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신교 (3)
신도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일월신교의 위기를 보다못한 초대 조사가 속세로 환생하여 신교로 돌아온다는 소문.
처음엔 모두가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거짓말도 여러 사람이 하면 혹하게 되는 법.
또한 그가 맥이 끊긴 일월신마공을 익히고 있으며, 오랜 숙적인 광명마교를 끝장냈고 무림맹주를 참살했다는 소식에 관심이 없던 자들도 귀를 기울였다.
비상식적인 속도로 소문이 퍼지자 두 성군도 세간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소문의 출처는 장로원과 신녀각입니다. 그들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민심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어찌 그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린단 말인가?”
“...마냥 유언비어는 아닙니다. 그 천마라는 자가 일월신마공을 익힌 건 사실이니까요.”
“하면 그가 정말 초대 조사의 환생이라고? 자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건...!”
보고를 한 자도 말을 잇지 못했다.
우연히 기연을 얻었다고 해도 의심할 판에, 뜬금없이 환생이라고 주장하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차라리 장로원과 신녀각이 암암리에 일월신마공을 구해 전인을 길렀다고 보는 편이 맞지 않소?”
“허어! 그들이 두 성군을 두고 후계자를 왜 기르겠나? 게다가 일월신마공은 어디서 나고?”
“만약 신녀각이 비밀리에 비급을 보관했다면....”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일! 유씨의 혈통도 아닌 자에게 일월신마공을 주다니?”
하도 상리를 벗어난 소문이다 보니 성군의 휘하에 모인 인재들도 진실을 추론하지 못했다.
수하들의 말다툼을 가만히 지켜보던 헌앙한 사내가 탁자를 툭툭 치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혈통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대책이지.”
일성군 유군명. 강호에선 화산의 검성과 부딪치면서 북천마검(北天魔劍)이라는 별호를 얻은 인물이었다.
근자에 신교를 떠들썩하게 뒤흔든 소문 때문에 그 역시 안색이 좋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대놓고 동요하거나 분노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일월신마공을 익힌 심상지경의 초고수. 광명마교주와 무림맹주를 제압했다면 그 힘은 증명한 셈이지.”
“하오나 그는 유가의 혈통이 아닙니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혈통은 문제가 아니다. 소문이 문제지. 교도들이 소문을 사실로 믿는다면 혈통 같은 건 사소한 문제다.”
“.......”
“본교는 오랫동안 내란을 겪었지. 신도가 뒤집힌 게 몇 번이나 되는지 아나?”
교주위가 몇 번이나 바뀌고, 백주대낮에 암살극이 버젓이 벌어지고, 신교의 무인들끼리 충돌했다.
지금이야 두 성군이 대치하고 있지만, 그전엔 무려 일곱 명의 성군이 난립했던 바.
“교도들은 지쳤다. 누군가 이 환란을 끝내주길 바라고 있지. 한데 백마 탄 초인이 나타난 거다.”
그 자신은 신녀의 지지를 받으며, 중원에서 광명마교주와 무림맹주를 끝장낸 영웅이기도 하다.
심지어 공포로 군림했던 염왕도문의 전인을 포함한 다수의 고수들을 거느리기까지.
“심지어 지금도 활발히 움직이고 있지. 화성좌가 그들과 마주쳤다고 했던가?”
그 말에 모두의 이목이 한쪽으로 쏠렸다.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모인 장내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붉은 무복의 절세가인.
그녀가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열흘 전의 일이었습니다.”
일부러 만난 건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비단길을 어지럽히는 악명 높은 마적단의 소식을 듣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다.
비단길은 일월신교의 주 수입원 중 하나인 만큼 마적단이 날뛰면 매우 곤란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도착했을 땐 마적단이 토벌된 뒤였다는 것이다.
“수백의 마적들이 절명했습니다. 한 사람의 소행이었지요.”
“으음...!”
“설마 천마가 손을 쓴 것이오?”
화성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는 앳된 소년이었지요.”
스스로 천마의 오른팔이라 주장하는 자였다.
남만 독곡의 주인으로서, 신교에도 그 이름이 알려진 만독자 완안극.
그가 수백 명의 마적들을 중독시키고, 마적단의 단주를 격살했다는 말에 좌중이 침음했다.
“만독자... 그 같은 자가 천마의 휘하에 있다니.”
“그가 화성좌를 공격하진 않았소?”
“아뇨. 그는 적대적이진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의 세력을 떠벌리듯 자랑했는데, 천마의 휘하엔 염왕의 제자뿐만 아니라 검후와 태화문주까지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빙궁과도 긴밀한 관계라고 하더군요.”
굳이 그 말을 한 건 당시에 마적단에 위협을 받은 상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도로 가는 상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완안극은 천마가 중원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떠들었다.
거기까지 말한 화성좌가 잠시 목을 축이기 위해 차를 들이켰을 때, 일성군이 쓴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수성좌와 금성좌, 장로원과 신녀각. 게다가 팔존급 고수를 최소 네 명이나 거느렸지.”
“예. 염왕의 제자가 천마의 휘하에 있으니, 어쩌면 염왕 또한 천마와 가까울 겁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암담하다. 이만하면 신교 전체와 붙어도 밀리지 않을 전력이 아닌가?
“시간을 줄수록 저쪽이 유리해진다. 신녀와 장로원이 가담했다면 곧 여론마저 넘어갈 터. 그전에 어떻게든 담판을 지어야 한다.”
무력에서 밀리고, 암살도 불가능하다. 정통성을 문제 삼기엔 일월신마공의 존재가 걸린다.
그런 와중에 평판마저 넘어가면, 교도들은 정말 천마를 초대 조사의 환생으로 여길지도 몰랐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때론 단순한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좌중을 둘러본 일성군이 말했다.
“천마에게 사람을 보내겠다. 일성군 유군명이 신교의 앞날을 허심탄회하게 논하고 싶다고 말이다.”
* * *
벽 장로와 신녀가 돌아가고 두 달 뒤.
얼어붙은 눈이 조금씩 녹으면서 춘록이 올라올 계절에 현가장엔 또 하나의 생명이 태어났다.
강엽은 식은땀에 절은 당묘정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고생했소, 정매.”
출산이 다가오면서 아이가 심하게 몸부림을 쳤기에 고통스러워했던 당묘정이었다.
심상지경의 무공도,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술법도 그때만큼은 아무 쓸모도 없었다.
무공이야 그렇다 쳐도, 활명술을 포함한 술법이 일절 안 통하는 것은 강엽도 처음 겪는 일.
하나 갓 태어난 딸아이를 보는 순간 납득했다.
푸른빛을 품은 양쪽의 눈동자.
강엽의 피를 물려받은 갓난아이는, 술법을 분석하고 파훼하는 정안의 능력을 타고난 것이다.
‘그 외는 처음부터 없는 것 같은데....’
상단전의 영성이 속삭였다. 반혈반인(半血半人)으로 태어난 아이는 긴 수명을 타고났다고.
불사는 아니되, 오랫동안 불로를 누릴 것이며, 평범하게 천수를 누린 사람이 단명종으로 보일 정도로 긴 수명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다.
‘햇볕 아래에서도 살아갈 수 있고, 무조건 피를 마셔야 연명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다행이었다. 만약 흡혈귀의 천형까지 물려받았다면 아이의 앞날이 마냥 밝지는 않았을 테니까.
“엽랑, 아이의 이름은....”
“당문주... 아니, 장인어른께서 말씀하셨소.”
일행이 천산 어귀에 도착하면서 사로잡혔던 문주들은 풀려나서 각자의 사문으로 돌아갔다.
당천경 역시 마찬가지. 그는 딸의 곁에 더 남고 싶어했지만, 무림의 동향이 심각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서둘러 떠날 수밖에 없게 됐다.
“딸이 태어나면 ‘세령(洗鈴)’이라 지으라고 하셨지.”
강엽이 무림맹을 등지고 일월신교로 가면서, 자연히 당묘정 역시 당문의 호적에서 지워졌다. 손녀의 이름을 지어준 게 딸을 위한 마지막 선물인 셈.
눈시울이 붉어진 당묘정이 딸을 안았다.
“령아야....”
“약속하겠소. 당신도, 우리 아이의 이름도 언젠가 당문의 호적에 다시 올리겠다고 말이오.”
강엽은 어떻게 올리겠다고까진 말하지 않았다. 구태여 지금 말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우애애앵!”
“엇, 령아가 배고픈가 봐요.”
그렇게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젖을 먹이는 당묘정을 설핏 웃으며 바라볼 때였다.
[주인님, 일성군의 사절이 찾아왔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화성좌입니다.]
귓가에 꽂히는 완안극의 전음에 강엽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 *
“화성좌 동방하연입니다. 동방가의 소가주로, 강호에선 적봉황(赤鳳凰)이란 이명으로 불립니다.”
담백하다 못해 무미건조한 소개.
강엽은 가만히 있는데, 주변을 둘러싼 측근들이 역정을 냈다.
“무엄하군, 화성좌!”
“저 싸가지는 하여간 고개가 참 빳빳하단 말이야. 이것아, 네 앞에 계신 분이 누군지 몰라!?”
수성좌는 물론, 얼마 전에 다시 합류한 금성좌도 살기를 숨기지 않는다.
하후진과 완안극 역시 은근히 기파를 일으키며 압박하자 일성군의 사절들은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화성좌는 담담히 그들의 기세를 흘렸다.
“알고 있습니다. 중원에서 오신 분이지요.”
“이 계집이 보자보자하니까-!”
“그만.”
강엽의 한마디에 사위를 옥죄였던 살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순식간에 변한 분위기에 화성좌가 이채를 띠는 가운데 강엽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몇 가지 물어보지. 화성좌 동방하연, 넌 누구에게 충성하지? 일성군에게 충성하나, 교주에게 충성하나?”
“당신은 교주가 아닙니다. 신교의 교주위는 현재 공석이지요. 적어도 아직까진 말입니다.”
“그 말은 내가 교주가 되면 충성을 바칠 의향이 있다는 건가?”
“...반대로 여쭤보고 싶군요. 만약 당신이 교주가 되지 못한다면 저들은 누구에게 충성합니까?”
“수성좌와 금성좌는 새로이 권좌에 앉은 자에게 충성하겠지. 그 외는 모두 내 사람들이다.”
“저도 그렇습니다.”
“음?”
“저는 공적으로는 신교의 화성좌이자 동방가의 소가주이지만, 사적으로는 일성군님의 정혼녀입니다. 설령 당신이 교주가 된다 해도 전 충성하지 않습니다.”
“...신인이시여, 명을 내려주신다면 제가 저 건방진 년의 골통을 깨버리겠습니다!”
허락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
자칫 칠성좌끼리 생사결을 벌일 수 있는 분위기에도 화성좌는 동요하지 않았다.
“저는 일성군님의 사절로 온 몸. 저를 죽이면 천마의 명예에 누를 끼치겠지요.”
만약 소문이 나면 강엽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테니 여태까지 평판을 관리한 게 소용없어지지 않겠는가.
“죽일 테면 죽여보십시오. 제 목숨으로 일성군님께 명분을 만들어드릴 수 있다면 나쁘지 않겠지요.”
“크악, 이게...!”
금성좌가 발작하든 말든 화성좌는 개의치 않고 강엽만 지긋이 응시할 따름.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장난은 이쯤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일성군의 전언이 뭐냐?”
“다가오는 춘분(春分)에 성월각에서 만나기를 청한다 하셨습니다.”
“성월각?”
수성좌가 얼른 대답했다.
“신도에서 가장 커다란 주루입니다. 천하의 명주가 두루 모이기에 고위직들이 많이 찾는 곳입니다.”
“그렇군. 춘분이라....”
“이성군도 부른다고 하셨으니, 세 분이 이참에 허심탄회하게....”
“아니.”
강엽이 고개를 저었다.
“만나봤자 기싸움이나 하겠지. 서로 탐색전이나 할 거면 굳이 만날 필요는 없다. 일성군에게 전해라. 난 춘분에 일월구천관에 도전할 테니, 할 말이 있거든 그쪽으로 직접 찾아오라고 말이다.”
“...!”
“수성좌.”
“예, 신인이시여.”
“이성군에게 사절을 보내라. 도월루주의 목과 함께.”
“삼가 명을 받드옵니다.”
수성좌가 순순히 공수의 예를 취하는 반면, 화성좌를 비롯한 사절단의 안색은 크게 변했다.
성월각에 비하진 못하나 도월루 역시 신도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명성 높은 주루.
한데 그런 도월루주의 목을 자르다니?
“몰랐나 보군. 도월루는 이성군이 개인적으로 부리는 살수 조직일세. 정확히는 그들의 본거지가 도월루에 있고, 도월루의 루주는 살수 조직의 수장이지.”
“...그게 사실입니까?”
오랫동안 이성군과 대립했던 일성군의 세력도 몰랐거늘 어떻게 강엽 일행이 알았단 말인가.
아무리 두 칠성좌의 충성을 받는다고 해도, 장로원과 신녀각의 지지를 받는다고 해도 그들이 구축한 신교의 정보망엔 한계가 있을 터.
강엽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대놓고 수상한 짓을 해서 모를 수가 없었지.”
현가장의 하인들 중에 정체를 숨긴 간자가 있어 마안의 능력으로 놈의 머릿속을 헤집은 것.
역추적을 거듭한 결과 간자가 도월루의 사주를 받았고, 강엽의 아이가 태어나면 납치하기 위해 현가장에 잠입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지금은 백서희가 도월루주의 목을 따기 위해 신도로 떠난 상황.
“보름 뒤에 누가 교주가 될지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