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18화 (418/450)

83화. 권좌 (3)

검결지에 둘렀던 심상의 기운.

한없이 불안정한 데다 절예의 영역으로 승화한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심상지경은 심상지경이다.

그러나 강엽은 그 사실에 의문을 품진 않았다.

화성좌와 토성좌, 두 칠성좌를 밑에 두고 있는 일성군이라면 그들 이상의 경지에 올랐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이성군도 목성좌를 휘하에 두긴 했지만, 기실 목성좌가 그를 지지하는 것은 외숙이라는 특수한 관계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성군의 휘하에 칠성좌가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만약 내가 오지 않았다면....’

일성군 입장에선 두 눈 뜨고 권좌를 도둑맞은 심정일 테니 광분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러나 그 사실에 미안함을 느끼진 않았다.

“일월신마공을 익히지 못했다면 일월구천관은 통과할 수 없다. 실제로 내가 오기 전엔 일월구천관에 들어오려는 시도도 안 하지 않았나?”

“그건...!”

“설사 일월구천관에 오지 않았어도 마찬가지야. 교주의 직계도 아니고, 일월신마공을 익히지도 못한 네가 권좌에 앉아봤자 정통성을 인정받진 못해.”

강엽의 약점이 혈통이라면, 일성군의 약점은 일월신마공을 익히지 못했다는 것.

눈높이에 맞춰 들어올린 검지를 앞뒤로 까딱인다.

“그래도 납득할 수 없다면 덤벼. 날 이기면 이자도 널 인정해줄 거다.”

“....”

잠시 유익의 의념을 힐끔 곁눈질한 일성군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허공섭물로 회수했다.

한 발을 살짝 내딛고 상체를 숙인 자세로 공력을 일으켰다.

장삼 자락이 펄럭이며 무채색의 기운이 뻗어나와 심장을 겨눈다.

미간에 힘을 준 일성군이 걸음을 옮기려고 했을 때였다.

“큽... 자들, 노오는...우나.”

제압된 노인이 억지로 턱근육을 움직이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어, 어하피... 너인 끄읏....”

“팔대교왕씩이나 되는 자가 굳이 일월구천관까지 들어와서 인신공양을 하려는 까닭이 무엇일까.”

일성군을 죽일 수 없다고 판단하자마자 바로 목숨을 버리려고 했다.

일성군, 나아가 일월신교에 큰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일 터.

“지하에 파묻힌 대마수와 관련 있을 것 같은데.”

“...!”

거대한 재액이 할퀴고 간 것처럼 반파된 도시의 전경을 둘러본 강엽이 툭 내뱉었다.

“놈을 묶어라, 혈목.”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바닥이 진동하면서 수십 줄기의 혈목이 비상, 노인을 향해 쏘아졌다.

대경한 노인이 강엽의 의념을 뿌리치고 격공으로 혈목을 공격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혈목이 격공의 힘을 무시하고 곧장 짓쳐들었던 것이다.

지난날 불권의 심마를 먹어치우고 금강불괴의 공능을 손에 넣은 혈목.

황금빛 서기를 두른 혈목이 관영신창의 묘리로 전후좌우 움직이며 노인을 공략한다.

마치 숙련된 고수가 합공을 취하는 모양새에 순식간에 궁지에 몰린 노인이 이를 뿌득 갈았다.

급하게 바닥에 떨어진 검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전에 강엽의 허공섭물이 검을 붙들었다.

“큭...!”

“자결하고 싶으면 해라. 혀를 깨물면 되지 않나?”

죽일 듯이 강엽을 노려본 노인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팔짱을 낀 유익의 의념이 말했다.

“인신공양은 목숨만 버린다고 되는 게 아니지. 형식과 절차에 맞춰 진행해야 효과가 극대화된다. 저 검에 의해 죽어야 효과가 생기나 보군.”

“그렇겠지. 저 검이 열쇠일 가능성이 커.”

보석이 박힌 보검을 허공섭물로 당겨와서 손에 쥔 강엽이 검신에 손가락을 튕겼다.

상당히 단단하면서도 탄성을 지닌 은빛 검신. 맑은 소성에 의념이 감탄했다.

“만년한철로 만든 것 같군. 가히 신병이기라 불릴 만해.”

다만 자세히 보면 검신에 법문이 음각된 게 딱 봐도 의식을 노리고 만든 예식용이었다.

한차례 검을 둘러본 강엽이 무게중심을 차지하는 부분을 콕 찌르자 검신에 금이 가며 산산조각이 났다.

“크아악! 너, 너 귀영...!”

“천마다. 이러면 인신공양이 어렵겠지?”

물론 강엽도 봉인된 대마수를 깨울 생각이긴 하지만, 인신공양을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팔대교왕의 반열에 들 만큼 고강한 고수의 생명을 제물로 바친다면 괴물이 그만큼 힘을 되찾을 테니까.

봉인과 함께 놈의 힘이 쇠락했다면, 그대로 둔 채 깨우는 게 낫지 않겠는가.

“흥, 얕보지 마라! 암만 검을 잃었다고 방법이 없을 줄 아느냐-!”

사방에서 쇄도하는 혈목 다발을 피해서 위로 껑충 뛰어오른 노인이 신형을 뒤집었다.

노인의 몸에서 발현된 강렬한 심상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간다.

비록 임시라고 하나 팔대교왕답게 심극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경지.

물론 혈목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휘몰아치는 흐름을 타고 공력의 급류를 거슬러 올라갔다.

퍼퍼퍼퍼퍼퍽!

날카로운 끝부분이 호신강기를 뚫고 노인의 팔다리에 박힌다.

목숨을 취하지 않은 선에서 확실하게 제압하기 위함이었지만, 노인은 광소까진 막지 못했다.

“이 한 목숨을 바치오니, 혈신을 섬겼던 가신이여! 그 거대한 몸을 일으켜 간악한 죄인들을 처단하시오!”

“잠깐...!”

노인의 노림수를 짐작한 의념이 급하게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단전 한복판에서 꿈틀거린 검붉은 빛이 중단전과 상단전을 타고 사지백해로 뻗어나갔던 것.

“...자기 몸에 심극을 쓴 건가?”

정기신을 스스로 깨트린 자결.

공력이 폭주해서 온몸의 경맥이 불탈 텐데도 광적인 신앙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아아아아아악!

눈과 코를 비롯한 칠공 전체로 불을 쏟으며 비명을 지른다.

혈목에 꿰뚫린 채 사지를 뒤튼 노인이 검은 불꽃에 휩싸여 잿가루가 되자 일성군이 안색을 굳혔다.

“...제물이 고통스럽게 죽을수록 인신공양의 효과도 커지지. 하물며 그게 자기 자신을 바치는 거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차라리 그냥 죽였어야 했어.”

끝내 인신공양을 막지 못했다는 비난. 그러나 강엽은 냉철한 신색을 견지하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봉인시켰다.”

“봉인이라니... 음?”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노인이 죽었던 곳을 바라본 일성군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노인이 남긴 잿가루가 한 곳에서 회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념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의념으로 잿가루들을 일일이 통제한다니. 무식한 짓이긴 한데 효과적이긴 하구만.”

파지지지직...!

뇌기를 동반한 벽이 휘몰아치는 잿가루들을 한데 감싸안으면서 어린아이 머리만한 공으로 만들었다.

한때 팔대교왕의 좌에 올랐던 절세고수의 잔해를 회수한 강엽은 삼매진화로 완전히 불태웠다.

백염으로 그 안에 담긴 원념을 불태우자 시커먼 연기가 노인의 얼굴을 그리며 솟구친다.

한차례 자신을 노려보며 사라진 연기를 곁눈질한 강엽은 손을 탁탁 털며 일성군에게 몸을 돌렸다.

“그럼 아까 했던 대화로 돌아오지.”

“....”

말없이 강엽을 응시한 일성군이 검을 들어올렸다.

삽시간에 팔대교왕을 제압한 무위를 보고도 물러나지 않을 기색.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꿋꿋이 투지를 관철하며 심상의 기운을 덧씌운 검을 들어올렸다.

“도전하는 입장에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염치 없다는 건 알지만, 일월신마공을 써줄 수 있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단순히 힘으로 꺾는 것보다는, 일월신마공으로 꺾는 게 훨씬 효과적일 테니까.

강엽의 양손에서 각기 하얀 불길과 냉기가 일기 시작하자 일성군은 홀린 듯이 넋을 잃었다.

일월신마공을 익히지 못했다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며 지고한 경지까지 올랐으나, 그럼에도 마음 한쪽에선 갈망을 떨치지 못한 걸까.

의념이 씁쓸하게 웃었다.

“운명은 참 잔인하지....”

하필이면 이런 시대에 태어난 게 불행이었다. 앞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교주가 됐을지도 모르는 것을.

“가겠다.”

표정을 굳힌 일성군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 * *

“커헉!”

흙과 피로 범벅이 된 일성군이 형편없이 땅바닥을 나뒹굴며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벌써 수십 번이나 반복된 양상.

양손에 양극의 기운을 덧씌운 채 최소한의 힘으로 상대한 강엽은 가볍게 숨을 골랐다.

참혹하게 찢겨진 의복 사이로 피를 흘리는 일성군에 비하면 놀랍도록 깔끔한 신색.

이마에 살짝 맺힌 땀방울이 아니었다면 싸웠다는 것도 모를 만큼 정갈했다.

“항복하지 않을 거냐?”

“물론...!”

부들부들 떨면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일성군이 검으로 땅을 짚으면서 강엽을 노려봤다.

몇 번이나 깨졌으면서도 눈빛에 어린 투지는 사그라들기는커녕 활활 타오른다.

고집스럽게 다문 입매 사이로 긴 날숨을 내뱉고, 다시 숨을 들이키며 한 발을 내디뎠다.

순간 전광석화처럼 강엽을 향해 쇄도했지만,

빠각!

빛살이 되어 배후를 잡은 강엽의 일장에 내동댕이쳐졌다.

떡 벌린 입으로 들어온 먼지를 내뱉을 새도 없이 추가타가 들어왔다.

복부를 쳐날린 발등에 몸이 붕 뜨고, 직후 다섯 번의 권격과 세 번의 족격에 속절없이 당했다.

심검이나 심상절예도 쓰지 않고 일성군을 몰아친 강엽이 양손의 기운을 마주쳤다.

-일월합신.

양극의 반발로 일어난 충격이 구체의 형상으로 뻗어나가면서 건물을 부수고 지면을 둥글게 파헤친다.

직후 지옥의 열탕같은 열기와 혹한의 추위가 동시에 몰아치면서 허연 수증기를 피워올리고, 수증기가 한 곳에 빨려들어가면서 차가운 와류를 일으켰다.

“빙겁쇄혼수(氷劫碎魂手)....”

멀찍이 떨어진 데서 강엽의 손에 몰린 냉기를 바라본 유익의 의념이 중얼거린 찰나.

전방 백여 장의 공간이 말 그대로 하얗게 얼어붙으면서 동토처럼 변해버렸다.

멀찍이서 일성군을 오시한 강엽이 한 줄기 빛으로 변하면서 그 앞으로 갔다.

“하아, 하아....”

폐부 너머로 간신히 숨을 토하는 일성군이 반쯤 풀린 눈으로 강엽을 바라본다.

열기와 냉기가 쉴 새 없이 터지면서 화상과 동상을 입은 몰골.

까맣게 타고 하얗게 얼어붙으면서 근골이 망가진 일성군이 이를 악물고 전진했지만, 이내 검을 떨어트리면서 무릎을 꿇었다.

“난, 나는....”

“거기까지만 해라.”

어느새 나타난 유익의 의념이 어깨를 짚으며 만류했음에도 일성군은 듣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의지는 태산처럼 굳건할지언정 육신은 정신을 따라가지 못하고 무너진다.

“알지 않느냐. 저 녀석이 널 죽이려고 마음 먹었다면 싸움은 훨씬 빨리 끝났을 거다.”

주먹을 쥔 채 엎드린 일성군의 아래로 뜨거운 눈물이 점점이 떨어지면서 바닥이 축축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운 일성군은 붉게 물든 눈으로 강엽을 올려다보며 목구멍을 쥐어짰다.

“왜지? 당신 정도라면 굳이 신교의 권좌에 목을 매달지 않아도 될 텐데! 그만한 힘이라면 신교보다 더 거대한 단체도 얼마든지 세울 수 있지 않나-!”

“시간이 있었다면 그랬겠지.”

강엽이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 곧 혈마가 부활한다. 그때를 대비하려면 신교가 필요해.”

“.......”

“내게 충성하라고 하진 않으마. 다만 날 인정하고 물러난다면 네 사람들을 챙겨주지. 그들을 숙청하지도, 불공평하게 대하지도 않겠다.”

“하... 그러면 난 평생 숨어지내야 하겠군.”

강엽은 그것까지 부정하진 않았다. 일성군이 어디에 있든 그가 살아남으려면 숨죽이고 있어야 한다.

“...조건이 있다.”

“말해라.”

어지간하면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 정도는 해야 유익에게 진 마음의 빚을 덜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어진 말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위대한 교주가 되어라. 나를 비롯한 유가의 혈통 중 누구도 감히 딴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난 위대해지고 싶은 생각이 없어. 그래도 신교를 위해 최선의 길을 찾겠다고 약속하지.”

“...정말이지 못 당해내겠군.”

쓰게 웃은 일성군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일성군 유군명이... 삼가 신교의 교주를 뵙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고꾸라져서 정신을 잃은 일성군의 모습. 후손의 몸을 잡은 유익의 의념이 쓴물을 삼킨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뭐, 그럭저럭 마무리된 건가. 네겐 고맙다고 해야겠군. 이 녀석을 죽이는 게 더 쉬웠을 텐데.”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뭐?”

“논리적인 건 아니야. 그냥 뭔가를 느꼈다. 이놈을 살려둬야 할 것 같다고 말이야.”

“음, 어쩌면 앞날을 예지한 걸지도 모르지. 내 원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천 년 뒤의 미래를 예견한 유익처럼, 강엽 역시 어렴풋이 미래를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

강엽도 부정하진 않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만약 당신의 후손들이 더 일찍, 내가 태어나기 전에 들어왔다면 당신은 일월신마공을 전수했을까?”

유익의 의념이라면 일월신마공의 구결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테니 다시 맥을 되살리지 않았을까.

그러한 질문에 유익의 의념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러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난 일월신마공의 구결만큼은 기억하지 못하거든.”

“어째서?”

“만약 내가 일월신마공을 전수했다면 장차 네가 각성했을 때 일이 더 복잡해졌을 테지. 지금도 유가의 혈통들이 이리 반발하는데 일월신마공까지 익혔다면?”

“그야....”

“내 원본은 그럴 여지를 없앴지. 나도 애석하지만, 유가의 시대는 끝났어. 이젠 너의 시대다, 천마.”

강엽의 가슴팍을 툭 친 유익의 의념이 씩 웃으면서 일성군을 어깨에 짊어졌다.

“그럼 가보자고. 봉인지는 조금 더 깊은 곳에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