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권좌 (1)
“회임하신 것은 축하드리오. 그러나....”
토성좌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뒷말을 이었다.
“검후, 당신은 논점을 흐리고 있소. 내 말은, 천마가 교주가 된다면 유씨를 쓰는 혈족들을 내버려두지 않을 거란 말이오.”
물론 권력투쟁에서 숙청이 따르는 것은 필연이다.
그러나 피를 흘릴지언정 역대 교주들의 혈통이 멸문당하는 비극이 있어선 안 된다.
“아니면, 당신의 자식에게도 유가의 핏줄이 흐르니 나머지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요?”
“당신이야말로 이이의 속내를 예단하네요. 차후 반란이 일어날 걸 염려해서 유가의 혈족들을 미리 숙청할 거라고 지레짐작하잖아요?”
“그게 권력의 속성이오!”
“내 말은...!”
“그만.”
일성군이 손을 들어 말다툼을 끊었다.
“쓸데없는 논쟁이군. 누가 교주가 되든 피가 흐르는 건 막을 수 없다. 신교의 역사는 늘 피와 함께 했고, 수많은 가문들이 생기고 사라졌지. 우리 유가라고 영원히 존속할 수는 없음이야.”
“하오나 일성군님!”
“어차피 내가 교주가 되면 해결되는 일이다. 그러니 토성좌는 이 문제를 언급하지 마라.”
“...속하가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일성군의 말마따나 그가 교주가 된다면 유가의 핏줄이 끊기는 일은 없을 터.
이성군 역시 비슷한 생각인지 삐뚤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가 교주가 되든 숙청은 피할 수 없겠지. 잘못된 줄을 잡은 대가를 치러야 하잖나?”
설령 강엽이 이 자리에 없었다 해도, 두 성군 중 한 명이 교주가 된다면 반대파는 쓸려나가리라.
강엽은 신녀를 힐긋 곁눈질하며 말했다.
“유가의 혈통을 제거하진 않을 거다.”
“말은 잘하는군. 하긴 신녀가 있는데 대놓고 숙청하겠다고 지껄이진 않겠....”
“너희 중에 혈교와 손을 잡은 놈이 있다는 걸 안다.”
“...!”
지난날 수성좌와 금성좌를 보내면서 혈교의 세작들이 암약하고 있음을 알렸던 신녀의 전언.
두 성군을 번갈아 돌아본 강엽이 나직이 말했다.
“아마 이 주변에 혈교놈들이 숨어 있겠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미리 경고하마. 혈교와 손을 잡은 놈들은 그게 누구든 쳐죽일 거다.”
낮게 가라앉은 일성군과 위험하게 웃는 이성군.
두 성군뿐 아니라 멀찍이 떨어진 수하들의 반응까지 빠르게 훑어본 강엽은 감을 잡았다.
일성군의 세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담담한 데 반해 이성군의 세력은 경직된 것이다.
그러나 증좌가 없으니 이 자리에서 추궁하는 것은 부적절하겠지.
“신녀.”
“명을 받들겠습니다.”
예를 차리며 앞으로 나서는 신녀.
아랫사람이 바친 석장(錫杖)을 받은 그녀는 날카로운 아랫부분을 바닥에 툭 치며 진언을 외웠다.
그러자 이마의 별 문양이 눈부시게 빛나면서 협곡에 깔린 진법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위우우웅......!
투명한 물결이 동심원처럼 퍼지면서 초목과 암석을 휩쓸고, 대기가 물결치며 하늘이 이지러진다.
계파를 막론하고 그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본 교도들이 신교의 교리를 읊었을 때.
“...열려라, 신문(神門)이여-.”
신녀의 한마디에 유리조각이 깨지듯 공간 전체가 바스러지면서 전에 없던 조형물이 나타났다.
대칭을 이루듯 똑같은 높이로 솟은 커다란 돌기둥.
그 사이의 공간이 이어지면서 오방색이 뒤섞인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돈이 휘몰아친다.
정안을 개방해서 석기둥의 구조와 술법을 분석한 강엽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엔 술법진으로 감춰두고, 신녀의 의념으로 드러내는 구조인가.’
술법진으로 이루어진 별개의 공간.
하지만 그 안쪽은 강엽조차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은밀한 장막으로 감추어져 있었다.
“저게 일월구천관...!”
“설마 이런 모습이었을 줄이야....”
신교가 개파한 이래 쭉 존속한 일월구천관. 하나 그 실체를 아는 자들은 손에 꼽았다.
역대 소교주들이 교주위를 물려받기 위해 도전했을 때는 조용히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광명마교 출신인 일사도와 팔사도, 흑룡교 출신인 이 노사 등도 넋이 나가서 중얼거렸다.
“과연 명불허전이군. 일월의 가장 내밀한 비밀이라고 하더니....”
일행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하는데 신녀의 목소리가 모두의 정신을 일깨웠다.
“세 도전자께선 차례대로 들어가십시오. 수하들은 데리고 갈 수 없다는 점 명심하시기를.”
“셋이 한꺼번에 들어가도 되나요? 문제가 일어나진 않을까요?”
백서희의 물음에 신녀가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옛날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답니다.”
세 명이 한꺼번에 들어간 사례는 없으나, 교주위를 두고 다투던 두 명이 들어갔던 적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렇게 구천일월관에 들어간 자들이 맞이하는 결말은 둘 중 하나였다.
“전부 아니면 전무.”
경쟁자들을 둘러본 일성군이 건조하게 말했다.
“일월구천관의 시험은 늘상 달랐지. 그러나 단순히 힘이나 지혜를 시험하는 건 아니었다.”
무공만 따지면 모두가 교주위를 차지할 자격이 있었으나, 그들 모두가 교주가 된 건 아니었다.
“과거의 기록을 보니 일월구천관엔 의지가 있어 도전자의 마음을 시험한다고 하더군. 우리들 중에 누가 교주가 될지는 모르지만, 마음에 들지 않은 대답을 놓는다면 일월신마공을 익혔어도 목숨을 빼앗길지 모르지....”
다분히 강엽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포권을 쥐는 토성좌의 어깨를 다독이고, 정혼자를 걱정하는 화성좌와 이마를 맞대며 무어라 속삭인 뒤.
몸을 돌린 일성군은 거침없이 나아가며 오방색의 소용돌이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내가 두 번째인가? 아, 그래. 가기 전에 나도 경고 하나쯤은 해둬야겠군.”
한차례 얄밉게 이죽거린 이성군이 짐짓 표정을 굳히며 반대파들을 노려보았다.
“너희는 잘못된 줄을 잡은 대가를 치를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테니까.”
대답을 듣지도 않고 소용돌이 안쪽으로 몸을 날린 이성군의 뒷모습.
백서희를 비롯한 일행과 눈길을 나눈 강엽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이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질감도 느껴지지 않은 소용돌이를 통과하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 * *
안쪽에 두 성군은 없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존재가 있었다. 하얀 두건을 깊이 눌러써서 얼굴을 가린 젊은 남자였다.
입술만 살짝 보이고, 코 위쪽은 어둠에 가려졌는데 강엽의 안법으로도 꿰뚫어볼 수 없었다.
“어서 오라, 도전자여. 아니, 별바다의 인도자라고 해야겠구나. 그대는 일월성신의 영성을 각성했으니.”
“시답잖은 경극은 그만두지.”
“음?”
“신비하게 보이려고 용써봤자 글러먹었다고. 내가 당신 정체를 모를 리 없지 않나.”
얼굴을 가렸다 하나 남자의 기척은 익숙했다.
지난날 북해에서 일월신교주와 싸웠을 당시, 갑작스레 나타나서 강엽에게 가르침을 내렸던 존재.
“유익.”
“.......”
한동안 침묵한 남자가 쓴웃음 섞인 한숨을 흘리면서 두건을 벗었다.
“허어, 역시 못 속이는구만?”
“아예 숨었다면 모를까, 내 앞에 나온 이상 정체를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당시 현실에서 흘렀던 시간은 찰나와 같았지만, 실제로 가르침을 받은 시간은 여삼추처럼 길었다.
오다가다 지나친 사람도 아니고, 그만큼 있었는데 유익의 기척을 잊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지. 하지만 너도 다 아는 건 아니군. 그때 만났던 너와 지금의 나는 다른 존재야. 말하자면 우린 한 뿌리에서 갈라져나온... 서로 다른 줄기지.”
북해에서 만난 유익이 강엽의 혼백에 담겨 있던 의념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유익은 진짜 유익이 죽기 전에 일월구천관에 남겨둔 의념이었다.
“네가 내 환생이라는 건 알지만, 또 다른 나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고 뭘 했는지는 몰라.”
“같은 근원을 뒀는데도 독립적인 존재라고?”
“그래,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네가 이전에 만난 의념이 사라졌을 때 나도 함께 사라졌겠지. 물론 진짜 유익이 살아있다면 우리가 겪은 일을 모두 알았겠지만, 진짜 유익은 오래전에 죽었잖냐?”
입가를 씩 들어올린 유익이 손가락을 들어 강엽의 가슴을 꾹 눌렀다.
“진짜 나는 네게 힘을 물려주고 사라졌다. 하늘의 섭리를 어긴 나머지 귀천하지도 못했어. 진조가 그랬듯 너의 일부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거지.”
“....”
강엽은 말없이 미간만 찌푸렸다.
유익의 말이 거슬려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을 만지는데도 꿈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억지로 저항하면 뿌리칠 수 있기야 하겠지만....’
구우우우웅......!
강대한 의념이 일어나면서 주변에 균열이 일자 유익이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물러났다.
“이봐, 좀 참아달라고! 너쯤 되는 고수가 날뛰기 시작하면 일월구천관도 무사하지 못해.”
이미 강엽은 생전의 유익은 물론이고 진조까지 초월한 존재. 그가 이 안에서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면 일월구천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그럼 간단하군. 나를 교주로 인정해라.”
애당초 강엽이 교주가 될 수 있도록 안배한 게 유익 본인이 아닌가?
일월구천관의 의념이 유익 본인은 아니더라도 그의 유지를 이어받았을 테니, 일월구천관의 시험은 사실상 보여주기 위한 요식행위였다.
“음, 나도 그러고 싶은데 절차라는 게 있어서 말이지. 그리고....”
말끝을 흐린 유익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남긴 기연을 얻으려면 너도 시험을 통과해야 해. 그건 내가 주고 싶다고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당신이 시험을 주관하는 것 아닌가?”
“그렇긴 한데 내가 출제자는 아니거든. 특히 널 시험하는 건 진짜 내가 생전에 만든 거다.”
“....”
“물론 강제는 아니야.”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은 강엽의 모습에 유익의 의념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좌우로 움직였다.
“기연을 얻든 말든 넌 이미 천리에 도전할 만큼 강대한 존재가 됐다. 이미 무공이니 술법이니 하는 걸로 재단할 존재가 아니란 말이야. 말 그대로 신인이지. 아마 혈마도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걸?”
하지만, 이라고 짧게 단서를 달면서 말을 잇는다.
“네가 원하면 돌아갈 수도 있어. 일월구천관을 통과하지 못하면 교주가 되지 못한다지만, 그만한 힘이 있는데 이딴 게 무슨 소용이야? 네가 원하면 두 성군 중 누가 교주가 되든 죽이고 권좌를 빼앗을 수 있는데.”
“...유익 본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후손인데 너무 매정한 것 아닌가?”
“현실을 얘기한 거지. 어차피 너는 내 환생이니, 권좌를 찬탈해도 양심에 거리낄 게 없지 않나?”
“내가 그런 걸 원치 않는다는 건 잘 알 텐데.”
의념의 말마따나 힘으로 때려부순다면 권좌를 빼앗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그 선택은 처음부터 배제했다.
“내가 일월신교로 온 건....”
“뭔데?”
짓궂게 웃으면서 묻는 모습에 강엽은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면서 한숨을 쉬었다.
“내 사람들이 지낼 곳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다른 곳도 있지 않나? 굳이 일월신교가 아니어도 되잖아?”
“일월신교가 최선의 선택지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솔직하게 속내를 밝히지 않았겠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거리낄 게 없었다.
“난 사마외도로 낙인 찍혔지. 무림맹을 뒤집은 이상 악명이 따라다니는 건 필연이었다.”
비록 적미성이 폭주하면서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그가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욕먹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내 아이들이 나 때문에 피해를 입는 건 막고 싶었지.”
“유가의 혈족들을 축출하면서까지?”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아. 사실이니까. 내가 교주가 되려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음, 그건....”
“신인이니 뭐니 불리지만 난 평범한 범부다. 내 재능이나 성격이나 상관없이 그래. 애초에 나는 비범하게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어.”
경전을 공부했던 흔한 유생.
지금 와서야 운명의 세 별이니 뭐니 하지만 한평생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난 욕망도 있고 감정도 있다. 내 가족이, 날 따르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 하지만 그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건 원치 않아.”
“장차 유가의 혈족들이 권좌를 되찾겠다고 네 후손들을 위협할 수 있는데도?”
“그때쯤 되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 것 같나? 내 아들이 장성해서 자리를 물려받을 때가 되면 적어도 수십 년은 흘렀을 거다. 그 아이가 물러날 때가 된다면 다시 백 년, 아니 어쩌면 이백 년이 흘렀겠지.”
“하하, 이백 년은 좀 너무한 것 아닌가?”
“내 아이들은 장수할 것 같더군. 평범한 사람이라면 노인이 됐을 세월에도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겠지.”
유가의 혈통이 몇 대가 지나는 동안에도 자식들은 권좌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 터.
“그만큼 시간이 흐르면 과거는 잊히기 마련이지. 당신은 유감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때쯤 되면 사람들은 유가를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을 거다.”
왕조가 몇 번이나 바뀌는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신교를 통치할 테니 굳이 유가의 복수가 두려워 숙청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니 난 힘으로 권좌를 찬탈하지 않겠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권좌를 차지할 수 있어.”
“그래도 혈교와 손 잡은 녀석들은 좌시하지 않겠지?”
“본보기는 보여야 하니까.”
“그 말이 진심이기를 바라마.”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이 된 유익의 의념이, 강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신교의 새로운 교주. 넌 시험을 통과했다. 이 대화야말로 시험이었으니, 생전의 내가 짠 신의(神衣)를 선물로 주마.”
강엽의 몸을 감싼 하얀 장삼이 환하게 빛나면서 찬란한 황금빛 수실이 새겨졌다. 태양과 달, 별빛의 형상으로 장삼을 수놓은 수실.
“천룡신포(天龍神袍). 먼 옛날 서왕모가 복숭아나무잎을 먹이며 키운 천잠(天蠶)이 짜낸 비단으로 만들었다고 하더군. 내가 신교를 세웠을 때 신물로 삼은 물건이다. 이 옷이 너를 상징하는 징표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