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군림 (1)
강엽과 두 성군이 안쪽으로 들어간 뒤.
그들이 모습을 감춘 신문은 움직임을 멈춘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새로운 교주가 나올 때까지는 저 상태라고 신녀가 공언한 상황.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각자 자신이 지지하는 도전자가 나오기를 소망하며 초조히 기다렸다.
한쪽에 모인 강엽 일행이 그나마 침착했지만, 자세히 보면 그들의 얼굴에도 일말의 걱정이 묻어났다.
“천마가 걱정되는 모양입니다.”
백서희는 슬금슬금 다가온 말총머리 여인을 힐끔 돌아보았다.
화성좌 동방하연.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정기신 합일을 이루어 칠성좌에 오른 불세출의 초고수.
그녀가 신교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히는 명문가 태생임을 감안해도 나이를 감안하면 굉장한 성취였다.
강엽만 아니었다면, 그래서 일성군이 교주가 됐다면 대부인의 자리에 올랐을지도 모르는 여인.
백서희를 바라보는 눈빛은 그리 우호적이진 않았으나, 당장은 감정이 배제된 어조를 견지한다.
백서희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받아쳤다.
“뭐, 걱정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렇지요. 아, 회임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참, 저번에 동방 소저가 왔을 땐 내가 자리를 비웠네요. 볼일이 있어서 신도로 갔거든요.”
“도월루가 풍비박산이 난 게 백 여협의 솜씨였군요. 과연 팔존이라 불리는 분답습니다.”
“과찬이에요. 찾는 게 어렵지, 찾기만 하면 나머지는 쉬웠거든요. 저 대신 동방 소저가 갔어도 같은 결과가 나왔겠죠.”
“겸손이 지나치시군요. 도월루는 과거 오성군을 암살한 이력이 있습니다. 저희도 그자들을 찾기 위해 분투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지요. 그놈들을 찾아내서 토벌한 것만으로도 구천을 떠도는 혼백들이 눈을 편히 감을 수 있을 겁니다.”
덕담은 적당히 주고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말을 멈춘 두 사람.
말문을 이은 것은 화성좌였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승복하실 겁니까?”
“두 성군 중 한 명이 이겼을 경우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신교의 율법에 따르면 누가 일월구천관을 통과하든 교도들은 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이성군이 나온다면 그쪽은 어쩔 건데요?”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치는 무례한 태도.
그러나 화성좌는 그 태도를 지적하기보다는 눈을 반개하며 작게 목소리를 이었다.
“그를 교주로 인정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성군이 교주의 그릇이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일성군님의 정혼자라 선입견을 가진 걸 수도 있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강엽이 실패한다면 저흰 신교를 조용히 떠날 거예요.”
애초에 강엽만 보고 이역만리 천산까지 온 만큼 그가 죽는다면 신교에 미련이 없었다.
“당신들 입장에서도 그편이 낫지 않겠어요? 우리를 불순분자로 취급하잖아요?”
“으음....”
수성좌나 금성좌야 원래 신교의 인물들이니 이탈하지 않겠지만 다른 인물들도 굉장한 고수였다.
하나같이 현 시대를 대표하는 절세고수들.
그들을 포섭할 수만 있다면 일월신교는 혈교를 능가하는 마도제일세로 발돋움할 수 있을 터.
일성군을 응원하면서도 강엽 일행을 신교에 묶어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떠본 것일까.
“염치 없다는 걸 알지만, 혹시....”
주저하면서도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
두 여인을 비롯한 장내의 초고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않은 채 그들끼리 모여있던 이성군의 세력.
그들 가운데에 있던 이들이, 깊이 눌러쓴 두건 아래로 무언가 진언을 읊조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짓을...?”
화성좌가 눈썹을 모을 때, 그들을 주목하고 있던 신녀가 사색이 된 얼굴로 외쳤다.
“멈추게 하세요! 지금 당장!”
신성한 의식 중에 수상쩍은 짓을 하다니?
그녀를 따르는 교도들이 우르르 몰려가면서 병장기를 뽑는 찰나, 음산한 웃음이 들렸다.
“신녀께서는 진정하시지요.”
한가로이 섭선을 살랑거리는 수려한 문사 청년.
몰려오는 무인들의 기세에도 선량한 미소로 신녀를 향해 공수를 취한다.
그 대담한 태도에 외려 다른 두 세력이 잠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당신은... 이성군이 거둔 책사군요.”
“하하, 부족한 사람을 알아봐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소생 도막생이라 합니다.”
“당장 저들을 멈추세요. 일월구천관 앞에서 지금 뭘 하는 건가요?”
“송구하지만 그럴 순 없겠습니다.”
전혀 송구하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은 문사 청년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가장 염려했던 천마와 눈엣가시 같았던 일성군이 일월구천관에 들어갔지요. 또한 이 자리에 신교 최고위의 고수들이 집결한 만큼....”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것과 동시에 사방의 협곡에서 미친 듯이 굉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쾅-!
아무런 전조 없이 땅밑이 폭발하면서 초목이 박살나고, 암벽이 무너져내리는 참상.
생각지도 못한 청천벽력에 신녀와 고수들이 뻣뻣해질 때 협곡에선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사, 살려... 크아악!”
“안 돼애애애애!”
쿠콰콰쾅! 꽈과과과과광-!
한 번에서 그치지 않고 연속으로 이어지는 폭발.
협곡의 둘레를 타고 고리처럼 퍼진 연쇄폭발이 찾아온 군중들을 아가리에 꿀꺽 삼켜버렸다.
눈치가 있다면 술사들의 진언이 폭발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는 마당.
신녀의 명령 없이도 모두가 움직였다.
“저들을 당장 막아!”
“감히 일월구천관 앞에서 이딴 짓을...!”
적어도 교주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충돌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합의.
교주 후보가 일월구천관으로 들어간 상황에서 그 합의를 깬 게 무슨 뜻이겠는가?
“설마 교주 후보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화성좌가 무겁게 침음할 때 백서희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농밀한 의념이 태동하며 일대를 강타,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환상같은 심상을 들이민다.
-심상절예 구현....
바로 옆에서 울리는 의념의 파동에 화성좌가 경악하여 몸을 돌리는 순간.
-무극검광.
끝없이 이어지는 극광(極光)의 은하수.
밤하늘을 가로지른 아름다운 별빛이, 가히 광속과도 같은 속도로 이성군의 세력을 휩쓸어버린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해쓱해진 고수들이 무언가 할 새도 없이 전신을 녹여버리는 필살의 일격.
강엽 말고 또 다른 심상지경의 고수가 있음을 알아차린 신교의 고수들이 경외감이 어린 눈빛으로 백서희를 우러르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천마의 배필 또한 지고한 경지에 올랐구려!”
“검후라고 하더니 과연!”
백서희가 점창파에서 사사한 게 알려졌기에 고깝게 보는 시선도 많았지만, 이 한 수로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눈빛은 상당 부분 달라졌다.
일성군의 휘하 고수들도 그녀를 경계할지언정 당장은 저들의 수작을 좌초시켰다는 데 안도한 기색.
그러나 정작 심상절예를 휘두른 백서희는 납덩이처럼 딱딱해졌다.
“...손맛이 없다시피했어.”
아무리 거리가 있었다 하나 심상절예를 휘둘렀는데 베었다는 감각이 희미했다.
그때 조영옥이 경고했다.
“동생, 위쪽을 봐!”
동시에 땅밑에서 아홉 개의 검푸른 불꽃이 거대한 꼬리의 형상으로 솟구치면서 하나로 모였다.
마치 꽃봉오리처럼 모인 반투명한 꼬리 위로 시뻘건 혈우(血雨)가 쏟아지는 광경.
미처 꼬리로 막지 못한 지면은 연기를 피어올리며 녹아내리고, 사람들 역시 화를 면치 못했다.
-아아아아악!
핏빛의 비를 맞고 살과 뼈가 녹아내리는 고통에, 협곡 곳곳에서 참담한 절규가 울려 퍼진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참상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안도하거나 원한을 곱씹을 새도 없었다.
어느새 맞은편의 협곡에서 나타난 청년 도막생이 섭선으로 하관을 가린 채 눈웃음을 쳤던 것이다.
“요선의 호신강기인가. 신임 태화문주가 그 힘을 흡수했다고 하더니 명불허전이구려!”
쿠구구구구구궁......!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이 폭발하듯 부풀어오른 존재감의 현신.
백서희의 눈썹이 잔뜩 굽혀졌다.
“너...!”
“놀랐소. 천마 말고 심상지경에 오른 고수가 또 있었을 줄이야. 축지의 술이 아니었다면 당했겠어.”
꼬리 아래 있는 강엽 일행을 내려다본 그가 한쪽 손을 들어올려 무너지는 지형을 가리켰다.
“일월구천관이 있는 이쪽 협곡은 예로부터 진법에 보호받았지. 금지나 마찬가지라서 특별한 날이 아니면 교도들조차 출입이 금지되었소. 함부로 발을 들이는 자는 정체를 밝힐 틈도 없이 목숨을 빼앗겼지.”
모름지기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는 게 제일.
진법으로 보호받고 있었기에, 그 사이의 숨은 공간을 활용하면 들키지 않고 함정을 팔 수 있었다.
“천마도 이것까진 예상치 못했나 보더군. 지고한 경지에 오른 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지. 자신의 힘에 취해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걸 간과해.”
“......!”
몇몇 사람들이 발끈했지만, 이어지는 광경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문사 청년의 뒤쪽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
앞서 일월구천관에 들어갔던 이성군이, 냉막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성군, 대체 어떻게...?”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지.”
아무리 권좌에 혈안이 됐다 하더라도 만인이 보는 앞에서 수작을 부리진 못하리라는 순진한 믿음.
“설마 일월구천관에서도 암계를 쓸까. 그런 안이함이 너희들로 하여금 한 치 앞도 못 보게 만들었다.”
“...대역을 보낸 건가요?”
그제서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차린 신녀의 물음에 곳곳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하오나 신녀시여, 다른 두 사람이 무사히 통과하면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소용없어집니다! 한데 어찌하여 이런 짓거리를...!”
“다 묻어버리면 그만이지. 천마도, 일성군도, 그 개같은 일월신마공도 다 묻어버리겠다.”
도중에 항의하는 불만을 묻어버리는 목소리.
혈교와 손을 잡은 시점에서 신교의 관례와 전통에 구애받지 않기로 결심한 걸까.
입가 가득 삐뚜름한 미소를 지은 이성군이 손을 올리자 하늘에서 내리는 혈우가 더욱 짙어졌다.
쏴아아아아아아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농밀한 핏빛의 소나기가 사람들의 비명마저 집어삼키자 신녀가 창백해진 얼굴로 치를 떨었다.
“이성군, 교도들을 모두 죽일 심산입니까!?”
“어차피 신도에 있는 자들만 십만이다. 천산 곳곳에서 살아가는 자들을 끌어모으면 그 이상이지. 여기서 좀 죽어도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다.”
교도들이 죽어가는 참상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갈 같은 독심에 모두가 이를 악물었다.
“혈옥귀군, 천마의 여자는 붙잡았나?”
“물론입니다. 살수들이 현가장의 식솔들을 몰살시키고 천마의 세 번째 부인과 호위장의 부인, 그들의 자식까지 한꺼번에 인질로 삼았지요.”
당묘정과 단목정이 잡혔다는 말에 강엽 일행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이 새끼들이... 죽여버리겠어!”
“나가면 안 돼요, 하후 무사!”
조영옥이 손을 들어 만류했음에도 막무가내로 나가려는 하후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사도와 팔사도, 완안극 등을 뿌리치고 꼬리 바깥으로 나간 하후진이 푸른 불꽃을 내뿜었다.
화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신을 둘러싼 창룡갑이 핏빛의 비가 닿으면서 매캐한 수증기를 피워올린다.
완안극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산독(酸毒)이군. 절세고수의 호신강기도 녹이는 위력이라니....”
“필시 술법이겠지. 그것도 최소 심법진의 규모로 펼치는 술법일 거다.”
말을 보탠 일사도의 검을 타고 노란 뇌기가 그물처럼 퍼지면서 핏빛의 비를 증발시켰다.
하후진이 괴성을 지르면서 이성군 일당을 향해 달려들려고 할 때, 백서희가 사납게 일갈했다.
“정신 차려, 하후진! 호위장이라는 녀석이 저 새끼들 격장지계에 넘어가면 어쩌자는 거야!?
“뭐? 하지만...!”
하후진이 항변하려는 찰나 조영옥이 차갑게 말했다.
“벌써 잊었나요? 현가장에 뭐가 있는지.”
“...!”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이 커진 하후진의 모습. 완안극이 혀를 차며 검지를 좌우로 까딱였다.
“주인님을 믿어라. 살수 따위가 감히 그분의 존체에 손 하나 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물며 여인들과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지.”
“이상한 말이군, 만독자. 마치 천마가 현가장에 남아있다는 투로 말하고 있어. 천마도 대역을 썼나?”
그 말에 화성좌와 토성좌 등이 진짜냐는 눈빛을 보내자 백서희가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이 너희랑 같은 수준인 줄 알아?”
“뭐?”
이해 못할 말에 이성군과 혈옥귀군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별안간 저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렀다.
“선물 잘 받았다. 보답을 해주고 싶어 이렇게 직접 찾아왔지.”
목소리와 함께 날아오는 물건들. 핏빛의 비에 맞아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구멍이 숭숭 뚫린다.
건너편에서 나타난 흑포 청년의 등장에 모두가 식겁하면서 외쳤다.
“천마!”
강엽은 그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하후진을 돌아보았다.
“네 가족은 무사하다. 지금은 안전한 곳에 있어.”
“어? 그, 그래. 고맙다. 근데 너... 정말 강엽 맞냐?”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내가 누군지는 잘 알 텐데? 본체에게 듣지 않았나?”
“...원영신.”
일사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강엽을 보는 일사도의 얼굴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천마의 원영신이군. 심지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이건 미친 짓인데.”
똑같이 원영신을 터득했던 광명마교주차 이토록 완성도 높은 개체를 만들 엄두는 못 냈다.
“자칫 원영신이 독립을 꾀할 우려가 있는 데다, 정말로 그래버리면 자신의 힘이 깎여나갈 테니까요.”
팔사도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은 좌중이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이 되었을 때.
강엽의 원영신이 혈옥귀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심상절예를 쓰지 못하는 것은 적미성과 싸울 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지만,
“본체가 나오기 전까지 시간벌이 정도는 가능하겠어.”
손가락을 튕기자 하얗게 타오르는 벼락이 핏빛의 비를 뚫고 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