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태풍 (2)
삼경이 넘은 야심한 시각.
얼마 전 당묘정과 흉금을 터놓고 얘기한 죽림의 호숫가에서, 강엽은 누군가를 만났다.
“어떻게 된 거지?”
“....”
황보진악은 머뭇거렸다.
돌연 맹주위에 도전할 뜻을 접으면서 경쟁자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한 부친의 결정.
평소의 호탕함은 온데간데없이 음울한 눈빛으로 어두운 호수를 보던 황보진악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동무림은 세력싸움에서 밀렸소.”
“그래서 지레 포기했다?”
“애초에 동무림의 지지만으로는 맹주가 될 수 없었으니까. 숫자도, 힘도 한참이나 부족했소.”
광명마교에게 피해를 봤던 동무림의 재건에 돈을 쏟는다면 다른 지역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일.
그렇기에 동무림을 제외한 그 누구도 황보가주를 지지하지 않았다.
“물론 동무림도 약하진 않소. 우리 스스로는 맹주를 배출할 수 없지만, 영향을 줄 정도는 될 테지.”
“맹주가 될 생각이 아예 없었군. 결정권을 쥐는 것이 목적이었나.”
하기사 무림맹에 동무림의 지분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꼭 맹주가 될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께선 맹주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소. 게다가 두 번 연속으로 팔가주가 맹주가 되는 건 정서상 힘든 일이었지.”
앞서 하북팽가 맹주를 배출한 만큼 차기 맹주는 구파 출신이 나와야 한다는 여론이 강세였다.
“그래서 이송 진인과 권패는 동무림을 포섭하기 위해 움직였소. 동무림에 특혜를 베풀겠다고 했지. 다만 이송 진인보다는 권패의 제안이 더 매력적이었을 뿐이오.”
“그가 뭘 약속했지?”
“부맹주의 지위를 주겠다고 했소.”
“...그런 지위는 없지 않나?”
“없지. 동무림을 끌어들이기 위해 급조한 자리요. 말로는 맹주의 오른팔이라고 하던데....”
“그걸 받아들였다는 건가.”
“덤으로 원로원의 자리들을 약속했소.”
맹의 예산은 원로원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만큼 동무림 역시 그만한 지원을 받을 터.
‘확실히 동무림의 지지를 받기엔 더할 나위 없다.’
서무림에 치중한 이송 진인은 할 수 없는 약조였다.
부맹주를 비롯한 각종 특혜를 약속받은 동무림의 인사들은 이송 진인의 제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터.
‘이송 진인이 혈교가 발호할 때를 대비한 방어전을 염두에 둔 반면, 적미성은 적극적인 원정을 주장하고 있지. 그 차이에서 오는 간극도 있겠군.’
맹주가 자리를 비운 동안엔 부맹주가 자리를 대행할 테니까.
지금까진 총군사가 그 역할을 했으니 부맹주가 필요치 않았지만....
“적미성은 절대권력을 원하나 보군.”
“음?”
“어느 쪽에도 힘을 실어주지 않았잖나. 자세히 보면 아랫사람들의 경쟁과 견제를 유도하고 있다. 이인자를 둘 생각이 없어.”
동무림을 끌어들이는 것도 그렇다. 단지 맹주위를 위해서만 지지를 구하는 게 아니었다.
“자기 계파에 경고하는 의미도 있겠지. 동무림에게 뒤처지기 싫다면 처신 잘하라는 거다.”
황보진악이 소처럼 커다란 눈을 끔뻑였다.
“그게 그런 뜻이오?”
“아마 총군사는 자기 계파에서 뽑을 거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총군사와 부맹주를 부릴 테고.”
“그럼 좋은 거 아닌가?”
“아니, 무림맹의 총군사는 여차하면 맹주의 의지에 반대를 표할 수 있는 자리야. 총군사가 반대하는 일은 맹주도 무조건 고집할 수 없어.”
하지만 부맹주가 있다면 얘기는 다르다. 총군사가 반대해도 부맹주에게 명령을 내리면 되는 일.
“음, 그래도 원로원도 있는데 그렇게 막 나가겠소?”
“모르긴 해도 원로원 역시 숫자를 대폭 늘릴 거다. 그 자리는 동무림과 자기 계파로 채우겠지. 친 맹주파가 많아야 전권을 휘두를 수 있으니....”
물론 원로원이 쉽게 굴복하진 않겠지만, 하필 전시라는 게 문제였다.
“고금을 막론하고 전시엔 왕권이 신권을 앞서는 법이야. 적미성이 맹주가 되면 전시체제를 강화하고 원로원을 누를 거다.”
“휴우! 난 모르겠구려. 강 형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는데, 그렇게 안 됐으면 해서....”
“나도 예상이 틀리길 바란다.”
하지만 강엽은 자신의 예상대로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논리나 이성을 건너뛰고 천리를 엿보는 상단전의 직감이 그게 정답임을 알려줬던 것이다.
‘한 가지는 인정해야겠군. 놈은 시대의 효웅이다.’
비록 강엽을 만나서 비참하게 패하긴 했지만, 무공과 심계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다.
만약 적미성이 맹주가 된다면 자신 역시 대비를 해놔야 해야겠지.
“얘기 잘 들었다. 그럼 난 이만....”
그렇게 호숫가를 떠나려는데 황보진악이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혼인하신다고 들었소.”
“....”
“축하드리오, 강 형.”
애써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이 썩어문드러졌다는 것 정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일전에 용봉지회에서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굳이 그 마음에 대못을 박을 필요는 없을 터.
“맹주 선출 이후에 혼례 날짜를 잡기로 했다. 그때 시간이 된다면....”
“하하, 고맙지만 안 될 것 같구려. 조만간 본가로 돌아가 폐관수련을 할 생각이라서.”
“하필 이런 시국에?”
“이런 시국이라서 하는 거요.”
황보진악의 입가엔 씁쓸한 감정이 떠올랐지만, 강엽의 눈길을 피하진 않았다.
“따라잡고 싶은 사람이 생겼거든. 연정 싸움에선 졌어도 무공으로는 언젠가 이기고 싶소.”
그게 누구인지는 구태여 묻지 않아도 되리라.
굳건한 각오를 내비친 황보진악을 들여다본 강엽은 고개를 주억이면서 손을 내밀었다.
“무운을 빌지.”
“고맙소.”
황보진악은 힘껏 손을 맞잡으며 씩 웃었다.
* * *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황보가주의 지지 선언 뒤에 동무림의 인사들 역시 적미성의 깃발 아래 모였던 것이다.
이송 진인을 비롯한 서무림의 계파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이 침묵을 견지할 따름.
목구멍 너머로 패배감을 삼킨 이송 진인은 담담한 미소로 경쟁자를 향해 포권지례를 갖추었다.
“감축드리오, 적 맹주.”
“진인께서도 고생하셨습니다.”
오연하게 응수한 거구의 사내.
뭇 맹방들의 대회합에서 새로운 맹주로 뽑힌 권패 적미성이 만인의 환호를 받으며 연단에 올랐다.
“고맙소! 고맙소! 이 적 모,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여 새로운 무림맹을 만들겠소이다!”
-권패! 권패! 권패! 권패...!
신임 맹주의 취임식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이 연신 별호를 부르짖는 모습.
불권의 제자라는 위광과 새로운 팔존이라는 위상이 군중으로 하여금 열광토록 하는 걸까.
참회동에 갇혔던 멸마전의 아라한들 역시 신임 맹주를 호위하듯 둘러싼 채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흥, 아주 그냥 살 판 나셨네.”
입을 삐죽 내밀면서 구시렁거리는 백서희의 모습에 일행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조영옥이 눈매를 찡그리며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지. 동무림의 인사들이 그에게 몰표를 줬으니. 뒤집을 방법이 없었어.”
“그럼 이제 전쟁을 하는 건가요?”
완만하게 부푼 배를 가리기 위해 품이 넉넉한 궁장을 입은 당묘정이 복부를 만지며 걱정스레 물었다.
“글쎄, 전쟁이 애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아무리 전쟁을 선언했다 해도 바로 출정하진 못할 거야. 서장까지 원정을 가려면 지금부터 단단히 준비해도....”
그 시점에서 주변인들의 눈동자는 슬금슬금 강엽을 향하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먼 하늘만 바라보면서 시간을 가늠할 뿐이었다.
‘지금쯤 시작했겠군.’
일사도와 팔사도의 구출 계획.
대부분의 전력이 광장에 모인 만큼 그들이 갇힌 지하뇌옥으로 가는 길은 상대적으로 느슨하겠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야율산산이 눈이 마주치자 목을 꼴깍 움직였다.
[그들이 탈출할 수 있을까요?]
강엽이 여기 있는데 누가 있어 그들을 구할 텐가.
북해빙궁의 전력 역시 오해를 사는 일을 막기 위해 전원 야율산산과 함께 나온 마당.
[믿을 만한 자들에게 맡겼다.]
[누군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시간이 지나면 알 거야.]
굳이 못 가르쳐줄 건 없지만, 함부로 말했다가 야율산산이 놀라서 비명을 지를 수도 있는 일.
괜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신임 맹주의 취임식에 얼굴을 비춘 만큼 조용히 넘어가야 한다.
그렇게 취임사를 한 귀로 흘려버리면서 상념을 이어가고 있을 때.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가 귓전을 강타했다.
“친애하는 무림 동도 여러분, 본인은 맹주가 되면 저 간악한 마교를 모두 없애리라 천명했소. 하지만 선전포고를 하기에 앞서 무거운 진실을 고백해야 할 것 같구려.”
사전에 논의하지 않은 사항인지 계파에 속한 명숙들도 의아해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신임 맹주가 무언가 비밀을 숨기기라도 한 걸까.
“우리 중에 마교의 쥐새끼가 있소.”
심후한 내공을 담은 목소리는 나직하지만 강렬하게 뇌리를 파고들었다.
맹원들은 물론 취임식을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이 술렁거리는 가운데 적미성이 실로 침통한 기색을 띠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이 순간 무림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 본인 역시 이전까진 그가 영웅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그는 기실 가면을 쓰고 우리 모두를 기만한 위선자에 불과했소.”
“그자가 누구입니까-!”
감히 허락도 구하지 않고 질문부터 던지는 자.
하지만 적미성은 그를 나무라기는커녕 열성적으로 답을 해주었다.
“그는 지난날 혈교의 교왕들을 격살하고, 광명마교의 사도들과 교주를 쓰러트린 인물이오. 그 공로로 천하제일인이라 칭송받고 있지.”
“.......”
무거운 적막이 광장을 뒤덮었다.
무림인이라면, 아니 하다못해 무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일화.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쏠리는 가운데, 적미성이 불처럼 뜨거운 안광을 뿌리며 당사자를 노려봤다.
“어디 한번 스스로를 변호해보겠나, 귀영? 아니, 이젠 일월마교의 교주라고 해야겠군.”
* * *
방금 막 취임한 무림맹주가, 당금 천하제일인을 마교도로 지목한 사상 초유의 사건.
심지어 앞잡이 수준도 아니고, 마교주라고 바로 일컬었다.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 침묵 속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만 소성처럼 이어질 때.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게 무슨... 아무리 맹주라도 그렇지! 증거도 없이 사람을 함부로 모함해도 되는 거요!?”
“옳소! 강 대협이 일월마교의 교주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여기저기서 터지는 고성. 더러는 신임 맹주에게 삿대질까지 하면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맹주가 먼저 그 같은 짓을 벌인 마당 아닌가?
심지어 구파의 장문인들과 팔가의 가주들도 당혹감을 금치 못하며 서로를 돌아볼 지경.
일행도 덩달아 분개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설 때, 강엽은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적미성을 바라봤다.
사마외도의 무공을 익혔다는 건 진작에 눈치를 챘으니 그렇다 쳐도, 일월신교주라고 지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때 일월합신을 쓰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산서의 평요에서 부딪쳤을 때, 놈의 심상절예를 찢기 위해 일월합신을 구사한 건 사실.
하나 낌새를 눈치챘다고 해도 증거도 없이 마교주로 몰아간다면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다.
강엽이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아무리 무림맹주라 해도 탄핵을 당할 만한 건이다.
심지어 만인의 앞에서 마교주로 지목했으니 이제 와서 발뺌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능구렁이처럼 교활한 놈이 그도 몰라서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배수진을 쳤을 리는 만무.
그럼에도 하필 이 날을 노려서 터뜨렸다는 건, 강엽을 확실히 궁지에 몰 자신이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러나 강엽이 스스로를 변호할 것도 없이 지금껏 연을 맺은 사람들이 나섰다.
“원시천존, 맹주께선 그 말에 책임을 지실 각오가 되셨습니까?”
“무당의 장문인이신 현운 진인이시구려.”
“그렇습니다.”
장문령부를 계승한 무당제일검이라면 맹주에게 책임을 물을 자격은 충분한 바.
화산의 옥청선자까지 힘을 실어주었다.
“경사스러운 날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다니 당혹스럽기 짝이 없군요. 맹주께선 무림 동도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합당한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이를 말이외까. 두 분이 귀영과 함께 얼마나 많은 활약을 하셨는지 아오. 분명 곁에서 귀영을 보고 그의 됨됨이를 판단했겠지. 하지만 본인의 주장은 사실이오.”
“하면 증거부터 제시하시오.”
지난날 강엽에게 은혜를 입은 모용세가주도 나섰다.
무작정 강엽을 두둔하진 않되, 증거를 대지 못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
멸마전의 아라한들이 눈을 부릅뜨고 명숙들을 노려보는 반면 적미성은 여유롭게 웃었다.
“운명의 세 별에 대해 아시오?”
“...그게 뭐요?”
“천기를 어지럽히는 역천의 세 별이지. 저기 있는 귀영이 그중 하나요. 다른 하나는 광명마교주고.”
“그건 맹주의 주장이지, 증거가 아니지 않-”
“여기 광명마교주의 기록이 있소. 귀영이 일월마교주의 독문무공인 일월신마공을 익혔다는 기록이지.”
단발머리의 여인이 홀연히 나와 공손히 서책을 바치는 광경에 백서희가 이를 뿌득 갈았다.
“암야마독, 저년이 무림맹에...!”
보란 듯이 서책을 흔든 적미성이 수하를 시켜 서책을 전달했다.
“물론 서책의 내용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소. 이 또한 광명마교주의 간계일지도 모르는 일.”
이제까지의 주장과 상반되는 말에 모두가 의아해하는데, 적미성이 강엽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러니 귀영의 장갑을 벗겨보시오! 틀림없이 일월마교의 상징이 있을 것이외다. 만약 이 적 모의 주장이 틀렸다면 즉각 사임하겠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