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탈맹 (3)
“서둘러야 한다! 놓쳐선 안 돼!”
죄수들을 쫓는 추격대의 좌장.
지휘권을 인정받은 개방주는 미치겠단 얼굴로 분통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무림이 어찌 되려고!”
신임 맹주의 독단적인 폭거와 그 뒤에 이어진 귀영과의 전투.
결과를 확인하진 못했지만, 누가 이기든 최악의 미래만 기다리는 게 사실.
한데 제자라는 놈은 사부의 속도 모르고 한심한 소리만 지껄인다.
“누가 이길까요, 사부?”
“니미럴! 그게 뭣이 중헌디!”
“엥, 왜 평소엔 안 쓰시던 방언을 나옵니까? 맨날 본인은 차가운 도시 남자라고 하셨으면... 케엑!”
기어이 매를 번 후개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린 개방주는 찰진 손맛을 애써 떨치면서 탄식했다.
“오, 천지신명 맙소사. 이런 녀석을 후개랍시고 세운 과거의 나는 도대체... 개방의 앞날이 어둡구나!”
“자꾸 그러시면 제자의 마음에 멍이 듭니다!”
“인석아! 이 사부의 속은 숯검댕이가 된다! 숲검댕이가!”
“그래서 누가 이기는데요? 불초 제자도 상황이 안 좋은 건 압니다. 그래도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무림의 운명이 달라질 것 아닙니까?”
“예측하는 건 의미 없다. 가장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고 움직여야지.”
“최악이라면....”
대화는 두 사제(師弟)가 이끌지만, 그들과 함께하는 추격대 역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수풀을 밟고, 나뭇가지를 밟으며 화살처럼 몸을 날리는 고수들. 신들린 보신경을 유지하면서도 두 사제의 대화를 경청한다.
마른침을 삼킨 개방주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귀영이 일월마교의 독문무공을 익힌 거지. 한데 맹주가 패한다면....”
그나마 누명이라면 귀영은 구주천지 의지할 곳 없이 혈혈단신이 되겠지만, 일월마교에 투신한다면.
언젠가부터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은 개방주의 안색이 점점 납덩이처럼 굳어갔다.
“우린 또 다른 광명마교주를 맞이할 게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위험한 절대적인 마인을.”
“...강 형이 정말 일월마교주가 될까요? 그는 유가(柳家)의 핏줄도 아니지 않습니까?”
일월마교가 개파한 이래 줄곧 교주위를 지킨 씨족.
그들끼리 피비린내 나는 권력암투를 벌일지언정 유가를 제외한 다른 씨족이 권좌에 앉은 역사는 없다.
“모를 일이지. 일월마교는 내전에 빠졌고, 교주의 독문무공인 일월신마공은 소실됐다. 유가의 정통성을 증명할 수단이 사라진 셈 아니냐?”
“그, 그럼 맹주는 그 가능성을 미연에 끊기 위해...?”
“....”
개방주는 입을 다물었다.
직감은 맹주에게 꿍꿍이가 있다고 속삭였으나, 감당 못할 말을 내뱉을 순 없었기에.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을 잃은 것은 뼈아프지만, 차라리 맹주가 이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멈...!”
말보다 습격이 빨랐다. 시퍼런 빛이 번쩍이는 것과 동시에 추격대가 타던 나무들이 잘려나간다.
물러서는 대신 더욱 앞으로 나아간 개방주가 장심으로 뜨거운 열양지력을 내뿜어 경파를 받아쳤다.
...콰아아아아아앙!
한 박자 늦게 울려 퍼지는 굉음. 추적추적 장대비가 내리는 중에 잎사귀와 흙이 사방으로 튄다.
그제서야 멈춰선 개방주가 상대를 노려봤다.
“당신은... 완 노사라는 사람이구려.”
“흠.”
지학이나 됐을까 싶은 앳된 소년.
짧은 간합을 경파로 잡아늘린 소년은 마뜩찮다는 얼굴로 나직이 혀를 찼다.
“제법이군, 만리독행개. 방금 건 항룡십팔장인가?”
“그렇소. 우 모가 독곡주를 뵈어서 영광이외다.”
독곡주라는 말에 추격대 사이로 술렁임이 번졌다. 모두가 완안극의 정체를 알진 못했던 것이다.
완안극이 머쓱하게 어깨를 추어보였다.
“뭘 영광씩이야. 사문을 잃고 추하게 살아가는 늙은이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되겠나?”
어린 소년의 얼굴로 늙은이 운운하니 지독한 위화감이 들었지만 개방주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죄수들을 돌려받으러 왔소.”
“주인님께선 그들을 보호하라 명하셨다.”
“주인이라... 귀하의 주인이라면 귀영이구려. 그가 어째서 무림의 의기를 저버리는지 모르겠소. 정녕 맹주의 뜻대로 일월마교에 뜻이 있는 거요?”
“구태의연한 이분법이군.”
“뭐요?”
“주인님께 정과 마, 흑도와 백도...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다.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상관없다고 하실 분이지.”
“그건 무림맹의 기치와 어긋나오.”
“후후, 글쎄. 난 모르겠는데. 새외 출신이라 그런가?”
어차피 말로 설득할 단계는 넘어선 바.
누가 올바르고 그른지 따질 단계는 진작에 지났으니, 이젠 힘으로 증명할 차례였다.
“아무리 독곡주라도 추격대 전부를 감당하실 순 없소! 이젠 비까지 내리지 않소이까?”
독을 살포해도 비와 섞여서 효과가 약해질 테니 완안극에게 한없이 불리할 터.
그러나 완안극은 시큰둥했다.
“나 혼자 왔다고는 안 했는데.”
“뭣?”
퍼뜩 놀란 개방주가 위를 보며 목구멍이 찢어져라 성대를 쥐어짰다.
“산개해라-!”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기척. 개방주가 외치기도 전에 추격대의 고수들도 해쓱해진 얼굴로 흩어졌다.
그들의 위에서 어마어마한 열기가 별똥별처럼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쿠와아아아아앙......!
일순간 지축이 흔들리고, 숲이 비명을 지를 만큼 가공할 경파.
강맹한 공력을 실은 족격이, 발 디딜 틈도 없는 빼곡한 숲 한복판에 광활한 개활지를 만들어버린다.
뜨거운 기류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뒤늦게 족격을 갈긴 죽립인의 정체를 파악한 개방주가 눈을 부릅뜨고 상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신유 선배!”
“오랜만일세, 우제.”
이름이나 별호 대신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는 중년인.
추격대가 흩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족격을 내려친 신유가 죽립을 살짝 들어올리며 엷게 웃었다.
“그간 격조했군.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비하면 많이 늙었구먼?”
“돌아오셨단 얘긴 들었소. 혈교에 붙잡혀 고초를 겪으셨다고....”
“사실이네. 귀영과 그의 벗들이 아니었다면 난 아직도 놈들의 꼭두각시 신세를 못 벗어났을 테지.”
담담하게 과거를 읊으면서도, 강엽 일행에게 빚을 졌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이야기.
“그래서 귀영을 돕는 거요? 하지만 그들은....”
“마교도들을 탈출시켰지.”
“그들이 풀려나면 혼란이 찾아올 것이오.”
“귀영의 말은 다르던데.”
말을 섞어봤자 이쪽이 불리하다. 여기서 지체할수록 저들은 멀어질 테니까.
개방주를 비롯한 추격대가 이를 악물고 기세를 끌어올리는데 신유는 한 걸음 나서며 권유했다.
“물러나게, 우제. 자네들에게 불리한 싸움이야.”
완안극도 부담스러운데 신유까지 합류했다면 개방주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노릇.
그럼에도 개방주는 웃었다.
“자신하지 마시오, 선배. 우리는 선발대에 불과했소이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숲에서 농밀한 기척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구파와 팔가 등 대문파의 고수들이, 개방주가 대치하는 동안 거리를 줄였던 것.
그 선두엔 황보가주 파산일권 황보혁과 적미성의 계파에 속한 문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문주들을 호위했던 멸마전의 아라한들 또한 추격대에 합류한 바.
“하하핫! 팔존과 독곡주라니! 온몸이 짜릿해지는구만!”
“근본 없는 독곡주야 그렇다 치고 팔존까지 마구니의 편을 들다니. 말세는 말세인가 보우.”
누가 봐도 형제라고 할 털복숭이 거한들. 각각 곤과 권갑으로 무장한 쌍둥이들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삼화취정의 기세를 드러냈다.
갈마중 역시 성한 나무에 올라 철궁의 시위를 팽팽하게 당기며 두 사람을 노려본다.
“엥? 맹주를 제외하면 멸마전엔 삼화취정이 두 명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저 친구도 삼화취정인데?”
“나도 처음 본다. 영약 먹고 깨달음이라도 얻었나.”
본래 중단전 개방에 머물렀던 갈마중 역시 삼화취정의 기파를 한껏 드러내며 압력을 걸었던 것.
여기에 산동의 권왕이라 불리는 황보가주까지 합세하니 추격대의 사기는 기세등등해졌다.
그리고 부친을 따라 추격대에 합류한 황보진악은 복잡한 심경이 가득한 눈으로 시선을 멀리 향했다.
강엽 일행 대부분이 죄수들을 탈출시키는 대열에 합류한 만큼 이대로 쭉 간다면....
“이쪽엔 삼화취정만 다섯이오, 신유 선배. 선배가 팔존임을 감안해도 저울추는 기울지 않소?”
“음, 확실히 이러면 우리가 좀 불리하지.”
각자의 사정과 신념이 부딪치는 일촉즉발의 상황.
바로 그때, 파산일권 황보혁이 느닷없이 장대한 거구를 움직여 허공의 한 점을 쳤다.
빗방울들이 일순 증발하며 공기가 팽창, 장대한 소성을 일으키며 숨어있던 자를 백일하에 드러낸다.
새카만 장삼을 흩날리는 절세미녀의 자태. 그러나 중인들이 놀라기도 전에 찬란한 금광이 사위를 채운다.
“싸움의 유불리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 과한 자신감은 독이랍니다.”
“태화문주....”
그녀의 접근을 막은 황보혁이 신음처럼 중얼거리는 때, 털복숭이 쌍둥이들이 놀라서 외쳤다.
“뭐, 뭐야!? 왜 내력이 안 모여?”
“단전이 굳어졌소이다, 형님!”
그에 주변에 있던 자들 또한 내공을 일으켰지만, 단전은 돌이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개방주의 안색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경직됐다.
“사술을...!”
“흑도 사파의 문주인 제가 사술을 쓰는 게 문제가 되진 않겠지요. 당신들은 이제 못 움직입니다.”
지난날 요선을 죽이고 빼앗은 여우신선의 영성.
시선을 마주친 이의 단전을 굳히는 금호요안의 공능이 조영옥의 눈에서 재현된다.
격이 낮아 요선처럼 자유자재로 다루지는 못하나, 절세고수들의 진기를 묶을 수는 있는 바.
심지어 치맛자락 사이로 나온 시커먼 영기(靈氣)가 그들의 그림자와 이어져, 운신을 제약하기까지.
‘역시 한꺼번에 네 명은 무리야.’
갈마중은 멀리 있는 탓에 닿지 않았으나, 다른 네 사람은 모여 있다는 게 행운으로 작용했다.
다만 절세고수 네 명을 묶은 탓에 조영옥 역시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본 쌍둥이 형제가 부득 이를 갈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갈 사형! 저 되바라진 년 좀 쏴주시오!”
갈마중은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있는 위치에서 저격한다면 쌍둥이도 횡액을 입을 테니까.
궁신탄영의 수법으로 나뭇가지를 박차면서 하늘 높이 뛰어올라 조영옥의 머리를 겨눈다.
그러나 때마침 날아온 빛살이 옆구리로 치고 들어오자 안색이 변해서 철궁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엉!
“지팡이?”
명아주를 엮은 초라한 지팡이가 만년한철로 만든 철궁을 밀어낸다.
그에 깜짝 놀란 갈마중이 다음 행동을 하기도 전에, 귓가에 한 줄기 전음이 꽂혔다.
[기민하군. 하나 조금 느렸네.]
정체불명의 노파의 전음에 웃음기가 어린 순간.
철궁과 부딪친 명아주 지팡이가 눈보라 같은 한빙지기를 쏟아내기 시작하자 갈마중은 속절없이 당했다.
미처 호신강기를 두를 새도 없이 전신을 덮친 한빙지기가 비와 섞이면서 전신을 얼려버린다.
그렇게 얼음덩이가 되어 떨어진 갈마중이 땅과 충돌하면서 산산조각 박살나는 모습에, 멸마전의 아라한들이 비명인지 절규인지 모를 포효를 질렀다.
“젠장, 갈 사형! 영약 먹고 삼화취정에 올랐는데 이리 가다니!”
“누구냐! 어떤 씹어죽일 놈이 감히 갈 사형을...!”
원독에 사로잡힌 쌍둥이가 고개를 돌리는데, 별안간 좌우에서 나타난 하얀 털옷의 무인들이 중인들을 차갑게 쏘아보면저 장심을 내밀었다.
그 사이 개방주를 비롯한 절세고수들의 마혈을 짚은 신유와 완안극이 빙오선에게 공수의 예를 취했다.
“북해빙궁의 신공이 고절하다더니 과연 명불허전이구려. 내 오늘 개안을 했소이다.”
“쩝, 비만 안 왔어도 내 독으로 제압했을 것을.”
신유가 순수히 감탄한 반면 완안극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비가 내리는 환경은 그와 같은 독인에겐 불리한 반면, 빙궁의 무인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전장.
빙오선도 공치사를 늘어놓는 대신 겸양하며 완안극의 면을 세워주었다.
“독곡의 독술이 천하일절임을 누가 모르겠소. 이번만은 천시가 본궁에게 미소를 지었을 뿐이외다.”
“...그냥 해본 말이오. 빙궁의 한빙지공이 얼마나 강한지는 주인님께 들어서 알고 있소.”
“강 무사가 본궁을 칭찬했소?”
“한빙지공으로는 천하에 적수가 없다고 하셨지. 빙궁의 무공을 견식하며 배울 게 많았다고 하셨소.”
“그와 같은 절대고수가 본궁의 무공을 높이 평가하다니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로다.”
그렇게 서로 금칠을 해주는 작태. 그 모습을 꼴사납다는 듯이 노려본 개방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체면이 말이 아니구려. 잡으러 왔다가 도리어 인질로 잡히다니. 우릴 어쩌실 셈이오?”
“그건 저쪽에 물어야지.”
신유가 눈짓을 하자 하늘에서 이남이녀가 떨어졌다.
죽립을 쓴 백발홍안의 노인과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여인, 늘씬한 교구를 날린 경국지색의 미인.
마지막으로 시커먼 장포 자락을 흩날리며 천천히 땅에 발을 붙인 청년이, 속내를 알기 힘든 우묵한 시선으로 장내를 둘러본다.
중인들은 난입자의 정체에 새파랗게 질린 채 덜덜 떨면서도, 청년의 위쪽에 둥둥 뜬 피투성이 거한의 몰골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사형! 개 같은 마두놈이...!”
우격다짐으로 달려들려고 하는 털복숭이 쌍둥이.
중인들이 말리기도 전에 한순간에 접근한 강엽이, 그들의 턱주가리를 잡고 무심하게 말했다.
“죽어라.”
염왕의 판결마냥 쌍둥이가 선혈을 웩 토하며 허물어진다.
말 한마디로 절세고수들의 심맥을 파열시켜 저승길로 인도하는 신위.
적아를 막론하고 모두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심즉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