 적들이 거칠게 포효하며 창과 도검을 휘둘러도 옷자락 하나 스치지 못했다.

물론 혈교에도 그들과 맞서 싸울 고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고수들의 숫자는 아군이 훨씬 많은 형편.

‘새로운 팔대교왕들도 다섯 명이나 죽었다. 검마를 포함해도 저쪽의 숫자는 네 명밖에 안 돼.’

염왕에게 한 명이, 강엽에게 두 명이, 이어 현운 진인에게 한 명이 죽지 않았던가.

또한 무림맹의 생존자들을 막는 과정에서 한 명이 더 죽은 바람에 팔대교왕도 절반 이하가 된 판국.

설사 새로운 마두들이 합류했다 한들 아군과 비교할 계제는 아니겠지.

다만 적들의 전력이 꼭 무인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쿠오오오오오!

“왔군.”

정주의 성벽조차 한눈에 내려다볼 만큼 거대한 마수들.

지축이 울리도록 전각을 부수며 달려오는 마수들의 위용에 적아를 막론하고 모두가 주춤했다.

그때 한달음에 허공을 건너뛴 낭왕이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뿔 달린 늑대 마수에게 쇄도했다.

“하하, 이놈은 내 거다! 아무도 손 대지 말도록!”

“그럼 저놈이 내 거네!”

그에 뒤질세라 전신에 창염을 두른 하후진이 거대한 이무기를 향해 거합을 휘둘렀다.

정신없이 퍼붓는 절초에 두 마수는 기세 좋게 달려들다 말고 두 사람과 어울려야 했다.

-크르르르...!

늑대가 앞발로 허공을 할퀴자 수십여 장의 땅가죽이 뒤집어지고, 전각이 동강나며 파편이 흩날렸다.

-구어어어어엉!

이무기가 꼬리를 휘둘러 지면을 휩쓸고, 이어서 뜨거운 겁화를 내뿜어 거리를 불태웠다.

얼마 전 새로이 창룡대에 합류한 점창파의 장문인 종현 진인이 그 모습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으음, 아무래도 혈마는 마수들로 하여금 고수들의 공백을 메꾸게 할 생각인가 보구려.”

“하지만 마수들은 자기편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지요. 전술적인 움직임을 전혀 가져가지 않으니 각개격파하면 됩니다.”

말을 받은 옥청선자가 하늘을 유영하는 검에 몸을 싣으며 공중 높이 날아올랐다.

피막 달린 날개를 퍼덕이는 큼지막한 박쥐들이 전장을 향해 떼를 지어 몰려왔던 것.

종현 진인은 물론, 어검술을 쓸 줄 아는 고수들은 모두 어검비행으로 공중에 오르며 박쥐들과 얽혔다.

“신기제갈의 후예들은 진법을 펼쳐 아군을 엄호하라!”

땅에선 제갈의현이 가문의 술사들을 이끌고 수십 가지의 진법을 전개하면서 적들의 정신을 공격하고 아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우리도 질 순 없지. 싸워보자고!”

두 주먹을 부딪친 금성좌가 작은 몸을 이끌고 팔이 여덟 개 달린 원숭이 마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강엽이 교주위에 오른 뒤, 금마의 비급을 얻은 그녀는 완전한 금강불괴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온몸이 흉기나 다름없는 만큼 적수공권으로 부딪쳐도 원숭이 마수를 오히려 밀어버린다.

그 신위에 피식 웃은 일성좌, 과거 일사도로 불렸던 예건룡은 아련한 얼굴로 전장을 돌아보았다.

과거 광명마교에 몸을 담았던 시절엔 무림맹을 막지 않았던가.

한데 이젠 일월신교의 일원으로서, 혈교를 몰아내기 위해 원수인 무림맹과 손을 잡았다.

“아무리 세상일은 모르는 거라지만 내 인생도 참 파란만장하군.”

차이가 있다면 그땐 사명을 이루기 위해 싸웠고, 이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것뿐.

전성기의 무공을 회복한 그는 황금빛 뇌기를 두른 심검을 쥐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흉악한 손톱을 휘두르는 거대한 강시와 맞서 싸우면서 심상의 파동을 내뿜는다.

-심상절예 구현.

황금의 뇌격이 명멸하며 세상을 하얗게 불태웠다.

-신여뇌극락.

콰아아아아아아-!

단 일격으로 강시를 잿가루로 만들고, 주변에 있던 혈교도들까지 격살하는 경세적인 파괴력.

주변 수십 장을 완벽한 진공으로 만들어버린 일성좌가 오연하게 고개를 치켜뜰 때였다.

암신을 운용하여 적들 사이를 파고든 완안극이 심상의 파동을 끌어올리며 독수를 뻗었다.

-만독무량나락(萬毒無量奈落).

수천의 독물이 사투를 벌인 끝에 탄생한 고독(蠱毒).

그 고독을 근원으로 삼은 심상절예가 구현되는 순간, 수백 명의 적들이 실 끊긴 인형처럼 픽 쓰러졌다.

특이한 것은 똑같이 범위에 놓인 아군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

“적아를 가리는 심상절예라... 제법이군.”

“후후, 오늘이야말로 네놈을 꺾고 이 몸이 칠성좌 최강임을 지존께 증명할 거다!”

“호오.”

암만 일사도가 욕심이 없는 성품이라 해도 무인의 자존심이 걸린 승부에서 도망칠 수는 없는 바.

“최강이라... 그 자리까지 내줄 순 없지. 나도 공을 세워야 우리 종파의 면을 세울 수 있다.”

허공에서 뜨거운 안광을 부딪친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을 노리고 짓쳐든 강시와 마수가 뇌격에 불타고 중독되어 쓰러지는 광경에 모두가 기함했다.

그때 두 사람 사이에 근육질의 거한이 어깨 관절을 풀며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재밌는 내기를 하는구려. 나도 끼어도 되겠소?”

“네놈은?”

“전강. 그대들에 대해선 대강 알고 있소. 전직 광명마교의 일사도와 독곡주.”

“흠, 외소림의 아라한인가.”

일성좌가 눈을 반짝이며 아는 척을 하자 전강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지금은 소림의 전강이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합장을 하자 은은한 심상의 파동이 거리를 잠식하고 정주성 전역에 퍼져나갔다.

-심상절예 구현.

적미성의 사후 소림에 머물 적에 사대금강과 대련하며 단초를 잡은 심상절예.

이 시대 최후의 아라한을 그릇으로 삼아 구현된 심상절예가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보리세수배(菩提洗隨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데 마수들이 깜짝 놀라 굳어지고, 약에 취한 혈교의 고수들은 졸도했다.

혈마의 수작으로 흡혈귀로 변한 관병들도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살상이 아닌 제압용이라... 불권의 심상절예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일성좌의 물음에 전강이 설핏 웃었다.

“사백에 비하면 아직 멀었소. 이제 막 발을 들였을 뿐이외다.”

“기형적인 심상절예군. 사마외도에게만 한없이 강력하고, 정공을 익힌 자에겐 별 소용이 없다니. 그러면서도 완 노괴의 심상절예처럼 적아를 구분하는군.”

“아, 젠장. 넌 멀리 떨어져라. 가까이 오기만 해도 소름 돋는다.”

일성좌가 흥미로워하는 반면, 완안극은 팔을 박박 문지르며 한 걸음 떨어졌다.

전강이 쾌활하게 웃으며 뭔가 말하려 할 때였다.

[팔대교왕들이 온다. 준비하도록.]

상공에 뜬 강엽의 어기전성(御氣傳聲)에 세 절대고수들은 표정을 굳히며 전방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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