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399화 (399/450)
  • 79화. 모략 (5)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팔사도는 불신 어린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강엽의 말을 아예 못 믿는 눈초리.

    다른 사람도 아니고 광명마교의 교맥을 끊어버린 장본인의 말을 덥석 믿을 리가 만무했다.

    “설마 교도들을 풀어주겠다고?”

    “그건 불가능하지.”

    “하면 무슨 수로....”

    “지금 무림엔 뿔뿔이 흩어진 광명마교도들을 사냥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

    “정사와 흑도를 떠난 광범위한 사냥이지.”

    흑도 사파마저 광명마교 사냥에 나섰다는 뜻.

    예전이었다면 광명마교의 하얀 도복만 봐도 벌벌 떨었을 무뢰배들이 교도들을 사냥한다는 말에 팔사도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몇 번이나 깨물어서 피딱지가 난 입술이 다시 터지면서 붉은 선혈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피를 닦을 생각도 없는지 그대로 강엽을 노려보며 물었다.

    “놈들을 막을 수 있어?”

    “내가 하지 말란다고 안 하겠나? 원한 때문이든, 욕심 때문이든 광명마교 사냥은 이미 대세야.”

    “그럼 대체 뭘-!”

    “다만 그들이 무림과 동떨어진 곳에서 맥을 잇도록 도와줄 순 있다.”

    “....”

    무림은 민생과 떨어질 수 없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야말로 바로 강호가 아닌가?

    설마 무인도에 가서 살라는 걸까.

    “옛 토번(吐蕃)의 땅은 지금도 사람이 별로 없다는군. 새출발을 하기엔 괜찮은 장소 같은데.”

    “...거기로 어떻게 교도들을 옮길 건데?”

    화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기세가 한풀 꺾인 기색이었다. 일단 강엽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의미.

    “석탑을 이용해야지.”

    광명마교주가 유명을 달리했으나 그가 만든 석탑은 이 순간에도 굳건한 위용을 과시했다.

    대군이 이용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흩어진 교도들이 드나드는 정도라면 괜찮을 터.

    “물론 석탑만으로는 부족하겠지. 석탑이 없는 지역도 있으니까. 그러니 하오문의 비선을 이용할 거다.”

    “그놈들을 믿을 수 있겠어?”

    팔사도가 아미를 찡그렸다.

    “너... 아니, 당신이 하오문주와 친한 건 알아. 하지만 아랫것들을 믿을 수 있나? 놈들이 우리 교도들을 팔아넘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딨냐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너희를 도울 거야.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라.”

    이후 강엽이 속사처럼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팔사도의 표정은 수시로 바뀌었다.

    놀라기도 하고, 어이없어하기도 하고, 때로는 궁금해하면서 궁금한 점을 묻기도 했다.

    이윽고 강엽의 설명이 끝났을 때,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오랫동안 씻지 못해 꾀죄죄한 몰골이지만 푸른 눈동자는 예리하리만치 선명하게 빛난다.

    “...당신의 계획대로라면 석탑의 공능을 부활시켜야겠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건가?”

    “그래,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다.”

    항복의 대가로 석탑을 받기로 했던 교주와의 약속.

    하지만 적미성의 참전과 교도들의 자결로 일이 꼬이면서, 결과적으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지금이라도 그때의 보상을 받아내기 위해 팔사도와 거래를 시도한 것이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

    팔사도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교주님이 안 계시니 석탑의 공능을 부활시킬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나 혼자서는 안 돼.”

    광명마교주가 폐관이나 부상 등으로 석탑을 돌볼 수 없는 경우 사도들끼리 자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비상조치를 해놨지만....

    “사도가 둘 이상은 있어야 해.”

    광명마교의 사도는 단순한 직위가 아니다.

    교주가 자신의 수족으로 임명한 그들은 유사시에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

    “우린 교주님의 심상 조각을 받았어. 너무 작아서 심상절예를 쓰지도 못하지만, 사도의 권능은 그 조각이 있어야만 행사할 수 있지.”

    즉, 누구 하나 대충 주워와서 광명마교의 사도로 삼아도 실질적인 효과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강엽은 실망하지 않았다.

    “걱정 마라. 옆방에 있는 놈에게도 같은 제안을 할 생각이니까.”

    “...옆방?”

    기묘한 표정을 짓는 팔사도의 모습에, 강엽이 되려 고개를 갸웃했다.

    “몰랐나?”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난 여기 들어올 때 정신을 잃고 있었어. 깨어났을 땐 이 꼴이었다고.”

    바닥에 떨어진 사슬을 대충 발로 차버리자 강엽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옆방에 일사도가 있다.”

    “뭐?”

    얼이 빠진 얼굴로 입을 벌린 팔사도는, 곧 정신을 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이, 일사도가 살아있었다고?”

    * * *

    정교한 기관장치로 움직이는 철문.

    정해진 방식을 따라야만 열리지만, 강엽은 초음의 공능과 특유의 기감으로 바로 문을 열었다.

    팔사도가 갇힌 독방의 문을 열 때 기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봐둔 덕분이었다.

    “제안을 하지, 일사도.”

    강엽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설득했고, 일사도는 맥이 풀릴 만큼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만 조건을 붙였다.

    “청려장을 하나 줬으면 좋겠군.”

    팔사도와 달리 그는 어떠한 배려도 받지 못했다.

    단전이 박살나고, 사지근맥이 잘린 채 폐인이 되어 죽을 날만 받아놓은 처지.

    게다가 잃은 건 무공만이 아니었다.

    “일사도, 당신...!”

    “눈이....”

    야율산산도 침음했다.

    마치 인두로 지진 것처럼 콧잔등 위의 피부가 흉물스럽게 눌러붙러 있었던 것.

    심상지경의 고수는 인간을 초월한 회복력을 지녔지만, 단전이 부서졌다면 답이 없었다.

    “호들갑 떨지 마라, 팔사도. 우리가 잃은 것에 비하면 이깟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헛소리 말아요. 그게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고한 경지에 오른 광명마교의 이인자가 이리 비참하게 몰락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러나 일사도는 개의치 않았다.

    “보면 알겠지만 혼자선 걷지도 못하는 처지다. 튼튼한 청려장을 하나 구해줬으면 하는데.”

    “그 정도는 얼마든지 구해주지.”

    “그리고 또 있다.”

    “말해.”

    “탈옥 계획.”

    석탑을 대가로 광명마교도들을 안전한 곳에 모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강엽의 독단.

    무림맹이 그들을 내보내지 않는다면, 무력을 써야 하리라.

    “겸사겸사 위층에 있는 교도들도 데려가고 싶군.”

    일사도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마치 강엽이라면 그 정도는 능히 해줄 수 있다는 뻔뻔한 태도였다.

    오히려 팔사도가 낯빛을 흐리며 우려했다.

    “무림맹이 좌시하지 않을 텐데요?”

    강엽이 대답했다.

    “그건 방법이 있다.”

    “...정말로?”

    “곧 맹방대회합이 열리거든.”

    무림맹의 맹방들이 모여 중요한 안건을 논하는 시기.

    가장 최근의 대회합 땐 광명마교주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유야무야 넘어갔다.

    “맹의 이목이 대회합에 쏠릴 거다. 현 맹주의 퇴임식과 신임 맹주의 선출이 며칠 간격으로 함께 있으니까. 우리가 움직이는 건 신임 맹주를 선출할 때다.”

    “당신이 그 자리에 없으면 의심받을 텐데.”

    “계책이 있다.”

    “좋아. 그 정도는 당신이 알아서 하겠지. 그럼 우린 그때까지 여기 있으면 되나?”

    씻지도 못하고, 요강도 없어서 묶인 자리에서 변의를 봐야 하는 더러운 곳에서 지내야 한다니.

    하지만 두 사도 모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여상히 받아들였다.

    “간수장에게 편의를 좀 봐달라고 하면....”

    야율산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오히려 일사도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호의는 고맙지만 그게 더 성가시다.”

    “예? 성가시다니요?”

    “편의를 봐주는 만큼 방비는 더 단단해질 테니까.”

    대신 대답한 강엽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사도란 직위는 특별해. 잡히지 않았다면 이들은 척살대상 일, 이순위에 나란히 올랐을 거다.”

    일사도는 무공까지 잃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간 쌓은 은원이 태산처럼 높고 장강의 물속처럼 깊은 만큼 무림맹은 결코 편히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야율산산이 말문을 잃고 이를 꽉 무는데, 팔사도가 씁쓸하게 말했다.

    “나 때문에 무리할 필요는 없어.”

    “뭐라고요?”

    “내가 네 고모가 아니었다면 여기 왔겠니?”

    “....”

    “마음 독하게 먹어, 소궁주. 우리의 인연은 지난날 빙궁이 날 쫓아냈을 때 끊어진 거야.”

    “참 잘났군요. 그래서 이렇게 잡혔나요?”

    “너희가 날 잡았잖아?”

    그건 그렇다. 빙궁의 고수들이 팔사도를 막지 않았다면, 그녀가 잡히는 일은 없었을 터.

    “...하지만 너희 덕에 내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 그건 감사하게 생각해.”

    그녀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인 만큼 일사도보다 더 험한 꼴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

    비록 더럽고 꾀죄죄할지언정 여인으로서 최악의 치욕은 당하지 않은 것은 천운이었다.

    “근데 여기까지야. 우리의 길이 겹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거야. 그래서도 안 되지.”

    야율산산이 두 사도의 탈옥에 일조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빙궁의 입장도 곤란해진다.

    팔사도, 아니 야율진진은 그 사실을 알고 조카로 하여금 몸을 사리라고 충고한 것이다.

    “당신은...!”

    울컥한 얼굴로 혈육을 노려본 야율산산은 고개를 홱 돌리며 입술을 까득 물었다.

    “그래요. 당신 말이 백번 맞네요. 이제 다시는 만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겠죠.”

    그녀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강엽에게만 말했다.

    “혹시 간수장이 올지도 모르니 망을 좀 볼게요.”

    초월적인 기감을 지닌 강엽이 간수장이 오는 걸 모를 리 없지만, 강엽은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일사도가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래도 혈육인데 너무 매정한 것 아닌가?”

    “괜찮아요. 오히려 이쪽이 서로에게 좋겠죠.”

    “...그런가.”

    내가 참견할 계제는 아니겠지.

    작게 중얼거리며 턱을 주억인 일사도는 강엽을 돌아보았다.

    “용무는 대충 다 끝난 것 같군.”

    봉인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라는 뜻.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하겠어.’

    전쟁은 끝났는데도 할 일은 산처럼 쌓였다.

    심상지경의 고수임에도 피로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걸 느끼며 눈두덩이를 문지를 때였다.

    거처로 들어가기도 전에 기척을 느끼고 멈칫한 강엽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대문을 넘어섰다.

    마당에서 불청객과 대치한 백서희와 조영옥이 강엽을 보고 어깨를 으쓱 추어보였다.

    “저기 당사자가 왔으니 말하시죠?”

    백서희가 불편한 티를 팍팍 내면서 말하자 녹색 장포를 걸친 노부인이 강엽을 돌아보았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강 무사님. 당문의 총관인 당여진입니다. 일전에 한 번 뵈었지요.”

    무림맹에 있는 당문의 장원을 관리하는 총관. 강엽은 일전에 그녀와 만난 기억을 떠올리고 포권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노구가 왜 오셨는지 아십니까?”

    “....”

    “아시는 것 같군요.”

    “당문주님께서 노하셨겠군요.”

    “예, 유감스럽게도.... 만약 강 무사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본문은 예를 차리지 않았을 겁니다.”

    “대신 당문의 독인들이 찾아왔겠지요.”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강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각 세력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무림맹이었다. 당여진이 조심했어도 이목을 피할 순 없는 노릇. 민감한 시기에 찾아온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강엽이 손가락을 튕기자 거대한 무형의 막이 장원 전체를 감쌌다.

    “바깥의 이목은 치웠으니 솔직히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당 소저는 무사합니까?”

    “....”

    당여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강엽이 전개한 무형의 막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힘인지 깨달았기 때문. 안목이란 게 존재한다면 등줄기가 축축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신변에 이상은 없습니다. 오늘 아침 문주님께 혼쭐이 나시곤 줄곧 방 안에 갇히셨지요.”

    “갑시다.”

    “감사합니다.”

    만약 강엽이 가지 않겠다고 하면 당여진으로서는 인정에 호소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때 백서희가 강엽의 옆구리를 툭 쳤다.

    “가서 개판만 치지 마.”

    “내가 무슨 개판을 친다고....”

    “당 동생은 당문주님의 하나뿐인 자식이잖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인데. 욕하거나 독수 좀 날린다고 너도 똑같이 하면 그땐 다 망하는 거야.”

    듣고 있던 당여진이 뻘쭘한 감정을 감추기 위해 크게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가시지요. 마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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