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15화 (415/450)
  • 82화. 신교 (5)

    후우우우웅!

    환한 우윳빛을 토해내는 소맷자락.

    거친 바람결에 주변에 있던 군중들은 감히 정면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냥 활명술만 써서는 안 되겠지.’

    일전에 천하를 순회했던 경험.

    본래는 광명마교의 석탑을 없애기 위함이었지만, 겸사겸사 자신을 신인으로 포장하기 위하여 각지의 병자들을 치유하지 않았던가.

    틈틈이 당묘정에게 의술을 배우면서 활명술로 병자들을 치유했던 경험은 상당히 큰 도움이 됐다.

    ‘오래전에 잘린 팔다리는 활명술만 써서는 재생이 안 돼. 흡혈귀의 피가 필요하다.’

    허공에 고정된 채 부들부들 떠는 광마진도의 어깨를 잡고, 헐렁한 소매를 거침없이 뜯는다.

    오래전에 잘려나간 단면은 우둘투둘 흉하게 아물어서, 일부 군중들은 눈을 돌렸다.

    “뭐, 뭘 하려고....”

    “가만 있어봐라.”

    엄지를 까득 깨물어 낸 피로 흉하게 아문 단면에 바른다.

    끽해야 한두 방울의 피였지만, 활명술의 기운과 만나자 기묘한 상승 작용을 불러왔다.

    콰직!

    “끄아아아악!”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 광마진도의 모습에 군중들은 물론 신교의 무인들도 해쓱해졌다.

    강엽 일행만 담담하게 그 광경을 바라볼 따름.

    ‘모공으로 흡수된 피는 흡혈귀를 만들기엔 너무 적지. 정식으로 의식을 치른 것도 아니고.’

    강엽의 피를 흡수해서 흡혈귀가 되려면 한 됫박은 될 법한 양을 구강으로 마셔야 한다.

    다행히 광마진도는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에 흡혈귀의 피에 오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우드득! 꾸드드드득!

    불길한 소리를 내면서 사지를 뒤트는 광마진도.

    안구가 뒤로 돌아가면서 침을 질질 흘리는 몰골은 끔찍하기 그지없었지만, 놀라운 것은 그 이후였다.

    흡혈귀의 재생력에 자극받은 뼈가 단면을 뚫고 나오면서, 신경을 잇기 시작한 것이다.

    “파, 팔이 자라고 있어....”

    신교의 무인들과 군중들은 물론, 두 성군의 사주를 받은 바람잡이들도 넋을 잃었다.

    상리를 거스르는 이적을 행한 강엽만이 초음의 공능으로 광마진도의 내부를 관찰할 뿐.

    단순히 뼈와 신경이 자라나는 것만이 아니라, 한때 끊어졌던 경맥의 기운이 되살아났다.

    뼈와 신경, 핏줄이 자라나고 근육이 그 위를 덮으면서 다섯 손가락까지 완전해진다.

    이윽고 시간을 되돌리듯 새하얀 피부가 벌건 근육을 덮으면서 정신을 잃은 광마진도가 털썩 쓰러졌다.

    그때까지도 현실감을 되찾지 못한 장로들은 강엽의 목소리를 들은 뒤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를 의원에 데려다주도록. 그리고 깨어나면 내 앞에 다시 데려와라.”

    “조, 존명! 신인의 명을 받듭니다!”

    입을 벌리고 있다 허둥지둥 대답하는 장로들.

    반면 무인들이 광마진도를 끌고 간 뒤에도 군중들은 꿈을 꾸듯 몽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기적이다....”

    “신인이시다. 진정 신인께서 강림하신 게야!”

    한두 명의 혼잣말은 이내 큰 술렁임이 되어 대로 전체를 잠식했다.

    그 모습을 둘러본 강엽은 약간 지친 신색을 추스르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도들이여, 난 아프고 병든 자들을 외면하지 않겠다. 돈이 없어 의원을 찾아가지 못한 자들, 의원도 고개를 흔든 중병을 앓는 교도들은 내 앞에 나서라!”

    “와아아아아아아아!”

    장로원이 심어둔 바람잡이들이 무색해질 만큼 신도를 흔드는 함성.

    누군가가 연호하기 시작했다.

    -천마! 천마!

    평교도들과 신교의 무인들이 그를 따라 천마를 부르짖고, 일부 간부들까지 호응한다.

    얼떨떨했던 장로들도 현실을 깨닫고 눈빛을 교환하더니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교주님 천세! 천마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가 천세 삼창을 부르짖는 장관에 흐뭇한 얼굴로 군중들을 감상한 완안극은 시조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한때 평범했던 청년이 별바다의 인도를 따라 수많은 역경을 딛고 천산의 산기슭에 왔구나. 무지한 자들은 그를 질투하여 모함했으나, 하늘은 그를 인정하여 천마라는 별호를 내려주었도다. 천마는 난세를 평정하고, 천하무맥의 대종사가 되리니. 고금제일 천마의 군림행에 만마가 고개를 조아릴지어다!”

    -천마군림(天魔君臨) 만마앙복(萬魔仰伏)!

    누군가의 외침에 만인이 호응한다.

    -천세! 천세! 천천세!

    교도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수많은 병자들과 불구자들이 천마의 앞에 앞다투어 엎드리고, 천마의 약손에 건강을 되찾는다.

    감복한 자들이 돈과 쌀을 바쳤으나 천마는 무심한 한마디로 거절하니 모두가 눈물을 쏟아냈다.

    여인들과 아이들이 천산의 들꽃을 꺾어와서 천마의 행렬을 축복하고, 사내들은 절하고 경배했다.

    광명과 흑룡의 잔당들도 은원을 잊고 홀린 듯이 천마를 바라보니, 그의 수족이 시조를 읊었다.

    “일월과 광명, 흑룡... 영웅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반목했으나, 영웅의 공동전인이 그들을 다시 합쳤도다. 천마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신교를 창건하니, 영웅의 후손들이여. 천마의 신교 아래 집결하라!”

    일월도 광명도, 흑룡도 아닌 새로운 신교.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마도 종파를 하나로 합친 거대한 마교가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 * *

    “미쳤군.”

    일월신교의 이성군 유상천.

    신도에서 떨어진 협곡의 땅이 흔들릴 만큼 큰 함성이 울리고 있었다.

    두 성군의 세력까지 덩달아 기가 질릴 지경.

    “천마군림 만마앙복....”

    워낙 시끄럽게 떠드는 통에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말은 몇 개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반복되는 여덟 글자의 말은 똑똑이 들렸기에 누군가가 멍하니 따라했다.

    그 중얼거림에 간부들이 발작하듯 격분했다.

    “누구냐! 어떤 놈이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서슬 퍼른 기세에 죄없는 자들까지 움츠러들자 간부들이 짐짓 눈을 부라렸다.

    “명심해라! 천 자만 내뱉어도 즉참할 것이야!”

    “놈의 사술에 현혹되지 마라! 놈은 정명한 혈통을 빼엇으러 온 이단의 교적이다!”

    그에 무인들은 입을 다물었지만, 크게 일어난 동요는 좀처럼 가라앉을 생각을 안 했다.

    가늘게 떨고 있는 수하들의 모습에 이성군이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군.”

    시선의 끝에 걸린 한 사람.

    평생 숙적으로 삼았던 일성군 유군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뒷짐을 지고 있었다.

    똑같이 유씨 성을 쓰고 있긴 하지만 기실 두 사람은 형제는커녕 가까운 혈연도 아니었다.

    몇 대 전부터 갈라진 먼 친척뻘.

    유군명이 더 일찍 태어나서 일성군이라 불리긴 하나, 그렇다 하여 서열이 더 높은 건 아니었다.

    ‘쯧, 저놈만 넘으면 권좌가 코앞이었거늘.’

    좀 더 직계에 가까운 혈통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일찌감치 선두를 달렸던 밉상스러운 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겨우 따라잡았는데,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뚝 떨어졌다.

    평생의 호적수로 삼았던 놈보다 훨씬 위험한, 어쩌면 신교 전체를 뒤집을지도 모를 위험인자.

    책사로 위장한 혈옥귀군과 슬쩍 눈빛을 교환한 이성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일성군을 호위하는 화성좌와 토성좌가 앞을 가로막았지만, 아랑곳 않고 입을 놀렸다.

    “묘하게 침착하군. 설마 벌써 포기한 건가?”

    “...포기?”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던 일성군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다 이내 피식 실소했다.

    “설마. 내겐 목표가 있다. 그걸 이룰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어찌 포기하겠느냐.”

    잠시 사이를 둔 그가 뜸들이며 말했다.

    “아마 너도 그렇겠지.”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여태껏 해온 게 있는데 포기하는 건 어불성설이지.”

    그럴 거면 애초에 도전하지도 않았다. 외인에게 권좌를 바치려고 아등바등 살아남은 게 아니지 않은가?

    그때 이성군의 세력을 쭉 둘러본 일성군이 이채를 띠었다.

    “목성좌가 안 보이는군?”

    이성군을 보필하는 유일한 칠성좌.

    처음엔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성군이 지적한 뒤에야 화성좌와 토성좌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표정을 굳히는데, 이성군은 의뭉스러운 웃음을 띠면서 대답했다.

    “잠깐 바쁜 일이 생겨서 말이야.”

    “...또 암계를 꾸미나. 그 간악한 책사가 네게 계책을 알려주던가?”

    “유능한 친구지. 누구들과는 달리 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일성군의 세력을 비웃듯이 흘겨보자 화성좌와 토성좌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항의할 기회는 없었다.

    “오는구나.”

    툭 던지듯 중얼거린 일성군의 말에 장내의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저편에서 몰려오는 무지막지한 군세.

    천마군림 만마앙복을 부르짖었던 교도들이 몰려오는 가운데 사인교에 탄 하얀 장삼의 청년이 눈에 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두 성군 모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천마.”

    일월신교를 삼키려는 괴물이 현신했다는 것을.

    * * *

    푸른 전나무와 새하얀 암석이 가득한 협곡.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이 협곡을 깔아뭉개면서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강엽이 신녀를 힐끗 돌아보았다.

    “마침내 후계자들이 모였군요.”

    자연스레 만인의 이목은 그녀에게 향했다.

    면사를 벗어 얼굴을 드러낸 신녀가 두 성군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일성군이 두 손을 정중하게 모았다.

    “일성군 유군명이 신녀를 뵙소.”

    “...이성군 유상천이 신녀를 뵙소.”

    마지못해 예를 갖춘 이성군. 말은 안 하나 그의 눈빛엔 섭섭한 감정이 가득했다.

    “두 성군께는 죄송스럽지만, 저는 초대 조사의 영성을 계승한 천마께 충성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일월성신의 영성 말이오?”

    “예. 두 분께서도 느끼셨겠지요?”

    방계이긴 해도 두 사람 모두 유익의 피를 이은 후손.

    강엽을 보자마자 그가 일월성신의 화신임을 깨달았을 터.

    “천마께선 일월신마공까지 익혔으니, 권좌에 앉을 자격은 충분합니다.”

    “이의를 제기합니다.”

    말한 사람은 두 성군이 아니었다.

    시종일관 일성군의 뒤에서 호위를 자처한 탄탄한 근육질의 사내가 발언을 청한 것.

    ‘저자가 토성좌로군.’

    땅밑의 지기를 몸 안에 축적한 절세고수.

    신녀가 대답하기 전에 토성좌가 말을 이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신녀께선 저자가 일월성신의 화신이라 하셨지만, 본디 교주위는 대대로 유가의 것이었습니다. 저자가 교주가 된다면 신교의 유구한 전통이 깨질 터. 이는 역성혁명이나 다름없으니 신교의 정체성이 바뀔 겁니다.”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자는 이전의 왕족들을 살려두지 않는 법.

    만약 강엽이 교주가 된다면 유가의 혈통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겠는가.

    “신녀께서도 유가의 혈통이 아니십니까. 한데 어찌 외인을 교주로 옹립하고자 하십니까?”

    “이분은 초대 조사의 환생이시지요. 그 환생은 우연이 아니라 초대 조사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유가가 몰락하는 게 당연하다는 겁니까?”

    “유가의 혈통은 끊이지 않을 겁니다.”

    “그게 무슨?”

    “여러분께 소개하지요. 천마의 첫 부인이자 흑룡교의 혈손인 검후 백서희 여협이십니다.”

    “...!”

    하얀 피풍의를 휘날리는 절세가인의 등장에 좌중은 너 나 할 것 없이 눈을 부릅떴다.

    왜 이제야 눈치챘는지 의아할 만큼 신녀를 빼닮은 용모. 백서희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신녀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난 흑룡교의 혈손이에요. 내 조모님이 유가의 혈통이라고 하더군요.”

    “검후라면... 점창파의 후예가 아니오? 근데 흑룡교의 혈손이라고?”

    “난 용혈을 타고났고, 쬐끔이긴 하지만 일월성신의 영성도 있어요. 당신들은 느꼈을 텐데요?”

    “그거야....”

    두 성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집중해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희미했지만, 백서희의 기척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 것이다.

    “내 핏줄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이건 말해야겠군요. 이이가 교주가 되어도 유가의 혈통은 끊이지 않아요. 왜냐하면 내 아이가 교주가 될 테니까.”

    배에 손을 올린 백서희가 강엽을 돌아보며 따스한 미소를 나누었다.

    그 모습에서 뭔가를 깨달은 신녀가 탄성했다.

    “아, 축하해야 할 일이 늘었군요!”

    “고맙습니다. 천산에 온 게 효험이 컸나 봐요.”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밥상머리에서 구역질이 치밀어 맥을 짚어보니 태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그토록 갈망했던 아이가 들어섰기에 백서희는 초조했던 마음을 버릴 수 있었다.

    “당신들 입장에서 보면 우린 굴러들어온 돌이죠. 그러니 반발하는 것도 이해하지만, 토성좌의 주장은 틀렸어요. 성씨는 달라도 난 유가의 직계 혈통. 따라서 내 ‘아들’ 역시 유가의 혈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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