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모략 (2)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는 연회.
악공들과 예인들을 불러 흥청망청 놀진 않을지언정 연회 자체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산 사람들이 죽은 이들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던 것.
잠시 변소를 핑계로 자리를 비운 강엽은 경로를 이탈하여 한갓진 길로 빠졌다.
죽림 뒤편에 있는 한갓진 호수.
밤하늘에서 은은한 빛을 내리쬐는 달을 구경할 수 있는 장소에 익숙한 뒷모습이 있었다.
긴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한 녹색 궁장의 여인. 그녀의 옆에 온 강엽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호수의 수면에 반사된 달빛이 이지러진 광경.
“...오실 거라 생각했어요.”
분홍빛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감정을 반영하듯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완 노사님이 말씀하셨어요. 강 무사님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알아차리실 거라고.”
“완안극이 알고 있었단 말이오?”
강엽의 눈빛이 변했다.
그러고 보면 항주의 대전이 끝난 후로 완안극은 줄곧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렸기에 의아하게 여겼는데 그게 당묘정의 일 때문이었다면....
“제가 말씀드리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강엽이 끝까지 추궁했다면 완안극도 실토했겠지만, 아무래도 남녀의 일인 만큼 자신이 함부로 끼어들 수 없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내가 그때 느낀 게 착각이 아니었군.”
적미성을 쓰러트리고 도시로 돌아왔을 때, 흡혈귀의 기척을 느끼고 당묘정이 있는 약방을 덮쳤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었다.
진조 역시 너무 미약한 기척이었기에 착각했을 수 있다고 조언했고.
하지만 착각한 게 아니었다.
‘혼자면 몰라도 두 명이 같은 기척을 느꼈는데 오판했을 리가 없지.’
그 뒤로는 별다른 기척을 느끼지 못해서 뒷전으로 미뤘지만, 당시의 기억은 지금도 또렷했다.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소?”
“그건....”
“혼자 끙끙 앓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내가 그 아이를 부정할 것 같았소?”
“...혼란스러웠어요.”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감정. 입술을 깨무는 당묘정의 모습에 강엽은 말문이 막혔다.
“강 무사님을 어떻게 봐야 할지, 사람들이 저희를 어떻게 볼지, 가문과 아버지는 어떻게 나오실지....”
“....”
“심지어 그날 일은....”
강엽을 살리기 위해서였다고는 하나 그의 의사가 개입된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지 않았나.
그러나 강엽은 고개를 저었다.
“당 소저가 날 살리기 위해 무얼 희생했는지 알고 있소. 내가 소저를 버리는 일은 없을 거요. 조만간 당문주님을 찾아가서 허락을 구하겠소.”
안심시키기 위해 품에 안자 당묘정은 가늘게 떨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머릿결에선 난꽃향이 풍겼다.
그렇게 한참을 토닥이고 있는데, 별안간 당묘정이 품을 벗어나며 멋쩍어했다.
“...근데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허락부터 구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야....”
강엽이 대답하지 못하고 침음하는데, 대나무숲 사이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나왔다.
“기가 차서 진짜. 하도 안 와서 찾았는데 여기서 다른 여자랑 노닥거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러게 말이야. 이거 그냥 두면 안 되겠는걸?”
한 손을 허리춤에 올린 채 삐딱한 표정을 짓는 백서희와 뜻 모를 미소를 생글생글 흘리는 조영옥의 모습.
강엽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어, 그게....”
머릿속에선 천 마디 말이 맴도는데, 막상 입은 아교를 칠한 것마냥 꿈쩍도 않는 게 아닌가?
쌍심지를 켠 백서희가 바짝 다가와서 강엽의 양쪽 뺨을 한껏 늘렸다.
“변명해 보셔, 바람둥이.”
“아픈데....”
“구라치네.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불괴의 능력 때문에 아프진 않아도 말하긴 불편했다.
조영옥에게 눈길을 보냈지만 그녀 역시 어깨만 으쓱일 뿐 나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뭐, 저는 저번에 말한 게 있으니까요. 그래도 백 동생은 마음 많이 상했으니까 달래주세요.”
“미안하다.”
“...흥.”
못 이긴 척 강엽에게 안긴 백서희가 한껏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다 들었거든? 그, 당 소저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당묘정만 흘깃거리는 백서희의 모습에 강엽은 쓰게 웃었다.
“조만간 날 잡고 식 올리자.”
“내 말이 그런 뜻은 아니잖아.”
“이젠 괜찮아.”
흡혈귀가 아이를 갖기 힘든 것은 특유의 기운이 음한지기로 치우쳤기 때문인데, 음양오행의 기운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그럴 염려가 사라졌다.
‘진조와 예사란의 경우는 좀 특별한 것 같지만....’
진조와 예사란 역시 아이를 갖기 힘들었던 것은 흡혈귀의 음기와 가루라의 양기가 상극이었기 때문.
강엽은 음양오행의 기운을 조절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으니 그들과 같은 문제를 겪진 않을 것이다.
아마 당묘정이 아이를 가진 건 당시 음양의 균형이 무너진 게 원인이 아니었을까.
“정말이지?”
“그래.”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백서희는 믿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엽의 몸을 껴안았다.
그때 조영옥이 물었다.
“근데 어떻게 된 거예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지난날 호광성에서 겪은 일을 설명하는 당묘정.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두 여인의 안색은 수시로 변했다.
이윽고 얘기가 다 끝나자 백서희가 한숨을 쉬었다.
“좋아. 괘씸하긴 하지만... 너도 불가항력이었으니까 한 번만 넘어가준다.”
한참이 지나서야 떨어진 백서희는 어정쩡하게 선 당묘정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어요. 진작에 알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백 소저, 저는....”
“그만. 그땐 방법이 없었잖아요. 저는 마의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그 자리에 없었고요.”
“그래도 상공에게 마음은 있었죠?”
조영옥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묻는 말에 당묘정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그, 그게, 그러니까...!”
“뭐, 결과적으로 이렇게 됐으니 어쩌겠어요. 앞으로 오순도순 잘 살아봐야지.”
“아, 네. 자, 잘 부탁드릴게요.”
“당문주를 설득하는 게 일이긴 한데... 그거야 상공이 알아서 하실 일이고. 가족이 됐다고 생각하고 편히 동생이라 불러도 될까요?”
나이로 봐도 조영옥이 가장 많았고, 당묘정이 가장 어렸으니 자연스레 호칭이 정해졌다.
눈시울이 붉어진 당묘정이 얼른 대답했다.
“물론이죠, 언니들.”
“한 식구가 된 걸 환영해, 동생.”
“크흠, 그래도 서열 일 위는 나야.”
기어이 한마디 얹는 백서희의 모습에 강엽은 황당했지만, 그녀가 눈을 부라리자 조용히 먼 산을 돌아봤다.
원래 죄인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법.
‘앞으로 엄청나게 고생하겠군....’
백서희는 물론, 조영옥도 당묘정이 먼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못내 섭섭한 눈치였다.
* * *
피곤하다는 핑계로 먼저 자리를 빠져나온 강엽은 당묘정을 당문의 장원 인근까지 바래다주었다.
“며칠 내로 다시 오겠소.”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리고....”
붉어진 얼굴로 머뭇거린 당묘정은, 이내 굳게 결심한 얼굴로 강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정매라고 불러주세요. 저도 여, 엽랑이라고 부를 테니까....”
“알겠소.”
강엽은 실소를 흘리며 당묘정을 가볍게 안았다. 부끄러워하는 그녀에게 살짝 입을 맞춘 뒤 저편으로 보내는데, 그녀가 옅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마중을 나온 당문의 고수들이 당묘정을 데려갈 때까지 자리를 지킨 강엽은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시선을 들어올렸다.
“.......”
나뭇가지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는 야조(夜鳥). 녀석은 사람과 마주하고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강엽은 야조의 눈동자에서 어떤 의지를 느꼈다. 그렇지 않고선 주루와 죽림, 그리고 당문의 장원까지 따라올 리가 없지 않은가.
한동안 강엽과 눈싸움을 한 녀석이 푸드덕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유려하게 허공을 돌면서 날카롭게 울더니 하늘 높은 곳으로 날아간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한 느긋한 태도.
그래도 보통 사람이라면 쫓지 못하겠지만 강엽은 여유롭게 속도를 맞추었다.
무림맹의 성벽을 넘어 어느 이름 모를 야산에 도착할 때쯤에야 야조는 속도를 줄였다.
미리 그 장소에 대기하고 있던 익숙한 면면들을 돌아본 강엽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당신들이 여기에 올 줄은 몰랐는데...?”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변복을 했지만, 관운장처럼 덥수룩한 수염과 짙은 홍안은 감출 수 없었다.
지난날 태화문의 내전이 일단락된 뒤 찾아왔던 일월신교의 무리들.
당시 신녀를 보필했던 수성좌가, 무림맹의 앞마당까지 일단의 교도들을 이끌고 온 것이다.
“...수성좌 이홍장이 삼가 소교주님을 뵙나이다.”
“소교주?”
“예, 아직 보위에 오르지 않으셨으니... 일단 소교주라 불러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하여....”
경어를 쓰는 게 어색한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수성좌의 모습.
강엽은 그러한 태도를 지적하는 대신 이 자리에 없는 신녀에 대해 물었다.
“신녀는 일월신교에 있나?”
“...그렇습니다.”
“그래도 되나? 아무리 신녀가 존귀한 신분이라도 호위가 없다면 여차할 땐 위험할 텐데?”
“신교엔 저 말고도 강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수성좌의 자리를 채울 수 있는 자들은 거의 없겠지. 게다가....”
일부러 말을 끊은 강엽은 수성좌의 뒤편에 선, 그를 향해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는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인과 소녀의 경계에 있는, 얼핏 보면 이제 막 방년의 나이가 된 여인. 나름대로 기파를 감춘 모양인데 강엽의 기감을 피할 순 없었다.
“또 다른 칠성좌까지 데려왔다면 신녀의 곁엔 그 급의 고수가 전무할 것 같은데.”
“...인사드리시오, 금성좌(金星座).”
일월신교를 대표하는 일곱 명의 절세고수.
그중 하나인 금성좌가 이토록 어린 여인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니군. 반로환동을 했어.’
염왕 이후 두 번째로 만나는 반로환동의 고수.
금성좌라 불린 여인이 질겅질겅 씹던 풀잎을 퉤 뱉고 불량스러운 태도로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다, 귀영. 금성좌 교아랑이다.”
“금성좌!”
수성좌가 힐난하는 태도에도 금성좌는 삐딱한 자세로 콧방귀를 뀌었다.
“시끄러워. 난 아직 인정하지 않았어. 애초에 정식으로 소교주위에 오른 것도 아니잖아?”
“하오나 신녀께서 그를 인정하셨소!”
“그렇지. 그러니까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 보려고 천산에서 머나먼 정주까지 온 거잖아? 신녀를 존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오지도 않았어.”
마치 신녀의 부탁 때문에 마지못해 왔다는 언동. 그 말에 강엽이 피식 웃자 금성좌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내 말이 우습나?”
“말은 바로해야 하지 않나?”
“음?”
“내 지위와 상관없이, 금마를 죽인 인간을 확인하려고 왔다고 말이야.”
“...!”
금성좌의 아미가 위로 휘어지고, 수성좌 또한 무거운 침음을 흘리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숨 몇 번 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금성좌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동종의 기운을 익혔으니까. 철금신공이었던가? 쇠를 먹어서 몸을 금강불괴로 만들어주는 마공이었지.”
“마공이 아니라 신공이다. 그리고 금마는 내가 죽였어야 했다. 넌 내 사냥감을 빼앗아갔어!”
“그래서 내게 죄를 묻겠다?”
“...하나만 더 묻지.”
눈을 치켜뜬 금성좌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금마를 죽인 뒤에 그의 비급을 얻었나?”
“비급이라....”
강엽은 몇 달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막 심극의 경지에 올랐을 무렵 조우했던 사대악인.
금강불괴의 공능으로 무장했던 금마는 강엽도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쓰러트릴 수 없는 강자였다.
“철금신공엔 관심이 없어서 알아볼 생각도 못했군. 놈의 시체엔 비급이 없었다.”
“젠장, 다른 데 보관해놨나? 엉뚱한 놈들이 찾으면 안 되는데....”
“다만 구결은 알고 있지.”
“...!?”
“보아하니 비급을 찾는 것 같은데. 단순히 사문의 무공을 회수하려는 이유 때문은 아닌 것 같군. 당신은 반로환동을 이뤘지만 금강불괴를 이루진 못했어.”
“...그걸 보기만 해도 안다고?”
아연해진 금성좌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으르렁거렸다.
“아니, 질문의 순서가 잘못됐군. 비급을 못 찾았다면서 구결은 어찌 알고 있지?”
“놈의 기억을 헤집었다.”
상상도 못한 대답에 금성좌가 눈을 껌뻑이는데, 강엽은 손바닥을 살짝 들어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경맥을 따라 장심으로 이동한 혈공진기가, 머릿속 구결의 형태로 붉은 글자를 그린다.
“아, 아니! 그건...!”
“이제 자신의 처지를 좀 알겠나?”
물론 금성좌는 반로환동까지 한 노고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무례를 이해해줄 생각은 없다.
교주가 되진 않는다고 해도, 천산에 숨겨진 안배를 찾으려면 일월신교의 협조가 필요한 바.
금마가 일월신교의 금성좌와 동문이었을 줄은 그의 기억을 헤집을 때도 몰랐지만,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이용해먹어야겠지.
“미리 경고하는데, 힘으로 협박할 요량이라면 금성좌고 뭐고 봐주지 않겠다. 난 애초에 일월신교의 교주가 될 생각이 없어. 그쪽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일 푼도 없지. 그 반대라면 모를까.”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금성좌의 모습에 강엽은 할 말을 잃었다.
수성좌도 당황하며 한탄했다.
“이런 줏대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