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모략 (3)
넙죽 고개를 숙이는 금성좌의 모습에도 강엽은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한 가지는 확실하군. 저들은 한편이 아니야.’
일월신교라는 울타리에 묶이긴 했으나, 내부에선 계파를 이뤄 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교주위를 두고 두 후계자가 다툰다고 하던가.
‘이 여자는 두 후계자의 계파에 들어가지 않지만, 신녀와 같은 편도 아니다.’
신녀를 존중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을 굳이 언급한 이유.
그럼에도 강엽을 만나러 온 것은 어쩌면 금마의 비급을 회수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겠지.
만약 강엽이 금마의 비급을 갖고 있다면, 지지를 대가로 비급을 거래할 생각이 아니었을까.
한데 교주위엔 관심이 없다고 했으니 꽤나 당혹스러웠을 터.
그녀뿐 아니라 수성좌의 노안에도 곤란한 기색이 번졌다.
“...진심이십니까?”
“반대로 묻지. 일월신마공을 익혔다고 교도들이 내게 충성할까?”
강엽이 교인이었다면 얼마든지 충성을 끌어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외부인은 경우가 다르다.
“계파를 막론하고 반감을 갖는 이들이 나타날 거다. 심하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그건....”
수성좌도 반박하지 못했다.
물론 강엽의 신위라면 힘으로 찍어누를 수 있겠지만, 그래서야 점령군이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금성좌도 당황하여 물었다.
“그래서 교주가 되지 않겠다고, 요?”
시선을 의식하고 급하게 존대를 붙이는 게 퍽 우스웠지만 강엽은 웃지 않았다.
“내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골칫거리만 안겨준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지 않겠나?”
“역시 정파에 미련이...!”
“금성좌.”
수성좌가 이맛살을 찡그렸다.
“이제부턴 노부가 응대하겠소.”
“...뭐, 좋아.”
의외로 반발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나는 금성좌였다.
그녀 역시 반로환동을 겪은 노고수인 만큼 경험은 풍부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인의 경험.
오랜 세월 신녀를 보필한 수성좌에 비하면 정치적인 감각은 많이 떨어지는 편이겠지.
“소교주, 아니 강 무사의 말은 본교가 귀하를 원하도록 판을 짜야 한다는 뜻으로 들리는구려.”
좀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태도. 예를 다하긴 해도 강엽을 외인으로 대하고 있었다.
강엽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확실히 외인이라면 정통성을 인정받기 힘들겠지... 하지만 신녀께선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소.”
“어째서?”
“본교엔 일월구천관(日月九天關)이 있소.”
“처음 들어보는데.”
“본교의 교주가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오. 역대 교주님들 중에 일월구천관을 통과하지 않고 권좌에 오른 분은 없었소이다.”
“그 말은 두 계파의 후계자들 중 누군가가 통과하면 교주가 될 수 있다는 건가?”
“그렇소. 하지만....”
“통과하지 못했군. 아니, 차일피일 미뤘어.”
“...일월구천관에 두 번째 기회는 없소. 한데 통과하려면 일월신마공을 필수로 익혀야 하지.”
“일월신마공이 있어도 통과를 장담할 수 없고?”
“음, 유감스럽지만... 그렇소. 실제로 수많은 소교주들이 일월구천관에서 생을 마감한 탓에, 소교주를 교체한 적이 상당히 많소.”
“이해했다. 난 일월신마공을 대성했으니 통과할 수 있겠군.”
“그렇... 아니, 뭐라고 했소?”
귀를 의심해서 다시 물은 게 아니다. 그 같은 절세고수가 말을 허투루 넘길 리가 만무.
금성좌도 붕어마냥 입을 뻐끔거렸다.
“대, 대성이라고?”
“그래.”
양손의 장갑을 뺀 강엽은 태양과 달의 문양을 교차했다.
심상절예를 구현한 건 아니나, 그들쯤 되는 절세고수라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한 공력 파동.
음양의 심상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일월신마공을 대성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표일 터.
“오오...!”
“맙소사.”
수성좌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금성좌가 입을 가린 채 아연해한다.
두 사람을 호종하는 고수들은 엎드려 경배하며 교의 경문을 읊기 시작했다.
“일월성신의 가호 아래 정명한 길을 걸어가리.”
“중생의 삶은 운성(隕星)처럼 짧으매 덧없도다. 그러나 그 삶은 별처럼 찬란할지니. 덧없고 아름다운 별들이 모여 성운(星雲)를 이루는구나.”
“신인이시여, 별바다의 인도자시여...!”
일월신마공을 대성한 강엽을 신인으로 받드는 광신의 무리.
수성좌 또한 태도를 바꾸었다.
“신인이시야말로 본교의 정통한 주인이십니다! 신인이 아니면 그 누가 있어 본교를 이끌겠사옵니까?”
“저 여자도 그렇게 생각할까?”
지목을 받은 금성좌에게 쏠리는 시선들. 일월신교의 무리 중 유일하게 서 있는 자는 그녀가 유일했다.
수성좌는 물론 교도들의 눈초리마저 험악해지자 금성좌의 낯빛이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나, 난...!”
결국 사방에서 쏟아지는 압박을 견디지 못한 금성좌는 입술을 깨물며 똑같이 엎드렸다.
“금성좌 교아랑, 삼가 신인을 배알하옵니다. 아까 전의 무례는 용서해주소서.”
용서를 빈 건 똑같으나 태도는 천지차이.
그녀를 오시한 강엽이 천천히 다가와서 어깨에 손을 올리자 가녀린 몸이 움찔 경련했다.
“너를 보낸 자들은 소위 중립을 지키고 있겠지.”
“그걸 어떻게...?”
의아해하며 머리를 치켜들다, 강엽과 시선이 얽히자 황급히 눈을 내리까는 모습.
두 성좌를 비롯한 교도들을 두루 살핀 강엽은 뒷짐을 지며 그들 사이를 거닐었다.
“난 마도를 적으로 두었다. 광명마교를 멸문시켰으며, 그전엔 혈교의 교왕들과 요선을 죽였지.”
이 자리에 있는 이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강엽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난 혈교와 전쟁을 벌일 거다. 내가 교주가 된다면 필히 일월신교는 피를 흘리겠지. 그런데도 나를 교주로 받들겠단 생각이 드나?”
“모든 것은 신인의 뜻대로. 당신은 별바다의 인도자. 이 땅에 우리의 역사를 남길 수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내가 인신공양처럼 극악한 의식을 금하고, 금기를 범한 자들을 벌하겠다고 하면 어쩔 거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입니다. 현재 두 후계자는 대권에 눈이 멀어 외부의 마인들을 닥치는 대로 영입하고 있는데, 놈들로 인해 신교의 물이 흐려지고 있나이다.”
“그렇군. 소위 중립파는 교의 물이 흐려지는 것을 염려해서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는 쪽인가?”
느닷없이 화살을 맞은 금성좌는 못내 체념한 어조로 질문에 답했다.
“...그렇습니다. 중립파는 전통을 견지하는 입장. 두 후계자의 세력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통이라. 나는 외인이니 정통성이 떨어지는군. 중립파에서도 의견이 분분했겠어.”
“며, 면목이 없습니다.”
“금마의... 아니, 철금신공을 주지.”
“...!”
“보아하니 비급의 일부가 유실되어서 금강불괴를 익히지 못한 것 같은데 맞나?”
“맞습니다! 금마, 그 찢어죽일 배신자 새끼가 사부님을 살해하고, 비급을 훔치는 바람에 저희 무맥이...!”
피가 거꾸로 솟았는지 육두문자를 뱉은 금성좌는 수성좌의 눈총을 받고서야 아차 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해한다.”
실수를 눈 감아주겠다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린 것도 잠시. 그녀는 이어지는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중립파가 내게 호감을 품도록 만들어라. 설득을 하든 공작을 꾸미든 상관없어. 비급은 일을 완수하면 보상으로 내리겠다.”
“아...!”
비록 두 후계자의 세력엔 못 미칠지라도 중립파 역시 세력 구도에서 큰 지분을 차지했을 터.
강엽은 그 점을 꿰뚫어보고, 금성좌로 하여금 중립파를 설득하도록 종용한 것이다.
두 성좌 역시 그걸 깨닫고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강엽은 선수를 치듯 말을 이었다.
“교주가 될 마음이 없다고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예!? 그, 그럼...?”
말이 앞뒤가 다르지 않은가.
“정확히 말하면 ‘아직’ 없는 거지. 내가 교주가 될지, 아니면 다른 자를 교주로 세울지는 차차 생각해보지. 다만 근시일 내로 일월신교를 찾아갈 생각이다.”
일월신마공을 대성한 강엽 말고 누가 교주의 좌에 오르겠나. 두 성좌는 계파는 달라도 똑같은 마음을 품고 눈빛을 교환했지만,
“삼가 신인의 뜻을 받드옵니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결국 강엽의 말대로 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다는 걸 깨닫고 머리를 조아렸다.
고개를 끄덕인 강엽이 이어 말했다.
“일월신교 내부의 세력 구도에 대해, 두 후계자에 대해 말해봐라. 그래야 나도 판을 짤 수 있으니.”
* * *
두 성좌가 물러난 뒤 강엽은 생각에 잠겼다.
‘일월신교라....’
언젠가는 가야겠지만, 아무래도 예상보다 더 빨리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내에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된다고 했던가.
교주위를 다투는 두 계파의 후계자, 그들의 진영에 합류하는 사마외도의 마인들.
그중에 혈교의 세작들이 섞였다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었다.
신녀를 비롯한 상층부도 정확히 누가 세작인지, 어떤 후계자가 혈교와 손을 잡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곳곳에서 발견되는 혈교의 흔적이, 사태를 방관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뿐.
‘하지만 지금은 무림맹의 일이 더 급해.’
맹주가 몇 달 동안 정양해야 할 만큼 깊은 내상을 입으면서 차기 맹주의 선출이 불가피해졌다.
팔이 잘린 거야 본인이 적응하면 무위를 되찾을 수 있다지만,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평화의 시기도 아니고 난세에 맹주가 수련을 위해 폐관수련에 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모처에선 맹방들이 차기 맹주위를 놓고 이합집산하며 암중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누가 맹주가 되든 상관없지만, 적미성이 맹주가 된다면 바로 전쟁을 선포하겠지.
혈교와의 전쟁은 강엽도 바라는 바지만, 접근 방식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적미성이 연일 무림맹의 명숙들과 만나면서 선제공격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홍가려가 보낸 하오문의 당주. 야심한 밤이었지만 강엽은 숙소에 오자마자 그와 만났다.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자신이 혈교의 총단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고 합니다. 총단을 둘러싼 술법진을 파훼할 방법도 알고 있으니, 기습하면 혈교를 쓸어버릴 수 있다고 장담하더군요.”
“그 주장에 호응하는 세력은?”
“신흥세력이 지지하고 있습니다.”
차를 들이킨 당주가 설명을 이어갔다.
“지난날 맹주님께서 정예 고수들만 이끌고 항주를 기습했던 일에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구파와 팔가가 타격을 입어서 그들의 입김이 커지긴 했지만, 이렇다 할 공적을 세우진 못했으니까요.”
“그들의 지지가 도움이 되겠소?”
“무림맹은 구파와 팔가의 것만이 아니니까요.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표를 행사한다면... 자신들 입맛에 맞는 맹주를 선출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진 문파간의 은원이나 이권 때문에 하나로 뭉치지 못했지만, 마교와의 전쟁이 모든 걸 흔들고 있었다.
“강 무사님도 아시다시피 구파와 팔가는 예전만 못합니다. 남궁세가는 멸문했고, 점창파와 모용세가는 큰 타격을 입었지요. 공동파와 산동악가는 수장을 잃었습니다.”
구파와 팔가 아래에서 호시탐탐 그들의 자리를 노리던 자들에겐 다시 없을 호기였다.
“본문이 알아낸 바로는 구양세가와 진주언가(晋州言家) 등이 중심이 되어 적미성을 밀어주고 있습니다.”
“구양세가라면 호광의...?”
“예, 강 무사님도 그들과 인연이 있으시지요. 조천방과 거룡방의 방파대전에서 구양세가가 거룡방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습니까?”
장강의 조운을 장악하기 위해 거룡방이라는 괴뢰를 세워 장강의 조운방들을 합병했던 사건.
그간 많은 일을 겪어서 잊긴 했지만, 구양세가의 암검들과 싸우지 않았던가.
“모용세가가 타격을 받았으니 이 기회에 호남으로 진출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신임 맹주가 그들의 뒷배가 되어준다면 든든하겠지요.”
“모용세가가 약해졌어도 만만치는 않을 텐데.”
“태상가주가 이번 전쟁에서 내상을 입고 금분세수를 한다고 합니다.”
현 가주는 정도십대고수에 들지 못했으니, 태상가주만 물러나면 해볼 만하다고 본 것이리라.
“그럼 진주언가는 뭐요?”
“하북의 대가문이지요. 전성기엔 팔가에 들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팽가에 눌려 지냅니다.”
“맹주가 은퇴하니 기를 펴고 싶다?”
“그렇겠지요. 기실 적미성을 지지하는 세력들 대부분 비주류로 밀려난 세력입니다. 다만 그 숫자가 많아서 만만히 볼 수 없습니다.”
“....”
강엽이 팔걸이만 툭툭 치자 하오문의 당주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강 무사님은 누굴 지지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난 맹원이 아니라서 표도 없소만.”
“무슨 말씀을.... 강 무사님께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신다고 선언만 하시면 민심이 요동칠 겁니다.”
명실상부 광명마교주를 꺾은 천하제일인.
구파와 팔가, 낭인전과 하오문과 두루 인연을 쌓은 그가 움직인다면 그 파급력은 얼마나 클 것인가.
만약 무림맹에 입맹하고 맹주의 자리에 도전하면 돌풍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일.
“하오문은 누굴 지지하고 있소?”
“으음....”
당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사지간인 그들이라면 특정인을 지지하는 대신 후보들 모두와 정보를 거래하며 실리를 취했을 터.
“...본문은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나도 그렇소.”
강엽은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래서 이제부터 후보들을 만나볼 생각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