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24화 (424/450)
  • 84화. 군림 (6)

    단순히 심상의 기운을 두른 수준이 아니다.

    오히려 공격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떠한 징후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눈치채는 게 늦었다.

    의념의 파동은 내면의 심상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현상.

    심상절예의 완성도가 높을수록 그 현상은 찰나에 이루어지기에 개입할 틈새가 없다.

    그러나 강엽의 공격은 달랐다.

    심검을 유형화한 것도 아니면서 모든 공격이 심상절예 수준인 데다 의념의 표출도 없다.

    마치 명경지수처럼 극도로 고요한 기척.

    잔잔한 흔들림조차 일어나지 않아서, 마치 인간의 형상으로 빚은 정물을 보는 듯했다.

    “정중동의 이치를 극한까지 몸에 새겨넣은 건가... 무슨 부동명왕(不動明王)도 아니고.”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깨달음을 고수한다는 대일여래의 화신.

    소림 역시 그 이름을 따서 소림칠십이종절예 중 하나인 부동명왕보를 창안하지 않았던가.

    하늘의 마를 참칭한 마인이 불가의 부동명왕과 비견된다니.

    스스로도 우습다고 생각했는지 입가 사이로 헛웃음을 흘린 검마가 돌연 표정을 굳혔다.

    “네가 뭐든 상관없다. 그분의 앞길을 막는 자들은 모두 배제할 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빛살로 화한 신형이 강엽의 앞에 치닫고, 유형화된 심검이 대기를 갈랐다.

    낡고 녹슨 흑검이 채찍처럼 휘어질 때마다 섬광이 번쩍이고 무지막지한 굉음이 메아리쳤다.

    싸움을 견디지 못한 대지가 갈라지고 산천초목이 울부짖으며 죽어간다.

    “하아아아아아압!”

    힘찬 기합과 함께 시커먼 참격이 수십 장의 산등성이를 가르면서 저편까지 뻗어나갔다.

    동시에 바닥에 떨어진, 주인 잃은 날붙이들이 두둥실 떠오르며 강엽을 겨냥했다.

    수백 자루의 이기어검을 다루는 신기. 그 하나하나에 심상의 기운을 덧씌운 어검들.

    -암령우(暗靈雨) 낙천과해(落天垮海).

    검마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설사 팔존이라 해도 가루가 되어버릴 소나기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감히 두 사람의 전장에 다가오지 못한 무인들은 멀리서 울려 퍼지는 의념의 충격에 넋이 나갔을 정도.

    카앙! 키아아아앙......!

    사방 수십 장의 허공을 유영한 어검들이 무수한 궤적을 그리면서 강엽을 그 안에 가둬둔다.

    그야말로 무한히 이어지는 참격의 지옥.

    파천황의 신위에 양측의 고수들이 무공 고하에 상관없이 말문을 잃고 압도당했을 때.

    검마는 무수한 검의 궤적 안에서도 단 일격도 허용하지 않은 강엽의 모습에 표정을 굳혔다.

    피하기는커녕 몸을 움직이지도 여의치 않을진대, 어찌하여 뒷짐만 진 채 가만히 있는가.

    한데 어찌하여 그가 휘두른 어검들은 강엽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고 허공만 스치는가.

    “...공간을 왜곡시키는군. 의념으로 공간에 개입하는 경지에 도달했나.”

    정중동의 이치와 물극필반의 태극.

    각기 소림과 무당을 상징하는 공부들이 강엽의 전신을 빈틈없이 감싸는 역장을 친 것.

    어검이 닿는 순간 교묘하게 궤적을 비틀며, 방향뿐 아니라 검속의 완급까지 조절하는 솜씨.

    심상절예에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검마의 절초를 아무렇지 않게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심상절예를 쓸 틈을 주지 않고 죽이는 게 최선이겠지.’

    유익의 의념에게 들은 호교사천의 심상절예는 강엽도 주의해야 할 수준이었다.

    그중 검마의 심상절예는 다른 호교사천들의 심상절예보다 훨씬 위험한 만큼 여유를 줬다간 상황이 뒤바뀔지도 모른다.

    강엽의 손날이 수평으로 허공을 긋고 지나간다.

    집요하게 그를 노렸던 어검의 지옥이, 단 한 번의 손짓에 산산조각 깨져나가는 순간이었다.

    콰차차차차차차창......!

    깨진 유리처럼 사방에 흩어지는 어검의 파편들.

    호목을 부릅뜬 검마가 울컥 치솟는 기혈을 다스리기도 전에, 강엽의 손길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대체 언제!”

    검마가 의문을 이어갈 새도 없이, 우악스러운 금나수가 어깻죽지를 인정사정없이 잡아뜯었다.

    호신강기와 함께 어깻죽지가 뜯겨나간 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치솟아오르고,

    팔이 뜯겨나가는 격통에 검마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노성을 토해내며 반대쪽의 손을 휘저었다.

    뜯겨진 손에 쥐어졌던 흑검이 멀쩡한 손으로 옮겨지면서 강엽의 늑골 사이로 쇄도했다.

    칼끝의 일점에 역량을 집중시킨 척초(刺招).

    성벽조차 무너뜨릴 거력이 왜곡된 간합을 뚫고 살갗에 닿는 찰나.

    강엽이 손가락 사이로 검날을 잡아챘다.

    유형화된 심검, 그 자체로 심상절예나 다름없는 검을 맨손으로 잡아채는 공수탈백인.

    ‘확실히 구두룡보다는 약하군.’

    무공 자체는 검마가 더 윗줄이지만, 종합적인 역량은 구두룡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구두룡은 타고난 신통력으로 용맥의 자연지기를 끌어올리면서 무한한 힘을 휘둘렀으니까.

    자연지기의 수용량만 놓고 보면 강엽보다도 많았을 정도였다.

    촤아아아아악!

    공간을 뛰어넘은 심검이 상대를 바로 타격한다.

    그저 의지를 세우는 것만으로 검마의 몸 한복판에서 심검이 휘둘러진 것이다.

    “커억!”

    허리를 비스듬히 베인 검마가 피를 쏟으면서 비틀거리는 모습에 강엽이 살짝 미간을 모았다.

    ‘타점이 빗나갔나? 역시 아직은....’

    의념이나 심상을 표출하는 단계를 넘어, 베고자 하는 의지 자체를 휘두르는 진정한 심검.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서 타점이 빗나갈 때가 종종 있었다.

    원래라면 허리부터 어깨까지 단박에 가로질렀을 것을.

    “검마아아아아아!”

    아래에서 일행과 싸웠던 괴악이 단숨에 허공을 주파했다.

    세 절대고수에게 합공을 당했으면서도 딱히 부상을 입지 않은 걸 보면 여유가 있던 모양.

    하지만 강엽을 상대로도 그럴 자신은 없는지 초장부터 강대한 심상을 쏟아냈다.

    -심상절예 구현.

    억만의 망령들을 거느린 저승사자.

    수많은 유골을 산처럼 쌓아두고 그 위에서 망령들을 거느린 백귀야행(百鬼夜行).

    하늘 한복판에서 태동한 심상이 만인의 뇌리를 파고들면서, 현실을 강제로 비틀었다.

    -천만대귀상여사(千萬大鬼喪輿使).

    괴악의 몸에서 쏟아진 회색빛 망령들이 한데 뭉치며 가교를 잇는다.

    그 가교를 일직선으로 달린 괴악의 기척이 수십 배로 부풀어오르면서 한순간에 짓쳐들어왔다.

    견제하고자 날린 심검은 망령들에 의해 막힌 판국.

    거리를 좁힌 괴악이 양손에 쥐어진 심겸(心鎌)을 사선으로 휘두르며 악다구니를 질렀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이건....’

    아무리 강엽이라도 이만큼 증폭된 심상절예를 무턱대고 막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그렇게 피하려는 찰나, 괴악이 가속한 상태로 급격히 심겸의 궤적을 비틀며 강엽을 쫓아왔다.

    “검마, 내가 이놈의 발목을 잡는 사이에 도망쳐라!”

    “아니.”

    쩍 벌어진 복부를 붙잡고 고개를 들어올린 검마가 시퍼런 살기를 띠며 대답했다.

    “시간을 벌어줘서 고맙지만, 이놈만큼은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

    그와 함께 검마의 신형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며 수중의 흑검으로 빨려들어갔다.

    -아멸제천검(我滅制天劍).

    스스로 심검이 되어 적을 치는 것.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살의로 가득한 의념에 강엽은 눈매를 구겼다.

    “기어이....”

    검마의 심상절예를 경계했던 이유는 그것이 필살과 필중의 의념이 담긴 동귀어진의 수였기 때문이었다.

    천 년 전 진조 일행이 혈마를 몰아친 최후의 싸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고 죽었다고 했던가.

    당시 유익과 백무량이 중상을 입을 정도로 막강한 심상절예.

    괴악의 심상절예를 막느라 빈틈이 생긴 강엽의 뒤를 파고든 흑검이 강엽을 찌르는 순간이었다.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힌 강엽이 허공에 뜬 상태로 진각을 밟았다.

    천마군림보의 파문이 물결치듯 퍼져나가면서 두 호교사천의 심상절예를 뒤틀어버린다.

    완전히 와해하진 못했어도, 방향을 일부나마 뒤틀면서 타점을 어긋나게 한 것.

    -소용없다, 천마. 잠시 시간을 유예했을 뿐!

    검마의 말마따나 두 사람의 심상절예는 올바른 길을 되찾아 강엽을 앞뒤로 포위한 지 오래.

    그 잠깐 동안 강엽은 눈을 반개한 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 와서 만상여의로 대처하기는 늦었어.’

    지난날 적미성을 패퇴시킨 심상절예의 삼재융극.

    세 가지의 심상을 조합한 삼청연화라면 두 호교사천의 합공을 와해시킬 수 있겠지만, 사전 준비가 많기 때문에 당장 쓰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니 지금 쓸 수 있는 패를 꺼낸다.

    후우우우우웅......!

    하단전의 혈공진기와 중단전의 구룡환, 상단전의 영성이 공명하며 이룬 삼화취정.

    여기에 일월과 용혈, 용맥의 자연지기 등이 합세하며 이전과 전혀 다른 기운을 이루었다.

    아직 이름도 붙이지 못한 심법. 유익의 안배에서 단초를 얻고 퍼뜩 창안한 심법.

    지금까지 익힌 모든 공부과 영성을 한데 녹여낸 기운이, 경맥의 진기를 까맣게 물들였다.

    마치 별들을 삼킨 밤하늘처럼, 혹은 끝모를 무저갱처럼 깊으면서도 한 줌의 불순물도 없는 정순한 어둠.

    -그건...!

    “아, 그래. 생각났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심상치 않은 기운에 바짝 경계심을 조인 두 사람을 향해 강엽이 개운한 얼굴로 입가를 들어올렸다.

    “천마신공(天魔神功)이라 부르면 되겠어.”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모든 힘을 한데 집중한 심검이 허공을 갈라버렸다.

    과거 호적수였던 광명마교주가 그랬듯이.

    -......!

    강엽과 가까이 있던 검마와 괴악뿐 아니라, 지상의 사람들까지 혼백이 베이는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강엽의 손이 아래까지 내려왔을 때.

    “저, 저...!”

    지상의 무인들은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두 개의 인영을 발견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늘이 길게 갈라진 가운데, 심상절예가 풀린 검마와 괴악이 추락하고 있었다.

    * * *

    “포기하세요.”

    불현듯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붉은 머리의 여인은 어깨를 잘게 떨었다.

    본인이 내상을 입은 데다, 호위들마저 천마군림보에 추풍낙엽마냥 쓸려나간 상황.

    가까스로 시선을 돌린 곳엔, 일월신교의 신녀가 안쓰러워하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필시 당신이 혈교의 신녀겠죠. 이름이?”

    “...적설란.”

    “그래요, 적 소저. 혈교는 패했어요. 우리의 신인께서 당신네 고수들을 패퇴시켰지요.”

    일월신교에서 가장 원로한 고수인 일성좌와 월성좌가 격살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얼마나 좌절했던가.

    이후 강엽이 거대한 용을 끌고 내려왔을 때야 비로소 승리의 추가 기우는 듯했다.

    “하필 본교를 의식의 발원지로 고른 것은 인신공양을 위해서겠죠.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어요. 순순히 항복한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아뇨.”

    혈교의 신녀, 적설란은 처연하게 웃으면서 상대의 호의를 거절했다.

    “당신도 신녀라면 알 텐데요. 우리는 신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요. 그분을 위해서라면 이깟 목숨쯤은 얼마든지 버려도 아깝지 않아요.”

    “....”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신녀 자신도 적설란의 말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겠지.

    서로 다른 교리를 믿고 적으로 만났지만, 대척점에 선 두 여인은 놀랍도록 닮았으니까.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신녀가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채운 수성좌와 금성좌가 적설란을 향해 짙은 살의를 드러낸다.

    팔대교왕과 비견되는 칠성좌 두 명의 살기를 받아내고도 적설란은 담담했다.

    죽음을 초탈한 기세에 외려 두 칠성좌가 수상쩍은 시선을 보낼 때 신녀가 충고했다.

    “조심하세요. 신기나 법구 같은 걸 숨겨놨을 수도 있으니까요.”

    “후훗, 공연한 걱정을 하시네요. 제게 그런 게 없다는 건 그쪽 신녀께서 잘 아시지 않나요?”

    무언의 눈빛을 보내는 수성좌의 모습에 신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수성좌가 언월도의 날로 적설란의 허리를 베는 사이 금성좌가 냉큼 달려들어 일권을 날렸다.

    혹여나 적설란이 한 수를 숨겨놨을까 싶어 호신강기를 단단히 두른 채 찌르는 일격.

    십이성 공력이 담긴 일권에 절세가인의 안면이 뭉개지고, 가녀린 허리가 갈라지며 피와 장기를 뿌린다.

    상대가 이토록 허무하게 당할 줄은 몰랐는지 금성좌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푸념했다.

    “내참, 어이가 없어서... 이년은 이렇게 뒈질 거면 뭐하러 쳐들어온 거야?”

    “다행으로 여기시오. 상대에게 꿍꿍이가 없다면 이대로 승기를 굳히면 될 일....”

    “...아니에요.”

    뒤따르는 목소리에 두 칠성좌가 의아해하며 신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처음부터... 스스로 희생할 작정이었군요. 자기 자신도 인신공양의 대상으로 삼은 거였어요!”

    -네, 그 말씀이 맞아요.

    허공에 투명한 물결이 치면서 적설란의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과거 그분과 대적했던 자들의 후손. 그리고 심상지경의 초고수와 신녀인 저. 이렇게 삼위(三位)가 일체(一體)를 이룬 공양의식이 저주가 되어 천하를 덮칠 테죠.

    “무슨 말도 안 되는...!”

    -세상이 피로 물들 때 혈신이 강림하리니, 천하 만민이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적설란의 의식이 사그라들고, 불길한 기운이 하늘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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