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천하 (1)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미시(未時) 중엽.
오랜만에 만난 친우가 반쪽이 된 것을 본 하후진은 혀를 내둘렀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만.”
“하하, 티가 많이 나나 봅니다.”
“동경 좀 봐라. 볼살이 푹 꺼졌어. 눈밑도 시커멓고.”
그에 비하면 면도를 못해 수염이 덥수룩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쩝, 일 년이 좀 넘게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났으니까요. 작금의 중원은... 지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산새들이 느긋하게 지저귀는 소리를 아련하게 들은 청수가 짐짓 한숨을 흘렸다.
“그에 비하면 천산은... 여긴 정말 평화롭군요.”
“뭐, 중원에 비하면 그렇긴 한데.”
떨떠름한 얼굴로 차를 마신 하후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기도 마냥 평화롭진 않았어. 당장 신도만 해도 습격을 받은 게 올해 들어 세 번째였다니까?”
걸핏하면 요마가 출몰하며 주변 도시들과 마을을 괴롭히더니 이젠 신도까지 심심찮게 공격했다.
그나마 신교의 고수들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기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지만, 전투 양상을 돌이켜보면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거드름이나 피우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도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웠다고.”
“압니다.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봤다.
도적들에게 약탈당한 마을, 길거리에 널브러진 시신들, 혈교에 끌려간 사람들까지.
“저 빌어먹을 혈교놈들을 하루라도 빨리 이 땅에서 몰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넌 어째 좀 변한 것 같다?”
수많은 적들과 싸우는 중에도 청수는 어쩔 수 없이 적을 죽일지언정 노골적으로 살의를 품진 않았다.
심지어 난전에서도 가급적 제압하는 데 중점을 두었지, 다짜고짜 살수를 퍼붓지는 않았다.
한데 지금 풍기는 분위기는 살얼음판처럼 차가우면서도 위태롭기 그지없지 않은가.
“좀 전에도 말씀드렸듯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하후 도우도 그렇지 않습니까. 염왕 선배님께서....”
하후진의 입가를 타고 쓴웃음이 번졌다.
사부가 없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쪽이 욱신거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부의 죽음을 막지 못한 강엽이나, 무림맹의 인사들에게 분노하지는 않았다.
“사부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
당시 오로목제에서 싸웠던 하후진은 염왕의 의념과 만나서 그의 진심을 들었다.
그가 진정으로 혈마와 겨루길 원했으며, 패했어도 별로 여한은 없다는 말을.
그렇기에 사부의 선택이 야속하게 다가올지언정 부정적인 감정을 품지는 않았다.
“무인은 칼날 위에서 춤추는 놀이패니, 강자와 싸우다 죽는 것은 명예로운 최후다. 사부가 항상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야. 그땐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따져보면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고 죽은 셈이었다.
염왕이 자신의 죽음을 후회하지 않는다면, 하후진이 그 선택을 최대한 존중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사부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건 아니고. 난 살 만큼 산 다음에 자식들 앞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고 싶거든. 내가 누군가에게 죽는다면 자식들이 복수를 하려 들지도 모르잖냐?”
“그 말씀은... 혈마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당연하지. 뭘 그런 걸 물어?”
염왕도문의 신물인 대도를 만지는 하후진의 입가에 살기등등한 미소가 피어났다.
“사부가 만족한다고 나까지 만족하는 건 아니잖냐. 난 어디까지나 사부의 선택을 이해할 뿐이지, 복수를 포기한 건 아니라고.”
만약 혈마에게 한 방 먹여줄 기회가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놈의 면상에 칼을 박아줄 것이다.
하후진이 그렇게 말하면서 이를 드러낼 때였다.
“우앗!”
“헉, 린아야!”
월동문 안쪽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딸의 모습을 본 그가 사색이 되어 부리나케 달려갔다.
마침 부엌에서 주전부리를 가지고 나온 단목정이 넘어지면서도 방실방실 웃는 딸의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애는 울지도 않은데 아빠가 더 호들갑이네요.”
“아니, 애가 뼈라도 부러지면 어떡해!?”
“...보통 넘어진다고 뼈가 부러지진 않잖아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에구구, 린아야. 어디 까지진 않았지? 내 이놈의 돌부리를 아주 그냥....”
무정물에 불과한 돌멩이에게 분노를 토한 하후진은 작신작신 밟아서 숫제 가루로 만들었다.
“돌멩이는 이 아빠가 해치웠으니 안심하라구!”
“뿌우...!”
돌멩이를 없애줬는데도 불만스럽게 볼을 빵 부풀린 하후린의 얼굴에 결국 청수도 웃음을 터뜨렸다.
* * *
강엽은 교주전에서 무림맹의 생존자들을 만났다.
현운 진인과 옥청선자, 제갈의현뿐만 아니라 남궁세가의 가주에 오른 남궁상아와 연가휘까지 있었다.
“오랜만이군, 연가휘.”
“그, 그렇습니다, 교주님.”
다른 사람들을 건너뛰고 자신에게 말을 걸 줄은 몰랐던지 연가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강엽은 남궁상아가 연가휘의 손을 잡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날 따라오지 않았을 때 짐작했지만, 둘이 잘 됐나 보군. 축하한다.”
“가, 감사합니다. 실은 얼마 전에 혼인을 했습니다. 시절이 하수상한지라 성대한 혼인식은 못했지만....”
남궁세가쯤 되는 가문의 수장이 변변찮은 혼례식을 올렸다는 건 구설수가 될 수 있는 문제.
다만 남궁상아의 얼굴에 별반 아쉬움은 보이지 않았다. 연가휘가 말한 대로 시절이 시절인 만큼 일일이 절차를 지킬 수가 없던 것이겠지.
그제서야 강엽이 두 사람에게 시선을 떼서 세 문파의 수장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협상은 각자 알아서 할 거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
하나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무림맹의 생존자들은 잘 쳐봐도 객장이었고, 대놓고 말하면 식객에 불과했으니까.
하물며 무림맹에서 헤어졌을 때 강엽을 공적 취급했던 것을 감안하면, 강엽이 하대를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게 여겨야 했다.
“허락하신다면 소생이 대표로 나서려고 합니다.”
제갈의현 역시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있는 만큼 스스로를 한껏 낮추면서 예를 다했다.
강엽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냥 각자 하는 게 나을 텐데?”
“예?”
“문파의 저력도 다 다르지 않소? 무당과 화산은 자파의 전력을 대부분 데려왔지만, 제갈세가는 술사들만 몇 명 데려오지 않았나. 허울만 남은 남궁세가는... 뭐 말할 것도 없지. 서로 조건이 다른데 똑같이 대우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소?”
“그게....”
정곡을 찔린 제갈의현이 할 말을 못 찾는 그때, 현운 진인이 나서서 고개를 저었다.
“총군사의 의견이 저희 모두의 의견입니다, 교주.”
“화산 또한 총군사를 대표로 선정했습니다. 이는 각파의 전력과는 별개로 총군사가 무림맹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 남궁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면전에서 모욕을 당한 남궁상아는 하얗게 굳어진 상태에서도 제갈의현의 면을 살려주었다.
“그럼 그렇다 치지. 어차피 나도 이쪽이 편하긴 하오. 시간도 없는데 괜히 실랑이나 하고 싶지도 않고.”
물론 각자 협상을 한다면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굴복시킬 수 있겠지만, 그럴 만한 가치는 없었다.
“네 문파가 합쳐서 삼백이라... 타격대 하나를 창설하면 그럭저럭 구색은 맞는군. 수장은 현운 진인이 맡으시오. 군사는 제갈가주가 그대로 유임하시고.”
협상을 한다고 불렀더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다. 이래서야 협상의 의미가 없지 않나.
그럼에도 누구 하나 따지지 못한 것은 그만큼 강엽의 인선이 절묘하기 때문이었다.
천산까지 오는 과정에서 적잖은 제자들을 잃었다 하나 여전히 무당과 화산의 전력이 가장 컸다.
그렇다면 배분도 가장 높고 일신의 무력도 출중한 현운 진인이 맡는 게 이상적일 터.
이는 강엽이 그들의 전력을 꽤나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럼 낭인전과 북해빙궁은....”
“그들은 따로 만날 것이오.”
두 방파는 신교의 동맹이니, 망명한 네 문파와 똑같은 취급을 할 순 없다는 이유.
강엽은 그쯤에서 화제를 돌렸다.
“단체의 명칭이나 지원에 대해선 나중에 정하기로 하고...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을 말해주겠소. 사실 간단한 문제지. 신교의 옆에서 의용군으로 참전하시오.”
“의용군... 말입니까?”
“하는 일은 신교의 타격대와 다르지 않소. 후방 지원에 머무르진 않을 테니 안심하시오.”
사실 가장 우려했던 문제였기에 제갈의현을 비롯한 네 문파의 수장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강엽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또한 출정식에서 신교를 정식으로 인정하며, 향후 신교를 무림맹의 일원으로 받겠다고 선언하시오.”
“...!”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한 충격에 네 문파의 수장은 눈이 튀어나올 듯이 경악했다.
혈교를 제외하면 단일세력으로는 천하제일을 논하는 신교였다. 굳이 무림맹에 참여하지 않아도 천하를 경략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대방파.
그런데 무림맹에 들어오겠다니?
“난 예전부터 무림맹이란 이름을 이상하게 생각했소. 사파와 마도는 참여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전 무림을 대표한다는 이름을 쓸 수 있을까? 흑도나 사파, 마도는 무림으로 인정하지 않는 걸까?”
“아닙니다, 교주님! 그건...!”
“긴말은 필요 없을 것 같군.”
말로는 정사마를 아우르는 조직을 만들겠다고 해도, 그 의도는 무림맹을 장악하는 것이리라.
신교를 전면에 내세워 천하를 병탄하는 것보다는, 무림맹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군림하겠다는 야망.
“앞으로 무림맹은 정파는 물론 흑도 사파와 마도, 새외까지 아우르는 진정한 무림의 대표자가 될 것이오. 황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대조직이 되겠지.”
혈교의 천하가 되기도 전에, 광명마교가 득세하던 시절부터 황실은 허수아비였다.
강엽이 무림맹을 내세워 천하를 장악한다 한들 막을 힘 따위는 없을 터.
“아, 너무 걱정하진 마시오. 신교가 다 해먹겠다는 뜻은 아니니까. 난 기존에 원로원이 했던 역할을 대신할 단체를 만들 거요. 이른바 ‘상임문파(常任門派)’라는 다섯 개의 대방파지.”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신교와 태화문, 북해빙궁, 낭인전...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할까 고민 중이오. 내 생각엔 여기 모인 문파들 중 하나를 넣으면 될 것 같은데.”
성사만 된다면 상임문파는 맹주에 비견되는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면서 군림할 것이다.
무림맹의 법안과 각종 이해관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로 거듭날 테니까.
그제서야 강엽이 어떤 구상을 품었는지 깨달은 제갈의현은 해쓱해졌다.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니 강엽이 상임문파를 미끼로 그들을 조련하려는 것임을 알아차렸을 터.
“물론 이건 혈교를 이긴다는 전제 하에 수립된 계획이오. 전쟁에서 패하면 도로아미타불이지.”
“그, 그렇지요. 하면 언제 거병하실 생각이십니까?”
신교는 일인지하의 독재체제니 교주의 결정이 곧 신교의 결정.
강엽이 대답했다.
“그쪽도 이제 막 왔으니 추스릴 시간이 필요하겠지. 춘절이 지나고 신록의 계절이 찾아오면 거병할 거요. 그때까지 어떻게든 싸울 수 있는 상태를 만드시오.”
족히 몇 달은 남았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지금부터 바쁘게 움직이면 출병식까지 맞출 수 있으리라.
제갈의현이 굳은 결기를 보이며 포권을 쥐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난 언제나 그대의 능력을 높이 샀소, 제갈 군사.”
강엽은 빙그레 웃으며 생각했다.
‘상임문파. 탐이 안 날 수가 없겠지.’
무당과 화산은 속세를 멀리하는 도가 문파고, 남궁세가는 곤궁하여 다시 일어나기 어렵다.
여태껏 무림의 안녕을 위해 분골쇄신했던 제갈의현이지만, 상임문파라는 떡이 나타난 이상 가문을 우선시할 공산이 높았다.
‘설령 그렇게 안 되어도 아쉬울 건 없지. 여차하면 남궁세가를 지원해줘도 되니까.’
신교가 쌓은 부의 일부만 투자해도 남궁세가를 일으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설사 남궁세가의 무공이 모두 실전됐다고 해도 강엽에겐 되살릴 비책이 있었다.
‘어디 보자. 일월각(日月閣)에 남궁세가의 무공 비급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교주만이 출입할 수 있는 장서각. 신교가 천 년 동안 모아둔 십만 권의 무공 비급이 쌓여있는 무고.
비록 필사본이긴 해도 남궁세가의 무공 일부가 서가에 잠들어 있으니, 적절한 지원만 해준다면 남궁세가는 머지않은 때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신교의 충직한 봉신가(封臣家)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