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신교 (2)
쩌어어어엉...!
장원을 흔드는 한 줄기 장소성.
삼화취정의 고수들끼리 부딪치는 기척에 수성좌는 묘한 표정으로 장내를 돌아보았다.
강엽은 여상한 태도로 현가장주가 대접한 특산차를 음미하고 있는 가운데, 한쪽에선 여인들이 이제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우와, 얘 진짜 강심장이다. 저리 난장을 피우는데 울지도 않는 것 봐.”
“그러게. 아빠 닮았나 보다. 어머, 하품까지 하네?”
백서희가 아기의 볼을 꾹 누르면서 신기해하고, 조영옥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묘정은 몇 달 전에 비해 확연히 커진 배를 만지며 갸름한 턱을 갸우뚱 기울였다.
“린아는 원래 잘 안 우나요?”
하후진과 단목정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
염왕이 린(藺)이라 이름 지어준 딸을 안은 단목정이 부드럽게 웃었다.
“안 울기는요. 배고프면 새벽에도 시끄럽게 울어서 저랑 그이가 얼마나 놀라는지 몰라요. 시비들이 도와주는데도 쉽지 않더라고요.”
처음엔 애가 둔해서 혹시 감각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렇진 않았다고.
그러한 단목정의 말에 조영옥이 감탄했다.
“그럼 정말 애가 대범한 거네요. 이제 보니 타고난 여장부인걸?”
“저보단 그이를 더 닮은 것 같아요.”
“에이, 생긴 건 영락없이 단목 동생을 쏙 빼닮았는걸. 그렇죠, 조 언니?”
“응? 눈매는 하후 무사를 더 닮지 않았나?”
그렇게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은 대화에 수성좌가 떫은 표정을 지을 때, 강엽이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하후진이 걱정되나?”
그 말에 여인들도 수다를 멈추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수성좌가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하후 무사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묵갑철마대주는 삼화취정을 이룬 초고수입니다. 칠성좌의 자리에 공석이 생기면 그 자리를 대체해도 될 만한 인물이지요.”
하후진이 염왕의 무맥을 이었다 하나, 고수들의 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만큼 필승을 장담하진 못할 터.
“혹시 소신이 잘못 판단한 건지....”
“아니, 제대로 봤다.”
일대일 대결인 만큼 하후진이 위기에 처해도 완안극은 나서지 않는다.
이 싸움은 철저히 하후진의 몫이었다.
“묵갑철마대주 모왕(矛王) 비극신. 과거 곤륜파의 장문인과 일천 합을 겨룬 초절정의 고수지. 신교에선 수성좌 그대와 더불어 신교쌍창(神敎雙槍)이라 불린다지? 실제로 오 년 전엔 화성좌에 오를 뻔했고.”
“그렇습니다. 다만 그가 거절했지요. 야전이 좋다면서 묵갑철마대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은 기마대를 이끌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면서 칠성좌의 자리를 고사한 걸물. 금성좌와 더불어 장로원을 수호하는 대표적인 고수였다.
“묵갑철마대주는 과거 염왕에게 부하들을 잃었습니다. 원한이 있으니 살초를 쓰기를 주저치 않을 겁니다.”
마침 이쪽에서 판을 깔아줬겠다, 명분도 있으니 옳다구나 하고 전력을 다하지 않겠는가.
강엽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후진을 내보낸 거다. 그런 상대를 쓰러트려야 권위가 똑바로 설 테니까.”
비록 묵갑철마대주가 구파의 장문인에 버금가는 고수라지만, 하후진 역시 최근에 깨달음을 얻은 바.
강엽은 수성좌의 노안을 보며 태연히 말했다.
“그대가 무얼 염려하는지 안다. 하후진이 묵갑철마대주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거겠지. 하지만 내 장담하는데 하후진이 오십 초 안에 이길 거다.”
* * *
폭풍이 몰아치고 열기가 들끓는다.
얼음이 녹은 연못이 온천처럼 허연 수증기를 내는 가운데 두 사람의 인영이 종횡무진 질주했다.
기둥짝만한 대도를 휘두르는 사자머리 청년과 철갑으로 무장한 반백의 중년인.
중년인이 내찌르는 장팔사모가 허공을 뚫고, 당기듯 휘돌면서 수면을 낮게 휩쓸었다.
물 흐르듯 막힘없이 이어지는 창식. 일격은 바위처럼 묵직한데도 완급을 조절하는 솜씨가 기가 막혔다.
“고작 그따위 실력으로 염왕의 후계자를 자처하는가? 염왕은 너 따위보다 몇 배는 강했다!”
대등했던 승부의 추가 서서히 기울어간다.
처음엔 심각한 낯빛으로 비무를 관전했던 벽 장로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피어났다.
“염왕에게 부하들을 잃은 이후 비극신은 염왕도문의 무공을 철저히 분석했지. 언젠가 염왕을 다시 만난다면 설욕하기 위해서 말일세.”
지붕 처마에 걸터앉은 완안극이 그 말에 벽 장로를 힐끗 내려다보다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파훼식을 찾았나?”
“글쎄, 노부야 모르지. 하나 눈으로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그대의 안력이라면 공방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알아볼 텐데. 비극신이 칠 대 삼으로 공격을 점하고 있고, 염왕의 제자는 수세에 몰렸지.”
때론 한 방의 역습으로 승부를 뒤집기도 하지만, 묵갑철마대주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하후진이 도초를 펼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철저히 공간을 제한하며 창격을 날린 것.
제대로 도초를 펼치기도 전에 장팔사모가 요혈을 찌르고 들어오니 수세에 몰릴 수밖에.
반격은커녕 회피와 방어에 급급한 모양새.
어지럽게 흩날리는 물방울 사이로 불티와 혈화가 튀며 시야를 더욱 어지럽힌다.
하후진은 수상비(水上飛)의 보신경을 펼치면서 뒤로 물러났지만, 묵갑철마대주는 철갑을 두른 몸으로 그보다 더욱 빨리 움직이며 묵직한 압박을 가했다.
도격을 튕겨내며 타점을 흐트러뜨리고, 한순간 드러난 허점을 귀신같이 찌른다.
“큭, 빌어먹을...!”
요혈을 노리는 살초를 가까스로 막아낸 하후진이 뒤로 더욱 물러나며 수면을 박차고 뛰었다.
상대의 배후를 점하기 위함이었지만, 묵갑철마대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창대를 밖으로 밀어내면서 채찍같은 창격을 날려왔다.
“나이를 감안하면 놀라운 성취지만, 그 정도로는 내게 닿지 못한다.”
묵갑철마대주는 하후진을 무시하지 않았다.
모왕이라 칭송받는 그도 하후진의 나이에 저만한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던 것이다.
“물러서라. 넌 내 상대가 못 된다. 항복하면 내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주지.”
만약 그가 염왕도문의 무공을 견식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몇 년에 걸쳐 파훼법을 연구하지 않았다면 하후진이 이토록 밀리진 않았으리라.
그러나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사부에게 원한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피 섞인 가래침을 퉤 뱉은 하후진이 입가를 닦으면서 자세를 잡자 묵갑철마대주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렇지. 좀 전만 해도 네놈을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하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까진 없더군.”
“...뭐?”
“어차피 이젠 한 식구니까. 염왕도문이 신교의 그늘에 들어오지 않았나. 대신 우리 철왕무종(鐵王武宗)이 염왕도문을 이겼음을 신교에 공표할 생각이다.”
오랫동안 공포로 군림했던 염왕의 무맥이 굴욕을 당한다면 저승에 있는 부하들도 만족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머리가 식으니 앞날이 걱정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네놈을 죽였다가 천마의 분노를 사기는 싫더군. 내가 죽는 건 그렇다 쳐도, 모시는 분과 부하들이 몰살당하는 건 원치 않거든.”
“지랄.”
입매를 비튼 하후진이 기수식을 취했다.
“그딴 말은 날 꺾고 말하쇼.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수다. 나도 아직 다 보여주지 않았고.”
“아직도 보여줄 게 남았느냐?”
“물론이지.”
하후진의 전신에서 창염이 솟구치며 머리까지 빈틈없이 감싸자 묵갑철마대주의 안색이 낮게 가라앉았다.
“창룡갑이라... 잊고 있었군.”
과거 염왕이 그와 묵갑철마대를 궤멸시킬 때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창룡갑의 존재는 기록을 통해 연구했을지언정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공방일체의 호신강기라고 했던가? 건방진 애송이로군. 날 상대하면서 감히 힘을 숨기고 있었다니.”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그와 같은 무인이 심극을 이루지 못했을 리 만무.
하나 묵갑철마대주는 철저히 창술만 고집하며 하후진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오냐, 원한다면 보여주마.”
고집스러운 입매를 악다문 묵갑철마대주의 전신에서 막강한 공력의 파동이 쏟아졌다.
중단전의 심상이 상단전의 백회혈을 통해 뿜어져나오면서 사위를 짓누른다.
-기마권토진(騎馬捲土進).
구우우우우웅...!
수천의 기마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진격하는 심상.
마치 끝없이 몰려오는 기마대를 상대하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 하후진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러나 물러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좋아. 해보는 거야.’
천하제일은 못 되어도, 염왕도문의 전인으로서 사문의 명예를 건 승부에서 패할 수는 없었다.
강엽을 따라다니면서 수없이 깨진 경험이, 그를 새로운 경지로 인도하지 않았던가.
잔잔한 심호흡과 함께 뿜어낸 공력이, 묵갑철마대주의 심상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태염무진겁(颱炎無盡劫).
염왕도문의 무공을 파고들어 이루어낸 심극.
염왕의 심상절예와는 그 방향도, 형태도 다른 그만의 구명절초였다.
끝없이 타오르는 창염을 자신만의 투로로 엮어, 필살의 의념을 담아 휘두른다.
염왕도문의 무공을 연구했다는 묵갑철마대주도 난생 처음 견식하는 생소한 투로.
창룡갑과 함께 쇄도한 구명절초는 미처 파공성이 울리기도 전에 기마권토진의 심극과 부딪쳤고.
콰아아아아아앙......!
연못이 증발할 만큼 강한 열기를 일으키며 무맥의 자존심을 산산조각 박살내버렸다.
* * *
“비극신이 이리 허무하게....”
이제까지의 우위가 무색해진 허망한 패배.
물이 모조리 증발하여 바닥을 훤히 드러낸 연못 바닥에 죽은 개구리마냥 누운 묵갑철마대주의 모습에, 벽 장로의 면상은 썩어문드러졌다.
아무리 염왕의 제자라 하나 칠성좌와 맞먹는 절세고수를 꺾을 줄이야?
“일 각이 좀 넘었군요.”
문득 귓가에 꽂히는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차분한 신색으로 말하는 신녀가 보였다.
“승부가 애매하게 끝났는데 어쩌실 건가요?”
완안극은 묵갑철마대주가 일 각 안에 하후진을 이긴다면 해독제를 주겠다고 했다.
승부는 하후진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일 각이 넘겼으니 해독제를 청할 명분이 사라진 셈.
정신을 퍼뜩 차린 벽 장로가 주변을 둘러보자 묵갑철매원들은 쓰러진 채 미동도 없었다.
“...이들은 신교의 무인들일세. 설마 이들을 죽여버릴 심산인가?”
“뭐,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어깨를 으쓱인 완안극이 손뼉을 탁 치면서 말했다.
“일어나라.”
“커억!”
일제히 기침하며 헛숨을 토하는 묵갑철마대원들의 모습에 벽 장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무장은 못 갖고 들어간다.”
“알고 있네.”
정신을 차렸어도 몸 상태가 멀쩡하진 않으니 같이 들어가봤자 도움이 안 되겠지.
묵갑철마대주도 정신을 잃었으니 그와 신녀만 들어가야 하리라.
“으, 죽겠네. 이젠 때려죽여도 못 싸워.”
심극을 펼치느라 모든 공력을 소모한 하후진이 어깨 관절을 풀면서 터벅터벅 걸어왔다.
완안극이 입가를 이죽이며 비웃었다.
“약골 녀석 같으니. 그 정도 가지고 주군의 호위장을 하겠다고?”
“아니, 저 양반 장난 아니라니까? 댁이 상대해도 쉽진 않을 거요!”
“나였으면 십 초 안에 끝냈다.”
“잘나셨수다.”
입가를 삐죽인 하후진의 모습에 피식 웃은 완안극이 종이로 감싼 단환을 던졌다.
“먹고 운기요상이나 해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무리하게 심극을 짜냈으니 내상이 도졌을 터.
하후진도 거절하지 않고 요상약을 챙겼다.
“자, 그럼 들어갑시다, 장로 나리.”
“....”
신녀가 말없이 먼저 들어가고, 벽 장로가 참담한 낯빛으로 그 뒤를 따랐다.
강엽 일행이 모인 영접실의 전경.
태사의에 앉은 강엽을 필두로, 일행이 문무백관처럼 좌우로 도열한 채 두 사람을 맞이했다.
강엽 말고 의자에 앉은 것은 배필인 세 여인들과 아기를 안고 있는 단목정뿐.
다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남편이 들어오자 단목정이 벌떡 일어났지만, 하후진은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면서 손을 작게 내저었다.
“오랜만이군, 신녀.”
“일월신교의 삼십칠대 신녀 유소향이 삼가 별바다의 인도자를 뵙습니다.”
일월신교의 교주를 우러르는 별칭.
과거 하늘의 섭리를 엿보면서 교도들을 천산으로 인도한 초대 조사를 기리는 경칭이기도 했다.
강엽을 그런 경칭으로 부른 것은 이미 그를 교주로 여긴다는 뜻이나 마찬가지.
그러나 함께 온 벽 장로는 그런 신녀의 태도에 감히 반발하지 못했다.
“장로원의 벽해상.”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처럼 어둡게 가라앉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식은땀이 비오듯 흐르기 시작한 것.
“내가 교주가 되는 걸 반대하나?”
“아, 아닙니다. 소신이 어찌 감히....”
“장로원이 두 성군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걸 알고 있다. 누가 권좌에 오르든 장로원의 지위를 보장받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함이겠지.”
설마 강엽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지적할 줄은 몰랐는지 벽해상은 눈썹을 까딱였지만, 지긋이 바라보는 강엽의 시선에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 그건....”
“긴말하지 않겠다.”
속을 파헤치는 듯한 무심한 눈길. 다리를 모로 꼬은 채 깍지를 낀 강엽이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신교로 돌아가서 나를 맞이할 준비를 해라. 너희들의 처우는 그 이후에 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