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모략 (1)
“...아직도 믿기지가 않소.”
그윽한 차향이 풍기는 고즈넉한 다관.
서녘으로 저무는 황혼이 보이는 창가 자리의 손님들은 감회 어린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광명마교가 멸문했다니... 무려 천 년간 이어진 마교가 우리 시대에 끝났다니 현실감이 흐려지는 기분이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 않나. 흑룡교도 멸문했는데 광명마교라고 멸문하지 말란 법은 없지.”
“그렇기에 하는 말이오. 저자에 도는 소문을 들으셨소? 우리 시대에 마교들이 전부 망할 거라 하더구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렇게 두 사람이 난색을 표하고 있는데 혈기왕성한 젊은이가 끼어들었다.
“안 될 건 또 뭡니까?”
“그럼 자넨 가능하다고 믿나?”
“일월신교는 교주위를 둘러싸고 내전을 벌이느라 쇠약해졌습니다. 혈교 또한 사천혈전으로 인해 팔대교왕 절반을 잃었고요. 두 마교 모두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요. 마도를 멸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일리 없는 말은 아니었기에 동석한 두 사람도 딴죽을 걸진 못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백발의 노야가 주변을 힐끔거리다 목소리를 확 낮추었다.
“그보다는 신임 맹주의 건이 더 급선무일세.”
“으음...!”
“멸도가 맹주위에서 물러나겠다고 천명했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일사도와의 싸움에서 크게 다쳤으니....”
“그 정도요? 몇 달 정양하면....”
“팔을 잃었다고 하더군.”
“...!”
“지금 맹주가 정말로 은퇴하시면 새로운 맹주를 뽑을 걸세. 무림맹의 행보는 그 뒤에 결정되지 않겠는가?”
“...누가 입후보할까요? 노야께건 짐작가시는 인물이 없습니까?”
“글쎄.”
노야라 불린 백발의 노인은 쓴웃음만 지었다.
“팔존들 중에도 마땅한 인물이 없구먼. 낭왕은 무림맹의 인사가 아니니 맹주가 될 수 없고, 신유 또한 정사중간의 인물이지.”
어쩌다 보니 백도 정파의 팔존은 죄다 은퇴하거나 세상을 등졌으니 새로운 인물들을 뽑아야 할 터.
세 사람이 정도십대고수 중에서 몇 사람의 이름을 거론했지만 마땅한 인물은 없었다.
“흠흠, 이건 아는 사람에게 들은 건데....”
“오, 뭔가 아시는 겁니까?”
“노야, 저희에게도 알려주십시오.”
“그럼세. 항주의 대전에서 소림의 고수가 나타났다고 들었네. 그는 불권의 제자인데, 삼십 년 전에도 혈교를 토벌했다고 하더군.”
“예?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까?”
“불권의 제자가 무명일 리가 없을 텐데....”
두 사람이 아연해하자 노인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반쯤 식은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자네들 외소림이라고 아는가?”
“외소림이라면....”
“살계를 열지 못하는 소림승들 대신 암중에서 사마외도를 척결했던 협사들이지. 그들은 소림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수많은 무림공적들을 쓰러트렸네.”
“그런 자들이 왜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말하지 않았나. 암중에서 싸운 사람들이라고. 소림의 무공을 익힌 이들이, 비록 사마외도라고 하지만 대놓고 인명을 해친다면 세간의 질타를 받지 않겠는가?”
“과연...!”
“듣자하니 항주의 대전에서 그가 가공할 신위를 보였다더군. 일사도와 괴뢰마를 제압했다고 하네. 그전엔 소림을 침범한 괴물을 쓰러트렸고....”
“괴물은 또 무엇이오?”
“노부라고 알겠나. 여하튼 그 인물이 하마평이 무성하니 알아두게.”
“그자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청년의 물음에 노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권패(拳覇) 적미성.”
“권패, 권패라... 기억해야겠군요.”
그렇게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세 사람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다관은 한동안 시끄러웠다.
해가 기울고, 손님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적막해진 가운데 여종업원이 한 군데를 힐끔거렸다.
구석진 곳에 손님이 한 명 남아 있었던 것.
호로록.
은어처럼 섬세한 손가락. 찻잔을 잡은 여인은 말없이 차를 홀짝이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권패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아니 끝났기에 오랫동안 고여 있던 무림에도 변화가 오고 있었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고, 새로운 강자들이 선배들의 자리를 차지한 격변의 시대.
그녀가 하루 내내 생각했던 남자 역시 그 자리에 앉겠지.
그렇게 마지막 남은 찻물을 목구멍에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당 소저.”
당묘정은 막 다관에 올라온 사내를 돌아보았다.
철탑처럼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답지 않게 멋쩍어하는 얼굴로 포권을 하고 있었다.
“황보 공자께서 여긴 무슨 일로...?”
해가 저물면서 손님들도 다 떠난 마당이 아닌가. 게다가 그녀가 알기로 황보진악은 차를 즐기지 않는다.
“아, 그, 그게 근처를 지나다가 우연히 당 소저의 얼굴을 봤지 뭐요. 그래서 같이 가려고....”
“어딜요?”
“아, 듣지 못하셨소? 전쟁이 끝난 기념으로 용봉지회를 열기로 했잖소. 죽은 친구들의 넋도 기리고....”
“아.”
그러고 보니 약속 날짜가 오늘이었던가. 요 며칠 고민이 깊어서 깜빡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요즘 술을 멀리해서....”
아무래도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함이니 거절하는 것 자체가 큰 실례였다.
“음, 그래도 자리에 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이오. 당 소저에게 신세를 진 친구들도 많으니까.”
척마대의 일원으로 싸웠던 이들 대부분이 당묘정에게 목숨빚을 진 만큼, 그녀가 술을 안 마신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묘정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전 갈 수 없을 것 같네요. 모임 주최자들에겐 추후에 따로 사과 편지를 보내겠다고 전해주세요.”
“아, 그, 그렇소?”
완곡한 거절에 황보진악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에라 모르겠다는 얼굴로 당묘정의 앞에 털썩 앉았다.
“황보 공자?”
“결례를 용서해주시오.”
그러더니 종업원을 불러 새로운 차를 부탁한다.
얼마 남지 않은 마감시간 때문에 종업원의 얼굴에 탐탁치 않은 기색이 스쳤지만, 곧 상대의 신분을 헤아리고는 다관 주방으로 쏙 들어갔다.
종업원이 차를 내올 때까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다리를 떨던 황보진악은 뜨거운 차를 쭉 들이켰다가 앗뜨뜨 하며 내려놨다.
“켁! 혀, 혀가...!”
“여기요.”
당묘정이 건넨 냉수를 쭉 들이키고 나서야 안도하는 황보진악의 모습.
황보세가의 외공이 강철마냥 탄탄하다지만 혓바닥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가, 감사하오. 후우, 혓바닥 익을 뻔했네.”
한바탕 촌극에 당묘정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음, 그게 말이오.”
기세 좋게 앉은 것치고는 말이 굼뜨다. 하지만 당묘정은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황보진악이 침을 삼키고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려고 하오. 오래전부터 소저를 흠모해왔소.”
“....”
당묘정이 멈칫했다.
황보진악의 고백이 의외는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징조는 이전부터 있었으니까.
다만....
“미안해요.”
그녀는 그 마음을 받을 수 없었다.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으니 황보진악의 입장에선 화가 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할 터.
그러나 황보진악은 쓴웃음만 지었다.
“...왠지 이럴 것 같긴 했는데.”
“황보 공자가 싫어서는 아니에요. 오히려 황보 공자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진심이었다. 신분이나 무공을 떠나서 황보진악은 진솔한 사람이었으니까. 지나치게 호탕한 게 흠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조차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전 공자의 마음을 받을 수 없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다른 이를 마음에 두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
당묘정은 침묵했지만, 그 무언이야말로 시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황보진악이 씁쓸하게 말했다.
“누군지 알 것 같구려.”
“황보 공자, 저는....”
“그럼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예?”
“당 소저가 왜 여기서 청승이나 떨고 있는지 모르겠소. 그 친구에게 가서 부딪쳐야 할 거 아니오?”
“그, 그게...!”
“갑시다! 그 친구도 용봉지회에 오기로 했소. 술은 안 마시더라도 말은 걸어보시오. 뭐가 무서워서 말도 안 하는지 모르겠지만, 끙끙댄다고 해결되는 건 없소! 시원하게 깨지더라도 일단 부딪쳐봐야지!”
아무래도 황보진악은 뭔가 오해한 것 같지만, 당묘정은 저간의 사정을 말할 수 없었다. 황보진악의 성정상 가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 * *
그 시각 강엽은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그렇구려. 대사형이....”
척마대의 일원으로 싸우다 전사한 야차마곤.
그가 남긴 유품을 수습하기 위해 장경과 함께 무림맹에 온 전강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대사형은 옛날부터 고집불통이었지. 사마외도를 척결하는 일엔 타협하지 않은 외골수였소.”
손에 쥔 흑곤을 복잡한 표정으로 보는 전강.
그는 몇 남지 않은 사형제들이 멸마전이라는 방회를 세워 활동하고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착잡해했다.
“외소림이 어찌 해산되었는지 아시오?”
“일전에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고향의 스승님께서 적미성과 구면이더군요.”
스승인 송계학에게 들은 얘기를 들려주자 전강은 다시 한번 시름 섞인 한숨을 뱉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려. 강 무사의 현사(賢師)께서 대사형과 연이 있을 줄은 몰랐소.”
당시에 전강은 너무 젊었기에 사형들의 개인사까지 알지는 못했다. 싸울 때 외에는 수련을 하거나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하며 소일했기 때문이다.
“대사형을 어쩔 심산이오?”
광명마교주가 죽은 지금은 강엽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
그가 명분을 무시하고 움직인다면....
“당분간은 내버려둘 겁니다.”
“그냥 지켜보겠다는 말이오?”
“솔직히 그가 한 짓은 지금도 짜증나긴 합니다. 기껏 밥상을 차렸는데 엎어버린 꼴 아닙니까?”
항주의 싸움이 끝나고 한 달이 좀 안 되게 지났지만, 당시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만약 백서희가 광명마교주를 막지 않았다면 실로 무지막지한 대참사가 벌어졌을 터.
결과적으로 광명마교를 부활의 여지 없이 멸문시키긴 했으나 하마터면 일을 그르칠 뻔했다.
“그런 놈이 영웅 놀음을 하는 꼴이 어이없긴 한데....”
이제 와서 암야각의 일을 들먹여봤자 효과는 미비하겠지. 다만 강엽이 손 놓고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상당히 모였겠지.’
하오문을 통해 부탁한 적미성의 과거. 그가 음지에서 암약했다면 하오문의 이목을 피할 수 없었다.
신분을 숨기던 때라면 모를까, 신분이 특정된 이상 과거를 역추적하면 놈이 저지른 일들을 알 수 있을 터.
당장 장경만 해도 외소림에 의해 가문이 짓밟힌 아픈 과거가 있지 않던가.
그 외에 강엽이 파악한 것만 해도 꽤 많았다.
잘하면 무력을 쓸 것도 없이 정치적으로 실각시킬 수 있을 정도로.
그때 전강이 물었다.
“혹시 강 무사는 맹주가 될 생각이 없소?”
지나치게 젊긴 해도 무공과 공적을 생각하면 맹주에 도전할 만했다. 어쩌면 현 맹주인 팽무강 역시 강엽을 지지할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 강엽은 고개를 저었다.
“저와는 안 맞는 자리입니다.”
맹주가 되면 운신에 제약이 생긴다. 언젠가 일월신교로 가야 할 텐데 그땐 뭐라고 둘러댈 건가.
‘그래서 염왕한테 제안한 건데....’
원래는 맹주 역시 염왕에게 자신의 후임을 권했지만, 염왕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다시 한번 그딴 말을 하면 떠나버리겠다면서.
“그럼 전 약속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알겠소. 나중에 봅시다.”
* * *
“떠나간 친우들을 위하여-!”
주관자의 건배사에 참석자들이 똑같이 화답하며 술잔을 바닥에 던져서 깼다. 술잔을 깨서 죽은 친우들을 기념한다는 뜻이라나.
“솔완주(摔碗酒)라는 의식에서 본땄어요. 원한이 깊은 두 권력자가 술잔을 깨고 화해했다는 고사에서 따온 건데... 그냥 멋있다고 가져온 거죠.”
남궁상아의 설명에 강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비롯한 일행 또한 초대를 받고 왔다.
다만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과 섞이는 대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끼리 모여 있었다.
문득 하후진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럼 우리도 술잔을 깨야 하나?”
값비싼 술잔을 부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까웠던 모양이다.
청수가 피식 웃었다.
“값은 용봉지회에서 낼 겁니다.”
“오.”
눈을 반짝인 하후진이 술잔을 던져 깨부쉈고, 일행 역시 술잔을 깨부수며 의식에 동참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
“우리가 산 건... 운이 좋아서였지. 우리도 까딱하면 여기 없었을 거야.”
“맹주님이 안 계셨다면 그랬겠죠.”
청수도 동감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맹주와 함께 일사도와 싸웠고,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급급했다.
“구파의 장문인들과 팔가의 가주님들 중에도 돌아가신 분들이 계셨으니....”
공동파의 광악 진인과 산동악가의 가주가 전사했고, 십이전대의 대주들도 세 명이 죽고 네 명이 은퇴해야 할 만큼 중상을 입었다.
연가휘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살아남은 게 어디입니까.”
술잔을 든 그의 오른손엔 넷째 손가락이 없었다. 격전의 와중에 적의 암기를 맞고 잘려나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목숨을 잃진 않았으니까. 게다가 격전 중에 기연을 얻기까지 했다.
강엽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삼화취정엔 익숙해졌나?”
“예, 처음엔 감각이 널을 뛰어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익숙해졌습니다.”
그때 하후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럴 때 혼인하겠다고 하면 욕먹으려나?”
“음?”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하후진이 뺨을 긁적였다.
“아, 아니. 사부님께도 말씀드렸고, 전쟁도 끝났으니까... 정매를 언제까지 그냥 둘 순 없잖냐.”
하긴 아이까지 가졌으니 슬슬 서둘러야겠지.
강엽이 말했다.
“요란하게만 안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정말로?”
“가까운 사람들만 부른다면야.”
“당연하지. 나도 요란하게 할 생각은 없어.”
길일을 잡고 납폐를 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 그때쯤이면 사람들도 일상으로 돌아가리라.
조영옥이 작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르죠. 기쁜 일이 많이 일어날수록 슬픔을 빨리 떨칠 테니까요.”
하후진의 안색이 대번에 밝아지는데, 저편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했다.
주위를 둘러본 황보진악이 일행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올라왔다.
“아, 여기들 모여 계셨군.”
“앉으세요, 황보 공자.”
“아니오. 난 저기 친구들과 대작해야 해서 이만 가보겠소. 당 소저는 여기 계시오.”
황보진악의 거구에 가려졌던 당묘정이 빨갛게 익은 얼굴로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강엽의 안색이 낮게 가라앉았다.