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지옥 (4)
갖가지 괴성과 조소가 울려 퍼지는 핏빛의 심연.
한바탕 천재지변이 지나간 것처럼 산산조각 부서진 폐허는 어수선한 분위기로 팽배했다.
붉은 혈포와 시커먼 흑포의 혈교도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세간과 가재도구를 부수고,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낸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살려달라고 빌어도 기분 나쁘게 킬킬거리며 머리채를 잡아끈다.
“이 찢어죽일 놈들아! 내 딸은 안 된다!”
“사, 살려주세요!”
딸이 끌려가는 걸 막기 위해 혈령교위의 바짓가랑이를 붙든 초로인.
눈이 시뻘게진 혈령교위가 칼날을 내리쳤다.
“늙어빠진 버러지가 감히!”
“아버지!”
등짝이 꿰뚫린 아비가 꿈지럭거리다가 절명하는 광경에 혼절한 여인을 짊어진 혈령교위.
피를 뒤집어쓴 채 실실 쪼갠 그는 여인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른 곳에서는 붉은 무복을 입은 평교도들이 사람의 머리를 공처럼 차며 놀고, 그 옆에서는 사람을 매달아두고 돌을 던지며 폭소한다.
어딜 봐도 목불인견의 참상이 벌어지는 지옥도.
무림맹이 들어선 정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과연 누가 생각했을까.
넝마처럼 찢긴 무림맹의 깃발이 초라하게 나부끼는 가운데, 무림맹의 성문 위엔 장대들이 우후죽순 걸려 있었다.
심한 바람에도 넘어가지 않도록 튼튼하게 만들었으며, 하중을 계산해서 정교하게 만든 장대.
그 위엔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다.
반항하지 못하도록 사지근맥을 잘랐고, 단전은 폐했으며, 옷을 벗긴 다음 모진 매질을 했다.
그 자신의 피로 피부에 교적(敎敵)이라 적힌 수십 명의 죄수들. 적잖은 수가 이미 숨이 끊긴 듯 축 매달린 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직 숨이 붙은 자들조차 썩은 동태처럼 흐리멍텅한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볼 뿐.
다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쿨럭, 방장 스님... 무사하시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족히 한 뼘은 커다란 체구를 지닌 근육질의 노인.
온몸이 난자당한 것은 물론, 눈 하나는 뽑혔고 오른팔도 반쯤 잘린 채 썩어문드러졌다.
설령 운 좋게 목숨을 건진다 해도 무인으로서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중상.
아니, 단전이 부서졌다는 걸 생각하면 이미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란히 잡힌 소림의 방장도 마찬가지.
법현이라는 승명을 지닌 노승 역시 황색 가사가 걸레짝이 된 건 물론 성한 데가 없었다.
계인을 찍은 이마는 벌겋게 벌어졌고, 사지의 뼈가 모조리 부서진 바람에 운신도 못할 지경.
평범한 사람 같았으면 고열에 시달려서 진작에 삼도천을 건넜을 테지만, 법현 대사는 버텨냈다.
“크, 허헛... 하늘은... 쿨럭, 이 늘근 땡중의... 목수움을, 거울 생가기... 없신, 오양임니다.”
듬성듬성 빠진 이빨 때문에 발음이 부정확하긴 해도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더억부네... 앵주님의 알모옴을 보은군요.... 이 때앵중이 저언생에 우슨 업오를, 싸앗길에....”
“내 알몸을 본다고 업보 운운하는 게요? 이래봬도 아랫도리는 충실히 가리고 있소만?”
“원애는... 큭, 그조오챠 벅기지 아났....”
“그 소리는 하지 맙시다. 생각하기도 싫으니까.”
팽무강이 부르르 떨었다. 모욕을 주겠답시고 홀라당 벗겨 장대에 매달린 기억이 훤했다.
덜렁거리는 물건을 보기 싫다고 옷을 입혀두긴 했지만, 이 기회에 그냥 잘라버리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을 때는 얼마나 등골이 싸늘했던가.
주장하는 자도 말리는 자도 단순히 유희거리로 치부하는 사태에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망할, 혀를 깨물지도 못하게 고독을 심어두다니....”
차라리 재갈을 물리는 게 훨씬 나을 텐데.
하지만 혈마는 굳이 쉬운 길을 택하는 대신 귀한 고독까지 써가며 팽무강을 조롱했다.
만약 혀를 깨물거나 그럴 조짐이 보이면 머릿속의 고독이 그러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식.
덕분에 생전 다시없을 치욕을 당하면서도 여태껏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버텨왔다.
“하아... 자결도 못하고, 아사도 못한다면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구려.”
“죽은다고, 끝도... 아이지 안슴이까.”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멀리 향하는 법현 대사.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려세운 팽무강도 그가 무엇을 보는지 알고 무거운 침음을 흘렸다.
“죽은 자의 군세....”
-우워어어어어...!
죽어서까지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혼백째 사로잡혀 거리를 배회하는 수천의 망자들.
지난날 광명마교의 마의가 만들었던 망자들과는 다소 외견의 차이는 있지만, 특징은 얼추 비슷했다.
이성과 마음을 잃고 명령에 복종하는 도구로서 혈마의 명령을 따라 도시를 떠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들 중에 맹주로 재임하던 시절 아꼈던 부하들이 있음을 확인한 팽무강이 내심 탄식할 때.
“그오다... 다르은 맹주우님은...?”
“간신히 숨만 붙어있소.”
청성파의 장문인 이송 진인.
팽무강의 뒤를 이어 맹주의 임무를 수행했던 노도사는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묶여 있었다.
온몸의 기혈이 꼬인 상황에서 주화입마에 빠진 채 서서히 미쳐갔던 모습이 선연하다.
“차라리 미치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맨정신으로 저 지옥도를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게 나을지도.
여태껏 멀쩡히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자신이 원망스럽다가도, 이 꼴이 되고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고소를 머금었다.
그때 갑자기 공기가 무거워졌다.
“살 만한가 보군.”
성문 위로 나온 아름다운 용모의 청년.
긴 머리카락을 비녀로 고정한 채 붉은 혈룡포를 휘날리는 청년이 핏빛의 눈동자를 부드럽게 휘었다.
검마를 시종처럼 데리고 다니는 혈마의 등장에 팽무강과 법현 대사는 이를 악물었다.
“닥쳐라! 이 마귀 새끼가...!”
그 순간 검마가 흑검을 뽑아 썩어문드러진 팽무강의 팔뚝을 완전히 절단해버렸다.
반쯤 괴사된 팔이 붉은 핏물과 함께 떨어지자 눈을 부릅뜬 채 짐승 우는 소리를 내는 팽무강.
법현 대사의 안색이 통나무처럼 뻣뻣해지고, 잠에서 깨어난 이송 진인이 헤실헤실 웃었다.
짐짓 엄격한 눈빛을 지으며 세 사람을 쏘아보는 검마와 달리 혈마는 피식 웃어넘겼다.
“마귀 새끼라... 그래, 그게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다. 난 불구대천의 대악인으로서 천하의 질서를 부수고 이 세상을 원점으로 회귀시킬 거다.”
“어재서... 그런 지스을...?”
“할 수 있으니까. 내 의지로 하늘의 섭리를 부순다면, 그야말로 신이나 이룰 위업 아닌가? 창생은 파괴 위에서 꽃을 피우는 법이니, 나야말로 신시대의 신이다.”
자신의 포부를 드러내긴 했지만 딱히 논쟁할 생각은 없는지 법현 대사의 반응을 살피진 않았다.
“아, 그렇지. 원래 너희들을 찾아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이제야 떠올렸다는 듯 손뼉을 친 혈마가 세 사람을 차례대로 돌아보면서 말했다.
“곧 천마가 올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놈이 무슨 대답을 가지고 올지 기대되는군. 우리 둘의 승부로 천하의 주인이 누가 될지 갈리겠지. 하지만....”
뒷짐을 진 채 불타는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붉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거기에 너희 자리는 없을 것 같구나. 누가 이기든 마도천하가 올 테니까. 천하의 질서를 수호하겠답시고 건방을 떤 너희는 멸망할 거다.”
“......!”
눈가를 잘게 떤 법현 대사는 나직이 불호를 읊었다.
‘무량수불... 너라도 무사히 보내서 다행이구나.’
소림의 가르침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가르친 제자가 탈없이 천산으로 피신하기를 염원할 뿐이었다.
* * *
스르륵....
먼지처럼 나직이 깔린 어스름한 광각.
신교의 교주만이 들어올 수 있는 연공실엔 한 사내가 가부좌의 자세로 명상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극히 희미한 빛을 제외하면 온통 어둠뿐인 폐관에서 미동도 않고 호흡하기를 몇 시진.
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헤아리기 힘들 만큼 시간이 지났을 때, 긴 호흡과 함께 눈을 반개했다.
찬란한 별빛이 빠르게 갈무리되면서 이내 뚜렷한 초점이 눈동자에 맺힌다.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지.”
마치 자신에게 알려주는 듯한 혼잣말과 함께 서서히 몸을 일으킨 강엽이 팔짱을 꼈다.
천마신공은 완성 단계로 접어들었으나, 모든 심상을 하나로 모은 심상절예는 답보 상태.
아슬아슬하게 한 걸음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길이 끊겨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심정이라고 할까.
고작 한 걸음이라고 하면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기실 하늘과 땅 만큼이나 넓은 간격이었다.
지금 당장 깨달음을 얻어 돈오를 이룰 수도, 영원히 길을 더듬으며 목적지를 헤맬지도 모르지.
시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평생을 궁구한다고 해도 닿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필멸의 검... 애초에 방향성이 잘못된 건가?’
죽일 수 없는 것을 죽이기 위한 심상절예. 자신의 모든 역량을 일점에 모은 필살의 일검.
당초엔 그것만이 혈마를 죽일 수 있는 수단이라 믿고 전력을 다했으나, 부족하단 느낌이 들었다.
세상의 명운이 걸렸기에,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조바심에 불안해진 걸까.
단순히 그런 거라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지.’
상단전의 영성이 속삭인다.
지금까지 익힌 심상절예를 억지로 우겨넣어봤자 혈마가 염왕을 상대로 보여준 수를 이길 순 없다고.
원인과 결과를 바꾸는 역천의 심상절예.
비슷한 효과를 지닌 심상절예는 마의나 검선 등이 보여줬지만, 혈마가 구현한 것은 격이 달랐다.
상대의 공격을 되돌리는 것을 넘어, 시공의 흐름 바깥에서 운명에 간섭하는 힘.
따지고 보면 먼저 답을 내고, 답에 이르는 길을 어떻게든 짜맞추는 식이지만 그 법칙이 생사결에 적용되면 가히 무적이나 진배없었다.
처음부터 압도적인 우위를 지닌 적을 상대로 어떤 수를 짜낼 수 있겠는가.
설사 똑같은 심상절예를 만들어낸다 한들 길항을 이룰 뿐 꺾을 순 없겠지.
그것이야말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싸움일 터.
“영원히 이어질 싸움이라... 영원....”
그렇게 혼잣말만 곱씹으며 화두에 몰두했을 때였다.
-교주님.
바깥에서 들리는 전성에 강엽이 미간을 찌푸렸다.
“완안극? 무슨 일이냐?”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고하지 말라고 명을 내려두었던 터에 집중이 깨졌으니 심기가 불편해졌다.
설마 섬서 끝단의 고원에서 무림맹의 잔존 세력이 혈교를 맞닥뜨린 일로 찾아온 걸까.
“무림맹의 일이라면 신경 쓰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그 정도도 이기지 못하면 혈교와의 전쟁에선 써먹지 못한다. 지원을 보낼 생각은 아예 없어.”
-...대부인께서 산통을 느끼셨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강엽의 안색이 급변했다.
백서희가 회임한 시간을 돌이켜보면 해산달이 찾아오기까지 한 달이 좀 넘게 남아 있었다.
“설마 조산(早産)인가?”
-예? 아닙니다. 대부인께서 아기씨를 낳으실 달이 맞습니다. 열 달을 꽉 채우셨는데요.
“음? 그게 무슨 소리...?”
말하다 말고 멍해진 강엽이 물었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다, 달포가 좀 넘으셨습니다. 대부인께선 알리지 말라고 하셨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
극도로 몰아에 빠진 탓에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아예 잊고 있었다는 건가.
-아, 그리고 무림맹과 혈교의 싸움은....
강엽은 듣지 않았다. 혈마고 폐관수련이고 죄다 내팽개친 채 문을 박차고 뛰어갔다.
* * *
“으애애애앵!”
“오구, 오구. 우리 아들....”
엄마의 뱃속에서 벗어나 낯선 세상에 내던진 게 무서운지 시끄럽게 우는 아기.
쭈글쭈글한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는 백서희의 모습에 강엽은 그제서야 긴장의 끈이 풀리는 걸 느끼고 벽에 기댄 채 미끄러졌다.
“...고생했다.”
“지금 얼굴 무지 웃긴 거 알아?”
“뭐?”
“애는 내가 낳는데 왜 네가 창백해져?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누구 부고 들은 줄 알겠네.”
“너는 꼭 비유를 해도....”
강엽이 눈썹을 치켜뜨며 역정을 내는 모습이 재밌는지 백서희가 깔깔 웃으며 아이를 쓰다듬었다.
“사실 당 동생이 회임했을 때 나 질투했다? 내가 먼저 맺어졌는데 첫 아이를 가졌잖아.”
“이제는 좀 풀었어?”
강엽이 쓴웃음을 지으며 땀이 흥건한 이마를 만지자 백서희가 눈을 찡긋하며 배시시 웃었다.
“진아를 가졌을 때 진작 풀렸지.”
강무진. 굳셀 무(武)에 나아갈 진(進)을 붙인 이름이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굳세게 나아가라는 뜻에서 백서희가 붙여준 이름.
그 뜻을 헤아린 강엽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지금 힘들다는 거 알아. 완 노사님이 그러더라. 네가 고민이 많은 것 같다고. 그래서 알리지 말라고 했어. 혹시 나 때문에 깨달음을 놓칠지도 모르니까....”
“세상 어떤 남자가.”
강엽이 백서희를 꼭 끌어안아주며 속삭였다.
“자기 여자가 아이를 낳고 있는데 수련이나 하고 있겠냐. 우리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날인데, 당연히 만사 제쳐두고 달려와야지.”
“응. 고마워, 여보.”
“나야말로 고맙다고 해야...?”
끝에 가서 말꼬리를 올린 강엽이 말을 잇지 못하자 백서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딘지 초점이 엇나간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본 강엽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영원... 무진... 만상....”
뭔지는 몰라도 단초를 얻은 게 틀림없다.
그 사실을 직감한 백서희는 아들이 찡얼거리는 소리도 강엽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기막을 쳤다.
그렇게 한참을 넋을 잃은 채 중얼거리던 강엽이 초점을 되찾고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고맙다. 덕분에 단초를 얻었어.”
“응? 아, 으응. 추, 축하해. 바쁠 텐데 이만 가봐. 시비들 도움 받으면 몸 추스릴 수 있어.”
“아니, 이제 연공실엔 가지 않아.”
고개를 저은 강엽이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알았거든. 이젠 헤매지 않고 갈 수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