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군림 (7)
까맣게 타서 추락하는 두 호교사천.
허공에 고정된 자세로 그들을 내려다본 강엽은 조금씩 호흡을 고르며 진기를 안정시켰다.
그간 모은 영성을 하나로 집대성한 진기. 다만 혈공진기의 운기 행로를 그대로 따라하다 보니 조금씩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다.
‘나중에 세세하게 조정해야겠군.’
솔직히 재생력이 없었다면 기혈이 망가진 채 주화입마에 빠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순하면서도 한없이 어둡고, 패도적인 진기.
만약 이것을 후대로 전하고자 한다면 구결을 가다듬고 운기 행로를 세밀하게 교정해야 하겠지.
일단은 땅에 떨어진 호교사천부터 확실하게 해치운 다음에....
“음?”
-구오오오오오오!
살과 뼈의 제단에서 솟구친 핏빛의 원기둥.
지름만 삼 장에 이르는 기둥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솟구치더니, 구름에 닿기도 전에 포말처럼 부서졌다.
산산이 흩어진 핏빛 방울들이 바람을 타고 휘날리는 것을 보면 실패한 건가 싶었지만, 상단전의 직감은 그게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의식이 성공한 건가?”
호교사천이 나타난 걸로 보아 혈마의 부활과 관계가 있을진대.
혹시 모를 가능성에 정안을 열고 기저에 감춰진 술법의 이치를 들여다보려는 찰나.
“이건...!”
불현듯 전장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현상을 파악한 강엽은 서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는 호교사천이 문제가 아니다.
“이보게, 왜 그러나?”
“나, 나도 잘 몰라... 웨엑!”
처음엔 혈교의 고수들이. 그 다음엔 비교적 심각한 중상을 입은 일월신교의 고수들이.
마치 중병에 걸린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혈관이 울긋불긋 치솟더니, 검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일행의 안위를 확인한 강엽이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을 때 완안극이 외쳤다.
“주인님, 이건 독이 아닙니다!”
“당연히 아니지. 이건 저주다.”
“예에?”
“인신공양으로 벼려낸 살주(殺呪)다. 오장육부를 찢고 피를 강제로 짜내고 있어. 이들의 입장에선 갑자기 분근착골을 당한 것 같겠지. 혈교도들이 가장 먼저 발작했지만, 이대로라면 천산 전체로 퍼질 거다.”
“그런...!”
“떠들 시간이 아깝군. 들어라!”
쩌렁하게 메아리치는 목소리가 채찍처럼 주변에 있는 이들의 귓가를 강타했다.
“내가 의식을 중단시키겠다. 사지 멀쩡한 자들은 부상자들부터 엄호해서...!”
-늦었어요, 진조의 후계자.
귀영도, 천마도 아닌 진조의 후계자.
오랜만에 들은 호칭에 눈썹을 구붓하게 휜 강엽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봤다.
“...혈교의 신녀로군. 죽었는데도 자아가 남아있었나?”
-곧 사라지겠지요. 그나저나 당신의 힘엔 감탄했습니다. 호교사천 둘을 감당할 줄이야. 하지만 당신도 혈신의 부활은 막지 못하겠지요.
쿠구구구구구궁......!
그녀의 말이 끝나는 것과 함께 대지가 갈라지면서 검은 촉수들이 튀어나왔다.
몸통의 끝부분이 전각의 대들보만큼 거대한 촉수들이 문어발마냥 튀어나와 일행을 노렸다.
곳곳에 붉은 눈알이 달린 시커먼 대마수의 현신에 백서희가 짜증을 냈다.
“이건 아주 산 넘어 산이네! 끝이 없잖아!”
다른 일행들도 말만 안 할 뿐이지 질렸다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묻어나왔다.
-타락한 백택(白澤)이랍니다. 당신이 제압한 구두룡에 버금가는 대마수예요.
한때 이 세상에서 지혜로웠다는 전설의 신수. 그런 신수조차 혈마의 시종으로 전락했다는 말일까.
수십 다발의 촉수들이 일행과 신교의 고수들을 노리고 짓쳐드는 와중에도 강엽은 주변을 살폈다.
‘염왕과 다른 호교사천은 교전 중. 검마와 그 대머리는 아직 깨어나지 못했군.’
염왕을 묶어두는 마수를 빼면 혈교의 고수들은 사실상 전멸한 상황.
문제는 이 순간에도 신교의 고수들이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은 이놈부터 쓰러트리는 게 우선이다.’
어쩌면 타락한 백택을 쓰러트린 뒤에도 무언가 계속 나올지 모르지만, 구두룡에 버금가는 대적을 두고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단방에 쓰러트려야 해.’
보검처럼 날카롭게 벼려낸 의지가 대지를 비집고 나온 백택의 눈동자를 겨냥했다.
수십 개가 달린 눈동자 중에서도 놈의 뇌와 가장 긴밀하게 연결된 커다란 눈.
초음으로 놈의 내부를 파악하자마자, 지체없이 심검을 휘둘러 놈의 눈알을 베었다.
그 안에 담긴 천마신공의 기운이 신경을 타고 뇌를 헤집자 백택이 수십 개의 눈을 부릅떴다.
-끼에에에에에에엑!
발작하듯 휘두른 촉수가 대지를 쓸고, 그에 휘말린 무인들이 깔리고 튕겨지며 피를 뿌린다.
보다못한 일행과 일월신교의 고수들이 촉수들을 쳐내며 무인들을 구했지만 그뿐.
일전에 묵갑철마대주를 기절시킨 심극을 쏘아낸 하후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망할! 문어처럼 생긴 놈이 뭐 이리 단단해!?”
단단한 비늘도, 질긴 가죽도 없는데 심극조차 놈의 살점을 부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심검을 다루는 백서희와 요선의 능력을 빼앗은 조영옥만 근근히 맞서 싸울 따름.
기실 그녀들조차 여유는 없을 정도로 타락한 백택의 폭주는 재앙처럼 다가왔다.
“이래서야 방법이...!”
-크워어어어어!
천지를 삼키는 괴성과 함께 산만한 거구가 타락한 백택을 밀어뜨렸다.
사특한 기운을 내뿜은 대마수들끼리 얽히고설킨 광경에 일행이 멍해졌을 때, 강엽은 다시 한번 의지를 날카롭게 세우며 심검을 자아냈다.
‘단숨에 베어낸다.’
아무리 완전한 심상지경을 이루었어도 저만한 대마수를 상대로 장기전은 부담이다.
설령 놈을 쓰러트린다고 해도 이게 끝이라는 보장이 없는 마당.
마안의 공능에 제압당한 구두룡이 꼬리를 휘두르고, 뒤뚱거리는 백택을 가차없이 물어뜯는다.
경지에 오른 그도 손에 땀을 쥘 만큼 피와 살이 난무하는 두 대마수의 혈전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면밀하게 싸움을 관찰한 강엽은 결정적인 순간 의지를 세운 검을 날렸다.
서걱!
나직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절삭음.
내부의 장기와 신경 다발이 동시에 잘려나간 백택의 동체가 서서히 미끄러진다.
그에 일행과 구두룡이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그 순간.
희미하게 떨었던 적설란이 환희와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힘겹게 외쳤다.
-아아! 마침내, 마침내 그분께서...!
말을 마치기도 전에 희미하게 녹아내린 기척.
동시에 강엽은 타락한 백택이 나왔던 지저의 틈새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감지했다.
흥미와 놀라움, 호기심 등의 시선으로 그를 훑어내린 시선의 주인이 말했다.
[진조의 후계자.]
***
언젠가 한 번 들었던 목소리.
기억을 더듬은 강엽은 그것이 광명마교주의 기억에서 들은 목소리임을 떠올렸다.
“혈마.”
[진조와 비슷한 기척이군. 이미 그의 모든 걸 물려받은 순혈의 진조가 됐어.]
강엽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정체를 짐작한 듯 눈을 가늘게 뜬 핏빛의 그림자.
그 순간, 그의 기척이 폭발적으로 확장되면서 강엽을 향해 보이지 않는 손을 뻗어왔다.
의지를 세워 손목을 베어버렸건만, 혈마의 그림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얗게 웃었다.
그리고 강엽은 의식이 급격히 부상하는 느낌을 받고 표정을 굳혔다.
저 너머에 있는 혈마의 의념이 공명하면서, 주변 환경이 급격히 달라졌던 것이다.
시체로 태산을 쌓고 핏물로 바다를 이룬 아비규환.
인간과 괴물들이 끝없이 죽고 죽이는 지옥의 꼭대기에서 그 모든 것을 오시하는 핏빛의 그림자.
붉은 하늘을 등진 채 비스듬히 앉은 마귀의 왕이 시선을 내려 강엽을 굽어본다.
[진조의 후계자.]
“어디선가 본 풍경이군. 진조의 심상과 비슷한걸.”
과거 흑룡교주의 암계에 빠졌을 때.
그를 구해준 진조가 보여준 심상의 정경이 이와 비슷하리만치 오싹하고 살풍경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진조 흉내를 내고 싶었나?”
거대한 그림자가 하얗게 웃었다.
[그의 심상에도 전쟁이 있던가?]
“...고통받는 사람들은 있었지.”
[그랬겠지. 죄를 지은 사마외도의 종자들, 어둠 속에서 인간을 사냥했던 동족들.]
왕좌의 팔걸이를 툭툭 친 그림자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면서 음산하게 웃었다.
[나는 그와 다르다. 이 세상을 본래 타고났던 대로, 순리에 따라 회귀시키려고 한다.]
“순리?”
죽음조차 거부해서 부활하려는 역천의 마인이 지껄이는 소리치곤 퍽 남사스러웠다.
[먹이사슬이라는 말을 아느냐? 먹고 먹히는 적자생존,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투쟁이 세상의 본모습이니라.]
혈마가 손가락을 들어 혼란스러운 지옥을 가리켰다.
[저 지옥이야말로 세상이 마땅히 돌아가야 할 원래의 형상이다. 혼란스러운 대자연에서 한때 흡혈귀들은 자유롭게 사냥을 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진조의 등장 후로 모든 게 바뀌었다.
흡혈귀를 포함한 인외의 마들은 사냥당했으며, 한때 그들의 사냥감이었던 인간들만 살아남았다.
[내가 그의 제자였던 시절, 진조는 이렇게 말했지. 우리 같은 자들이 없어져야 세상이 안정을 되찾는다고.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강자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게 어째서 죄인가.
그게 죄라면 맹수가 약한 짐승들을 잡아먹는 것도 죄다.
[그럼에도 난 그를 따랐다. 경쟁자를 무너뜨리는 것 역시 자연의 섭리니까. 진조와 나만 남는다면 우리는 세상을 향유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니었겠지.”
[그래, 어느 날 발견했다. 자신의 불사를 깨트릴 방법을 찾는 그를! 그는 최후에 자기 자신마저 죽이려고 했던 거다. 당연히 나 또한 그의 제거대상이었지.]
써먹을 만큼 써먹었다가 토사구팽을 해버리려는 진조의 처사에 분노했다는 말일까.
만약 강엽 자신이 혈마의 입장이었어도, 스승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실을 알았다면 실망했겠지.
언젠가 스승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를 배신하고 떠난 것 역시 이해할 수 있는 일.
[그렇기에 네 존재를 알았을 땐 놀랐다. 설마 진조가 또 다시 제자를 들일 줄은 몰랐으니까. 하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준 후계자라니....]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혈마가 느낀 배신감과는 별개로 그를 동정하거나 그의 사상에 동조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를 알아챈 건지 혈마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아직도 모르겠나? 진조는 날 죽이기 위해 널 만들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는 법. 진조가 아무런 안전 장치도 없이 널 만들었을까?]
“.......”
[천만에. 일이 끝나면 너 또한 죽는다. 그 미친놈은 우리가 세상을 향유하게 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마의 핏줄을 끊어버리려고 혈안이 된 게야!]
혈마가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마의 세상을 되살리자. 마가 인간들의 위에 군림하는 강자존의 세상을. 그리하면 너와 네 자식들은 세상의 왕이 되어 천년만년 영광을....]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개소리를 찰지게 하시는군.”
[.......]
“그딴 제안을 들을 거였다면 애초에 광명마교주와 손을 잡았을 거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선 강엽이 손을 들어올리면서 농밀한 심상의 파동을 내뿜었다.
“나도 진조의 생각에 동의하거든. 흡혈귀 따위 세상에 존재해서 좋을 게 없어.”
[네놈?]
“내 자식들은 흡혈귀가 아니다. 흡혈귀로 키울 생각도 없고.”
얼마 전에 태어난 딸아이도,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아들 녀석도, 그리고 그 뒤에 태어날 아이들도.
다른 사람들보다 긴 수명을 누릴지언정 다른 이의 피를 빨고 연명하는 일 따위는 없다.
“생자필멸(生者必滅). 생명은 언젠가 죽는다. 흡혈귀 또한 마찬가지. 육신은 영원히 존속하더라도 정신은 닳고 닳아 언젠가는 미쳐버려.”
그 끝에 광기와 탐욕만 남아 이성을 잃은 괴물이 되기 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불사성을 깨트리는 것이 진조가 바란 결말이 아니었던가.
[아까 내가 한 말은 귓등으로 들은 거냐? 설령 날 죽여도 진조가 널 내버려둘 리 없다! 네 자식들 또한 과거의 흡혈귀들이 그랬듯 비참하게 사냥당할...!]
“네 걱정이나 해라.”
이 공간은 현실이 아니다. 두 사람의 의념이 공명하면서 심상이 잠시 겹친 것에 불과할 뿐.
그럼에도 혈마가 완전히 부활하기 전에, 그의 힘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는 되리라.
-심상절예 만상여의.
마신과 흑룡이 허공을 찢고 나오고, 혈목이 땅을 뚫고 나오면서 거대한 이무기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리고 하얀 벼락이 빠직거리며 빗발치는 가운데 일월의 태극이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동안의 여정으로 손에 넣은 심상들.
잠시 강엽을 노려본 혈마가 손을 들어올리자, 사방의 땅이 흔들리며 거대한 마수들이 등장했다.
[일단 이놈들부터 넘고 오거라. 그리하면 내가 친히 상대해주겠노라.]
이 마수들 또한 심상의 일부.
타락한 백택이 그랬듯 혈마에게 복속되어 영원히 그를 따르는 노예들이었다.
-심상절예 수라군생(修羅群生).
그 순간 상단전의 영성이 속삭였다.
혈마 역시 강엽처럼 다중심상을 터득했으며, 이는 그가 지닌 힘 중 일부에 불과하다고.
일월성신처럼 특별한 체질도 아니면서 다중심상을 터득했다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이겠지.
강엽을 내려다본 혈마가 입가를 비죽 올렸다.
[잠깐의 유희거리 정도는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