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군림 (5)
“신문이....”
멈춰있던 신문이 갈라지는 전조.
난리통에도 애타게 신문만 주시했던 신녀는, 그러나 예상과 다른 광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쩌저저적.. 쭈와아아아아악!
신문의 정중앙을 가른 균열이 끝없이 확장되며 천지를 아우르는 광경.
죽고 죽이는 혈투로 신문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무인들도 어느새 이변을 깨달았다.
쿠우우우우우웅!
신문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사방에 퍼진 균열이 거칠게 맥동한다.
천지를 잇는 공간이 깨지고 으스러지면서, 미증유의 거력이 그 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여간 느려터진 녀석이군.”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긴 흑발의 사내가 혀를 차며 몸을 날렸다.
혈교의 고수들에 둘러싸여 분투하던 하후진이 익숙한 얼굴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다.
“어? 사, 사부?”
“뭐가 어냐, 얼빠진 녀석. 고작 이딴 놈들한테 고전하는 걸 보니 수련이 덜 됐구나.”
제자를 타박한 염왕이 경악한 적들을 돌아보며 기광을 번뜩인 순간.
허공에 투명한 궤적이 그어지며 적들의 머리가 떠올랐다.
“염왕...!”
그를 알아본 일월신교의 고수들이 식겁할 때, 염왕은 그를 주시하는 강적에게 몸을 돌렸다.
앞서 그의 심상절예 일도무겁살을 받아낸 검마가 게슴츠레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강엽의 원영신을 내버려둔 채 검으로 어깨를 툭툭 친 그는 모처럼 입가를 들어올렸다.
“염왕이라... 그래, 그쯤은 되어야 격이 맞지.”
어차피 원영신은 싸울 상태가 아니기에 그는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그때 거대한 인영이 쿵 떨어졌다.
말은 없지만 얼굴을 전부 가린 투구 사이로 드러난 안광은 불만의 기색이 역력하다.
[.......]
“이런, 마수. 설마 자네 상대를 빼앗았다고 불평하는 건가? 나도 어쩔 수 없었네.”
쓰게 웃은 검마가 다른 곳을 돌아보았다.
“정 그러면 괴악이나 돕게. 세 명에게 둘러싸여 합공당하는 친구가 불쌍하지도 않나?”
그럼에도 마수가 떠날 생각을 안 하자 검마는 짐짓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추어올렸다.
“쯧쯧, 알겠네. 이자는 자네에게 양보하지. 대신 이번이 마지막일세.”
작게 고갯짓을 한 마수의 모습에 검마는 입맛을 다셨다.
“뭐, 이렇게 됐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강자와 못 싸운 건 아쉽지만....”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다 죽여야 할 놈들이니.
염왕의 뒷말에 검마는 마수의 등짝을 툭 치면서 매정하게 몸을 돌렸다.
마수에게는 괴악을 도울 것을 권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는지 제단으로 돌아간다.
정확히는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강엽의 원영신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온 백서희를 향해서였다.
“진짜도 아닌 놈을 위해 목숨을 걸 건가?”
“....”
그렇게 말해도 백서희가 물러날 조짐이 없자 검마는 피식 웃으며 기수식을 취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치할 때.
-쩌어어어엉!
문득 강렬한 타종음이 전장을 강타했다.
급속도로 커져갔던 하늘의 균열이 산산조각 깨지는 것과 동시에 시커먼 어둠이 출렁거렸다.
마치 거대한 용이 하늘을 찢고 나오는 듯한 광경에 적아를 막론하고 모두가 경악했다.
그 가운데 미소 짓는 것은 오직 검마뿐.
“성공했군. 구두룡이 부활했어. 가능성은 그리 높게 보지 않았는데....”
상대가 상대인 만큼 자칫하면 팔대교왕이라는 막강한 전력이 버림패가 될 수도 있는 노릇.
다만 이번엔 위험을 감수한 보람이 컸다.
모두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가운데, 검마가 검을 번쩍 치켜올리며 소리쳤다.
“기뻐해라, 혈신의 종들이여! 저 흑룡은 본교를 수호하는 신수(神獸)이니, 이는 시운이 우리에게 따른다는 증거! 적들의 수괴는 죽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혈교도들이 기세등등해서 달려드는 반면에 일월신교의 고수들은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일성군 휘하의 고수들은 주군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몸서리를 칠 정도.
그나마 강엽 일행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에도 초조함이 묻어나왔다.
“적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마세요!”
“그래, 주인님이 어떤 분이신데! 저딴 뱀대가리 정도는 한 손에 멱을 따실 분이다!”
조영옥과 완안극이 투지를 불태우며 몰아치고, 일사도가 그들을 도우며 황금빛 뇌격을 뿌린다.
“하하, 늦었다. 자칭 하늘의 마를 칭한 애송이는 죽었고, 우리의 주인은 부활하실...!”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괴악의 웃음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웃는 그대로 굳어졌다.
어둠을 두른 채 백삼을 흩날리는 청년의 모습.
새카만 비늘의 용을 타고 신문을 뚫고 나온 청년은, 혼란스러운 전장을 오연하게 굽어봤다.
적아가 뒤얽힌 가운데, 죽어가는 원영신을 보호하는 백서희를 향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씩 웃은 백서희는 좀 전에 검마가 그랬듯 자성검을 들고 외쳤다.
“천마가 돌아왔다!”
“우오오오오!”
흑룡을 타고 강림한 하늘의 마.
일월신교의 고수들은 사기를 끌어올리면서 다 같이 발을 굴렀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천마군림 만마앙복!
* * *
“이건 예상 밖인데....”
호교사천인 검마조차 아연해졌다.
차라리 강엽이 구두룡을 죽이고 나온 거라면 경계할지언정 이토록 놀라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구두룡에게 목줄을 채워서 나올 줄이야?
-이, 이노옴...!
구두룡이 굴욕감에 부들부들 반항하자 강엽은 진각을 밟았다.
묵직한 충격을 골통으로 감내한 구두룡이 비틀거리면서 곤두박질친다.
떨어지는 중에도 어떻게든 강엽을 떨쳐내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그래봤자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반항하지 마라, 뱀대가리.”
-......!
구두룡의 용안이 핏빛으로 물들면서 초점이 사라지고, 충돌 직전에 몸을 바로 세웠다.
하마터면 거대한 덩치에 깔릴 뻔한 양측의 고수들이 돌처럼 굳어지는 가운데 그들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친 구두룡이 무너진 협곡 위로 착지했다.
강엽이 하나 남은 용머리에서 뚝 떨어지는 모습에 검마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군. 마안으로 제압했나? 하지만 그건 진조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일 텐데....”
천하의 혈마도 세 번을 싸운 끝에 간신히 제압한 구두룡이었다.
비록 혈마의 힘이 완성되지 않은 시절이었다고 하나, 그만한 대마수가 인간에게 굴복하다니?
하지만 더더욱 놀랄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음?”
한순간 강엽의 기척을 놓친 것.
그 사실을 깨달은 검마가 눈썹을 굽혔을 때, 강엽은 이미 백서희의 앞에 있었다.
그와 똑같이 생긴 원영신이, 백서희의 품에서 핏빛 안개를 쏟아내며 죽어가고 있었다.
“강엽....”
“내가 너무 늦었지.”
백서희의 양뺨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
세심하게 뺨을 닦아주는 손길에 백서희는 울면서도 히죽 웃었다.
“바보, 한참이나 늦었다고.”
강엽은 쓰게 웃으면서 주억이고, 반쯤 사라진 자신의 원영신을 내려다보았다.
이제야 안심했다는 듯 편안히 눈을 감고 완전히 핏빛 안개로 변해 강엽에게 흡수되는 원영신. 떨어진 일부가 돌아오면서 정기신이 합일했다.
마안의 공능 또한 완전해지면서 복속당한 구두룡이 천지가 떠나가라 포효했다.
-우오오오오오오!
용의 의지가 담긴 포효에 산천초목이 숨을 죽이고, 무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벌벌 떤다.
뼈와 살점의 제단에서 진언을 읊었던 혈교의 신녀도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채 휘청거릴 정도.
한동안 백서희를 다독인 강엽은 그녀를 힐끔 곁눈질하다, 이내 검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의 여유는 사라지고 납처럼 굳어진 안색.
그를 가만히 본 강엽이 물었다.
“기척을 보니 호교사천 같군. 다른 두 명은 검을 안 든 걸 보면 그쪽이 검마인가?”
“나를 아나?”
“광명마교주가 너에 대해 경고했었지. 호교사천 중엔 네가 먼저 부활했을 거라면서.”
“하, 그렇군. 가루라의 화신... 예운광 그놈이 나불거렸단 말이지.”
검마는 어이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도, 이내 결연한 얼굴로 검을 들었다.
혈교의 신녀가 의식을 끝내기 전까지는 시간을 끌어야 하니, 밀리더라도 싸워야 하리라.
바로 그때 강엽이 발을 크게 굴렀다.
쿠우우우웅!
용천혈로 분출되는 종아리 비복근의 발경.
강대한 기파가 파도처럼 지면을 타고 너울지면서 뭇 고수들의 심장을 두들겼다.
혈교의 신녀와 제단을 지키는 고수들이 피를 토하는 모습에 검마의 안색이 변했다.
“이놈...!”
“아직 안 끝났다.”
이보를 내딛자 패도적인 기파가 더욱 넓게 뻗어나가면서 적아가 뒤얽힌 전장에 닿았다.
일월신교의 고수들도 움츠러들었지만, 강엽의 진각은 그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심장을 두들기며 사기를 진작시켰고, 혈교의 고수들만 심맥을 파열시켰다.
“의념으로 적아를 구분한다고...!”
수천 명이 뒤얽힌 전장에서 그게 가당키나 한가.
검마를 비롯한 호교사천도 할 말을 잃고 넋을 잃는데, 염왕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놈은 볼 때마다 더 괴물이 되는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강엽은 내심 웃으면서 전장을 향해 전성을 발했다.
-자랑스러운 신교의 영웅들이여, 신성한 땅을 침범한 간악한 무리를 주살하라.
심령 깊숙이 각인된 의념에 일월신교의 고수들이 함성을 질렀다.
“뒈져, 이 빌어먹을 혈귀들아! 감히 우리 땅을 넘봐?”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모조리 쓸어버려!”
함성과 악다구니를 내지르며 혈교를 몰아치는 일월신교의 기세. 전황이 바뀌었다는 걸 직감한 검마는 잇새 사이로 끓는 분노를 흘렸다.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이군. 그 보법의 이름이 뭐냐?”
“군림보(君臨步).”
“천마의 군림보.... 천마군림보인가. 광오한 이름이지만 인정하마. 넌 그만한 이름을 쓸 자격이 있다.”
수천 명이 뒤얽힌 회전에서 전황을 바꿔버리는 재난. 적대하는 입장에선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흑검을 들어올린 검마가 차갑게 말했다.
“하나 네놈도 정상은 아니겠지. 구두룡을 제압하기 위해 상당한 심력을 소모했을 터.”
아무렇지 않은 척 허세를 떨고 있지만, 하얀 장삼은 피와 먼지를 뒤집어쓴 채 걸레짝이 되었다.
상대를 감안하면 경미한 피해라고 해도, 만전의 몸 상태는 아닐 터.
검마의 신형이 흐릿해지는 순간, 강엽 역시 심검을 들어올리면서 몸을 휘돌렸다.
쩌어어어어엉!
검을 부딪친 것만으로도 충격파가 일고, 땅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이지러진다.
백서희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경파의 방향을 조절한 강엽이 그녀를 향해 외쳤다.
“가서 사람들을 도와!”
그녀가 안전한 곳에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한 말. 백서희도 강엽의 말뜻을 알아듣고 힘차게 대답했다.
“죽으면 용서 안 할 거야!”
대답 대신 작게 미소만 지은 강엽은 검마의 검격을 피하면서 삼보를 내디뎠다.
걸음을 내디딜수록 몇 배로 강한 압력으로 사위를 찍어누르는 천마군림보의 중압감.
“큭...!”
“꼭 빨라지는 것만이 보신경은 아니지.”
상대로 하여금 옴짝달싹 못하도록 하는 보신경.
검마가 코웃음을 치며 사위를 옥죄는 기파를 베고 그 틈으로 흑검을 찔러들어왔다.
언뜻 보기엔 낡고 조악해서 볼품없는 흑검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거력은 태산을 베고도 남는다.
그러나 강엽은 손바닥을 들어 흑검을 막았다.
쿠아아아아아앙!
뒤편으로 전달된 기파가 협곡을 쪼개고 산사태를 일으키며 수백, 수천의 바위들을 떨어트린다.
하나 정작 강엽이 심흔은커녕 살갗도 베이지 않자 검마는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걸 적수공권으로 막아?”
“유형화된 심검이라.... 광명마교주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겠어.”
광명마교주는 용맥을 손에 넣었던 만큼 비교할 계제는 아니지만, 경지 자체만 놓고 보면 검마는 그와 대등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연 혈교주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혈교를 제멋대로 굴린 막후의 실세답다고 할까.
‘유익의 안배를 얻지 못했다면 위험했을지도.’
구두룡을 굴종시키고 얻은 유익의 안배.
유익 자신도 깨닫지 못한 최후의 심득을 얻지 못했다면 검마가 지적한 대로 지친 상태로 싸움이 임했겠지.
아직 완전히 깨달은 건 아니나, 그 일부를 얻은 것만으로도 강엽은 더욱 높은 경지를 엿보았다.
흑검을 떨쳐내면서 내뻗은 주먹과 동시에 일순 휘황한 빛에 휘감기면서 무너지는 건너편의 산봉우리.
간발의 차로 주먹을 피한 검마가 얼이 빠졌다.
“통상 일격이 심상절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