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33화 (433/450)

86화. 혈마 (2)

몇 번을 베어도 재생하는 불사의 괴물들.

한때는 심상절예만이 그런 괴물들을 죽여버릴 수 있는 수단이라고 믿었지만, 용맥을 퍼올릴 수 있는 괴물들은 그 믿음을 깨부쉈다.

당장 강엽 자신만 해도 절대무적이라고 여겨졌던 심상절예의 심흔을 극복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염왕에겐 재생의 공능이 없다.

강엽이나 혈마와 달리 심상절예를 정통으로 맞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겠지.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갈구하는 대신, 기존의 무공을 더 발전시키는 걸로 대응했다.

일찍이 불권이 광명마교주를 상대로 펼쳤던 심상절예의 파생기.

같은 심상에 근원을 두었되, 첫 번째 심상절예와는 또 다른 공능을 지닌 절기를 창안한 것이다.

‘육신이 아닌 마음을 베는 심상절예....’

어떤 의미에선 가장 이상적인 심상절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상이 아닌 계도를 목적으로 심상절예를 빚어낸 불권처럼 염왕 역시 심상절예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는 걸 증명한 셈.

설사 염왕의 무공관이나 사상에 공감하지 않을지라도 눈여겨볼 만하겠지.

[.......]

마수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아군인 무림맹은 물론, 적인 혈교 역시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

잠시 숨을 고른 염왕이 입을 열었다.

“다음.”

나직한 한 마디였지만 반향은 컸다.

-와아아아아아아!

손에 땀을 쥐었던 무림맹의 무인들이 주먹을 번쩍 치켜들며 함성을 질렀으니까.

무림맹의 수뇌부들도 한결 밝아진 안색으로 아군의 사기를 독려하며 전의를 돋웠다.

강엽만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전장을 볼 뿐.

‘좋아할 때는 아니야.’

염왕 역시 마수를 꺾고도 얼굴에 어린 긴장감을 완전히 내려놓진 않았다.

아직 적이 남아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리라.

“전군 진...!”

여세를 몰아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이송 진인이 지휘봉을 들어 명령을 내리는 찰나.

-그만.

허공에 깔린 전성이 이송 진인의 목소리를 틀어막고, 한껏 오른 투지에 찬물을 끼얹는다.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 불허하는 압도적인 존재감.

양측의 무인들을 합쳐 일만 명이 넘는 전장이, 한 사람에 의해 완벽하게 제압당했다.

“혈마.”

심상세계에서 만났을 때와는 다른 외양. 야성적인 외모였던 그때와 달리 혈마는 절세옥용의 미청년으로서 현신했다.

소름끼치도록 위험한 눈빛만이 그때와 똑같을 뿐.

허공에서 핏빛의 붉은 용포를 흩날리며 뒷짐을 진 혈마가 마수를 힐끗 돌아보았다.

혈마가 나타났는데도 침묵하는 거대한 괴물.

그 모습에 분노보다는 호기심을 느꼈는지 혈마는 턱을 매만지며 짐짓 흥미로워하는 투로 중얼거렸다.

“마음을 베는 칼이라... 생각했던 이상이군. 조금은 얕봤던 생각을 정정하마.”

“글쎄, 여전히 얕보는 것 같은데.”

염왕이 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려오지 않겠다면 강제로 끌어내주지.”

투아아아아앙!

느닷없이 터져나가는 기파.

창염을 동반한 격공의 기운이 혈마를 잡아먹고, 사방 십여 장의 허공을 집어삼키며 폭발했다.

아무런 조짐도 없이 터진 열양지기에 초원에도 불이 붙었지만, 혈마는 아무렇지 않게 나타났다.

터럭만큼도 상한 기색 없이 유유자적 화마 한가운데를 거닐며 염왕과 대치한다.

그때 이송 진인이 끼어들었다.

“귀하가 혈마요?”

무림맹주와 혈교주의 대화. 적의 수장이 말을 걸었음에도 혈마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는 넌 누구냐?”

“당대의 무림맹주요. 청성파의 장문인이며, 강호엔....”

“그렇군. 관심 없으니 꺼져라.”

만인이 보는 앞에서 면박을 당한 이송 진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굳어졌지만, 혈마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림맹 수뇌불들을 잠시 둘러보고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릴 뿐.

“심상지경에 오른 놈이 한 명도 없는가. 그나마 서너 명 정도가 제법이지만, 나머지는....”

혈마가 눈을 부릅뜨자 무형의 기운이 부챗살처럼 퍼지며 수뇌부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무공이 떨어지는 자들은 숫제 무릎을 꿇고 컥컥거리기까지 한다.

보다 못한 고수들이 출수했다.

“멈춰라-!”

전대 맹주인 멸도 팽무강과 낭왕, 그들을 비롯한 이들이 나섰지만 혈마의 몸에 닿진 못했다.

병장기가 전권을 뚫고 들어오기 직전 혈교측의 고수들이 막아섰던 것.

곳곳에서 불티가 튀고 파찰음이 울린다.

“주인님의 옥체엔 손끝 하나 댈 수 없다.”

시커먼 장포를 걸친 평범한 용모의 중년인.

그러나 팽무강과 낭왕, 두 천하팔존의 날붙이를 일검에 얽어버린 신위는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안색이 급변한 두 절세고수가 이를 악물고 기파를 발하는데도 산들바람처럼 흘려버리는 이화접목.

오히려 주변 수뇌부들이 내상을 입었는지 울컥 피를 토하면서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일단 진정하는 게 어떤가, 멸도?”

“...자네는 검마인가?”

“염왕이 알려줬나 보군.”

“그렇소. 많이 알려주시긴 했지. 천마에게 패해서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는 말도...!”

팽무강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맹렬한 기파가 터지면서 주변의 소음을 묻어버렸다.

검마가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다.

“굳이 명줄을 재촉하는구나.”

“어차피 죽일 생각 아닌가?”

여상하게 대꾸한 낭왕이 횡소천군의 기수식으로 우도를 휘둘러오자 검마가 흑검을 세웠다.

얇은 흑검이 칼날을 튕겨내고, 역으로 낭왕의 호신강기를 두부 썰듯 베어버린다.

가까스로 피했음에도 어깻죽지에 상처를 입은 낭왕이 입매를 씰룩거리며 좌검으로 척초를 질렀다.

쉴 새 없이 종횡무진하는 좌검우도의 폭풍세례.

그러나 검마는 종이 한 장 차이로 모두 피하면서 엇박자로 허점을 비집고 들어갔다.

유형화된 심검 앞에서 방어초는 흐트러지고, 호신강기도 두르지 못한 맨몸이 드러난다.

십 초도 되기 전에 위기를 맞이한 낭왕의 눈빛이 싹 굳어질 때.

-심극 전개.

공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은 팽무강의 절초가 검마의 측면을 노리고 쇄도했다.

-오호무허도(五虎武㠊刀).

절세의 노도객이 전력을 담은 필살의 구명절기.

이름 그대로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질주하는 듯한 패도적인 심극이 주변 일대를 뒤집는다.

하지만 검마는 흑검을 휘두르지도 않고 손날을 모아 공력 파동의 결을 잘라냈다.

동시에 뒤에서 덮치는 낭왕의 간격에 맞춰, 겨드랑이 사이로 흑검을 역수로 찌른다.

말도 안 되는 대응인데도 검마의 흑검에 어린 힘이 두 절세고수의 절기를 간단히 파훼했다.

“크읍...!”

어깻죽지를 베인 팽무강이 핏물을 쏟으며 휘청거리고, 낭왕은 옆구리를 관통당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두 사람을 간단히 제압한 검마가 코웃음을 치며 목을 치려고 할 때.

“너, 사특한 마두야! 멈추지 못하겠느냐!”

이송 진인이 몸을 날리고, 뒤에 있던 제갈의현이 수인을 맺으면서 진언을 읊었다.

‘주박술인가.’

멀리서 제갈의현의 수인을 관찰한 강엽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두 천하팔존이 제압되는 모습을 보고 정면대결은 무리라고 판단, 일단 발목을 묶을 생각을 한 것이겠지.

하나 검마는 제갈의현의 뒤통수를 치듯 흑검을 휘둘러 주력을 절단하고 이송 진인의 허리를 베었다.

이후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무당의 현운 진인과 화산의 옥청선자를 맞닥뜨린다.

“서쪽 숲에 퇴로를 열겠다고 했는가?”

강엽과 함께 그 광경을 목도한 종현 진인이 한숨을 터뜨리며 후예사일의 기수식을 취했다.

“장문인?”

“염치 없지만 부탁하네. 이들을... 아니, 무림의 정기가 끊어지지 않도록 지켜주게.”

굳건한 각오를 다지는 장문인의 말에 함께 백의종군하던 사일검수들이 결기를 내비쳤다.

“장문인, 저희도 가겠습니다!”

“고맙구나. 하지만 너희는 퇴각하는 아군을 도와라.”

“예? 퇴, 퇴각이라니...!”

“보고도 모르겠느냐? 무림맹은 패했다.”

“...!”

혈마와 검마, 두 절대고수만 나서도 무림맹의 전력을 으깨버릴 수 있으리라.

하물며 팔대교왕을 비롯한 혈교의 전력까지 가세한다면 승리할 길은 요원해지겠지.

사색이 된 제자들을 일별한 종현 진인이 강엽을 향해 씁쓸한 미소를 내비쳤다.

“이 우둔한 늙은이도 알겠네. 혈마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자네밖에 없음을.”

염왕이 마수를 꺾을 때만 해도 희망은 있었지만, 검마는 그조차 부질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제는 최대한 많은 제자들을 살려서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을 터.

“부탁하네, 천하제일인.”

천마가 아닌 천하제일인.

정과 마를 통틀어 강엽이야말로 이 시대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임을 공언하며 몸을 돌린다.

“제자들은 후퇴하라!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전력을 보전하거라. 이는 장문인의 명령이니라.”

“장문인...!”

“따라오는 놈은 용서치 않겠다.”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발바닥 용천혈로 진기를 분사하며 바람처럼 날아가는 종현 진인의 모습.

그를 부르짖을 사일검수들 속에서 강엽은 가장 익숙한 사람의 어깨를 잡았다.

과거 강엽 일행을 점창파까지 안내했던 사일검수이자 용봉지회의 일원인 척무경이었다.

“이익! 이것 놓으시오! 당신이 누군지 몰라도...!”

“눈치 좀 챙기지?”

“뭐?”

“장문인이 날 뭐라고 불렀는지 잊었나?”

“드, 듣긴 했지. 천하제일... 설마?”

“다른 사람 몸을 빌렸으니 바로 못 알아보는 것도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저 싸움에 당신들이 끼어드면 방해만 될 뿐이야.”

그제서야 장문인이 친근하게 대한 사람의 정체를 깨달은 척무경은 말문이 막힌 기색이었다.

다른 사일검수들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강엽만 망연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따라와라. 퇴로를 열려면 나도 준비할 게 많으니까. 지금은 다른 사람 몸을 잠깐 빌린 거라 스스로를 지킬 수 없어.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

“자, 잠깐... 당신... 정말로?”

“천마다.”

“...!”

“장문인을 구하고 싶다면 군말 말고 따라오도록.”

척무경과 사일검수들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절세고수들도 목숨을 보전하기 힘든 싸움에 끼어들어봤자 방해만 될 게 불보듯 뻔했다.

“저, 정말 장문인을 구할 수 있습니까?”

“빨리 움직일수록 가능성이 늘겠지.”

* * *

“운기해라, 염왕.”

뜻밖의 제안에 염왕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마수를 상대하면서 적잖은 공력을 소모했을 터. 만전도 아닌 놈을 쓰러트려봤자 재미없지. 호법을 서줄 테니 공력을 넉넉히 채우고 덤벼봐라.”

염왕이 만전이 되었을 때 쓰러트리겠다는 건가.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염왕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지.”

“왜, 운기하던 중에 기습할 것 같은가?”

“아니, 굳이 운기할 필요가 없거든.”

진심이었다. 몸은 천근만금 무겁고 단전도 바닥을 드러냈지만, 그래도 심상절예를 펼칠 수는 있다.

어차피 이쪽의 패를 상대가 알았으니 괜한 탐색전을 펼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을 터.

‘한 번이면 된다. 만약 이게 이마저 안 통하면....’

혈마를 상정하고 창안한 심상절예.

만약 이게 먹히지 않는다면, 만전의 상태로 싸움에 임한다고 해도 초라하게 패배하겠지.

그런 염왕의 각오를 읽었는지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응시한 혈마도 피식 실소했다.

“그러면 이 몸도 최선을 다해야겠구나. 천마를 상대하려고 아껴둔 절기였거늘.”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

심상의 파동을 최대한 숨긴 채, 두 사람은 빛살처럼 상대의 허점을 노리고 비장의 패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상대의 마음을 베는 단심일도의 심상절예가 구현되는 그 순간.

-심상절예 구현.

혈마의 심상절예가 조금 더 먼저 완성됐다.

-역천(逆天).

“......!”

하늘의 섭리를 정면에서 반하는 심상절예.

그 실체를 깨달은 순간, 염왕은 울컥 선지피를 토하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심상절예가 굳이 요란할 필요는 없지. 그런 의미에서 네 심상절예는 꽤나 훌륭했다, 염왕.”

“쿨럭! 이 심상절예는...!”

“원래는 진조를 상대하려고 만들었지. 그의 불사성을 파훼하고 목숨을 추수하기 위해서....”

염왕의 목을 잡은 혈마가 말했다.

“내 심상절예는 인과를 뒤집지.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힘, 난 이 힘으로 천리에 도전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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