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모략 (4)
“무림 말학 강엽이 장문 진인을 뵙습니다.”
“이송이오. 무림의 영웅을 만나서 반갑기 그지없소이다.”
청성파의 장문인 이송 진인.
과거 황산에서 볼일을 끝내고 사천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났던 서하무량검 적운 도장의 스승.
강엽을 초청한 그는 까마득한 선배답지 않게 정중하게 예를 갖추면서 자리를 권했다.
“영웅이라니. 후배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는군요.”
“허허, 무슨 말씀을... 광명마교주를 제압한 이를 영웅이라 하지 않는다면 누가 영웅이겠소?”
“죽인 건 제가 아닙니다만.”
“물론 교주를 죽인 건 점창의 검후지만, 그전에 강 도우가 그를 제압한 덕분이 아니겠소? 그대와 검후는 연인이니 구분할 필요도 없을 테고.”
일전에 백서희가 심상지경에 올랐음을 만인의 앞에서 선보인 뒤에 그녀의 별호도 바뀌었다.
척마대원들 사이에서만 불렸던 점창검후라는 별호가 안착한 것.
심지어 앞의 ‘점창’까지 빼버렸다.
-검후 섬무검예 백서희.
본래는 일찍이 봉문을 천명한 검각주의 별호지만, 얼마 전에 사문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며 강호에서 은퇴할 뜻을 밝힌 것이다.
졸지에 붕뜬 검후의 별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백서희의 것이 되었고.
“호사가들은 검후를 새로운 팔존으로, 강 도우를 천하제일인이라 부르고 있소. 강 도우에겐 특별히 ‘백뢰나정(白雷儺淨)’이란 새로운 별호도 붙었고 말이오.”
“하얀 벼락으로 악귀를 쫓아 세상을 맑게 한다는 뜻이더군요.”
청성파의 제자가 내온 용정차를 한 모금 들이킨 강엽은 내심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흡혈귀가 갖기엔 모순적인 별호가 아닌가?
“제일인이 된 소감이 어떻소?”
“음, 건방지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별 감정은 들지 않습니다.”
“강 도우가 그럴 만한 자격이 되기 때문이오. 자격이 안 되었다면 뛸 듯이 기뻐했겠지.”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데 합당한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강엽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해야 하니 후배를 잘 이끌어 주십시오.”
“무슨 말씀을. 빈도야말로 잘 부탁드리오.”
덕담은 여기까지.
잠시 숨을 고른 이송 진인은 본론에 들어갔다.
“강 도우가 빈도의 초청에 응했다는 건... 이 사람을 지지한다는 뜻으로 봐도 되겠지요?”
“아직은 아닙니다.”
“음?”
이송 진인의 백미가 꿈틀거리는 반면, 강엽은 담담하게 차를 홀짝였다.
“아직 후보가 다 정해지진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하마평에 오르는 이들은 셋이지요.”
“그렇소. 빈도와 황보세가의 가주, 그리고 멸마전주인 권패가 있지.”
일전에 만났던 황보세가의 가주. 그가 차기 맹주에 입후보한 건 강엽으로서도 의외였다.
“황보세가의 가주님도 찾아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이제 보니 강 도우가 빈도에게 원하는 게 있는 모양이구려.”
반백의 수염을 쓸어내리는 모습만 보면 선풍도골이 따로 없었지만, 주름에 뒤덮인 눈빛은 노회한 강호답게 예리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 속 시원히 말씀해보시오. 무림맹 제일의 영웅의 청이라면 무엇인들 못 들어주겠소?”
* * *
달뜬 열기가 휘몰아치는 방.
끈적한 운우지락을 나눴음을 방증하듯 땀냄새와 체취가 진동하는 가운데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대충 바지만 걸친 행색. 흉터투성이의 근육을 훤히 드러낸 사내는 독한 화주를 들이켰다.
비단침보 위에 엎드린 채 관능적인 알몸을 드러낸 단발머리의 미녀가 그 모습을 보며 짓궂게 물었다.
“당신은 걱정도 안 돼?”
“뭐가?”
“귀영 말이야. 자타공인 천하제일인.”
“....”
뒷모습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내의 안색이 차갑게 식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눈매를 둥글게 휜 암야마독이 조롱하듯 말했다.
“그가 청성의 장문인을 만났잖아. 어젯밤에 말해줬는데 벌써 까먹었어?”
“까먹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을 뿐이지.”
“정말?”
“어차피 맹주는 내 차지니까.”
“아하, 귀영이 뭘 하든 맹주 자리를 차지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상대는 구파의 장문인인데?”
“그래봤자 한계가 뻔한 늙은이다.”
구파의 장문인이라고 해도 맹방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맹주가 되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
“설령 귀영이 그를 지지한다고 해도... 이송 본인은 맹주로서 그리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지. 사천 무림만이라면 몰라도 맹방들 전부가 그를 지지하진 않을 거다.”
“그럼 당신은 매력적이고?”
“물론이다.”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 광오하다고 해도 좋을 자신감이었다.
“내가 왜 멸마전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그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문다.
답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알기 때문에 다문 것이다.
“난 오래전부터 이때를 준비했다. 멸마전, 아니 외소림을 이끌었을 때부터.”
양지에서 활동하지 못한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소림의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해도, 사마외도의 무리를 격퇴하며 이름 석 자를 남겼다.
무림맹에 속하나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한 군소문파들.
힘이 없어 사마외도에 시달린 그들에게 꾸준히 은혜를 입히면서 명망을 쌓지 않았던가.
외소림이 해산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은혜를 잊은 자들도 있었지만, 멸마전의 이름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을 다시 찾아가서 주지시켰다.
지난날 맺은 은혜가 지금도 이어져 있다는 것을.
“무림맹이 구파와 팔가만 신경 쓰느라 쩔쩔맸을 때, 나는 군소방파들을 구원했지. 내가 그들의 유일한 우군임을 보여준 거다.”
“....”
“멸도가 이리 은퇴할 줄은 몰랐지만...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왔어.”
고개를 돌리며 씩 웃는 적미성의 모습에 암야마독은 졌다는 듯이 단발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 집요한 남자였을 줄은 몰랐네. 대체 얼마나 큰 그림을 그렸던 거야?”
“집념이라고 불러주면 좋겠군.”
“흠, 혹시 옛날에 날 꼬신 것도 계획이었어?”
“아니.”
대번에 부정하면서 매끈한 등골을 어루만진다. 암야마독 역시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옅은 비음을 흘렸다.
“하지만 네가 내 계획에 도움이 된 건 맞다. 그 난리통에서 도움이 될 것을 들고 오지 않았나?”
“하핫, 그땐 깜짝 놀랐지 뭐야.”
도둑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간드러진 웃음을 토한 암야마독이 입술을 핥았다.
“설마 광명마교에서 그런 비밀을 찾을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네가 가져온 정보는 요긴하게 쓰일 거다.”
“고생하며 얻은 정보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
“뭘 그렇게 봐?”
“아니, 그냥.”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어깨만 으쓱이자 암야마독이 까르르 웃었다.
“뭐, 당신이 시선을 끌어준 덕분이긴 해. 암만 나라도 그 복마전에선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한동안 어깨를 들썩인 그녀의 얼굴에 유혹하는 듯 요염한 미소가 피어오르는데 적미성이 몸을 일으켰다.
“뭐야? 벌써 가려고?”
“좀 있으면 중요한 손님을 만나야 한다.”
“누구?”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워든 적미성이 이빨을 드러냈다.
“날 지지하는 대상인들이지.”
* * *
무림맹에서 맹주전과 더불어 금지로 지정된 뇌옥.
고위직이라도 허가 없이는 못 들어가는 곳이었지만 강엽은 아무렇지 않게 출입했다.
“어, 어서 오십시오. 총군사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제갈의현이 강엽의 출입증을 발급한 만큼 절차상 문제가 될 것은 없는 마당.
긴장감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비빈 염소수염의 간수장이 헤픈 웃음을 지었다.
“찾으시는 죄인들은 현재 뇌옥의 가장 밑바닥인 무간(無間)에 있습니다. 한데....”
무심코 강엽의 뒤편을 본 간수장은 넋을 잃었다.
“그녀는 내 일행이오.”
이국적인 용모를 지닌 앳된 여인.
칙칙한 뇌옥이 한순간 밝아졌다는 느낌이 들 만큼 화사한 금발과 흰 피부를 지닌 아름다운 소녀였다.
“북해빙궁의 야율산산입니다.”
“아, 그, 그렇군요. 빙궁의 소궁주... 소저께서 오신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허둥대며 대답을 쥐어짠 간수장은 왜 빙궁의 소궁주가 이 험한 곳까지 왔는지 모르겠단 눈치였다.
그러다 야율산산의 용모를 보고 무언가 짐작이 갔는지 헛숨을 삼켰다.
“서, 설마...?”
“그 이상은 말씀하시지 않는 게 좋겠어요.”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감정한 목소리.
하지만 본능적으로 위험을 인지한 간수장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아, 아무렴요. 소,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극악무도한 죄수들을 잡아두는 뇌옥답게 안쪽의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춥고 어두운 건 물론, 쥐와 벌레도 심심찮게 출몰했던 것이다.
“그, 좀 불편하실 겁니다. 아무래도 마인들이나 무림공적들만 모아둔 곳이다 보니....”
간수장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이교의 죄인들! 너희가 세상을 망쳤다!”
“교주님을 시해한 자들! 하늘이 용서해도 우린 너흴 용서치 않아! 반드시 복수하겠다!”
뇌옥의 좌우에 자리한 창살들. 그 너머에 갇힌 죄수들이 창살을 흔들고 빈 틈으로 손을 뻗으며 욕설과 악다구니를 내뱉었던 것.
강엽을 알아보고 가래침까지 찍 뱉는 광경에 간수장이 해쓱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야, 이것들아! 일 제대로 안 해!?”
간수장의 호통에 헐레벌떡 달려온 간수들이 육각봉을 휘둘렀다. 욕지거리를 뱉으며 창살의 틈새로 손을 뻗은 죄수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했다.
야율산산이 이채를 띠며 물었다.
“저들은 광명마교의 잔당인가요?”
“예, 항주에서 생포한 놈들인데... 지금은 재판만 기다리고 있지요.”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나요? 저들도 무공을 익혔잖아요. 숫자도 많고요.”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간수장은 이제껏 새가슴처럼 굴었던 사람답지 않게 가슴을 당당히 펴고 자부했다.
“이 지하뇌옥엔 제갈세가의 술법진이 깔려 있으니까요. 수감되면 내공을 못 일으킵니다.”
지하뇌옥 전체에 술법진이 깔렸다는 말엔 야율산산도 기함을 금치 못했다. 빙궁에서도 이만한 규모의 술법진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만 믿진 않습니다. 보시다시피 죄수들의 발목에 철구를 달아놓지요. 저 철구만 해도 삼십 근이 훌쩍 넘습니다. 또 죄수들의 끼니에도 약을 치고요.”
“약이요?”
“몸을 나른하게 해주는 약이지요.”
비릿하게 웃으며 설명하는 간수장의 모습에 야율산산이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쳤다.
“제가 우문을 드렸네요.”
“허허, 아닙니다. 궁금해하시는 게 당연하지요.”
물론 이 와중에도 광명마교의 교도들은 난리를 치고 있었지만 간수들은 무자비하게 제압했다.
그 모습에서 자신감을 되찾은 건지 간수장은 처음보다 훨씬 당당해진 기색으로 말을 이어갔다.
“죄질이 심한 놈들은 처형될 겁니다. 어쩌면 사지근맥을 자를 수도 있겠지요. 다만 대부분은 단전만 폐하고 노역장으로 보낼 겁니다.”
“강제로 역을 지운다고요?”
“그렇습니다. 큰 공사에 동원되거나 광산처럼 일손이 부족한 곳에 투입되지요.”
언제까지라는 말은 없었다. 아마 웬만하면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지 않을까.
야율산산이 고운 얼굴을 찌푸렸지만, 빙궁 역시 죄인들에게는 엄격한 만큼 뭐라 하진 않았다.
“두 분이 찾으시는 죄인들은 가장 아래층에 있습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뇌옥. 그렇기에 무간이라 불리는 지옥.
횃불에만 의존한 채 아래로 내려간 두 사람은, 지하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한기를 느꼈다.
좀 전까지 신나서 떠들었던 간수장도 목울대를 꿀꺽 움직였다.
“...여기부턴 독방만 있습니다.”
“술법진이나 구속구만으로는 안 되지 않소?”
강엽의 물음에 간수장의 안색이 흐려졌다.
“원래 죄수들은 무간에 잘 오지 않습니다. 무간에 올 정도면 위험한 마인이나 무림공적일 텐데, 그런 놈들을 생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강엽도 현상금 사냥을 해본 적이 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이는 것보다 생포하는 게 몇 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여기에 들어오는 놈들이 종종 있지요. 반드시 생포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죽기 싫어 항복하는 놈들도 있으니까요. 그때는....”
철문 앞에 멈춰서는 간수장.
강엽은 그것이 만년한철로 만든 철문임을 직감했다. 같은 무게의 금괴보다 수십 배는 비싼 만년한철로 뇌옥의 문을 만든 것이다.
쾅쾅!
“들어간다, 죄수 이호!”
정해진 방식대로 기관장치를 만지자 내부에서 달칵 소리가 울렸다. 세 치나 되는 둔중한 철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내부의 정경이 드러났다.
“아아....”
야율산산이 탄식했다.
온몸에 구속구를 매단 여인의 모습. 눈과 입은 막혔고, 사슬로 몸을 결박당한 채 벽에 매달린 신세.
요강도 없는지 바닥엔 오래된 변이 딱딱하게 굳은 채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다.
사슬에 붙은 부적 다발을 본 강엽은 그것이 여인의 내공을 완전히 억누르고 있음을 알아봤다.
위층의 술법과 비슷하지만 훨씬 가혹한 주박술.
“...보통 이런 죄수들은 단전을 폐하고 사지근맥을 자릅니다. 다만 이번엔 그런 조치를 하지 않았지요.”
간수장은 이제야 왜 윗선이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겠다는 듯이 야율산산을 보았다. 무림맹이 빙궁을 배려해서 죄수를 봐줬음을 눈치챈 것.
다만 아무리 빙궁의 입김이 세도 마교를 증오하는 정파인들의 속성상 좋게 대우할 수는 없었다.
“우리끼리 얘기하고 싶소만.”
“아, 알겠습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간수장의 기척이 멀어지자 강엽은 손을 휘저었다. 바람이 불고 사슬에 붙은 부적들이 휘리릭 떨어졌다.
사슬이 춤추듯 너울지고, 얼굴을 가린 안대와 재갈이 풀리면서 퀭한 눈빛이 드러났다.
초췌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얼굴. 야율산산과 닮은 얼굴은 증오와 독기로 얼룩져 있었다.
“...날 비웃으러 왔나?”
“거래를 하러 왔다, 팔사도.”
“개소리를 하는군, 귀영. 교주님을 시해한 네 말을 들을 것 같아? 너도 마찬가지다, 산산.”
조카인 야율산산을 쏘아본 팔사도가 으르렁거렸다.
“수치 주지 말고 죽여! 대체 얼마나 날 욕보여야 만족할 셈이지? 자결조차 못하게 막아놓다니...!”
“그럼 당장 혀 깨물고 죽든가.”
시큰둥하게 받아친 강엽은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삐딱하게 선 채 팔사도를 응시했다.
“다만 거래를 받아들인다면 광명마교의 교맥은 끊기지 않게 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