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신교 (4)
보자기로 감싼 목함과 함께 전해진 서신.
뚜껑이 열린 목함에선 지독한 피비린내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서신을 읽은 이는 말이 없었다.
회당 안의 모두가 불길한 낌새에 침묵하는 와중에 일부의 눈빛은 목함의 내용물로 향했다.
은실로 수놓인 푸른 탁자보를 보랏빛으로 물들인 선혈.
죽은 지 오래 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잘린 단면에서 피가 뚝뚝 흘러나오는 초로인의 수급이, 눈을 까뒤집은 채 혀를 빼물고 있었다.
초로인을 처음 봤다 해도 그가 누군지 모르는 자는 없었다.
외성 바깥 신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거대한 도월루의 주인.
실상은 이성군이 부린 살문의 수장으로, 그 실력은 신교의 살수 조직인 흑영(黑影)에 버금간다고 알려졌다.
비록 엄청난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오성군을 암살한 이력이 있는 자.
한데 그를 비롯한 도월루가 하루 아침에 멸문하고, 그 목은 이성군에게 보내졌다는 게 무슨 뜻이겠나.
한참 동안 침묵을 견지한 이성군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월구천관에서 보자고 하는군. 보름 뒤... 아니, 하루가 지났으니 열나흘이 남았나?”
“역시 일월구천관을...!”
교주위에 앉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
통과만 하면 지리멸렬한 권력투쟁을 할 필요가 없는데도 두 성군이 도전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실력과 상관없이, 일월신마공을 익히지 않은 자가 그 안에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관문의 시험이 매번 달라졌기에 전임자들의 기록은 큰 도움이 안 되는 마당.
만약 천마가 일월구천관을 통과하면, 이는 그가 일월신마공을 익혔음을 세간에 공표하는 셈이었다.
혈통이라는 정통성을 지녔되 교주 무맥을 익히지 못한 두 성군의 약점을 제대로 찌르는 것.
일월구천관을 통과하면 초대 조사의 환생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유언비어가 정말 진실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혈옥귀군.”
“예, 성군이시여.”
“준비는 잘 됐나?”
“이성군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준비했습니다.”
신교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임에도 일월구천관은 신도 외곽의 협곡에 존재했다.
그 내부까지는 감히 수작질을 부릴 수 없지만, 바깥쪽에선 얼마든지 수작을 부릴 수 있다.
“한데 천마를 완벽히 속이려면 이성군님께서도 일월구천관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뭐라?”
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장내의 사람들이 당혹스러워하는데, 이성군이 돌연 눈을 빛내며 무릎을 탁 쳤다.
“그렇군. 그대의 생각이 뭔지 알겠구나. 확실히 천마를 속이려면 내가 일월구천관에 들어가야겠지!”
“이성군님께서 들어가시면 일성군도 나서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겁니다. 신교의 교도들이 보는 앞에서 겁쟁이라 낙인 찍히고 싶지 않다면요.”
물론 거절할 수도 있으리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둘러댈 수도 있고, 사건을 일으켜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전자는 비루한 변명에 불과하고, 후자는 불가능한 일이다. 외부의 세력을 사주해서 준동시킨다고 해도 천마가 정리해버렸어.’
굳이 따지면 중요 인사를 암살해서 세간의 시선을 돌리고, 일월구천관의 개방을 뒤로 미루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래봤자 시간벌이일 뿐.
도월루를 짓밟은 이유도 성군들로 하여금 그딴 짓을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함일 터.
‘쯧, 계획대로만 되었으면 수월했을 것을.’
성군들을 차례차례 제거하고, 이성군을 지원하여 그가 공적을 쌓을 기회를 제공한다.
굉장히 오래전부터 진행한 계획이 겨우 한 사람 때문에 무너졌다.
‘천마... 검마가 경고한 진조의 후예.’
호교사천인 요선을 죽이고, 광명마교주를 제압하여 혈마의 대적으로 떠오른 운명의 세 별.
장차 혈교의 대계에 지장을 초래할 거대한 변수인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날을 위해 이중삼중으로 계획을 짰으니까요. 여차하면....”
마지막은 전음으로만 살짝 흘렸다.
[호교사천께서 나서실 겁니다.]
이성군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였다.
그렇게 열나흘이 지난 뒤, 운명의 아침이 밝았다.
* * *
구름처럼 우글거리는 인산인해.
관도마냥 뻥 뚫린 신도의 대로를 둘러싼 교도들은 이른 아침부터 나온 이들을 보고 웅성거렸다.
신교의 간부들을 보는 거야 여상한 일이지만, 신녀와 장로들을 비롯한 최고위 인사들이 한꺼번에 나온 것은 무척이나 이례적이었다.
“어째 익숙한 광경이네요.”
사층 다루의 창문 틈새. 비스듬한 각도로 아래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은 여인은 복잡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태화문에 이공녀가 돌아왔을 때. 당시도 전 숨어서 훔쳐보고 있었고, 맞은편엔 신녀가 있었죠.”
“사람은 그대로되 구도는 좀 다르네요.”
맞은편에 앉은 금발의 소녀가 차를 호로록 마셨다.
바다를 닮은 푸른 눈빛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아름다웠지만 그녀를 주시하는 자들은 없었다.
왜냐하면 현재 다루엔 두 여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으니까. 암중에서 두 여인을 호위하는 자들은 있되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야율 소저가 여기 온 건... 강 무사를 돕기 위해서인가요?”
“제가 뭐라고 돕겠어요. 그냥... 시기가 약간 어긋났을 뿐이에요.”
“시기요?”
야율산산이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음... 본궁과 무림맹의 동맹은 아무래도 파탄이 났으니까요. 그동안 본궁은 많은 논의를 했고, 얼마 전에야 가까스로 결론을 냈어요.”
“...일월신교와 동맹을 맺겠다고요?”
“네. 거리가 너무 멀긴 하지만, 뭐 병법에서 이르기를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고 하잖아요? 강 공자는 자신을 돕는다면 빙궁의 중원 진출을 보장하겠다고 했어요.”
“그걸 하오문의 소문주인 제게 말해도 돼요?”
홍가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묻자 야율산산이 작게 냉소하면서 찻잔에 손을 올렸다.
싸늘한 냉기가 찻잔을 감싸면서 뜨거운 김이 식고, 살얼음이 끼었다.
“저와 만난 시점에서 예상하셨을 텐데요. 북해빙궁의 소궁주가 그럼 왜 왔겠어요?”
“혹시 강 무사가 보장한 지역이....”
“산서 무림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하북은 황실의 입김이 센 데다 팔가인 하북팽가가 있어 세력을 뻗기 어려웠다.
대신 산서엔 대방파가 없는 데다, 지난날 암야각의 난동으로 다수의 군소방파들이 쓸려나간 탓에 빙궁의 진출을 방해할 힘이 없었다.
“하오문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일월신교... 아니, 강 공자님과 동맹을 맺으려고 왔잖아요.”
단순히 염탐이나 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소문주인 홍가려가 직접 찾아오는 일도 없었겠지.
그러나 홍가려는 대답하기 전에 바깥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창문을 뚫고 들려왔다.
“천마다! 천마의 일행이 당도했다!”
* * *
-별바다의 인도자로서 신교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돌아오는 춘분에 신도에 입성하겠다.
신도 곳곳에 붙은 방문의 포고.
구구절절한 자기 소개나 주장도 담기지 않은 뜬금없는 내용이었지만 모두가 이해했다.
스스로를 별바다의 인도자로 부르는 것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권.
천마가 마침내 대권에 도전한 것이다.
두 성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천마의 오만함을 성토하는 가운데 신녀와 장로들은 천마를 맞이하러 나왔다.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신녀의 모습에, 교리에 심취한 교도들은 감복하여 무릎을 꿇었다.
그 와중에 장로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애써 근엄하게 자리를 지켰으나, 주변을 둘러보는 눈빛 한편엔 일말의 불안감이 전해졌다.
군중들 사이사이에 바람잡이를 심어두긴 했지만 교도들이 어찌 반응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여론 공작을 펼쳤음에도 외인이 교주위에 도전한다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부류도 있지 않겠는가.
두 성군 역시 바람잡이를 심어뒀을 테니 여론전으로 흐른다면 진흙탕 싸움이 될 공산이 농후하다.
“저기 우리의 인도자께서 오시는군요.”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 속에서 신녀의 한마디가 커다란 반향을 불러왔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에도 나직하게 퍼지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저편으로 향했다.
신도로 들어오는 완만한 대로 너머.
검은 비단에 하얗게 천마(天魔)라 적은 깃발들이 휘날리며 거대한 행렬이 들어왔다.
건장한 장정들이 짊어진 사인교 위에 앉은 수려한 인상의 청년. 늘상 입었던 시커먼 흑포 대신, 눈처럼 새하얀 장삼을 걸친 채 등장한다.
청년의 앞에선 사자머리 청년이 거대한 군마에 탄 채 길을 열고 있었고, 좌우에선 일사도와 완안극, 수성좌와 금성좌 등이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조금 뒤에선 하얀 피풍의를 흩날리는 백서희와 검은 장삼을 걸친 조영옥이 준마에 탄 채 뒤따랐고, 그 뒤엔 사두마차가 따랐다.
얼마 전 아이를 낳은 당묘정과 단목정을 배려한 조치.
그녀들이 탄 마차엔 설산검문의 마지막 후인인 금사하와 팔사도가 호위로 따라붙었다.
“대체 몇 명이나 오는 거지?”
“맙소사, 설마 저들은...?”
마차 뒤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렬.
각각 광명과 흑룡의 표식을 한 자들이 몰려오자 평교도들은 물론 장로들까지 낯빛이 흙색이 됐다.
“이, 이런 말은 없지 않았는가? 광명마교와 흑룡교라니. 교주위에 도전하는 자리에서 이 무슨...!”
“진정하시오. 천마가 두 교단의 잔당들을 거두었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일 아니오?”
“우리만 알 뿐이지! 교도들은 모르지 않소? 신도의 백성들이 저걸 보고 어찌 생각하겠소!?”
그들이 우려한 대로 두 마교의 표식을 알아본 자들이 그 사실을 떠들자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흑룡교야 과거 우호적인 시절이 있었다 하나, 광명마교는 일월신교의 전통적인 숙적.
과거 몇 번이나 충돌한 전적이 있을 만큼 사이가 안 좋은 마교의 후인들이 들어오다니?
장로원이 심어둔 바람잡이들도 어버버하는데, 별안간 신녀의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진정하세요, 여러분. 우리들의 신인께서는 광명마교와 흑룡교를 정복하셨습니다. 저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친구로 왔으니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말은 장로들에게 하나, 목소리는 대로에 모인 불특정 다수에게 향해 있었다.
“우리들의 신인은 천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현신하신 진정한 절대자. 그분의 아래 본교는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 평안과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오오...!”
다른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다면 듣지 않았겠지.
그러나 신녀의 위상과 목소리에 깃든 거룩한 신통력이 교도들에게 한 줄기 신뢰감을 안겨준다.
사인교 위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강엽은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역시 그녀와 손을 잡은 게 정답이었군.’
예로부터 일월신교의 신녀는 교도들의 마음을 지탱한 정신적인 지주. 이전부터 아프고 가난한 교도들을 구휼하고, 고아들을 거두었다고 했던가.
민심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얻은 신녀의 존재감은 어떤 의미에선 장로원이나 두 성군보다도 컸다.
신녀를 중심으로 한 일월신교의 측근들이 대로 한복판에서 일행의 행렬을 맞이한다.
교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녀가 무릎을 꿇고 부복하자 장로들도 당황하여 덩달아 예를 차렸다.
“신교의 삼십칠대 신녀 유소향이 삼가 별바다의 인도자를 배알하옵니다.”
“사, 삼가 별바다의 인도자를 배알하옵니다!”
합창하듯 이구동성으로 똑같이 외치는 장로원의 모습. 그에 바람잡이들이 교주를 맞이해야 한다면서 선동하자 군중들이 엎드려 절하기 시작했다.
당혹감과 긴장감으로 잠긴 신도의 대로.
빼곡한 인파로 둘러싸인 대로를 말없이 둘러본 강엽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余)를 환영해주어 고맙다, 교도들이여. 너희 중엔 나를 아는 자들도 있고, 모르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또한 나를 반기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나를 의심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로는 물론이고 좁은 골목길, 심지어 건물 안쪽까지 두루 울려 퍼지는 전성음.
그 안에 담긴 마력(魔力)이, 사람들로 하여금 가만히 경청하도록 은밀한 영향을 행사했다.
“나를 믿어라. 난 초대 조사의 환생이자 일월성신의 화신. 너희를 오랫동안 고통에 빠트린 내전을 끝내고, 이 땅에 평화와 안정을 되찾아주기 위해 왔다.”
항간에 떠돌던 소문. 혹자는 낭설이라 치부한 말이 강엽의 입에서 나온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흥, 웃기는 소리! 당신이 초대 조사의 환생이라고? 그딴 유언비어를 누가 믿는단 말이오!?”
“감히...!”
군중 사이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모두가 움찔하는데, 완안극과 금성좌가 짐짓 살기를 흘렸다.
그러나 강엽은 동요하지 않고 되물었다.
“넌 누구냐?”
“당신이 진정 신인이라면, 일월성신의 화신이라면 날 납득시켜보시오!”
만인이 지켜보는 와중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텁석부리의 사내.
남루한 행색을 한 데다 한쪽 팔은 어깻죽지부터 잘려나가서 소매가 헐렁거렸지만,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증명하듯 형형한 안광으로 강엽을 압박했다.
교도들 중 일부가 그를 알아보고 비명처럼 외쳤다.
“광마진도(廣魔鎭刀) 북리극!”
“허어, 오성군의 휘하였던 자가 아닌가? 실종됐다고 들었는데 아직 살아있을 줄이야!”
“한데 오성군의 부하가 왜...?”
일성군과 이성군의 부하도 아니고, 어찌하여 오성군의 잔당이 반기를 든단 말인가.
두 성군의 바람잡이들도 이채를 띠는데, 강엽은 담담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하얀 소맷자락 사이로 드러난 태양의 문양.
일부가 그 문양을 알아보고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데, 광마진도라 불린 외팔의 사내는 마치 지남석에 끌리는 쇳조각처럼 어어 하며 끌려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허공에 뜨자 경악한 기색이 다분하다. 내공을 운용하는 듯 발버둥을 쳤지만, 허공섭물의 힘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이익! 크으읍...!”
시뻘게진 얼굴로 팔다리를 휘젓는 몰골.
긴장감에 휩쓸린 교도들은 술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지켜보는데, 강엽이 비어버린 외팔을 보며 물었다.
“팔은 어쩌다 잘렸는가?”
“그건 왜 묻는 게요!?”
“말하라.”
“...주군을 지키다 잘렸소!”
이성군의 암계로 죽은 오성군의 충신. 주군의 죽음을 막지 못한 충신이 분루를 흘리며 외쳤다.
강엽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 충심을 높이 사서 네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게 해주마.”
그리고 잘려나간 어깨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