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탈맹 (4)
과거 진조가 오사도를 상대로 펼쳤던 비기.
얼핏 보기엔 거창하진 않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와닿을 수밖에 없다.
추격대의 생사여탈권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를.
“병장기를 버려라.”
물러나라는 것보다 더욱 굴욕적인 요구.
추격대의 고수들과 무림 명숙들이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깨물자 강엽은 다시 한번 오연하게 말했다.
“세 번째는 없다. 병장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그러나 추격대의 고수들 중 병장기를 떼놓는 자들은 없었다. 점혈을 당한 개방주와 황보가주를 애타게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를 뿐.
지긋이 그들을 응시한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당신들 뜻이라면.”
아무것도 쥐지 않은 적수공권.
그러나 강엽의 장심에 투명한 기운이 너울지자 모든 이들이 흠칫했다.
손이 떨어지는 순간 강엽이 표적으로 삼은 이들의 명줄이 끊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
오히려 아군인 신유가 우려했다.
“이보게, 귀영! 이건 말이 다르지 않은...!”
문득 둔탁한 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타구봉을 버린 후개가 보란 듯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항복하겠소, 강 형. 살려주시오.”
과거의 연을 믿고 인정에 호소하지도, 무림맹을 저버린 마인이라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그저 초연하게 강엽의 얼굴을 응시할 따름.
오히려 개방주의 낯이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시뻘게졌다.
“이놈아! 대 개방의 후개라는 녀석이 항복하다니! 이 사부는 널 그리 키우지 않았거늘!”
“에이, 그럼 다 죽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죽으면 본방은 어쩌고요?”
“산 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어휴, 저랑 사부님 복수를 하겠다고 날뛰지나 않으면 다행이죠. 강 형에게 시비를 걸면 얻어터질 텐데. 자기 묏자리인 줄 모르고 부나방처럼 달려들면 어쩝니까?”
“그야...!”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개방주. 다른 이들도 비슷한 미래를 예감했는지 얼굴 가득 수심이 드리웠다.
천하제일의 반열에 오른 강엽이 살심을 품는다면 구파와 팔가라 해도 버틸지 미지수였으니까.
“뭐, 강 형이 저희 목숨을 가지고 무림맹을 협박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맹주님이 잡혔잖습니까? 맹주님도 인질이 되셨는데 저희가 뭐라고 덤빕니까?”
“....”
“항복합시다.”
심즉살로 삼화취정의 고수를 찍어버리는 힘이라면, 굳이 인질들을 잡을 필요도 없다.
강엽이 그 자리에 임한다면 그와 적대하는 자들 모두 아무것도 못해보고 잡힐 테니까.
결국 개방주가 굴욕감을 감내하며 입을 다물고, 황보혁 역시 입맛을 다시며 쓰게 웃었다.
“항복하겠네, 귀영. 부디 선처해주었으면 하네.”
추격대 중 가장 강한 고수인 두 사람이 항복하자 다른 이들도 차례차례 병장기를 버렸다.
사형들을 잃어버린 멸마전의 아라한들만이 식은땀을 흘릴지언정 투지를 버리지 않았다.
보다못한 신유가 지풍을 날려 점혈을 하고서야 무장을 해제했다.
“굳이 그러실 것까진 없습니다만.”
“내버려두면 다 죽일 것 아닌가?”
“본보기로 다 죽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이보게.”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핀잔을 주는데, 강엽을 따라온 금성좌가 외려 호통을 쳤다.
“이 늙은이가 보자보자하니까 누구에게 훈수질이야!?”
얼굴을 붉힌 채 씩씩대면서도 이따금씩 강엽을 곁눈질하는 게, 마치 칭찬을 바라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전에 온갖 거만을 떨다 혼쭐이 난 그녀가 그렇게 나오니 오히려 수성좌가 황당해할 지경.
하지만 더한 놈이 있었다.
“어허, 주인님이 하시는 일엔 다 뜻이 있거늘! 주인님이 두 번이나 권유하셨는데 복종하지 않은 놈들이 문제지, 그게 어찌 주인님의 탓이란 말인가? 주인님, 이 종복에게 맡겨주시면 저 사이비 땡중놈들에게 백팔 가지 지옥의 맛을 보여주겠습니다! 그러면 이 우민들도 주인님의 대자대비한 자비심을 깨달을 것입니다!”
무림맹의 추격대를 싸잡아 우민으로 격하시킨 완안극은 강엽이 허락만 하면 실행으로 옮길 기세.
어마어마한 박력에 금성좌도 잠시 넋을 잃었다가 완안극의 눈이 휘어지자 이를 뿌득 갈았다.
“하! 과연... 신인의 곁에도 뭘 좀 아는 놈이 있었군! 하지만 본교에서 죄인들을 몸소 고문하며 갈고 닦은 이 금성좌의 솜씨는 하늘도 알고 땅도 알지! 신인이시여, 소녀에게 맡겨주시면 저놈들의 혓바닥이 마르고 닳을 때까지 찬가를 읊게 하겠나이다!”
“...둘 다 마음만 고맙게 받지.”
가만히 듣고 있자면 낯이 뜨거워질 정도라서 강엽은 떫은 얼굴로 작게 한숨을 흘렸다.
기껏 분위기를 잡아뒀는데 뭔 촌극이란 말인가?
‘알고 그런 거면 대단하긴 한데.’
하긴 완안극도 금성좌도 강호 경험은 풍부하다.
여기서 강엽 대신 악역을 맡아서 그에 대한 반발심을 억누르려는 기지를 발휘한 걸지도....
“큭! 굴러들어온 돌이 감히 내 자리를...!”
“후후후.”
...아닌가?
손톱을 깨물며 초조해하는 완안극과 어깨를 으쓱이며 도발적인 미소를 짓는 금성좌의 촌극.
유치한 기싸움을 보면 이 노강호들이 반로환동을 하고 사춘기를 정통으로 맞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오죽하면 개방주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겠는가.
“...자네도 고생이 많구먼. 수하들의 과잉 충성은 때론 주군으로서 부담되는 법이지.”
“그런다고 풀어드리진 않을 겁니다.”
“알고 있네. 다만....”
정신을 잃은 채 축 늘어진 적미성의 몰골. 그를 일별한 개방주의 눈에 복잡한 심경이 스쳤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고, 가장 우려했던 최악의 경우가 당첨된 것이다.
“적 맹주와 우릴 협상의 패로 쓸 건가?”
“여러분은 맞지만, 적미성은 아닙니다.”
“그럼 왜 그를...?”
왜 적미성을 생포해서 데려왔는가.
여기까지 온 이상 강엽의 성격에 무림맹이나 백도 정파의 눈치를 보지도 않을진대.
“죽은 생선보다는 살아있는 생선이 더 가치 있는 법. 그가 죽을 자리는 여기가 아닙니다.”
굳이 구구절절 설명할 생각은 없는지라 강엽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조영옥의 안위를 살폈다.
“다친 데는 없소?”
“전 멀쩡하죠. 당 동생도 그렇고요.”
“그녀는 뭘 하고 있소?”
“환자를 보고 있답니다. 빙궁의 소궁주와 소첩의 부하들이 호위로 붙었어요.”
이름을 대는 대신 눈을 가리키자 강엽은 턱을 주억이며 겹겹이 접힌 양피지 조각을 꺼냈다.
‘...멀진 않군.’
방향까지 같진 않아도 갈 만한 거리.
혈점의 위치를 확인하고 양피지를 다시 품에 넣은 뒤 백서희를 돌아봤다.
“나 먼저 가볼게.”
“혼자 가도 괜찮겠어?”
“여럿이 우르르 몰려갈 일 아니니까. 게다가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엔 네가 있어야 더 안전해져.”
워낙 고수들이 많은 만큼 백서희가 없어도 지장은 없겠지만 만사불여튼튼이라고 하지 않나.
“내가 없는 동안엔 서희가 날 대신한다. 옥매, 조금 불편하겠지만 부탁하오.”
“네, 알고 있어요. 잘 다녀오세요, 상공.”
완안극이야 조영옥을 깍듯이 모신다고 쳐 두 칠성좌도 그런다는 보장은 없었다.
물론 강엽이 명령하면 마지못해 따르긴 하겠지만, 여차하면 단독 행동을 할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 백서희는 일월신교의 핏줄인 데다 심상지경의 고수이니 두 칠성좌에게도 권위가 선다.
[무례하게 굴지 말도록. 그녀도 내 여자다.]
아니꼬운 눈으로 조영옥을 흘겨보던 금성좌가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을 강엽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정신을 잃은 적미성을 데리고 홀연히 사라진 광경에 그제야 추격대의 고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이 새끼들아. 그분 없다고 막 빼는 시늉 하면 죽을 때까지 뒤지게 처맞는다. 알것냐? 느그들은 이제 대 일월신교의 포로란 말이여!”
“...신났군.”
본인이 제압한 것도 아니면서. 완안극이 어이없어하며 가자미눈으로 흘겨보는데, 수성좌가 낮게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다가왔다.
“일월신교의 수성좌인 정도준이오. 앞으로 한 식구인데 잘해봅시다, 만독자.”
완안극 같은 초고수가 합류한다면 교의 입장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하물며 그는 강엽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전에 태화문에서 만났었지. 주인님을 곁에서 모시는 충복은 바로 이 완안극이다. 그분께서 일월신교로 가셔도 변치 않는다.”
“허허, 충성경쟁이라면 이 늙은이도 자신 있으니 너무 과신하지 마시구려.”
두 노강호는 웃음 속에 칼날을 숨기면서 뜨거운 안광을 나누었다.
* * *
정주 남서쪽 부희산(浮戲山)의 깊은 산자락.
허공섭물로 적미성을 옮기며 양피지에 찍힌 곳 근처에 온 강엽은 적당한 그루터기를 찾아 앉았다.
양피지의 혈점을 살펴봤지만, 움직이지 않는 걸 보아 아직 저쪽의 상황은 끝나지 않은 듯했다.
전강과 하후진, 청수라면 납치된 장경을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니 나설 것까진 없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강엽은 여태껏 끌고 온 적미성을 거칠게 내던졌다.
전신의 뼈마디는 부서졌고, 장기와 근육은 파열되어 제 기능을 못하는 꼬락서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단전까지 상처를 입었으니, 평범한 촌부였다면 진작에 삼도천을 건넜을 터.
그럼에도 적미성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명이 질긴 건 타고난 거겠지.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 숨어있을 거냐?”
미동도 않는 모습을 삐뚜름히 쳐다본 강엽이 강렬한 살기를 내쏘자 시커먼 기운이 일어났다.
일찍이 적미성과 한 몸이 되었던 불권의 심마가 불쑥 튀어나와 일권을 내지른다.
그러나 강엽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면서 놈의 완맥을 잡고, 그대로 잡아당겼다.
투과아아아아앙!
수십 그루의 아름드리나무를 통째로 으스러뜨린 정경 뒤로 자욱한 흙먼지가 솟구친다.
-키에에에에에엑!
발작하듯 비명을 지른 불권의 심마가 강엽을 노려보고는 지면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시 한번 용맥과 결합해 연명하려는 수작.
그러나 아무리 시도해도 용맥까지 닿지 않자 허둥거렸다.
“역시 흉내쟁이는 흉내쟁이로군. 본인이 되지 못해.”
사마외도를 불구대천의 원수마냥 증오했던 시절의 불권이라면 절대 등을 보이지 않았겠지.
설령 자신이 죽는다 해도 어떻게든 한 방 먹이려고 발악했을 것이다.
그런 증오심을 물려받은 주제에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추태는, 이미 그 시절 불권의 의념과는 억겁이나 동떨어졌다.
“소용없다. 너는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해.”
일대의 용맥을 장악한 지금이라면 심마가 용맥 속에 숨을 틈도 없이 제압할 수 있는 바.
빠르게 수인을 맺은 강엽이 두 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대며 삼각형을 그렸다.
-사상봉절(四相封切) 뇌벽(雷壁).
주력으로 만든 네 개의 기둥이 치솟는 것과 동시에 광범위한 기막이 일대를 감싸기 시작했다.
안에 있는 대상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철옹의 주박술.
장장 수백 장에 걸쳐 구현된 광범위한 기막이, 심마를 향해 강렬한 뇌기 다발을 내쏘았다.
-카아아아아악...!
감전되는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발광하듯 일권을 뻗고, 다리를 휘돌리며 저항을 이어간다.
등 뒤에서 힘겹게 회전하는 광륜은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 흐릿하지만, 그럼에도 심마는 뇌기를 막으면서 기막을 몇 번이나 두들겨댔다.
그 끈질긴 집념엔 강엽도 혀를 내두를 정도.
‘하지만 적미성의 몸에서 나온 시점에서 놈에겐 시간이 없어. 무리할 필요도 없다.’
굳이 심상절예를 출수하지 않아도 놈은 갇힌 채로 죽어갈 명운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 안....”
거칠게 던져도 미동도 안 하던 적미성이 눈꺼풀을 들어올리더니, 손발을 움찔 떠는 게 아닌가.
“아, 안 돼... 내겐... 커억.”
폐와 성대 모두 정상이 아닌데도 절박하게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그러나 부러진 채 꺾인 팔다리와 터진 근육은 주인의 명령을 들어주지 못했다.
“제, 발... 제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젠 내게 심마밖에 없으니 빼앗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걸까.
그때 강엽은 상단을 자극하는 의지를 느끼고 미간을 좁혔다.
‘혈목?’
고개를 갸웃하며 혈목을 불러내자 녀석이 사상봉절의 지면을 뚫고 나와 심마에게 쏘아졌다.
심마가 깜짝 놀라서 날카로운 경파를 일으켰음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들러붙는다.
그걸 보고서야 강엽은 혈목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아연해졌다.
‘지금 저놈을 흡수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