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409화 (409/450)

81화. 탈맹 (5)

불권의 번뇌와 미망이 담긴 심마.

피도 없는 의념의 덩어리에 불과한 것을 혈목이 탐내자 강엽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그도 잠깐에 불과했다.

‘생각해보면... 전례가 없는 건 아니었지.’

일찍이 정마안이 환신의 심상을 삼켜 심상절예처럼 강해지지 않았던가.

혈목도 강엽과 함께 성장하긴 했지만, 한계에 다다른 만큼 다른 돌파구가 필요하긴 했던 차.

강엽 자신은 불권의 심마를 흡수해도 별 쓸모가 없지만, 혈목이 흡수한다면 도움이 될 테지.

콰직!

-키아아악!

빨판처럼 심마에게 달라붙은 혈목이 그 안에 담긴 기운을 빨아들이자 심마가 온몸을 비틀었다.

놈의 힘이 온전했다면 진작 뿌리쳤겠지만, 존재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운 판국.

이대로라면 굳이 강엽이 나설 것도 없이 혈목이 알아서 심마를 먹어치울 수 있을 터.

“그윽... 아, 안....”

“끈질기군.”

모든 걸 잃은 적미성에게 남은 것은 불권의 심마밖에 없다.

죽을 때 죽더라도 불권의 심마를 끌어안고 죽겠다는 건지 애벌레처럼 몸부림을 쳤지만, 이런 꼬락서니로는 머지않아 숨이 끊기고 말겠지.

활명술로 약간의 기운을 전달하자 적미성의 안색이 눈에 띄게 호전되기 시작한다.

“너, 너...?”

“착각하지 마라. 널 살릴 생각은 없으니까.”

돌이켜보면 적미성을 죽일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다.

세간의 평판을 신경 쓰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겠지.

단지 자신의 미래와 주변인들의 안위를 고려하여 세간의 평판을 신경 썼을 뿐.

“네겐 고맙다고 해야겠군. 네가 길을 끊어준 덕분에 선택지가 하나 줄었거든.”

적미성은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으나, 강엽은 굳이 부연하진 않았다.

그저 애처롭게 반항하는 심마를 인정사정없이 물어뜯는 혈목을 물끄러미 관찰할 따름.

그 광경을 본 적미성이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지만, 끝내 심마는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못했다.

심마를 먹어치운 혈목은 하늘을 향해 만족스럽게 포효한 다음 땅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심상을 흡수한 걸로 끝나지 않는군.’

용맥에서 기운을 퍼올리는 심마의 능력 역시 흡수되면서 이제 공력이 필요치 않아졌다.

끌어올릴 수 있는 힘은 한정되었으나, 용맥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혈목은 무한히 싸울 수 있다.

“내 힘이...!”

“이제 끝날 때가 됐지.”

강엽이 시선을 들어올린 방향.

불타는 낙조를 등진 채 내려오는 네 사람의 모습에 적미성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전강!”

“대사형....”

청수와 함께 장경을 부축한 전강이 강엽의 발치에 쓰러진 적미성을 발견하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고초를 치른 장경은 강엽이 다가오자 억지로 웃는 티를 냈다.

“여어, 왔냐.”

“와야지. 나 때문에 납치됐는데.”

무겁게 대답한 강엽은 장경이 생각보단 무탈함을 확인하고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맞았는지 눈가와 뺨이 퉁퉁 붓고 입술엔 피딱지가 졌으나 다행히 고문당한 흔적은 없었다.

활명술의 기운을 불어넣자 장경의 피부가 하얗게 빛나며 붓기가 가라앉고 멍자국이 빠진다.

“흐흐, 좀 낫구먼. 고맙다, 짜샤.”

“납치범들은?”

“몇 놈은 죽이고, 몇 놈은 생포했지.”

하후진이 관절을 풀며 툴툴거렸다.

“어지간하면 생포하려고 했는데, 끝까지 반항하는 놈들이 있더라고. 그 새끼들은 그냥 죽였어.”

“일이 틀어진 걸 알고 장 분타주를 죽이려 했습니다. 특히 초륜이라는 사람이 독하게 굴더군요.”

청수가 보탠 말에 강엽은 우울한 기색을 띠는 전강을 돌아보았다.

전강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사형제들은 변했소. 과거에 우린 용감하게 싸웠지만, 적어도 더러운 짓을 일삼진 않았는데.”

비록 음지에서 활동하여 명성을 구가하진 못한다고 해도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부심으로 뭉쳤던 이들.

그랬던 사형제들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낙심한 걸까.

그때였다.

“큭큭큭....”

쓰러진 가운데서도 비웃음을 흘린 적미성의 모습에 일행의 표정이 슬며시 굳어졌다.

“이 새끼 왜 이래? 돌았냐?”

하후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손가락을 머리 옆에서 빙빙 돌리는데 청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정신이라면 맹주위에 취임하자마자 그런 짓을 벌였을 리가 없죠.”

“맹주에게 못하는 말이 없군, 무당 제자.”

선천지기를 조금 나눠받은 영향인지 적미성은 한결 차분한 신색으로 비아냥거렸다.

“난 맹방들의 지지를 얻어 정당하게 맹주위에 올랐다. 예의를 좀 갖추는 게 어떤가?”

“세상 어떤 맹주가 백주대낮에 무고한 사람을 납치한답니까? 그리고 당신은 아직 맹주가 아닙니다.”

“뭐라고?”

“잊었습니까, 아니면 모르는 겁니까? 취임식을 했어도 맹규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오늘까진 멸도 팽무강 노선배님이 무림맹주이십니다.”

전임 맹주가 요양을 핑계로 일찍 떠나서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을 뿐.

엄밀히 말하면 적미성의 공식적인 맹주 임기는 오늘밤 자시(子時)부터였다.

“그래, 네 말대로군. 난 아직 맹주가 아니지. 하지만 그것 말고는 틀렸다.”

“변명하는 겁니까?”

“아니, 현실을 말해주는 거다. 전강, 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더러운 짓을 일삼지 않았다고?”

전강은 느닷없이 날아온 화살에 경직된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사형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틀렸다! 사마외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더러운 일을 일삼지. 놈들을 토벌하기 위해 우린 보이지 않은 곳에서 오욕을 뒤집어썼다. 당시 어렸던 너나 초륜에게 더러운 현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아서 숨겼을 뿐!”

“...그걸 자랑이라고 떠드는 거요?”

“세상 사람들이 우릴 비난하고 욕해도 넌 그래선 안 된다! 우리가 그러지 않았다면 네가 살아있었겠나? 천만에! 진작에 이름 없는 야산에서 객사했을 거다!”

“그게 장 분타주를 납치할 이유는 안 되오.”

“닥쳐라! 네가 협력했다면...!”

“그래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겠지.”

듣는 이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하는 단호한 음색.

타오르듯 기광을 내뿜는 적미성의 눈길을 별반 동요 없이 받아넘긴 전강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또한 다른 사형들이 당신처럼 양심을 저버렸다고 하진 마시오. 외소림이 왜 해산되었는지 잊었소?”

“그건...!”

“적어도 사형들 중에 몇 분은, 아니 적잖은 분들이 대사형의 오만과 독선에 실망했소.”

설령 자신의 손을 더럽히더라도, 무고한 이의 피까지 손에 묻혀선 안 된다.

무고한 가문을 짓밟았다는 충격에 좌절한 외소림의 아라한들은 반발하지 않았던가.

이미 세상에 없는 야차마곤 같은 사형제들이 어찌 행동했는지 전강은 똑똑이 기억하고 있었다.

“대사형이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다고는 생각지 않소. 그러나 대사형은 불제자의 본분을 잊고 스스로를 합리화했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압제자들의 논리. 우리가 희생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지 타인의 목숨이 아니오.”

-설사 이 몸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한 몸 불사르리라.

아라한들이 산문을 나서기 전에 맹세를 한 말을 담담히 읊조리자 적미성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대사형, 당신은 사과부터 해야 했소. 당신으로 인해 두 번이나 죽을 뻔한 사람에게.”

전강이 한 걸음 물러나며 눈길을 준 사람.

얼굴 가득 복잡한 심경이 떠오른 장경을 흘긋 본 적미성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두 번이나 죽을 뻔해?”

“정말 타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구려. 이 우제가 왜 장 분타주를 지켰는지 모르는 거요?”

그럼에도 어리둥절한 기색을 띠는 적미성의 모습에 나지막이 탄식할 때, 장경이 한 걸음 나섰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앞에 뒀으면서도 증오를 내비치기보다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다.

“석면장가를 기억하쇼?”

“석면...?”

고개를 삐뚜름히 기울이던 적미성은 무언가 깨달은 듯 경악했다.

“너, 설마!”

“그래, 내가 장가장의 생존자였수다. 돌아가신 장주님께서 내 아버지였지.”

“장가장의 식솔들은 다 죽었을 텐데....”

외소림의 죄를 상징하는 오점.

만약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적미성 자신의 도덕성에 흠결이 날 수 있는 만큼 좌시하지 않았을 터.

그러나 장경을 납치하면서도, 정작 전강이 왜 그를 비호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 때문에 우리 부모님은 돌아가셨소. 당시 다섯 살밖에 안 된 내 동생도 생일을 며칠 앞두고 죽었지. 날 길러준 유모도, 날 손자처럼 예뻐해줬던 노복도, 내 글선생이었던 총관 숙부님도 모두 귀천하셨소.”

“나, 난....”

“그분들의 무덤 앞에서 똑같이 말할 수 있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했다고? 당신들의 죽음은 정녕 아무것도 아니라고!?”

“틀렸다! 그, 그건 내 탓이 아니야. 혈교, 그래! 그 빌어먹을 혈귀들이 우릴 현혹했어! 그놈들이 너희 가문에 누명을 씌웠단 말이다!”

강엽과 전강 앞에서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떳떳했던 적미성이 드물게 혼란스러워하는 모습.

자신을 압도한 강엽에게도 큰소리를 쳤던 그가, 일초반식의 무공도 익히지 못한 장경 앞에선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덜덜 떨었다.

“혈교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수다.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지. 하지만 당신은 한 점의 잘못도 없소? 억울하게 죽은 우리 집안의 사람들에게 단 일 푼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냔 말이오!”

“아니야! 나야말로 억울하다! 나, 나는...!”

퍽 소리와 함께 직각으로 돌아간 적미성의 면상.

두툼한 주먹을 들어 턱주가리를 후려친 장경이 손목을 문지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시팔, 더럽게 아프네.”

“큭! 네놈...!”

“방금 그건 우리 아버지 몫이오. 그리고 이건 우리 어머니 몫이지. 그 다음은 우리 동생의 몫이고.”

무공을 모르는 장경이 심상지경의 고수를 때리는 일은 어불성설. 적미성이 멀쩡했다면 반탄강기에 근육과 뼈가 터져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단전을 잃은 지금, 적미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순순히 처맞는 일 말고는 없었다.

“전강! 큽, 대사형이 죽도록 내버려둘... 컥!”

“닥쳐, 이 쓰레기 새끼야!”

때리다 보니 감정이 북받쳤는지 최소한의 경대조차 생략한다.

강엽과 전강, 하후진, 청수 등 누구 하나 나서지 않는 가운데 묵묵히 이어지는 폭력.

때린 만큼이나 장경 자신도 다치고 있으나, 장경에 맞는 것 자체가 적미성에겐 큰 굴욕이겠지.

오히려 강엽에게 죽는 것보다 장경에게 맞는 게 더욱 두렵고 끔찍할지도 모른다.

과거의 죄가 자신을 덮쳐오는 것이니까.

“헉! 허억!”

숨이 차는지 무릎을 짚고 땀을 흥건하게 흘린 장경이, 떨리는 주먹으로 적미성을 후려친다.

“마지막으로 이건 우리 강아지의 복수다.”

어린 주인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충견의 복수까지 끝마친 그가 대 자로 누워 팔뚝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가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에 누구 하나 섣불리 위로하지 못한다.

한참이나 흐느끼던 장경은 곧 눈가를 슥슥 닦고 민망하다는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그 새끼, 아직 살아있냐?”

“뒈졌지.”

하후진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입술 사이로 고깃조각과 피를 흘린 채 허물어진 적미성의 동공은 동태마냥 흐리멍텅했다.

“근데 댁이 때려서 죽은 건 아니고, 지가 혀를 잘랐는데?”

“...하, 개만도 못한 새끼. 내 손에 죽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 이거지?”

“아직 분 안 풀렸으면 목이라도 자르겠수? 장 분타주에겐 특별히 우리 염왕도문의 신물을 빌려줄게.”

“뭐... 됐어. 칼 잡을 힘도 없다. 근데 전강, 넌 괜찮은 거냐? 나야 그렇다 쳐도 너는....”

망자의 눈꺼풀을 감겨준 전강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사형은 스스로 죽었소.”

만약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했다면 나았을까.

그러나 적미성은 과거의 죄를 직시하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존심을 지키는 길을 택했다.

“다만 강 무사와 장 분타주, 두 사람이 허락한다면... 난 대사형의 시신을 수습해주고 싶소. 비록 엇나갔다지만, 그래도 내게는 한때나마....”

장경은 강엽을 돌아보았고, 강엽 역시 장경을 바라보았다. 눈빛을 나눈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

“저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손님이 온 것 같군요.”

뜻 모를 말에 모두가 의아해하는데 허공에서 나직이 불호가 울렸다.

“무량수불....”

노란 가사를 걸친 깡마른 노승. 갑자기 나타난 사대금강의 모습에 강엽을 제외한 네 사람은 깜짝 놀랐다.

차기 방장으로 내정된 법현 대사가 슬픈 눈빛으로 적미성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탄식했다.

“결국 이리 되는구려.”

“절 원망하십니까?”

강엽의 물음에 법현 대사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방장 사형께선 당신의 제자가 과거를 뉘우치고 진정한 불제자가 되길 바라셨지요. 그것만이 사형의 유일한 소원이었습니다.”

“제가 부족하여 선사의 유지를 잇지 못했습니다.”

강엽에게 무량여래지망을 남긴 불권의 유지.

그러나 적미성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나버림으로써 그 유지를 이을 수 없게 됐다.

“그게 어찌 강 시주의 탓이겠습니까. 강 시주는 할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하셨습니다. 단지 적 사질에게 자신의 죄를 직시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지요.”

허공섭물로 적미성의 시신을 띄운 법현 대사가 다시 불호를 외우며 전강을 돌아보았다.

“적 사질의 시신은 내가 수습하마. 다른 이들의 시신도 마찬가지다.”

“사부님....”

전강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설마 법현 대사가 전강의 스승이었을 줄이야?

“산으로 돌아올 테냐?”

그 말에 전강은 잠시 장경을 돌아보고, 다시 사부를 향해 공수의 예를 취했다.

“허락하신다면 아직은 속세에 머물고 싶습니다.”

“네 뜻대로 하거라.”

흔쾌히 허락한 법현 대사가 강엽을 향해 노구를 돌렸다.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요.”

“....”

“부디 방장 사형의 마음을 소중히 간직해주시길. 사형께서 강 시주께 심상을 드린 것이, 단지 적 사질 때문만은 아닐 겝니다.”

이미 강엽이 무림맹을 떠나 일월신교로 가기를 마음 먹었음을 알고 있다는 기색.

강엽은 그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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