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40화 (440/450)

88화. 천하 (2)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갔고, 계절 역시 수시로 옷을 바꿔 입었다.

오색으로 물들었던 단풍이 떨어지고, 새하얀 눈이 세상을 덮고, 다시 춘록이 올라왔을 무렵.

지금껏 침묵을 지켰던 신교가 기지개를 켰다.

“지금껏 비축해둔 물자는?”

“이년치 군량미를 쌓아놨습니다. 중원뿐 아니라 서역에서 물자를 들여온 게 천만다행이었지요.”

아무리 혈마의 공능이 천리를 농락한다 한들 혈우가 세상 전체를 뒤덮을 순 없는 법.

신강의 사막 너머는 혈우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신교는 비단길을 오가는 상인들을 통해 대량의 군량과 물자를 차곡차곡 비축했다.

“당문의 의원들을 통해 약재도 확보했습니다. 빙궁과 하오문의 도움으로 먼 해동땅에서도 물자를 수급했지요. 문제는 물인데....”

혈우로 오염된 물을 장기적으로 복용하면 심신에 해롭다는 사실이 밝혀진 상황.

심지어 끓인다 해도 효용이 없었기에 물을 구할 방법을 새롭게 마련해야 했다.

“교주님의 주력이 담긴 법구를 강이나 호수 밑바닥에 심으면 됩니다. 하면 물에 담긴 사특한 힘이 걸러질 겁니다.”

“해당 법구의 수량은 충분한가?”

“이론상 이만의 대군이 일 년은 문제 없이 쓸 만한 양을 챙겼습니다. 교주님의 은총이지요.”

“...새삼스럽지만 그분이 안 계셨다면 이 전쟁은 시작도 못했겠군.”

전쟁에서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는 만큼 중진들은 모두 쓴웃음을 지었다.

상석에 앉은 수성좌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부인의 해산일 이후에 출정식을 거행할 터.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니 철저히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렇게 회의가 파한 뒤, 수성좌는 보고서를 들고 교주전으로 향했다.

안쪽에서 익숙한 면면을 발견한 그가 눈을 빛내면서 먼저 말을 걸었다.

“월성좌께서도 계셨구려.”

“허락을 받을 게 있어서 말이지.”

“허락이라면... 역시?”

“출정 전에 세작들을 다 제거해야지.”

신교에 잠입한 혈교의 세작들을 모조리 걸러내겠다는 작전.

정보를 완전히 차단할 순 없겠지만 혈교가 후방에서 교란을 펼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음, 우리가 못 찾은 세작도 있지 않겠소?”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손발을 죄다 제거하면 놈들도 운신의 폭이 좁아지지 않겠나.”

“일리 있는 말씀이구려.”

그때 안쪽에서 입실을 허가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월성신이 수놓인 병풍 앞에서 다섯 개의 발톱을 지닌 오조룡의 옥좌에 앉은 강엽을 향해 두 칠성좌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부복했다.

두 성좌의 인사를 받고 관련 사항을 보고받은 강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로 진행하도록.”

“예, 지존이시여. 한데....”

수성좌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지존께서 친정을 가시면 신교의 방위는 누구에게 맡기실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강엽이 칠성좌를 데리고 친정을 떠나면 인선이 마땅치 않았던 것.

강엽은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그 건은 따로 생각해놓은 게 있다.”

딱히 설명해줄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수성좌는 눈치껏 고개를 조아렸다.

강엽이 이어 말했다.

“전에도 말했듯 이부인이 아이를 낳으면 출병식을 거행할 것이다. 차질 없이 진행하라.”

“예, 지존이시여!”

두 칠성좌가 읍했다.

* * *

“딸이에요.”

땀에 절은 조영옥이 배시시 웃으면서 아기를 내밀자 강엽의 입가에도 따스한 미소가 맺혔다.

“세상에 나온 걸 축하한다, 민아야.”

장녀인 강세령과 장남인 강무진에 이어 차녀인 강세민이 태어난 것이다.

딸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조영옥에게 강엽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번 전쟁엔 옥매를 데려가지 않겠소.”

조영옥이 참전한다면 천군만마와 같겠지만, 이제 막 아이를 낳았는데 전쟁터에 데려갈 순 없는 노릇.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제가 신교를 지켜주길 바라시는 거군요.”

“부인밖에 적임자가 없으니까.”

굳이 따지면 실각한 대공자도 있으나, 강엽은 자신의 손으로 내쫓은 대공자를 복귀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가 이제 와서 대권에 욕심을 갖진 않겠지만, 한때 그를 따랐던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을 테니.

“여기서부터는 최악을 가정하고 말하는 거요.”

어쩌면 전쟁에서 패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면 신교의 미래도 보장할 수 없겠지.

강엽은 그때를 대비해서 조영옥에게 몇 가지를 당부했고, 조영옥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이윽고 강엽의 말이 끝났을 때, 그녀는 처연하게 웃으면서 강엽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당신은 이길 거예요. 아니면 자신이 없는 건가요?”

“자신감은 없소. 절박함만 있지.”

“그래도 자신을 가지세요. 당신은 이 땅의 교주이자 천 년 전 영웅들의 전인이에요. 그리고 천마고요.”

“...고맙소.”

작게 웃은 강엽은 조영옥과 긴 입맞춤을 하고, 가족들을 불러 함께 식사했다.

백서희와 조영옥, 당묘정과 세 아이까지.

언젠가 염왕이 말한 대로 가족들과 추억을 쌓으면서 사람답게 웃고 떠들면서 시간을 보냈다.

인간답게, 평범한 사람답게.

‘이게 내가 정한 길이다, 혈마.’

그렇게 열흘 가량이 지났을 무렵.

조영옥과 당묘정, 두 여인이 아이들과 함께 성문에서 배웅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강엽은 이만의 군세를 이끌고 신교를 떠났다.

* * *

“주인님, 적들이 움직였습니다.”

“길었구나.”

검마의 보고를 받으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혈마가 돌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저게 보이느냐?”

“...천기가 어지럽군요.”

검마 역시 심상지경에 오른 무인답게 천기의 변화에 민감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엔 보이지 않겠지만, 그들 같은 절대자들의 눈엔 하늘의 혼란이 보였다.

천지자연의 기운이 혼탁하게 뒤섞이는 소용돌이.

한편으로는 대척점에 선 두 개의 별이 자웅을 겨루듯 요사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저쪽에 뜬 게 내 별이다.”

혈마의 분신처럼 검붉게 빛나는 별. 검마의 시선은 그와 대치하는 또 다른 붉은 별로 향했다.

“하면 저게....”

“천마의 별이지. 파군(破軍)과 탐랑(貪狼). 각각 나와 천마의 별이다.”

참고로 죽은 광명마교주의 별은 염정(廉貞)이었으며, 탐랑에게 별빛을 빼앗기고 어둠 속에 잠겼다.

“별은 그 사람의 삶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별은 참 공교롭지 않느냐?”

“별의 의미가 어떻든 주인님께서 이기실 겁니다.”

“그래, 이번엔 기필코 이겨야지.”

밤바람에 나부끼는 혈마의 머리카락과 용포. 혈마는 아랑곳 않고 시선을 멀리 향했다.

“느껴지는구나. 대적자가 오고 있다.”

천 년 전엔 네 명의 영웅들이 그를 막았으나, 그는 세상을 거머쥐기 위해 기어코 부활한 바.

과연 이 시대의 대적자가 그를 막을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었다.

“검마, 천마를 막아라. 놈이 이곳에 오는 것을 막진 못하더라도 최대한 지연시키도록.”

“명을 받들겠나이다.”

검마가 분분히 물러난 뒤에도 혈마는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서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대적자야, 과연 날 막을 수 있겠느냐? 막지 못하면 난 이 세상을 송두리째 먹어치울 거다.”

마치 강엽이 앞에 있는 것처럼 중얼거린 혈마가 허공에 떠올랐다.

전각이 작게 보일 만큼 높이 떠오른 그가 손가락을 치켜들자 붉은 구체가 떠올랐다.

순식간에 성인 장정만큼 덩치를 키운 붉은 구체가 넓게 퍼지면서 정주 전역을 감싸기 시작했다.

거대한 반구형의 결계로 정주를 봉인한 혈마가 입매를 틀었다.

“준비는 다 됐다. 얼마든지 오거라.”

-구오오오오오오오!

혈마의 의지에 화답하듯 도시 곳곳에서 포효가 터지면서 거대한 그림자들이 아른거렸다.

* * *

오로목제와 합밀(哈密)을 경유한 뒤, 섬서의 강역으로 진입한 신교의 군세.

이후 군세는 둘로 나뉘어 일군은 난주를 진압, 이군은 청해의 서녕을 포위하며 혈교의 세력을 축출했다.

무림맹의 생존자들이 주축이 된 의용군, 강엽이 창룡대(蒼龍隊)라 명명한 세력은 현운 진인을 좌장으로 삼아 일군을 따랐다.

일만의 대군을 이끌고 쑥대밭이 된 난주의 대로를 행진한 강엽은 지부대인과 관인들을 처형했다.

일찍이 혈교에 세뇌된 그들이 관군까지 동원하여 신교를 필사적으로 막았기 때문.

“여기도 개판이 따로 없네.”

나란히 백마를 탄 백서희가 옥용을 찡그렸다.

이제까지 지났던 지역처럼 난주 역시 목불인견의 참상이 벌어지는 지옥도로 화한 지 오래였다.

정마대전 이후 멸문한 공동파의 도사들이 장대에 매달린 채 썩어문드러져가고 있었던 것.

남녀를 불문하고 모질게 고문당했으며, 여도사들은 차마 말로 못할 고통까지 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때 현운 진인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서 예를 표했다.

“교주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공동파 도사들의 장례를 치르겠다면 그러시오.”

“...감사합니다.”

“부하들을 보내 조의를 표하도록 하겠소.”

감사의 인사를 담아 포권을 취한 현운 진인이 물러간 뒤, 강엽은 백서희와 함께 거리를 거닐었다.

난주를 해방시켰다는 소식이 퍼진 건지 굳게 닫혔던 문들이 조심스럽게 열리면서, 두려움에 질린 주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혈교를 물리친 게 악명높은 일월신교라는 말을 들었을 땐 겁을 먹었지만, 무당과 화산을 위시로 한 창룡대가 그들을 안심시키면서 식량을 나누어주었다.

“혈교를 몰아냈으니 난주는 평화를 되찾을 겁니다. 법구를 묻어서 땅을 정화했으니 물과 논밭도 예전처럼 돌아오겠지요.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세요.”

“가, 감사합니다, 무사님들!”

피골이 상접할 만큼 착취당한 주민들은 한 줌의 쌀알에도 감격하여 신교를 칭송했다.

기실 양민들 입장에선 밥만 잘 먹고 평안히 살 수 있다면 누가 천하를 지배하든 상관없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일들을 많이 겪겠지.’

애초에 구휼을 목적으로 군량을 넉넉히 챙긴 데다, 하오문의 비선을 이용해서 보급품을 받고 있는 바.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일을 할 수는 없는 만큼, 강엽은 이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아마 혈교도 예상했을 테니, 신교의 앞길을 철저히 틀어막을 터.

칠성좌가 이끄는 이군이 합류한 뒤, 강엽은 여세를 몰아 정서(定西)와 평량(平凉)을 석권, 그대로 섬서성의 성도인 서안까지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들을 만났다.

“오랜만이군, 장경. 전강도 오랜만입니다.”

“그간 격조했소, 강 무... 아니, 교주.”

무심코 예전처럼 부를 뻔한 전강은 급히 호칭을 정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장경도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허허, 이거야 원... 이젠 옛날처럼 부르지도 못하겠습니다그려.”

“사석에선 예전처럼 불러도 된다.”

그 말에 안색이 밝아진 장경이 강엽의 손을 맞잡았다.

“하하, 역시 내가 안목은 뛰어나단 말이야! 그 빌빌거렸던 낭인이 이렇게 크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딱히 빌빌거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떨떠름한 표정이 된 강엽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전강을 돌아보았다.

“소림의 소식은 들었습니다. 유감입니다.”

“....”

신교에서 두문불출하는 동안에도 하오문을 통해 중원의 소식을 접하지 않았던가.

소림이 혈마의 침입을 받고 전멸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강엽도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었다.

“사부님께서는 나와 장 분타주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셨소. 하나 그 대가로....”

소림이 멸문한 이후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퀭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강엽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본교와 합류하기 위해 여기서 기다린 겁니까?”

굳이 사천으로 돌아가지 않고 섬서의 성도인 서안에서 기다린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장경이 눈치를 살피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솔직히 말하면 네가 사천으로 가진 않을 것 같았거든. 사천이 오죽 험한 땅이냐. 아무리 너라도 대군을 몰고 촉도(蜀道)를 넘는 건....”

사방이 험준한 산맥에 가로막힌 사천은 극히 일부의 지형을 빼면 대군이 진입하기에 여의치 않은 땅.

만약 혈교가 군세의 이동을 예측해서 사천땅에서 훼방을 놓는다면 강엽이 나선다고 해도 공략에 시간이 걸릴 게 뻔했다.

“...게다가 중원에 나온 이상 보급도 한계가 있을 테고. 이런저런 이유로 네가 단기전을 염두에 둘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면 사천은 최악의 장소지.”

혈교를 몰아내고 중원을 석권한 뒤라면 몰라도, 당장 사천을 공략하는 건 시기상조.

그렇기에 장경과 전강은 서안의 하오문 분타에 의탁해서 강엽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전강이 뜨거운 안광을 뿜으며 가슴을 두들겼다.

“미욱한 힘이나마 한 손 보태고 싶소. 훗날 소림을 재건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에 참가해야 하오.”

사문의 복수가 아니라 훗날을 논한다.

강엽은 그 말로 전강이 흉중에 어떤 포부를 품었는지 알고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나름대로 소림이 살아남기 위한 전략인가....’

물론 소림의 핏값을 받겠다는 마음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훗날 신교가 천하에 우뚝 설 때를 대비해 공을 세우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래야 소림을 재건하는 게 용이해질 테니까.

“불권 대사님께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분께 받은 은혜를 돌려줘야 할 때가 온 것 같군요.”

“...?”

전강이 의아해하는 그때, 강엽의 손에서 환한 빛이 떠오르며 전강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받은 게 무엇인지 깨달은 전강은 눈을 크게 뜨고 전율했다.

“이건...!”

“불권 대사님의 심상입니다. 지금의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쓸 수 있겠지요.”

못 보던 사이 깨달음을 얻은 건지 무공이 크게 진일보한 전강이었다.

강엽이 자신의 무공 성취를 알아봤다는 걸 깨달은 전강이 쓰게 웃었다.

“...역시 바로 알아보는구려.”

“심상지경에 오른 걸 축하드립니다, 전강.”

“이제 막 발을 들였을 뿐이오.”

만약 이 전쟁에서 전강이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소림은 머지않아 예전의 위상을 되찾으리라.

강엽은 그리 생각하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빚은 갚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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