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군림 (2)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무슨 소리야?”
뒤에서 따라오는 강엽의 말에 유익의 의념이 의아해했다.
강엽이 생각을 가다듬고 말했다.
“바깥에 둔 내 원영신이 움직였다. 이건 적이 습격했다는 뜻이야.”
“적이라... 혈교인가?”
“거기까진 모르겠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원영신이 움직였다는 것밖에 없어. 누구와 교전했는지는 몰라.”
심령으로 연결된 덕에 원영신이 움직였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 뿐.
‘...일월구천관에 들어와서 연결이 더 희미해졌다.’
단순히 거리가 멀었을 뿐이라면 공간적인 제약을 초월해서 현장을 파악할 수 있었겠지만,
술법진이라는 특수성이 존재하는 이상 심령에 의존해 원영신의 행동을 추측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야 하는데... 목적지는 멀었나?”
“아, 거의 다 왔어.”
기절한 일성군을 짊어진 의념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한 손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저기 무너진 장원 보이나?”
한눈에 봐도 다른 곳보다 처참하게 쑥대밭이 된 폐허.
멀쩡했다면 어지간한 대방파와 맞먹었을 웅장한 대장원은 겨우 터만 남아 있었다.
“일월신교의 옛 장원이지. 대마수를 여기다 봉인하느라 우린 터전을 강제로 옮겨야 했다.”
강엽은 눈가를 좁히고 폐허를 둘러봤다.
대마수가 날뛴 여파로 전각이 무너진 건 물론이고 곳곳에 커다란 구멍이 파이고 땅이 갈라져 있었다.
장원 정중앙엔 무너진 잔해들이 산을 이루었으며, 사슬과 부적 다발이 그 위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채 영험한 기운을 흘리고 있다.
“사슬에서 용혈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백무량의 힘이지.”
유익의 의념이 씁쓸하게 말했다.
“군데군데 녹슨 게 보이지? 술법진에 옮겨서 최대한 보존했는데도 세월의 힘은 피하지 못했어. 이 봉인을 유지하느라 엄청난 희생을 치렀는데도 말이지.”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인걸.”
봉인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일월구천관이 만들어진 이후 여기에 들어온 자들이 누구인지 생각하면 답은 뻔했다.
“교주가 되지 못하고 탈락한 자들. 실패자들의 목숨을 봉인을 유지하기 위해 공양했다는 말로 들리는데.”
“.......”
유익의 의념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무언의 침묵이 곧 긍정이었다.
‘어떤 술법진은 술자가 죽어도 오랫동안 유지된다.’
가령 무언가를 봉인할 목적으로 만든 결계나 주박은 술자의 역량에 따라 수백 년까지도 이어진다.
그러나 신인의 경지에 달한 두 사람이 협력했는데도 봉인을 유지할 힘이 모자랐단 말인가.
“어쩔 수 없었다. 대마수는 그만큼 강했어. 힘만 따지면 놈은 호교사천을 능가했지.”
“그런 힘이 있는데도 호교사천이 못 됐다고?”
유익과 백무량이 협력하고서야 간신히 봉인했으니 그 힘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리라.
하지만 그런 힘이 있는데도 호교사천이 되지 못했다는 말은 이해되지 않았다.
“뭐, 여러 이유가 있긴 한데... 크게 두 개만 뽑으면 일단 놈은 다른 호교사천만큼 혈마와 인연이 깊지 않았거든. 전쟁 말기에 혈교에 합류했다.”
유익의 말에 의하면 호교사천이 혈마를 따른 것은 혈교가 개파되기도 이전이었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일설에 따르면 대마수는 혈마와 세 번을 싸웠는데, 첫 싸움에선 대마수가 이겼고 두 번째 싸움에선 둘이 비겼다더군. 세 번째로 싸울 때야 혈마가 이기고 대마수를 복종시켰다던데.”
“무슨 삼고초려도 아니고.”
강엽은 헛웃음을 흘렸지만, 유익의 말은 그냥 넘길 게 아니었다.
비록 혈마가 무공을 대성하기 전이었다고 해도 그를 패퇴시킨 전적이 있지 않나.
“혈마가 호교사천의 지위를 주려고 했지만 본인이 거절했다는 말도 있어. 자의식이 비대해서 다른 놈들과 같이 묶이는 게 싫었던 모양이야.”
만약 대마수가 지위를 받아들였다면 호교오천이 됐을지도 모르지.
유익의 의념이 중얼거리는 뒷말을 들으면서 강엽은 정안으로 봉인의 요체를 살펴봤다.
“봉인하든 쓰러트리든 한 번은 깨워야겠어.”
깨우지 않고 봉인의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이 가장 좋겠지만, 그러기엔 봉인의 구조가 너무 낡았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안쪽이 썩고 문드러져서 억지로 수명을 연장해봤자 오래가지 못하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정안을 거두는데, 불현듯 일대의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궁......!
“뭐야? 벌써 봉인을 풀었어?”
“내가 한 게 아니야.”
강엽이 굳은 표정으로 봉인지를 노려봤다.
“놈이 스스로 깬 거지.”
우웅! 우웅! 우우웅-!
공간 전체를 울리는 의념의 파동.
대지가 공진하고, 봉인지를 덮은 쓰레기더미가 요동치면서 잔해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하필이면 바깥에서 난장이 벌어지는 중에 깨어난 게 우연일까.
유익의 의념이 새하얗게 질린 채 신음했다.
“이 자식, 설마 처음부터...!”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공진 속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봉인이 헐거워지면서 의식을 되찾은 거야. 한데도 여태껏 내색하지 않은 거지. 아까 그 혈교놈이 죽은 걸 알고 이제야 움직일 마음을 먹었나 보군.”
-아아, 너무 긴 세월이었느니라.
여러 사람이 말하듯 겹치는 목소리.
남성과 여성, 노인과 아이, 그 모든 목소리들이 똑같은 박자와 호흡으로 노래하듯 읊조렸다.
-죽은 자의 망령아. 네가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고 여겼겠지. 그 생각이 얼마나 하찮은 오만이었는지 이젠 깨달았으렷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유익의 의념을 비웃은 목소리.
강엽이 실소를 머금고 말했다.
“정신만 차리면 뭐하나?”
허리춤에 손을 올린 삐딱하게 선 자세로 봉인지를 휘몰아치는 의념을 응시하며 도발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면 소용없지. 만약 섣불리 몸을 일으켰다가 유익이 동귀어진의 수로 공간을 통째로 무너뜨리면 어쩌나 싶어 여태 사렸던 것 아닌가?”
-.......
고조됐던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는 게 파동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내 대마수는 코웃음을 쳤다.
-동귀어진이라. 해볼 수 있다면 해보거라. 이 몸은 불사. 혈마도 죽이지 못했던 불가살의 재액이니라.
설사 일월구천관을 통째로 무너뜨린다고 해도 대마수를 죽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
강엽과 유익의 의념을 굽어보는 투명한 의념이, 자신의 몸을 봉인한 옛 신인들의 의념을 깨트렸다.
-오랫동안 굶어서 배가 고프군. 저 망령놈이야 처먹어도 영양가가 없겠다만, 넌 다르지. 아해야, 네 몸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달콤한 향이 풍기는구나.
“해볼 수 있다면 해봐라.”
좀 전에 대마수가 한 말을 되돌려준 셈.
하늘이 찢어져라 광소를 토한 대마수가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시커먼 마기가 휘몰아쳤다.
시커먼 뇌기와 불꽃이 사슬과 부적을 찢고 잔해를 불태운다.
투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솟구친 그림자.
시커먼 비늘로 뒤덮인 거체 위로 길쭉하게 자라난 아홉의 용머리가 일제히 포효하기 시작했다.
불가의 사자후, 아니 그 이상으로 강력한 음공(音功) 경파.
“젠장, 구두룡(九頭龍) 녀석! 봉인을 풀어도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눈살을 찌푸린 의념이 일성군을 보호하면서 잔해를 피해 물러났다.
그와 함께 물러난 강엽은 구두룡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크군. 북해의 그놈보다도 더....’
일월신교주와 함께 부활을 꾀한 북해의 대마수.
놈 역시 전각 몇 채를 무너뜨릴 만큼 거대했는데, 구두룡의 덩치는 그보다 두 배는 더 컸다.
두 사람을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린 놈이 입을 벌리자 시커먼 마기가 단단히 모였다.
“피...!”
말을 하기도 전에 아홉 줄기의 섬광이 도시를 휩쓸고 지나간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물론, 피할 방위까지 예측하여 한꺼번에 쓸어버린 광범위한 섬광.
직후 충격파와 열기가 연쇄다발적으로 터지면서 일월구천관의 공간 전체가 거칠게 진동했다.
“강엽, 방금 공격으로 일월구천관의 진축 일부가 무너졌다! 이대로면 얼마 버티지 못해!”
강엽도 알고 있었다. 섬광 한 줄기가 술법진의 근원을 이루는 진축을 긋고 지나갔다는 것을.
그러나 구두룡의 위세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우우우우우우웅...!
“이건...!”
일월구천관의 아래에 파묻힌 용맥의 자연지기가 구두룡의 거체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 것.
지난날 불권의 심마가 그랬듯 구두룡 역시 용맥을 인식하고 그 힘을 퍼올리는 것이다.
-오랫동안 식음을 전폐했으니 미음부터 먹어야지. 맛은 없어도 몸에 활기가 도는 게 느껴지는구나.
“...용맥을 무슨 영양식 취급하나?”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구시렁거린 유익의 의념이 호신강기를 두른 직후 시커먼 벼락 줄기가 꽂혔다.
조금만 늦었다면 일성군과 함께 숯덩이가 됐겠지.
-그래도 인간이 가장 맛있다. 그 야들야들한 식감, 달콤하면서도 짭조름한 그 맛이 그립구나. 특히 어리고 살찐 인간들이 기름져서 맛있었는데....
그냥 두면 하루 종일 자기가 인간들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떠들 기세.
강엽이 혀를 차며 양손의 문양을 겹쳤다.
“말이 많아.”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수는 없잖느냐. 말하는 법을 잊지 않으려면 열심히 떠들어야...!
콰아아아아아앙!
구두룡의 아가리에 절묘하게 쑤셔넣은 일격.
일월합신을 정통으로 맞은 머리가 비명도 못 지르고 괴로워하는 한편, 다른 여덟 개의 용머리는 강엽을 노려보며 검은 섬광을 내쏘았다.
-비겁하게 말하는 도중 기습하다니!
“살다 살다 이딴 놈한테 비겁하다는 말을 듣다니....”
핏빛 안개로 변해서 섬광을 피한 강엽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구두룡의 용안이 부릅뜨였다.
-혈무화? 네놈 진조와 무슨 관계냐?
강엽은 대답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전력을 다해야 할 놈이다.’
정기신의 일부를 빼서 원영신을 만들었기에 기실 지금 상태는 만전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원영신을 회수하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
결국 지금 힘으로 어떻게든 놈을 쓰러트리고 다시 봉인하든 해야 할 터.
-심상절예 구현.
강엽의 몸에서 피어나는 무채색의 파동 속에서 거대한 기척이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만상여의 마신초환.
진조가 강엽을 위해 남겨둔 심상절예.
지난날 광명마교주를 상대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마신이, 수천의 악귀들을 이끌고 나왔다.
* * *
거대한 주먹이 구두룡의 면상을 후려쳤다.
여덟 개의 용머리가 날카롭게 포효하며 마신을 물고, 지면을 할퀴듯 전진한다.
한 방 얻어맞은 용머리가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허, 진조의 심상절예까지! 네놈 정말 정체가... 컥!
말하다 말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뒤로 밀려났던 마신이 손날을 세워 용의 목을 베는 게 아닌가?
무광암의 심상절예를 손날에 둘러 휘두르자 단단한 용머리도 속절없이 잘려나간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무광암의 공능에 용머리는 잘게 분쇄됐다.
그러나 강엽은 낙관하지 못했다.
‘단면이?’
잘려나간 단면이 꿈틀거리면서 심흔을 씻어내고, 뼈와 근육을 수육하고 있었기 때문.
“말했지. 놈은 불사라고. 재생력은 기본이다. 저 용머리는... 잘라도 계속 튀어나와.”
어느새 옆에 온 유익의 의념이 말하는 도중 강엽의 모습에 흠칫했다.
“너 입가에?”
“별거 아니야.”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핏줄기를 슥 닦은 강엽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핏물을 도로 삼켰다.
심상절예 만상여의는 만전의 몸으로 써도 부담이 심한 절기. 원영신으로 인해 정기신의 일부가 깎여나간 지금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 심상절예... 너 자신의 생명도 갉아먹는 것 같은데. 쓰는 사람이 심흔을 입다니 정상이 아니군.”
“그럼 힘 좀 보태주지 그러나.”
“난 심상절예 못 쓴다. 일월구천관을 관리하는 것 빼고는 평범한 무인에 지나지 않아.”
“한마디로 무능하다는 거지?”
“...거참 말 한마디로 뼈를 때리는구만.”
입술을 삐죽인 유익의 의념이 어깨에 짊어진 일성군을 힐끔거렸다.
“이놈이 깨면 도움이 될까?”
“글쎄, 별로 안 될 것 같은데.”
심상지경의 고수라 해도 구두룡의 마기를 맞으면 한 줌 핏물로 녹아내릴 게 뻔했다.
호신강기에 심상의 기운을 두른다면 조금은 버틸 수 있겠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그놈이 죽으면 일이 복잡해져. 지금은 나 혼자 싸우는 게 낫지.”
“방법이 있나?”
“결국 인내심 싸움이다.”
구두룡이 그랬듯 용맥의 자연지기를 끌어올려 심흔을 치유한 강엽이 손을 들어올렸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지면을 뚫고 나온 혈목이 한데 뭉치면서 거대한 괴수로 변모한다.
과거 북해에서 상대했던 대마수의 형상.
구두룡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괴물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붉은 이무기가, 뒤에서 구두룡의 몸통을 꽁꽁 묶기 시작한다.
유익의 의념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거 완전히 괴수대전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