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29화 (429/450)

85화. 혈세 (4)

“빨리빨리 움직여라, 굼벵이들아!”

“게으름 피우는 놈은 가차없이 죽이겠다!”

욕설과 함께 으름장을 놓은 핏빛 무복의 무인들.

채찍이 내려칠 때마다 행여나 자신이 맞을새라 깜짝 놀란 죄수들은 안간힘을 쓰며 노역했다.

불과 수증기가 난무하는 열탕지옥에서 철광석을 비롯한 각종 물자들을 옮겨다 놓는다.

수십 명의 야장들이 담금질을 하고, 그렇게 만든 병장기를 어디론가 옮기기를 반복한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채찍질을 맞는다.

그리고....

“사,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감히 비수를 숨겨둬? 넌 사형이다!”

수상쩍은 짓을 하는 자들은 펄펄 끓는 쇳물에 푹 담궈지며 처형당한다.

야장들은 사람이 들어간 쇳물로 병장기를 만든다는 사실에 토악질이 나온다는 표정이었지만, 서슬 퍼런 눈빛에 이를 악물고 망치질을 했다.

만약 일을 게을리하거나 부실한 병장기를 만들면 가족들이 험한 꼴을 당할 테지.

반항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본보기로 처형됐고, 남은 자들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굴종했다.

비록 그들이 지옥같은 곳에서 보수도 못 받고 일한다지만, 노역하는 자들보다는 한결 나았다.

“쿨럭! 쿨럭!”

“음? 교위님, 이 새끼 피 토하는데요?”

“그럼 저짝으로 보내버려.”

“아, 안 돼! 나는...!”

“돼.”

한눈에 봐도 중병에 걸린 해쓱한 안색.

혈교의 무인에게 끌려간 죄수가 비명을 질렀지만, 누구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시체 취급하듯 안 보이는 곳에서 혀를 차거나, 행여나 자신도 저렇게 될까 전전긍긍할 뿐.

-아아아아아아악!

일하는 중에 부상을 입거나 병에 걸린다고 약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넘쳐나는 게 인간인데 뭐하러 약을 쓰며 치료하겠는가.

“혈라분의 생산 진척은?”

“칠천 명이 쓸 분량까지 완성했습니다.”

“기대에 못 미치는군. 만 명분이 일차 목표 아닌가?”

“하오나....”

“네놈이 대신 공양되고 싶나?”

“아, 아닙니다!”

“그럼 똑바로 일해. 천하 만민을 그분의 신민으로 만드는 게 우리의 임무. 기대치에 못 미치면 네놈과 네놈 가족들이 공양될 거다.”

“서,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더 이상 노역에 써먹지 못할 자들은 심장이 뽑혀 저주받은 비약을 생산할 밑거름이 된다.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끌려온 죄수들이 핏빛 가루를 다른 약초와 배합하여 단약을 만들고 있는 상황.

사람을 재료로 쓴 약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저항하지 못한다.

“참, 끌려온 창기들이 있지 않나? 저번에 음질(陰疾)이 어쩌구 하던 년들 전부 공양시켜라.”

혈교도들의 노리개로 전락하여 중병을 얻은 여인들까지 인신공양을 하겠다는 미친 발상.

그러나 모두가 이의를 제기하기는커녕 기가 막힌 묘안이라면서 박수를 보낸다.

안건을 낸 사람이 가장 지근거리에서 혈마를 보좌하는 검마였으니까.

“그리고... 음.”

말하다 말고 뭔가 걸리는지 한쪽 눈썹을 하늘로 치켜뜨면서 은은한 불쾌감을 표한다.

모두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검마가 늑골을 매만지며 푸념했다.

“쯧, 반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대로인가....”

일월신교에서 싸운 뒤로 반년이 지났다.

혈마의 은총으로 심흔을 비교적 빨리 치유했는데도, 간혹 칼날같은 격통이 찌르르 울리곤 했다.

함께 싸운 괴악은 그보다도 심한 상처를 입었기에 아직 현장에 복귀하지 못한 마당.

우여곡절 끝에 혈마를 부활시키긴 했지만, 당시 두 사람이 입은 피해는 지나치게 컸다.

만약 그때 추격대에게 덜미를 잡혔다면 꼼짝없이 잡혀서 비참하게 죽었으리라.

‘천마의 전력을 오판했다. 우리 셋이라면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터무니없는 착각이었어.’

아무리 광명마교주를 죽인 놈이라지만 호교사천의 협공을 아무렇지 않게 감당할 줄은 몰랐다.

염왕의 참전도 계산 밖이었다. 놈의 제자가 천마에게 가세했다지만, 일월신교와 오랫동안 드잡이질을 한 놈이 그들을 도우러 올 줄이야?

속으로 한숨을 흘린 검마는 문득 자신을 의식하는 부하들의 눈빛을 의식하며 표정을 가라앉혔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난 그분을 뵈러 가겠다. 너희들도 현장에 돌아가도록.”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혈마의 존체를 듣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린 부하들을 내버려둔 검마는 회의실을 떠났다.

전각을 나서면서 밤하늘에 잔뜩 낀 검붉은 먹구름을 흘끗 올려다본 그는 숨을 들이켰다.

혈마를 배알하는 것은 호교사천인 그로서도 두렵고 긴장되는 일.

혈천궁(血天宮)이라는 편액이 걸린 교주전에 온 그는 바깥에서 무릎을 꿇고 경배했다.

“미천한 종이 삼가 주인님을 배알하나이다.”

최소한의 호위나 시비도 배치하지 않은 전각.

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입궁을 허락하자 검마는 의관을 단정히 하고 신중히 걸음을 옮겼다.

입구에서부터 자욱한 피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그러나 검마는 그 피냄새조차 감미롭게 맡으면서 혈천궁의 가장 깊숙한 심처로 나아갔다.

별천지처럼 여겨지는 혈천궁의 내부 정경.

드넓은 공간으로 가자 이질적으로 생긴 요마들과 영수들의 사체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과거 혈마가 사냥해서 영단을 취한 요마와 영수의 사체를 고스란히 박제한 것.

거기까지 지난 검마는 혈천궁을 호위하는 거대한 갑옷의 존재를 보고 멈칫했다.

“마수.”

[.......]

그와 같은 호교사천. 그날 염왕과 승부를 내지 못하고 동수를 이루었다고 했던가.

마수를 지나친 검마는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

“미천한 종이 삼가 주인님을....”

“됐다.”

말을 끊어버린 차가운 목소리.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낀 검마는 고개를 깊숙이 조아리면서 땅바닥에 이마를 댔다.

시커먼 판석에서 싸늘한 기운이 올라왔지만, 귓가에 꽂히는 주인의 목소리는 몇 배나 싸늘했다.

“했던 말을 또 할 필요는 없겠지. 고개를 들라.”

목울대를 꼴깍 움직인 검마는 엎드린 채 머리만 살짝 치켜들며 부활한 주인의 옥체를 응시했다.

새로운 육신을 얻은 만큼 천 년 전과는 사뭇 달라진 외양. 그가 허수아비로 취급했던 젊은 혈교주의 육신을 차지한 혈마가 나른한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동안 이 육신의 기억을 엿봤다. 그래도 내 몸이 될 놈인데 끔찍하게 학대했더구나.”

“망극하옵니다, 주인님. 속하를 벌해주십시오.”

영혼이 복속당한 검마는 혈마에게 감히 대항할 수 없다. 혈마의 처분을 기다리며 얌전히 목을 내미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삐뚜름한 자세로 턱을 괸 혈마가 피식 웃었다.

“정신과 육신은 서로 영향을 주는 법이지. 나도 모르게 육신의 분노에 호응했던 모양이다.”

곧 검마를 내리찍었던 압박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검마는 감히 안심하지 못했다.

이러다가 언제 또 변덕을 부릴지 모르는 혈마였기에.

“그래, 무엇을 고하러 왔느냐?”

“조만간 무림맹과 회전을 치를 예정입니다. 무림맹은 으깨질 것이고 잔당들은 사방에 흩어질 겁니다. 속하가 그 싸움에 나설 수 있게 윤허해주십시오.”

“팔대교왕이란 녀석들만으론 부족하더냐?”

“...적측에 심상지경의 고수가 합세했다는 세작의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염왕이라는 자이지요.”

“호오라.”

혈마가 흥미를 보이는 가운데 마수 역시 어깨를 움찔 떨며 고개를 돌렸다. 말은 안 해도 엎드린 검마의 뒤통수를 빤히 응시하는 모습.

혈마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수가 호승심을 드러내다니 별일이군. 둘이 은원이 있나?”

“전날 일월마교를 쳐들어갔을 때 염왕이 그쪽의 교주를 도왔습니다. 마수가 그자와 붙었지요.”

“그렇군. 승부를 내지 못했다면 아쉽겠지. 천마 말고도 그런 고수가 또 있을 줄은 몰랐구나.”

“예, 그러니 속하가....”

“내가 몸소 행차하겠다.”

“...!”

“그간 이 좁은 골방에 처박히기만 했지. 너희가 바치는 피를 따박따박 받아먹는 것도 괜찮기는 했지만, 이젠 내가 직접 사냥하고 싶구나.”

혈마가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옥좌와 몸을 연결시킨 수십 개의 혈목이 떨어져나갔다.

선혈이 흐르는 옥좌 위에서 철저히 단련한 상반신을 드러낸 혈마가 관절을 뚜둑 꺾었다.

핏빛 안개로 바뀐 그가 검마의 옆에 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검마는 감격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준비하겠습니다, 주인이시여!”

* * *

아직 계명성도 울리지 않은 이른 새벽.

불현듯 잠에서 깨어난 강엽은 평소보다 일찍 깼다는 걸 알고 땀이 묻어나는 이마를 짚었다.

마치 십 년 묵은 체증이 걸린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혈마.’

갑자기 그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상단전의 영성이 먼 곳에서 기지개를 켠 숙적을 헤아렸다.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고개를 돌리는데, 문득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슴팍에 와닿았다.

보드라운 살결과 함께 조영옥이 안겨왔다.

“상공....”

“깼소?”

“불길한 꿈을 꿨어요. 불타는 밤하늘과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미쳐 날뛰는 악귀들....”

“....”

“상공도 느끼셨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강엽은 조영옥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끼고 흠칫했다.

어지간해선 약한 소리를 안 하는 그녀가 하얗게 질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단지 악몽을 꿨기 때문이 아니다.

“꿈에서 옥좌에 앉은 자가 경고했어요. 제가 가진 요선의 영성을 되찾을 거라고... 저와 우리 아이, 상공까지, 모조리 죽일 거라고....”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혈마를 막지 못하면 도래할 최악의 미래.

조영옥을 토닥이며 안심하라고 말했지만, 그건 강엽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기도 했다.

그녀가 지쳐서 다시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침대에서 나온 강엽은 미간을 지그시 모았다.

하필 요선의 영성을 가진 조영옥이 꿈속에서 혈마와 조우한 게 우연일까.

대강 옷을 걸친 강엽은 백서희와 당묘정이 곤히 자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밤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교주전의 지붕으로 올라서 가부좌를 틀고 참선한다.

천마신공이라 명명한 새로운 심법.

교주위에 오른 뒤 보낸 반년은 오롯이 천마신공을 완성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혈마와의 싸움에서 살아남고, 나아가 그를 꺾기 위해선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경각심.

그를 위해선 천마신공의 진기를 완전히 통합하고, 운기 경로를 세세히 조정해야 한다.

힘들 때마다 조언을 해줬던 진조는 더 이상 없다.

온전히 자신의 능력과 노력, 그리고 운에 의지해서 앞날을 개척해야 하는 게 주어진 현실.

천마신공을 운용하는 강엽의 위로 기이하리만치 맑고 투명한 검은빛의 세 송이 꽃이 피어났다.

깊고 어두운 색인데도 정순한 것은 의념으로 사특한 기운을 걸러냈기 때문이었다.

마이되 마를 초월한 탈마(脫魔). 동시에 한없이 대자연의 기운에 가까운 자연경(自然境).

오기조원이니, 등봉조극이니 하는 두루뭉술한 경지를 건너뛰어 미답의 경지에 발을 디뎠다.

-너 자신을 문으로 만들어라. 그릇이 되지 말고 자연지기를 통하는 문이 되어라.

일월구천관의 진정한 시험을 통과한 뒤 얻은 기연.

과거 유익이 신교를 세우기 이전, 일월문의 전인으로서 우연히 얻은 선맥(仙脈)의 가르침.

당시 유익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강엽은 경문을 읽은 순간 돈오를 하듯 깨달음을 얻었다.

처음엔 완전히 체화하지 못했으나, 반년이 지난 지금은 경문을 곱씹으며 대강의 뜻을 깨달았다.

‘정기신 합일을 넘은 전신의 단전화.’

자연지기를 퍼올리는 수준이 아니라, 자연지기와 진정으로 합일되는 선인의 경지.

이른바 우화등선으로 가는 첫 걸음.

천마신공의 운기를 끝낸 강엽은 의지를 세워 마음의 검을 내쳤다.

당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없다.

단지 머리 위를 지나갔던 먹구름이 비스듬히 엇나간 채 하릴없이 흘러갈 뿐.

‘내 모든 역량을 담은 심상절예.’

천마신공은 무공 하나를 만드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내면의 심상까지 변화시켰다.

만상여의로 통합한 심상들이, 천마신공의 밑거름이 되면서 새로운 심상을 짜낸 것이다.

혈마를 죽이는 데 여러 개의 심상절예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이전에 몸으로 체득한 바.

혈마의 불사성을, 나아가 그의 근원을 파괴할 최후의 심상절예를 창안한다.

‘이게 내 답이다. 이게 안 통하면 다음은 없어.’

별빛이 쏟아질 듯 내리쬐는 밤하늘 아래.

강엽은 묵묵히 상념을 이어갔다.

그리고 며칠 후.

무림맹에 잠입한 세작들이 무림맹과 혈교가 회전을 벌일 거라는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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