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군림 (3)
앞뒤로 공격받은 구두룡은 여유가 사라졌다.
수천의 악귀들이 마신의 뒤에서 광륜을 이루면서 요사스러운 혈광을 흩뿌리고, 이무기가 된 혈목은 금광을 뿜으면서 구두룡을 옥죄인다.
-이놈이...!
구두룡이 혈목의 몸에 숨결을 내뱉었지만, 금강불괴의 심상을 지닌 혈목은 거뜬히 버텨냈다.
‘완전히 무사한 건 아니군. 몸의 일부가 탔어.’
그러나 그 정도는 용맥에서 퍼올린 기운을 써서 말끔히 회복했다.
“...저놈도 불사냐? 뭔 개나 소나 불사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강엽은 옆에서 투덜거리는 소리에 적당히 대꾸하면서 마신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일일이 조종하지 않아도 알아서 싸우는 마신이지만, 의지가 임하자 움직임이 달라졌다.
거대한 심검을 양손에 쥐고, 자성검법의 기수식을 취한 마신.
촤아아아아악!
삼십 장이 넘는 거구가 일순 시야에서 벗어나며 검세를 뻗는다.
음속을 넘나든 속도로 휘두른 심검이 구두룡의 목을 베고, 그 단면을 마찰열로 지져버린다.
불사라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여덟 개의 용머리가 미간을 꿈틀거리면서 불쾌감을 표했다.
-소용없다. 이 몸은 불사의 재액. 백날 검을 휘둘러봤자 통하지 않을 것이야!
“유익이 널 어떻게 제압했지?”
-...뭐?
“그 싸움을 본 건 아니지만, 아마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마신이 꼬나쥔 심검 위로 냉기가 흘러나오면서 또 다른 심상절예가 펼쳐졌다.
-심상절예 빙부만상.
모든 것을 얼리는 한빙의 심상. 일월신마공의 음공을 극한까지 파고든 냉기가 잘려나간 단면을 얼렸다.
미처 재생하지 못한 목구멍에서 흘러나온 검은 불꽃이 목을 감싼 얼음을 녹이려는 찰나.
물극필반의 이치를 담은 역태극이 불꽃을 반전시키고 그 안에서 폭발하도록 유도했다.
-끄아아아아악!
“큭...!”
그 반동은 강엽에게도 돌아왔다.
복수의 심상절예를 억지로 짜내느라 눈과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목구멍에 핏물이 차오른다.
기혈이 들끓고 근골이 찢어지는 고통이 사지백해를 내달리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마비된다.
아무리 용맥에서 자연지기를 퍼올린들 정작 그걸 담을 강엽의 그릇엔 한계가 있는 바.
재생력과 자연지기로 심흔을 치유한다고 해도, 회복력이 육신의 붕괴를 못 따라간다.
“역시 너라 해도 무리....”
“아니.”
눈가의 피를 닦은 강엽이 단호하게 말했다.
“말했을 텐데. 결국 인내심 싸움이라고. 저놈이라고 딱히 상황이 좋은 건 아니야.”
그 말대로 구두룡 역시 재생이 더뎌지며 마신과 혈목의 협공에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놈이 재생력에만 의존한다면 잡는 건 시간문제.
구두룡도 위기감이 들었는지 허세로나마 견지했던 여유를 버리고 진지하게 싸움에 임하기 시작했다.
강대한 기파가 해일처럼 퍼지면서 거구가 시커먼 그림자에 둘러싸인다.
충격이 모든 걸 밀어버렸기에 그때만큼은 마신과 혈목도 놈을 건드리지 못했다.
“조심해라. 이제부터가 진짜야.”
심상절예와는 그 방향이 다르다.
의념을 외부로 발산하는 심상절예와 달리, 놈의 의념은 내부로 수렴했던 것이다.
쪼그라드는 그림자의 모습에 강엽이 이채를 띠었다.
“인간의 형상이 되는군.”
그림자가 꿀럭거리며 터져나간 자리.
시커먼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아홉 명의 남녀가 각기 다른 심상의 병장기를 들었다.
“암만 그래도 너무 사기인데? 심상지경의 고수만 아홉 명이라고?”
“...구두룡은 인간을 혐오하고 깔봤지. 하지만 혈마와 겨루고 나선 무공에 깊이 심취했다.”
본래부터 자연지기를 다루는 존재였던 만큼 심상지경에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터.
눈을 뜬 아홉 명의 남녀가 말했다.
“본래 우린 아홉이서 하나인 존재. 아홉 화신으로 나뉜 만큼 그 힘은 하나일 때만 못하나....”
“벌레같은 인간에게도 나름 장점이 있지. 적자생존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혜를 짜냈다.”
“인간은 자신보다 강한 천적을 사냥하기 위해 무공을 창안했다. 한데 그걸 처음부터 초월적인 존재가 익힌다면 어찌 될 것 같으냐?”
“인간, 네놈의 힘은 인정하마. 너는 과거 나를 이긴 혈마보다도 강하다. 어쩌면 진조보다도 더. 하지만 나는 봉인된 시절에도 꿈을 꿨다.”
“꿈 속에서 다시는 인간에게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수련했지. 인간은 꿈을 통제하지 못하나, 나는 꿈조차 통제하며 폐관의 장소로 썼다.”
“천 년간 수련했으니 내 힘은 과거보다 강해졌다. 너는 시금석으로 쓰기에 딱 좋구나. 너를 쓰러트리고 나는 진정으로 승천하리라.”
아홉 명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하는 말에 유익의 의념은 희게 질렸다.
저 말대로라면 구두룡의 힘은 전성기의 혈마, 어쩌면 진조까지 초월할지도 모르는 일.
“솔직히 말하지. 이건... 내 원본도 예상치 못했어.”
천기를 엿보고 천 년 뒤의 안배까지 해둔 유익이었지만, 구두룡이 자각몽을 염상으로 삼아 폐관수련을 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강엽도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아홉 명의 심상지경 고수라....”
생각해보면 호교사천인 요선이 아홉 개의 꼬리로 자신이 잡아먹은 고수들을 구현한 일이 있었다.
그녀가 구현한 고수들은 심극에 그쳤지만, 구두룡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만약 이 상태 그대로 일월구천관 밖으로 나간다면 신교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가 휩쓸릴 터.
“반드시 잡아야겠군.”
“너....”
“걱정 마라. 당신을 탓하진 않는다.”
“너 혼자선 무리야.”
“그럼 달리 방법이 있나?”
“....”
말문이 막힌 의념의 모습에 강엽은 실소하면서 마신과 혈목을 거두었다.
긴장감 속에서 심검을 쥔 그가 아홉 화신을 향해 말했다.
“인간이 된 상태가 꼭 좋은 건 아니겠지. 아홉으로 나뉜 만큼 재생력도 떨어졌어.”
심상절예로 아홉 화신의 정기신을 파괴하면 불사고 뭐고 더는 재생하지 못할 터.
장검을 패용한 사내가 입가를 비틀었다.
“상관없다. 너를 죽이고 하나로 돌아오면 잃어버린 머리쯤은 머지않아 회복할 테니까.”
아홉 화신이 달려들면서 술법진의 공간이 흔들렸다.
* * *
파지지지지직...!
하얀 불벼락이 명멸하고 굉음과 충격파가 내달린다.
이성군과 결탁한 혈교의 세력이 밀물처럼 쏟아져들어오면서 숫적 우세가 뒤집혔던 것이다.
앞서 벽력탄이 터진 충격과 핏빛의 소나기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제대로 허점을 찔렸다.
“천산의 비선들을 뚫고 여기까지...!”
화성좌가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천산과 신강 곳곳에 깔린 일월신교의 비선들.
이들은 위기가 닥치면 봉화와 전서구, 심지어 술법까지 동원해서 주변에 급보를 알린다.
설사 천산을 크게 우회해서 신교를 노린들 비선을 완전히 속이는 건 불가능할 터인데.
“입도공월!”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방에서 달려드는 혈교도들을 벤 백서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모산파 장문인이었던 모산혈조. 그 작자는 먼 거리를 오갈 수 있는 축지의 술을 익혔어요. 그 술법이 혈교에 넘어갔다면 설명이 돼요!”
입도공월은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옮길 수 없다는 제약이 있으나, 장시간에 걸쳐 옮겼다면 그런 제약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지 않을까.
입도공월을 물려받은 혈교의 술사는 아마....
“저자군요.”
여유롭게 웃는 문사풍의 청년. 사특한 호풍환우의 술로 교도들을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
화성좌가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말했다.
“이성군이 그를 혈옥귀군이라 불렀지요. 들어본 적 있습니다. 팔대교왕의 일원으로 혈교의 군사를 맡은 자.”
설마 일교의 두뇌씩이나 되는 자가 적대문파의 세작으로 암약하고 있을 줄이야.
백서희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심지어 다른 팔대교왕보다도 강해요. 저자는....”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워 원영신의 뇌기를 막고, 섭선을 휘두르며 대등하게 맞서는 신위.
그에게서 발산되는 심상의 기운은, 일전에 맞닥뜨렸던 팔대교왕들을 아득히 능가했다.
-심상법 구현.
혈옥귀군의 몸에서 발산되는 강렬한 심상이 사람들의 뇌리에 틀어박혔다.
수천 명의 인간들을 죽이고, 그들의 심장을 적출해서 제단에 바치는 인신공양의 심상.
비교적 가까이 있던 자들은 적아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질 정도.
그들의 목숨까지 취해서 더욱 위력을 키운 술자의 의념이 현신했다.
-혈수라대반식(血修羅大飯式).
핏빛으로 이루어진 삼두육비의 괴물이 혈옥귀군의 몸을 감싸고, 그를 따라 수인을 맺는다.
사방팔방에서 날아든 핏빛의 화살 소나기가 원영신을 노리는 모습에 백서희의 눈이 커졌다.
내공을 있는 대로 끌어모으면서 심상절예를 구현, 핏빛 수라를 향해 내쏘았다.
-......!
심상절예와 심상법이 충돌, 일대가 하얗게 불타오르면서 충격파가 협곡을 휩쓸었다.
궤적이 꺾인 심상절예가 멀리 있는 산봉우리를 강타하여 무너뜨리는 광경에 백서희는 분통을 터뜨렸지만, 혈옥귀군의 표정도 좋진 않았다.
“저런. 아이를 가진 산모가 그리 날뛰면 쓰나. 아이에게도 별로 좋지 않을 텐데?”
“넌 네 걱정이나 해라.”
열기를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
흠칫한 혈옥귀군이 반응할 새도 없이 심상절예를 맞고 부서진 수라의 틈새로 뇌기가 쏟아졌다.
육비 중에 네 개가 으스러져서 온전한 팔은 두 개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수라는 두 팔을 교차하며 필사적으로 주인을 보호했다.
“더럽게 단단하군.”
흑의가 찢겨지고 몸 곳곳이 피투성이로 변한 강엽이, 양손을 겹치듯 태극의 원을 그렸다.
일월합신의 기운이 수라를 강타하고, 남은 두 개의 팔도 날려버리면서 갸우뚱 기울어졌다.
후속타를 꽂기 위해 심창을 역수로 쥐고, 투척할 자세를 취했다. 심상절예는 못 써도 심상의 병기는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이다.
그에 혈옥귀군의 눈매가 살짝 굳어졌을 때.
돌연 강엽이 급히 자세를 바꾸면서 머리 위로 심창을 휘돌렸다.
콰아아아앙!
강엽을 튕겨날리는 거대한 그림자.
위급한 순간에 도와준 조력자의 등장에 혈옥귀군이 반색했다.
“당신은...!”
[.......]
전신에 회색 철갑을 두른 거구의 인영.
땅을 박차면서 균형을 되찾은 강엽은 상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존재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갑옷의 눈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은 아무런 감정을 띠고 있지 않았으나,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안구에 은은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때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기신으로 이루어진 분신이라... 재밌는 놈이군. 진짜도 아니면서 심병(心兵)을 쓰고 있어.”
힐끗 돌아보자 창백한 피부의 대머리 사내가 씩 웃으면서 쥐고 있던 것들을 휙 던졌다.
“선물이다. 불청객이라도 손님은 손님인데, 맨손으로 오기는 좀 미안하지 않느냐?”
“....”
발치에 굴러오는 수급. 혀를 빼물고 죽은 두 노인은 생전 처음 보는 면면이었다.
“자칭 일성좌와 월성좌라고 하더군. 우리 앞길을 막길래 친히 죽여주었느니라.”
“...호교사천인가?”
초월적인 기감으로도 한계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강대한 기척을 지닌 이들.
대머리 사내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다. ‘괴악(怪惡)’이라고 하느니라. 저 갑옷 친구는 ‘마수(魔獸)’라고 불리지. 네놈은 귀영이렷다?”
“천마다.”
“그런 별호를 쓸 만큼 강하진 않구나.”
“....”
“뭐, 이해하마. 한낱 원영신이지 않느냐. 네 원본은 너보다는 강하기를 바라마.”
강엽을 포위한 세 명의 고수들.
괴악이 혈옥귀군을 흘끔 돌아보았다.
“이놈은 우리가 맡지. 넌 할 일을 해라. 네 심상법은 대계를 위해 존재함을 잊지 말도록.”
“...부탁드립니다.”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인 혈옥귀군이 강엽을 향해 썩어문드러진 미소를 날렸다.
“아쉽군요. 당신은 제가 죽이고 싶었는데....”
강엽은 멀어지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앞뒤로 포위한 호교사천이 강력한 존재감을 발했기에.
하지만 두 호교사천도 바로 달려들지 못했다.
“명색이 혈마의 수족씩이나 되는 자들이 합공을 하다니. 수치를 모르는군.”
“누가 아니라냐. 주인님께 손을 대려면 이 몸부터 넘어야 할 거다.”
“만만치 않은 자들이니 방심하지 마세요.”
괴악의 뒤편에서 일사도와 완안극, 조영옥이 나오면서 역으로 그를 포위한 것이다.
졸지에 서로가 맞물리는 모양새가 된 셈.
괴악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헛, 광명의 사도와 독을 품은 흡혈귀, 요선의 잔재를 흡수한 아해라... 죽일 놈들이 산처럼 쌓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