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군림 (4)
백서희는 전장을 주파했다.
‘이 녀석들, 꿍꿍이가 있어!’
이성군을 권좌에 앉히고, 신교에 타격을 주는 걸로 만족할 리 없다.
호교사천까지 투입됐다면 그 이상을 노릴 터.
필시 계획의 핵심은....
‘저놈!’
전장 한복판에서 솟구친 시체더미.
삼두육비의 수라가 수인을 맺고 진언을 외우는 가운데, 혈교의 술사들이 그를 보조하고 있었다.
술법이 진행됨에 따라 죽은 이들의 뼈와 살점이 떠오르며 거대한 제단을 이루는 모습.
정상적인 방법으론 저기까지 가기 힘들었기에 백서희는 허공을 박차며 화살처럼 쏘아졌다.
“멈춰라, 이교의 죄인!”
“잠깐, 저 계집은 설마...?”
혈교도들이 앞길을 막고자 검기와 경파를 날려댔지만, 대부분 그녀의 몸에 닿지도 않았다.
어쩌다 닿는 것들도 상시로 두른 호신강기를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스러지기 일쑤.
아랫배에는 작은 충격도 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적들을 넘어간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술사들이 진언을 외우다 말고 질겁하자 혈옥귀군이 경고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계속 진언을 외워라. 무슨 일이 있어도 제단을 완성해야 한다.”
진언을 외우는 도중에 다른 말이 끼어들면 자칫 술법이 깨질 수도 있는 노릇.
혈옥귀군과 달리 술사들은 술법을 이어갈 재주가 없었기에 예를 차리지도 못하고 진언을 이어갔다.
투아아아아아앙!
핏빛 수라를 움직여 심검을 막아낸 혈옥귀군이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강 부인, 홀몸도 아닌데 무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다 뱃속 아이가 잘못되면 어쩌시려고?”
“널 막지 못하면 다 잘못되겠지!”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그러나....”
말끝을 흐린 혈옥귀군이 스산한 안광을 뿌리는 순간, 전장에 난무한 핏물이 수라의 몸에 스며들었다.
한순간에 심흔을 씻어내고 시간을 되돌리듯 부서진 팔이 자라나는 모습에 백서희는 경악했다.
‘수백 명의 기운을 흡수했어!’
강엽이 자연지기를 흡수하여 심흔을 치유하는 것은 익히 봤지만, 이런 식으로 치유하는 것은 처음 봤다.
단순히 피에 담긴 선천지기뿐만 아니라, 아직 구천을 떠도는 혼백들까지 빨아들인 것.
완전히 치유하진 못해서 팔이 얇아지긴 했으나 수인을 맺는 것은 문제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직접 전투엔 소질이 없습니다. 내 심상도 나를 닮아 그렇지요. 그래도 주인을 지키고, 술법을 구현하는 데는 탁월하답니다.”
혈옥귀군이 어깨를 움직이는 순간 수십 종의 술법들이 사방팔방에서 쏟아졌다.
오감을 희롱하고, 정신을 제압하며, 진기를 운용하는 데 지장을 초래하는 치명적인 사술들.
절세고수라 해도 얕볼 수 없는 대술법들이 맞물리면서 주변 정경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섬뜩한 핏빛의 강물이 사방을 감싸기 시작했다.
아군은 온데간데없이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것.
“환술? 이딴 걸로 나를....”
그녀의 말이 멎었다.
핏빛의 강물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살덩어리들이 기어나왔던 것이다.
그중 백미는 무려 삼 장에 달하는 거대한 태아였다.
흰자위 없이 흑수정처럼 검은 눈동자를 뜬 역겨운 태아가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휘저었다.
-엄마... 엄마....
“이런 미친!”
치를 떤 백서희가 검을 휘둘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참격이 공간을 단숨에 격하며 삼 장에 달하는 태아를 양단해버린다.
“너 같은 자식 새끼 둔 적 없거든? 애초에 내 배는 너를 품을 만큼 크지 않아!”
-.......
한차례 그녀를 노려보는 태아. 몸이 두 쪽으로 나뉜 괴물은 좌우로 갈라진 채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포위한 괴물들이 촉수를 뿌리며 달려들고 이빨을 들이밀었다.
이성은 저들이 환술이라고 말하지만, 기감은 그들이 실체를 가진 괴물이라고 주장한다.
-극도로 발달한 환술은 현실과 구분할 수 없는 법. 환술인 걸 알아도 파훼하지 못하면 당신은 죽을 겁니다. 뱃속의 아이와 함께.
“닥쳐, 쓰레기 새끼가...!”
-쯧쯧, 산모가 험한 말 쓰면 되겠습니까? 바른 말 고운 말 쓰셔야죠.
백서희는 대꾸하지 않았다.
꾸역꾸역 나오는 괴물들을 베고 찌르면서 그녀를 둘러싼 환술의 짜임새를 살피고 생문을 찾을 뿐.
아무리 심상법의 기운이 깃들었다고 해도 어딘가엔 약점이 존재한다.
‘놈은 날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야.’
의식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어두는 게 목적이었다.
의식에도 주관하는 만큼 백서희에게만 집중할 수도 없을 터.
그렇게 괴물들을 베는 동안 감각이 무언가를 포착했다.
강물 깊숙한 곳에 숨겨진 지점.
그곳의 일부가 바깥과 통한다는 것을 감지한 그녀는 쯧 혀를 찼다.
혈옥귀군은 백서희가 생문을 찾을 것을 예상하고, 닿기 어려운 곳에 생문을 둔 것이다.
-보아하니 생문을 찾은 것 같군요. 심상지경의 고수는 이치와 섭리를 뛰어넘어 본질을 짚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지요. 다만 당신이라도 닿는 것은 쉽지 않을 겁니다. 심상절예도 두 번이나 쓰지 않았습니까?
첫 번째는 그가 협곡에서 수작을 부릴 때, 두 번째는 강엽의 원영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심상절예는 엄청나게 내공을 잡아먹으니 슬슬 바닥을 드러내겠군요.
심상지경의 고수라 해도 그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
괴물들에게 당하진 않는다고 해도, 단숨에 돌파해서 생문에 도달하는 것은 요원하다.
-거기서 의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시기....
“아니.”
상대의 말을 끊은 백서희는 길게 심호흡을 하고, 괴물들을 돌파하며 그 너머로 몸을 날렸다.
천근추의 수법으로 강물 아래로 잠수하면서 길을 열어젖혔다.
그렇게 밑바닥까지 닿자 다른 괴물들보다 더 큰 괴물이 등장했다.
앞서 베었던 태아와 비슷하지만 훨씬 큰 괴물이 입을 벌린다.
-아아아아아아!
물 속에서 메아리치는 음공 경파.
소리가 들리진 않았으나, 무지막지한 파동이 그녀의 몸을 후려쳤다.
호신강기로 파동을 비껴막은 백서희는 기감에 잡음이 끼는 것을 알고 미간을 모았다.
-걸렸군요. 당신이 생문을 찾는다면 그대로 뛰어들리라 생각했지요. 본교의 비선들로 파악한 바로 당신은 저돌적인 구석이 있었거든요.
백서희의 성격을 조사하고, 그녀가 소극적으로 버티는 대신 위험을 감수할 것을 예측했다는 말.
그녀가 아이를 지키고자 소극적으로 싸우든, 상황을 타파하고자 적극적으로 싸우든, 계략을 짜두고 그쪽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쪽이 진짜 함정입니다.
빙긋 웃는 말과 함께 태아의 입에서 나오는 파동이 한층 거세지고, 사방에서 괴물들이 달려들었다.
뭍으로 나온 괴물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한 괴물들의 돌격. 반면 백서희는 기감을 방해받아서 검을 휘두르기도 여의치 않았다.
‘굳이 정면에서 맞설 필요 없어.’
은신술을 발휘한 신형이 조금씩 흐려지더니, 종국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라진다.
-쓸데없는 짓을. 모습을 감춰도 물의 흐름은 고스란히 존재하거늘.
만약 괴물들에게 감정이 있었다면 당황했겠지만, 환술로 만든 가짜에게 그런 것은 없었다.
괴물들을 움직이는 주체는 혈옥귀군 자신.
환술진의 상황을 손금처럼 들여다보는 그에게 있어 백서희의 은신술은 눈 감고 아웅하는 짓이었다.
그렇게 흐름이 느껴지는 곳에 들이닥친 괴물들이 이빨을 들이밀고 발톱과 촉수를 휘둘렀다.
괴물들은 환술로 만든 가짜일지라도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면 실제로도 목숨을 잃는다.
발 디딜 틈새도 없이 괴물들에게 갈가리 찢겨나간 백서희는 그렇게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갑작스레 태아가 쓰러지면서 다른 괴물들을 덮치고 자욱한 흙먼지가 솟아올랐다.
-......!
[극도로 발달한 환술은 현실과 구분할 수 없다고 했던가? 그 말 돌려줄게.]
극도로 발달한 은신술은 실체와 구분할 수 없으니, 혈옥귀군의 기감조차 속여넘겼다.
어둠 속에 울리는 전성에 그제야 진상을 깨달은 혈옥귀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릴 때.
태아의 목구멍 깊숙이 숨겨진 생문을 찾은 백서희는 그대로 심검을 꽂으며 작게 웃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아무리 은신술이 출중해도 대등한 초고수를 속여넘길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했다.
그러한 절박감이 뱃속의 아이에게 닿은 걸까.
그녀는 오래전에 흑룡교의 비밀분타에서 경험한 감각을 다시 한번 누렸다.
‘엄마에게 네 힘을 빌려줬구나, 아가.’
암신의 능력으로 어둠과 동화되었던 백서희는 그대로 환술을 깨고 나가면서 심검을 휘둘렀다.
인신공양으로 재생한 팔이 떨어져나간 핏빛 수라.
그 안에 있는 혈옥귀군은 한눈에 봐도 내상을 입은 몰골로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쿨럭, 대단...하군요. 물의 흐름을 바꾸다니.”
“하필 물을 고른 게 실수였지.”
용혈을 타고난 데다 전륜구룡공까지 익힌 그녀에게 있어 깊은 강물은 땅만큼이나 편안한 환경이다.
비록 혈옥귀군이 만든 환술이라 해도 물의 성질을 가진 이상 조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 흑룡교 태생이라더니, 용혈을, 타고났군요. 그 힘을... 잊고 있었어....”
흑룡교는 오래전에 멸망했으니 바로 용혈의 힘을 떠올리지 못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하지만, 늦었습니다. 의식은 완성됐으니... 이제 당신들의 죽음으로 우리 주군을 부활시킬 겁니다...!”
“뭐?”
깜짝 놀란 백서희가 재차 묻기도 전에 비수를 꺼낸 혈옥귀군이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아연해하는 그녀를 향해 혈옥귀군이 비릿하게 냉소했다.
“큭큭, 당신이 알지... 모르겠지만, 인신공양은, 자기 자신을 바치면... 효과가 극대화되지요.”
혈옥귀군뿐만이 아니었다. 이제껏 음산한 진언을 읊조렸던 자들까지 자결하며 인신공양에 힘을 보탰다.
뼈와 살점으로 완성된 제단, 그 위에서 이성군이 누군가에게 잡힌 채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이, 이거 놔라, 이놈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거냐!?”
“아니까 그만 좀 칭얼대라. 넌 오늘 죽어서 본교의 대업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젠장, 이건 약속과 다르잖나! 내가 교주가 되면 너희와 동맹을 맺어서 중원을... 켁!”
우드득!
이성군의 목을 꺾은 중년의 사내.
이성군의 시체를 제단 위에 올려둔 그가 피곤하다는 듯이 목을 주무르며 투덜거렸다.
“흠, 구두룡까지 부활하면 완벽한데... 일월구천관의 일이 성공했으면 좋겠군.”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백서희는 온몸을 조르는 압박감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평범한 외양과 어울리지 않는 극도로 위험한 기척. 마치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이 있는 것 같았다.
한 손을 허리에 짚은 채 그녀를 내려다본 사내가 마뜩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푸념했다.
“누가 사대마교 아니랄까 봐 여기도 귀찮은 놈들이 넘치는군. 저 계집은 내가 맡을 테니까 의식은 네가 주관해라, 신녀.”
“알겠습니다, 검마.”
왜 지금에서야 깨달았을까.
검마라 불린 중년인의 뒤에 다소곳이 서 있는 붉은 머리의 절세미녀를 발견한 백서희가 무어라 외치려고 할 때, 시커먼 인영이 들이닥쳤다.
“미안하지만 방해하게 둘 순 없어서.”
파리를 쫓듯 대충 휘두른 검격.
그 안에 태산조차 가를 위력이 깃들어있다는 걸 깨달은 백서희는 재빨리 몸을 틀었다.
호신강기가 종잇장처럼 잘려나가고, 그 너머에 있는 암석의 산이 두부처럼 잘려나간다.
‘이런 건 심상절예로 막을 수밖에...!’
하지만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툭 찌른 검이 허점을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빠른 것도 아니고, 힘이 실린 것도 아니지만, 어쩐 일인지 막을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불현듯 흑포가 그녀의 앞을 가렸다.
“강...!”
푸확!
그녀를 밀쳐내면서 대신 검을 받아낸 원영신의 몸에서 핏빛의 안개가 터져나왔다.
중년인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진조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커억!”
“마수를 상대하면서 주변을 살피다니. 여유가 넘치는 모양이지?”
심장을 찌른 검이 늑골로 빠져나오자 원영신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바로 그때 위에서 덮친 백서희의 검을 가볍게 받아낸 검마가 일장을 후려쳤다.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진 백서희를 힐끗 본 그가 원영신의 목에 검을 겨누면서 말했다.
“혈신께서 부활하실 거다. 너희 일월마교를 제물로 바칠 예정이지. 너도, 네 원본도 막지 못한다.”
“...해볼 수 있다면 해봐라.”
애써 입매를 들어올린 원영신이 고개를 들면서 도발하는 것과 동시에.
-일도무겁살.
하늘에서 거대한 심도가 떨어졌다.
그리고.
-쩌저적! 쩌저저저적...!
심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